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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페사로 영화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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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가 지난 1992년 '한국영화 특별전'을 마련하면서 한국의 영화인들을 초청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아드리아노 아프라 페사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직접 한국으로 와서 배창호 이장호 감독의 작품을 골라갔는데 이 작품들을 소개하는 글을 '영화언어' 팀이 맡게됐다. 영화언어팀은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출간될 책자에 실릴 원고를 쓰면서 우리 영화를 대외에 알리기 위한 영문책자의 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영화언어팀은 이 인연으로 페사로 영화제에 참가한다. 아드리아노 집행위원장은 한국영화 해외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해준 은인으로 1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VIP 게스트로 초청될 예정이다. '영화제'는 생각보다 소박했지만 강렬한 자극이었다. 거창한 축제여야 할 것이라 생각하던 영화제와는 거리가 있는 작은 축제였다. 이탈리아는 아드리아해와 접한 동부 해안 도시들이 영화제로 연결된 독특한 나라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양양 강릉 동해 포항 울산 부산으로 이어지는 해안도시들이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 박광수 이효인(평론가), 배우 안성기 등 당시 동행했던 사람들은 한국 영화가 '미개국의 알 수 없는 영화'로 알려져있는 데 통탄하며 "우리도 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해야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페사로 영화제처럼 특별한 테마를 가진 작은 영화제라면 겁낼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페사로 거리의 가로등을 부여잡고 "가로등도 졸고 있는 비오는 골목길에 두 손을 마주 잡고~~"를 열창하던 안성기를 회상하며 "비록 손님이었지만 영화제의 중심부로 첨벙 빠져들었던 그 때의 감회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제가 자국 영화의 해외 진출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그리고 영화 비즈니스의 성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꿰뚫었던 참가자들은 귀국 후 수시로 만나 영화제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회동이 빈번해질수록 영화제의 청사진은 뚜렷해졌다. 마침내 '마니아와 대중 사이에 있는 영화제'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이 영화제를 통해 한국 영화가 무엇인가 변해갈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포착했다. 이렇게 해서 "비디오가 아닌 필름으로 된 영화가 보고 싶어"로 제기됐던 영화제 개최론은 페사로를 거치면서 한발 나아가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 창구가 되어줄 영화제를 열자"는 쪽으로 발전했다. 부산사람 김지석과,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활동했던 오석근은 특히 부산에서의 영화제를 고집했다. 학창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돈 벌어 해외 영화제를 다녔던 김지석은 이에 대해 "세계 유명영화제들이 해안 휴양지를 끼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부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화 운동이 영화제를 탄생시키려 하는데 굳이 서울로 옮겨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부산을 떠나서 산다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말하는 그는 중앙대 영화과 대학원과정도 부산에서 통학하며 공부했던 '고지식한' 부산 사람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한국의 영화인들은 부산을 영화제의 도시로 육성하자는 의견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남포동 광장을 끼고 극장들이 모여있는 것은 이점이었지만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스스로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힌 부산에서 영화제라니. 계간지 하나 찍어내기도 벅찬 제2의 도시가 영화제를 수용할 수 있을까. 하물며 이들 외에도 서울에서는 영화제 창설을 앞두고 숱한 그룹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용관 부집행위원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서울의 영화인들은 만나면 '영화제 한다며? 잘되어 가나?'가 인사였어요. 전부 하고 싶어했지." 솔직히 말하면 사공들이 넘쳐 배가 산으로 갈 판인 서울을 피해 부산으로 영화제 거점을 옮긴 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서로가 왕위에 오르기 위한 복마전이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인식이 만연했으며 해묵은 신구 세대간의 갈등도 갈수록 골이 깊어져 눈살 찌푸릴 만한 크고 작은 충돌도 많던 때였다. 손정인기자 jison@kookje.co.kr 손정인기자 jison@kookje.co.kr - 05/04/13 |
<3> 김동호와 문정수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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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화체육부 차관을 거쳐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진흥공사 등을 거친 관료 출신 영화인 김동호 마이TV사장을 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서울 시청앞 프라자 호텔 커피숍에서 회동을 하게 된다. 김동호 위원장이 피프호에 승선하게 된 역사적인 이 날이 1995년 8월 18일이었다. 김동호 위원장은 나름대로 영화제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재임했던 91년부터 해외 영화제를 다니기 시작했던 그는 영화제 개최를 위해 수시로 마련됐던 공청회에 적극 참가하고, 임권택 하명중 장선우 등 영화인들과도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다. 94년 문화체육부가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준비하던 환경영화제가 그 중 가장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척됐는데 김동호 위원장은 이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내정됐다. 그러나 환경영화제야말로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산물로, 영화제를 위해 들여온 작품들이 세관에 묶여 있다가 결국 영화제가 무산되면서 빛도 못보고 말았다. 솔직히 국제적인 망신이었다. 김동호 위원장이 부산영화제에 합류하면서 원활하게 일이 풀리나 싶더니 파라다이스호텔이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면서 위기에 직면한다. 파라다이스는 아마도 카지노사업을 중심으로 호텔 매출 증대를 위한 프로모션 차원에서 영화제를 기획한 듯한데, "아시아의 가난한 감독들을 우리가 초청해야 하며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얘기에 고개를 내저은 것같다고 초대 사무국장 오석근 감독은 설명한다. 김동호 위원장은 이때 상당히 분노했었다.
