2022년 11월 11일(금)
* 시작 기도
주님...
갓난아기가 엄마의 품속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것처럼 저 또한 우리 주님의 품속에 있기 원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의 품속에서 연합하기 원하오니 오직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소서.
나는 예수님의 형상인 아벨로 살아 그 삶 자체가 없음이되 성공과 획득을 원하는 가인이 아니길 원합니다.
하오나 이 죄인의 속에는 더 많이 얻고 취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나는 죽고 더 많이 비우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영적인 살이 찌는 것으로 아파하는 자가 되어 오늘 하루도 이 살찜을 잘라내고 무화과옷도 벗겨지는 날이 되게 하소서.
오늘 오전에 아내가 수술을 합니다.
옆에서 간병을 해야 하지만 너무 멀리 있어서 함께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우리 주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에 주님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 주옵소서.
주의 보혈로 덮으사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46:1-7
제목 : ‘품속에 함께’, 우리 주님과의 연합이 나의 가장 귀한 소망입니다.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 나의 묵상
양식을 사러 두 번째 애굽에 갔던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다.
요셉을 만날 때 형제들의 감정은 아마도 굉장히 엇갈렸을 것이다.
자기들의 동생인 요셉이 대제국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격스럽고 이제 양식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그들의 마음에 앞섰을 것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 자기들이 요셉을 팔아버렸던 그 괴이한 행동을 인해서는 자책을 하며 우리가 왜 그랬을까, 하는 심한 죄책감이 그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요셉 스스로 형들에게 말하기를 자기를 애굽에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면서 이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형들은 요셉의 그 말로 인하여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요셉의 초청과 애굽 왕 바로의 초청에 응한 야곱은 자신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 헤브론을 떠나 브엘세바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는 브엘세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그 때 하나님이 이상 중에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또한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갈 것이며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이곳 가나안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너의 눈을 감겨줄 것이다.
사실 야곱은 요셉과 애굽 왕 바로의 초청을 받고 그 무엇보다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속앓이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 곧 가나안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약속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가고자 하는 마음과 가면 안 될 것 같은 두 마음이 갈팡질팡 저울질 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의 종이 되어 종살이를 할 것이라는 말씀은 이삭이나 야곱에게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이 말씀과 함께 아브라함은 그 땅에 우거하다가 거기서 죽을 것이지만 그의 자손들은 후에 이방으로 내려가 종살이를 할 것이다.
야곱은 그 약속을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이삭에게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받은 언약의 말씀은 그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 초청을 하였을지라도 그 언약을 모른 채 하며 떠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고민 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확정적으로 말씀해 주신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서 너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너만 보내지 않고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
또한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 네가 죽거든 너의 장례를 치룰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이 확증적인 말씀을 들은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서 모든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입애굽 언약이 성취되었다.
(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과 ‘함께’ 내려가겠다고 하셨다.
이것 곧 ‘함께’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관계하는 존재양식이다.
(요 1:1-2,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말씀 곧 로고스로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태어나셨다.
말씀으로 나신 아들은 항상 아버지 품속에 거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양식인 것이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품속에 거하므로 아버지와 함께 연합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인 것이다.
말씀이신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의 영광은 독생자의 영광으로서 그 안에 은혜와 진리 곧 인자(히,헤쎄드)와 신실(히,에머스)이 충만하였다.
그 영광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영광이며 곧 아들이 계시하시는 아버지의 영광이다.
이 영광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함으로 그의 사랑을 받았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은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라 복종함으로 받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이라 한다.
이런 존재법을 통해서 아들은 늘 아버지와 연합의 관계를 잊지 않고 늘 함께 하셨다.
(요 17:23-24)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시는 연합의 상태가 최고의 영광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아벨은 자기가 치는 양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다.
당시는 양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동물이 아니라 오직 채소와 같은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제사할 때의 제물이 반드시 양과 같은 짐승일 필요도 없었다.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모세 시대에 주신 율법이기 때문에 그 때는 자기의 생업에서 나오는 소출로 제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은 소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지 않고 양을 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없음, 헛됨, 먼지, 티끌’이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자기의 의가 들어 있지 않은 오직 오실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제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아담이 먹은 선악과를 먹은 자로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다.
그는 땅의 소산 곧 곡식으로 제사하였다.
그가 짐승의 피로 제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세 당시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법 중에 소제도 있기 때문이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하지만 그가 드린 제사는 자기의 의로 가득 채워진 자기 의의 제사였던 것이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의 열심, 자기의 노력과 수고로 드리려는 무익한 제사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열심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제사를 받으신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성공, 획득’이다.
그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무언가를 얻으려 했던 자이다.
오실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제사하고 그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드리는 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니까 화가 나고 분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 아벨을 죽였다.
저놈만 없으면 내 제사를 받으시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앞뒤를 재지 않고 손해보는 아벨이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앞뒤를 재고 따지고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날까 노심초사하며 이익을 위하여 온 몸을 불사르는 자로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안에 이런 가인이 들어 있다. 나는 무언가를 행하고 이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던 자였다.
이런 나는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한 쪽으로 기울어진 나의 잘못된 사고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기에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 그리고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롬 1:22-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내 안에는 정말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어떠한 자원도 없다.
그저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못하고 감사는커녕 나의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을 뿐이다.
이처럼 나는 흑암과 어둠에 속한 자가 분명하다.
이것을 알기에 나에게 필요한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은혜가 필요하며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기에 긍휼을 구한다.
나의 온전한 제물이 되신 우리 주님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제물 되신 주님과 함께 나도 연합하여 십자가로 올라가 죽고 무덤에 장사된다.
이런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 땅에서 ‘없음과 먼지 티끌’로 사는 자는 실패한 인생임이 틀림없습니다.
누구나 가인과 같이 성공하고 획득하며 더 많이 가지려는 열심에 자신의 온 몸을 불사르기도 합니다.
이런 자를 세상 사람들은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며 열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심판은 이 땅이 아님을 믿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그 결과가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영원하신 뜻은 영생이기에 이 땅에서 남들보다 많이 얻지 못하고 부족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오늘도 아벨의 이름과 같이 비록 헛되고 티끌이나 먼지와 같이 없는 존재일지라도 거기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참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소망은 다시 오실 우리 주님께 있나이다.
나를 받으소서.
아무 것도 없는 나를 주님께 드립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과 연합하기 원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받으시는 가장 귀한 예물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