돈줄이 끊겼으니 다시 영화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상황에서 광주에서 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선수를 빼앗겼다 싶었던 위기감도 잠시, 예상대로 광주영화제는 조직이 취약했고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한편 부산에서의 영화제를 모색하던 아주 중요한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부산을 영상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앞세워 당선됐던 문정수시장이 그 주인공이다. 95년 7월 취임한 문 시장은 노동집약산업의 사양화로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부산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하던 중 항만과 해양 등 천혜의 환경을 활용하면서 문화적 인프라의 열세를 극복할 만한 콘텐츠를 구상하게 된다. 그 해답은 21세기를 지향하는 최고의 부가가치산업 '영화'였다. 정치인 출신 관료답지 않게 영화와 영화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데 대해 문 시장은 "어릴적 고향 다대포 바닷가에서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하며 품었던 막연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선된 후, 그는 공약대로 '용두산공원을 부산의 몽마르트 언덕으로, 부산을 영화 도시로'를 공공연하게 주창하였지만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현실적인 벽은 높았다. "시장님, 서울도 못한 영화제를 부산에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75년도에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개최했다가 돈만 진탕 쓰고 남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그 꼴 납니다." 문 시장의 '영화제 타령'을 상당수의 시 직원들은 현실성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치부했다. 부산시와 영화제 준비단은 여기서 공통 분모를 찾는다. 비록 생각은 앞서갔지만 문정수 시장은 영화제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어 실무를 추진할 사람들이 필요했고 영화제 준비팀은 자금을 비롯해 영화제를 지원해줄 든든한 배경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96년 1월초 중구 중앙동 부산시청사에서 문정수 시장과 김부환 내무국장, 박광수 감독(부집행위원장), 이용관 김지석프로그래머 등 양측이 첫만남을 가지게 되고, 한달 후인 2월13일 조직위원장 문정수, 집행위원장 김동호를 추대한 부산국제영화제 법인이 드디어 출범한다. - 2005/04/21 - | ||||||||||||
<4>전쟁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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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아메리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폴리 등 영화제 전문가들과 국내 영화인이 함께 한 세미나도 열리고 부산영화제를 대외에 알리는 적극적인 홍보 활동도 시작됐다. 박광수 부집행위원장은 2월 열린 베를린 영화제에,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홍콩영화제에 특사 자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오석근 사무국장은 4월에 열린 싱가포르 국제영화제의 자원봉사 스태프로 취업해 실무를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5월 칸 영화제에는 집행위 전원이 참가해 피에르 르씨엥 칸 영화제 고문, 사이먼 필드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유럽쪽 영화제 관계자들과 영화 기자 등 15명의 VIP를 초청, "백지 상태로 영화제를 시작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일이 진행될수록 영화제의 예산은 점점 늘어나 필요경비는 20억원을 넘어섰다. 17억원만 어떻게 확보하면 나머지는 입장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집행부는 기업 협찬을 따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전투를 시작했다. 문정수 전 부산시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법인 출범 직후에 서울 롯데호텔에서 영향력있는 영화인 열 몇명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부산에서 영화제를 하기로 했으니 마음으로나마 지원을 바란다는 취지였지. 시예산 3억으로 영화제를 시작하려고 한다. 추가로 필요한 돈은 지금부터 모아야 한다. 낡은 시청사라도 필요하다면 내 집무실도 내놓겠다. 필요하다면 출퇴근 시간 교통 통제도 하고, 시 통근 버스도 내놓겠다는 요지로 기조 연설을 했더랬어요." 고무된 부산 시장의 연설과 달리 참석자들의 전반적인 반응은 "부산에서 되겠어요? 서울도 못했는데…" 라는 비아냥 반 우려 반이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앉아 있던 곽정환 서울시 극장협의회회장은 "소박하게 시작해 판을 서서히 키우겠다"는 문 시장의 연설에 바로 딴죽을 걸었다. "영화제는 서서히 성장하는 게 아녜요. 첫회가 망하면 끝장입니다. 시지원이 3억이라고? 어림도 없어요. 문 시장님이 시청사도 내놓겠다는 그 마음 자세만 지키신다면 내가 1억원 내놓겠소." 현실성 없다고 때려치우라고 말할 줄 알았던 곽 회장은 의외로 현금 1억원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자 전국극장연합회장 강대진씨가 나서 "곽 회장은 조건 달았지만 나는 조건 달지 않고 1억 내겠다"며 가세했다. 당시 곽정환씨와 강대진씨는 미묘한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문 시장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강대진씨가 약속한 1억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해 접수되지 않았다. 어쨌든 서울의 영화인들로부터 심적 물적 지원을 약속받은 조직위는 기분좋게 스폰서가 될 만한 업체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PIFF를 최초로 지원한 기업은 대우였다. 여기에는 김동호 위원장과 경기고 동창인 김우중 회장과의 인연이 깊게 작용했다. 대우는 공연윤리위원회에서 김동호 위원장과 같이 일한 적이 있는 부인 정희자씨 이름으로 8억원을 쾌척하기로 했다. 나중에 3억원으로 지원금은 깎였지만 당시로서는 대우가 최고의 스폰서였다. 영화배우 정윤희씨도 1억원 대열에 동참했다. 그리고 부산의 지역 상공인 200명을 초청해 디너 파티 형식의 모금 행사도 벌였다. 이 행사에는 김지미 윤일봉 등 원로 배우들과 월드스타 강수연이 참석해 도와줬는데, 부산의 기업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현금 2억원을 만들어 내놓았다. 그리고 영화제가 보다 진척을 보이고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뒤늦게 삼성영상사업단과 CJ(당시 제일제당)도 영화제 기간 현물 지원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 2005/04/28 - | ||||||
<5> 민·관합작 영화제 진통
예산 집행과정 불신 개막직전까지 이어져 위기 금품 대금·직원 월급 등 없어 대출·카드깡 촌극 | ||||
사단법인 부산국제영화제의 창립총회가 열리던 날도 사소한 문제에 이견을 보이면서 총회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초창기 양 측의 갈등에 대해 "마인드의 차이와 상호 불신으로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며 완곡하게 말했지만 당시 공무원과 영화인들이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아 어지간히 속을 끓였던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영화제를 '딴따라'들의 축제로 폄하하는 관료들에게 영화제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해주기를 기대한 것은 무리였고, 마찬가지로 작품이나 비판하고 강의나 하던 영화인들에게 공무원 사회는 딴세상이었던 것이다. 영화제는 낭만적인 축제이기 이전에, 정치였고 경제였음을 영화인들은 피부로 느끼며 진땀을 흘려야 했다. "저 사람들 뭘 믿고 그 많은 돈을 주느냐"는 부산시청 내부의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예산 집행 과정에서의 불협화음은 개막 직전까지 이어졌다. 지원이 결정된 직후인 3월부터 영화제는 당장 쓸 돈이 필요했지만 관행적으로 '예산 집행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1/4분기는 예산을 집행할 수가 없는 시기였다. 집행부는 "대형 스크린 렌털비를 줘야한다, 물품 대금 지급기일이 도래했다"며 돈달라고 떼만 쓰니, 급기야 오세민 부산시 정무부시장이 오석근 사무국장을 보증인으로 세워 5000만원을 대출받아 급한 돈을 막아주는 촌극도 벌어졌다. 당시 부산시의원 진모씨는 "지금 부산에 배곯고 있는 연극인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면서 영화제에 수억원의 돈을 쓰는 게 과연 합당한지 조목조목 따지며 "그만 포기하라"고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우린 흥청망청 잔치판을 준비한 게 아니었습니다. 돈은 안나오지, 직원들 월급은 줘야지, 제 이름으로 500만원 대출받아 급한 돈을 막은 적도 있어요."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당시 영화제 집행부가 겪은 일들은 수모였다고 말한다. 그는 사무실에서 쓰기 위해 집에 있는 전화기까지 떼어왔고 경비 처리에 서툴러 결국 500만원은 챙기지도 못했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오석근 사무국장은 "김 프로그래머의 돈을 못 챙겨준 건 내 책임이기도 하지만 나도 '카드깡'으로 몇백만원을 얻어 썼는데 결국 떼였다"고 웃으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시청 출입이 특히 잦았던 오석근 사무국장은 "결재 받을 일이 있어 시청에 들어갈 때마다 이해가 안되는 것이, 사람이 사람 만나는데 왜 저리 경직돼 벌벌 떨고 서 있나 싶더라"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공무원 사회에 대해 회고했다. 오 국장이 본 공무원 사회는 형식주의에 치우친 융통성 없는 집단이었다. 결재 하나 받는데 계장 과장 국장 등 거쳐야 할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건지, 시장님 한번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넥타이는커녕 청바지에 점퍼차림으로 시청을 들락거리는 영화제 사람들이 공무원들 눈에도 기가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며 늘 불평만 늘어놓으니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그나마 문정수 시장은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젖어 있는 영화인들을 비교적 잘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는 산적한 현안을 다 물리치고 PIFF팀의 서류를 가장 먼저 처리해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결재를 위해 다른 시 직원들과 함께 줄지어 기다리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남천동 시장 관저에서 직접 영화제 진행추이를 보고 받는 오찬도 정기적으로 마련했다. 본격적으로 영화제를 준비한 기간은 채 1년도 안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티격태격 잡음이 끊일 날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 당시 집행부는 우여곡절 끝에 개막일을 맞이할 수 있게 한 일등공신으로 문정수 조직위원장을 으뜸으로 꼽는다. "문 시장이 민-관 갈등의 완충지대였죠. 물론 김동호 집행위원장도 관료 출신이라 중재 역할을 많이 했지만 민선 1기 시장이 딴 사람이었더라면 부산영화제가 과연 시작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오석근 사무국장, 김지석 프로그래머 등은 늦은 밤 간식거리를 한아름 사들고 사무국에 들러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조직위원장의 열정을 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 2005/05/05 - | ||||
<6> 프로그래머의 악전고투 " 정체불명 영화제 " 문전박대·상영료 요구 예사 각자 외국 인맥 동원, 수작 고르고 노하우 터득 국내도 이해 부족으로 김동호 위원장 직접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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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초청을 위한 공문을 해외 에이전트들에게 처음 발송한 것은 96년 4월. 개막이 불과 5개월 남은 시점에서 170여편의 작품을 모으기 위해, 전양준 김지석 이용관 세 프로그래머들의 악전고투가 시작됐다. 영화제의 모토에 따라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담당한 '아시아 영화의 창'이 주력 섹션이었지만 한국영화 파노라마 부문과, 월드 시네마 섹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특히 세계 영화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야 하는 월드시네마 섹션은 영화제의 편협성을 극복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할 분야였다. 당시 세계 영화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바닥권이었다. 문전박대당하기는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상영료를 요구하는 회사도 있었다. 월드시네마를 맡은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유럽 영화를 취급하는 필름 에이전트들에게 수없이 미팅을 요청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당시 우리를 만나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전 프로그래머는 "'당신들과의 미팅을 검토해볼테니 기다려라. 현재로선 어떤 답도 줄 수 없다'는 답변이 당시 들었던 가장 성의있는 반응이었다"면서 당시의 힘든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의 입장은 "영화 시장으로서의 한국의 잠재력은 인정하지만 부산영화제는 못 믿겠다"는 것이었다. 애가 탄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프랑스문화원, 영국 문화원과 각국 대사관 등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국내 배급이 결정된 작품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당시 한국은 할리우드와 유럽의 다양한 영화들의 구매와 개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점이어서 웬만한 영화들은 국내 배급사가 이미 결정돼 있었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이들과 접촉을 시작했고 '제8요일' '율리시즈의 시선' 등 영화제의 권위에 보탬이 될 만한 작품들을 그럭저럭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업자들도 흔쾌히 영화를 빌려준 것은 아니다. 영화제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없던 배급업자들은 "영화제에서 다 보여주면, 매상이 줄어드는데 당신들 같으면 영화를 내놓겠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국내 업자들을 설득시키는 일은 김동호 위원장이 맡았다. 어느 분야든 김 위원장의 마당발 인맥과 로비력이 동원되지 않은 곳은 없지만 특히 프로그램 선정에 있어서는 김 위원장의 인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 해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었던 '비밀과 거짓말'을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했던 것은 역시 작품을 맘껏 고르기 힘들었던 당시의 한계를 드러낸 일례. 아시아영화를 담당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그나마 학창 시절부터 다져왔던 인맥을 활용할 수 있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일본 야마가타 영화제, 홍콩 영화제 등 아시아쪽 영화제를 다녔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영화인들과의 교류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들을 통해 영화제 운영을 위한 노하우를 익히고 인맥을 쌓았다. 그는 "영화제 순례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자고 하루 한끼 먹으며 버티는 고행길이었는데 그 덕분에 초창기 프로그래밍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일본의 경우 가와키타 필름 인스티튜트의 해외업무 책임자 하야사 카나코(현 도쿄 필름엑스영화제 집행위원장)의 도움으로 일본영화 최신작들을 1주일동안 모조리 섭렵할 수 있었고 베를린과 홍콩 영화제 등에서도 인맥을 바탕으로 아시아 작품에 접근했다. 그러나 김지석 프로그래머도 "초청을 거절당하느라 정신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한다. 과정이 이러하다 보니 첫해 초청작 중에는 뒤늦게 도착해 자막 작업을 미처 못한 작품도 수두룩했고, 가까스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필름이 세관에 묶여 있는 상황도 발생하곤 했다. '작품 선정의 난'은 비단 1회 영화제 때만의 고충은 아니다. PIFF의 존재감이 세계 영화계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4회(99년) 이후 비로소 프로그래머들은 당당하게 작품을 골라오는 여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 2005/05/12 - | ||||
<7> 심의에 멍든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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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적으로 영화제는 대성황이었다. 한국 영화인의 잔치였으며 부산 시민의 축제였다. 수영만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 남포동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 관객들의 열기에 김동호 위원장도 감격하고 문정수 조직위원장도 흥분했다. 사무국의 스태프, 자원봉사자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인한 허술한 운영이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1회 영화제를 가장 애먹인 것은 심의의 망령이었다. 당시 영화진흥법은 "3개국 이상이 참여한 3년 이상된 국제영화제가 아니면 초청작 모두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공연윤리위원회는 부산영화제의 모든 초청작에 대해 심의를 하겠다고 통보했고, 영화제 집행부는 난감했다. 편당 80만원가량 매겨지는 심의료도 문제였지만 명색이 국제영화제인데 검열이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공윤'은 요지부동이었다. "영화제는 영화 특구입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것이 아니더라고요." 이용관 부위원장은 첫해 '공윤'과의 갈등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집행부는 정면으로 맞서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심의를 최대한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김동호 위원장이 '공윤'에 몸담던 시절의 인맥을 활용, '폭탄주 접대'로 심의위원들을 어르는 한편 최대한 시간을 끄는 편법도 동원했다. 개막이 임박해서야 필름이 도착했다며 서울로 올려 보낼 시간이 없다고 우기는가 하면 아주 사소한 사안도 모두 공문으로 주고받으며 미적거렸다. 영화제가 개막돼 상영이 시작되면 '공윤'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배째라"식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오석근 사무국장은 초창기 심의에 대해 웃지 않을 수 없는 일화도 많았다고 회상한다. "심의위원이 내려오면 여관방에서 심의를 하게 했어요. 비디오를 산처럼 쌓아놓았더니 먼저 질려 버리더라고요. 문제가 될만한 작품은 멀찍이 놓고 별 문제 없을 작품을 먼저 보도록 했죠. 그러면서 수시로 옆에 앉아서 말 시키고, 노출 장면이 나올 때 되면 시선을 딴데로 돌리게 하는 코미디도 벌어졌습니다." 김동호 위원장은 "문제가 생기면 내가 잡혀가겠다는 각오로 밀어붙였더니 그럭저럭 심의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 심의 문제로 1회 영화제에 오명을 남길 사건은 터지고야 말았다. 영화제 둘째날 부영극장에서 상영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가 문제였다. '공윤'은 이미 수입심의에서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크래쉬'는 봐줄 수가 없다며 '제한상영'을 종용했다. 일반예매가 중단되고, 게스트와 기자들에게만 영화를 공개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크래쉬'는 칸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으로 동성애와 변태적 성애를 담은 화제작이었다. 당시 공윤은 폭력에는 관대했으며 노출에는 민감했다. 또한 이데올로기 문제에도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한술 더 떠서 수입배급사 대우는 재심을 의식해 문제가 될 부분을 12분가량 삭제한 필름을 영화제측에 보내왔고, 집행부는 이 사실을 상영 직전에 알게 돼 삭제된 필름을 걸고야 말았다. 제한상영도 모자라, 삭제필름이라니 설상가상이었다. 당시 영진법에는 '3년 이상 영화제 심의면제 규정'외에 "문화체육부 장관이 특별히 명하는 영화제에 한하여 심의를 면제해준다"고도 규정돼 있었다. 일찌감치 심의 문제에서 해방될 수도 있었다는 말인데, 부산영화제는 문체부와 공윤을 적당히 구워삶아 심의 절차만 피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말하자면 '으샤 으샤'하는 분위기로 밀어붙이다 삭제된 필름을, 그것도 일반관객을 배제한 채 상영하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공윤'과 영화제의 악연은 첫해뿐 아니라 이듬해 왕자웨이의 '해피투게더' 심의에서도 재연됐다. 유독 동성애와 변태적 성행위에 민감한 '공윤'은 두해 연속 제한상영이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영화제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용관 부위원장은 "검열은 싱가포르 홍콩 이란 등 아시아 지역 영화제의 공통적인 아킬레스건"이라면서 심의기관의 융통성 없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프로답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부산영화제의 불안정한 내부 동력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 2005/05/19 - | ||||
<9> 급구!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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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연초 단행한 조직개편에 이어 대규모 신규 스태프 공채를 통해 조직의 내실을 다지는 환골탈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영상센터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조직의 합리화를 통해 선진 영화제로 거듭나려는 노력들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산영화제도 "영화는 몰라도 좋다. 영어만 되면 도와달라"며 구인난을 호소하던 곤궁한 시절을 겪었다. 경성대를 제외하고는 영화학과도 없었고 영화아카데미 등 교육기관과 제작사, 마케팅 홍보대행사 등 영화 관련업체들은 서울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인력을 채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영화제가 실시한 첫 공채에서 채용된 사람은 현재 사무국장 최윤나를 포함해 세명에 불과했다. 해외에이전트나 배급사, 감독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했으므로 영어회화 능력이 최우선으로 고려됐으며 '서비스 마인드'도 중요 평가 항목이었다. 이어 지연 학연을 바탕으로 추천 채용이 이어졌는데, 이 때 이승진 전 사무국장, 이소영 사업팀장 등이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서울의 제작사 홍보사 영화잡지기자, 독립영화집단 등에서 일하던 젊은 영화인들도 부산으로 대거 왔다. 96년 당시 경성대 교수였던 이용관 부집행위원장은 "솔직히 영어만 좀 하면 무조건 데려다 썼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영어는커녕 컴퓨터만 능숙하게 다뤄도 현장에서 즉각 채용이 이루어졌다는 것. 국제영화제 사무국장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원어민 강사로부터 영어과외를 받고 있던 오석근 사무국장은 아예 회화 강사를 초청팀 스태프로 영입해 버렸다. 재닛이라는 이름의 이 캐나다 여강사는 당시 동아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다가 졸지에 부산영화제의 식구가 됐다. 그럭저럭 필요인력의 머릿수를 채우고 업무를 추진했으나 곳곳에서 허점이 발견됐다. 주먹구구식으로 선발된 스태프들이 노하우와 경험없이 열정만으로 일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 세 프로그래머들은 나름대로 영화제에 대한 마인드를 갖고 있었지만 그밖의 스태프들은 영문도 모르고 휩쓸려 닥치는 대로 밤을 새웠다. 자막 시스템, 티켓 발매 시스템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 조차 없는 비전문 인력이 대부분이다 보니 운영은 매끄러울 수가 없었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이것이 비영리법인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6개월은 정상적으로 일하고, 6개월은 밤을 새워야 하는 최악의 노동조건에 급여 수준마저 바닥권인 영화제는 어떤 3D 직종보다 불리했다. "인건비가 전체 예산의 20%를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까다로운 전형으로 우수 인력을 뽑을 수가 없었죠. 그러다 보니 몇년동안 영화 한편 본 적이 없는 문외한이 채용되기도 했죠." 김지석 프로그래머와의 친분으로 영화제 식구가 된 오석근 전사무국장은 당시의 난감했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한다. "싱가포르 영화제에서 한달동안 실무를 익혔지만 솔직히 영화제의 개념조차 잡히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는 김지석의 감언이설에 속았어요. 프로그래머가 운영을 어떻게 알겠냐며 슬쩍 저한테 실무를 떠맡기더라고요. 당한 거지요." 이승진 전 사무국장은 "영화제는 구인난에 시달렸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는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며 독립운동가처럼 일했다"고 말한다. 안정된 급여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영화제 일을 배운다는 인턴 마인드로 일했다는 것이다. 이 상태로 영화제가 개막되니, 업무 분장의 경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게스트 의전을 담당하고, 상영관에서 GV를 진행해야 할 프로그래머들이 현장 진행요원으로 뛰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야외무대 진행을 맡고, 이용관 프로그래머는 배차 업무를 담당했다. 오석근 사무국장은 영화제 개막 후에도 노점상들과 커넥션으로 연결돼 있던 조폭들에게 불려다니며 비위 맞추느라 정신없었다. 박광수 부위원장은 남포동으로 해운대로, 퀵서비스 오토바이에 실려 다니며 게스트들 영접하느라 눈코뜰새 없는 집행위원장의 권한을 대행했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일당백'의 역할을 다들 해냈다. 운명적으로 부산에서 영화제가 열리게 됐지만 집행부와 스태프 대부분이 서울출신인 바람에 갈등도 초래됐다. 영화제 법인 출범을 전후해 부산의 학계 예술계 인사들 사이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서울놈들이 왜 부산까지 와서 설치나"하는 불만은 몇년동안 이어져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졌다. - 05/06/02 - |
<10>서울과 부산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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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의 '주동세력' 김지석 이용관 등이 부산 학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영화제가 창설됐지만, 집행위원장 이하 사무국 스태프 대부분이 서울출신이었기 때문에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부일영화상을 부활시키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던 원로 문화계 인사들과 부산국제영화제는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영화제 법인 설립 당시 집행위원장 내정자가 부산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통을 겪은 것을 비롯, 딴죽과 방해공작 비아냥거림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화제 개최가 급물살을 타자 어떤 대학은 '자원봉사 보이콧'을 선언하며 의도적으로 영화제 방해공작까지 벌였다. 이용관 부집행위원장은 "부산영화제가 지역 인력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바람직하지만 초창기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부산과 서울 지역의 갈등은 영화제 창설 후 한동안 계속됐다"고 말한다. 사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제외하고 프로그래머 사무국장 등 대부분은 부산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박광수 부위원장은 부산에서 고교를 마쳤으며 오석근 사무국장도 초중고 대학을 모두 부산에서 졸업했다. 이용관 부위원장은 "내가 경성대에서 10년을 가르쳤는데, 이만하면 부산 사람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1회때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그는 영화제 폐막 후 바로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굴러온 돌'을 핍박하는 지역 문화계의 배타성 때문에 괴로움을 많이 겪었던 그는 도저히 못견디겠다며 손을 들고 만 것이다. 부산 토박이로 갈등의 완충지대였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이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자면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천형으로 여기고 살아온 부산 사람들의 자격지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로테르담 영화제를 키운 사이먼 필드 집행위원장은 영국인입니다. 22년간 베를린영화제의 수장이었던 모리츠 데 하델른은 영국계 스위스 사람이고요. 이제 우리나라 카이스트 총장도 외국인 아닙니까?"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세계적인 야구천재들 이 다 모인 미국 메이저 리그처럼 한국 영화계를 움직이는 인재들을 부산으로 집결시켜 영화제를 개최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었다"고 말한다. 오석근 사무국장은 당시 서울 부산 따져가며 앞장서서 영화제를 비방하던 D대학의 모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그러지 마시고 영화제 집행위원이 되어달라"고 회유작전을 폈다. "내가 왜 서울놈들이 설치는 그따위 영화제에 관여해야 되냐"며 펄쩍 뛰던 그 교수에게 오 국장은 "교수님 같은 비판적 시각을 가진 분의 조언이 꼭 필요하다"며 설득, 결국 집행위원으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갈등의 해법은 정면 승부보다 설득과 대화였다. 근시안적인 편견으로 영화제를 곱지 않게 봤던 당시 부산 문화계 학계 인사들도 지금은 부산영화제에 없어서는 안될 훌륭한 어드바이저. 소모전에 지나지 않았던 지역간 갈등은 완전히 해소된 셈이다. 현재 부산지역 영상관련 학과들은 고급 영상인력 배출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분명히 피프 초창기의 지역 갈등이 시발점이 됐으며, 외지 인력들이 부산영화제를 위해 활약하는 모습이 자극제가 됐음이다. 부산영상센터시대가 시작되는 오는 2008년이면 영상센터 상근 직원의 70% 이상이 부산 인력으로 채워질 전망이며 부산영화제도 서울사무소를 축소하고 부산으로 근거지를 완전히 옮길 것으로 보여 이제 순수 부산 인력이 운영하는 영화제도 머지않았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인재 양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제가 발탁하고 키운 고급인력들이 부산 영화제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한편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받은 설움도 많았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유럽 사람들은 '부산'이 어디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면서 "'부산'을 발음조차 하지 못해 Busan(부산)을 Bushan(부샨)이라 표기해주는 웃지못할 사례도 있었다"고 말한다. 만약 영화제가 서울에서 열렸다면 "아, 올림픽이 열렸던 한국의 수도 서울말이냐"라고 조금은 더 반겨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은 "부산은 한국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 휴양도시"라고 열심히 도시 홍보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곤 한다. - 05/06/09 - | ||||
<11> 피프 도운 외국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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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집행위원장이 지난 1996년 각국의 영화제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곧 창설되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협력을 요청할 때의 일이다. 스위스 대사관저에서 마련된 한 오찬 모임에서 김 위원장은 당시 로카르노 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마르코 뮐러와 안면을 트게 됐다. 그런데 마르코 뮐러는 김 위원장 면전에 대고 다짜고짜 "토니 레인즈 영화제 잘해 보라"며 돌아서 버렸다. 당황한 김 위원장은 "그 사람은 도와줄 뿐이고 우린 부산국제영화제"라고 설명을 했지만 토니 레인즈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마르코 뮐러는 그후 3, 4년 동안 부산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르코 뮐러의 독설은 분명 비약이긴 했지만 '토니 레인즈 영화제'라는 말을 들을 법도 했던 것이, 그가 피프의 창설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부산영화제는 자생력만으로 출발할 수 없었다. 영화제 경험이 풍부한 해외 영화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솔직히 탄생조차 불가능했다. 초창기 토니 레인즈를 포함해 폴 이, 임현옥, 임안자, 윙아잉린, 피에르 르시엥 등 많은 영화인들이 물심양면 부산을 도왔다. 물론 영화제가 궤도에 오른 지금까지도 이 사람들은 피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1996년 2월 열린 '부산영화제 창립을 위한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석한 인연으로 부산에 눌러앉았다. 아시아 영화광인 토니 레인즈는 '메이저 경쟁영화제 진출을 꿈꾸는 신인감독들이 건너가야 할 다리'로 여겨지는 영향력 있는 평론가이다. 홍콩영화제 창설의 견인차였던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시절 몇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대만 거장 허우 샤오시엔, 일본감독 기타노 다케시, 그리고 중국의 5세대 감독들을 서방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1988년 처음 한국에 온 토니는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었던 김동호 위원장과 처음 인사를 했고 이후 막역한 사이가 됐다. 유럽 미주쪽에 한국영화를 알리는데 매진했던 그는 1992년 페사로 영화제 한국영화 특별전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후 토니 레인즈는 한국 최초의 영화제 창설을 위해 뛰었다. 부산영화제팀과 밤을 새우며 영화제의 골격을 짜고 부산시청을 드나들며 공무원들을 설득하는데도 함께 했다. 1회 영화제가 화려한 축제로 끝난 후 모두가 흥분해 있을 때 토니 레인즈는 "불꽃놀이나 감상하는 소모적인 축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면서 "형식보다 내실을 기할 것"을 경고하는 등 냉철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토니는 지금도 부천영화제, 광주영화제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홍콩영화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시아 영화제의 판을 꿰뚫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까탈스러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아시아와 부산에 대한 그의 애정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질 자콥 회장의 친구로 오랫동안 칸 영화제 고문으로 있는 피에르 르시엥은 토니 레인즈보다 훨씬 오래전 한국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우리나라와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며 신상옥 감독 등에게 관심을 보였던 그는 한국 영화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인정했다. 1996년 칸 영화제에서 김동호 위원장이 부산영화제 홍보를 위해 오찬을 마련했을 때도 피에르 르시엥은 앞장서서 유럽 영화제 관계자들과 기자들을 불러모아줬고 부산영화제를 소개하는데도 앞장섰다.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재미교포 2세 폴 이는 박 부위원장과의 인연으로 1996년 2월 열린 '부산영화제 창립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함으로써 발목잡힌 케이스다. "이왕 온 김에 좀 더 도와달라"는 박광수 부위원장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던 그는 결국 1회 부산영화제가 폐막한 다음에야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영화제를 불과 4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자막시스템은커녕 티켓판매망조차 준비가 안돼 있는 부산영화제를 한심해 했지만 결국 두 팔 걷어붙이고 잡다한 일을 도맡아 했다. 오석근 사무국장은 몇번이나 손을 떼려는 폴 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일을 회고한다. "영화제 개막 직전에 폴 이가 이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영화제를 하겠다니 기가 막히다면서 기어코 짐을 싸더군요. 무조건 빌었어요. 개막이 코앞인데 방법이 있습니까. 결국 그는 끝까지 남아 팸플릿 인쇄까지 모든 업무를 일일이 코치하고 도와줬습니다." 폴 이는 이듬해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의 창설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05.6/16 - 글 = 손정인기자 jison@kookje.co.kr |
<12> 피프가 지켜온 대원칙 하지만 官에 끌려가면 영화제 망해 한때 대선후보 유세 온몸던져 저지 | ||||
부산영화제가 민(民)과 관(官)의 상호 협조관계로 탄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정 문제 만큼은 현재까지도 관 의존도가 높은 것이 현실이다. 이는 수익모델이 약할 수밖에 없는 영화제의 운명이다. 1회 때 20여억원이던 총예산이 작년 9회 때는 40억원을 넘어섰고 이중 정부와 부산시 지원으로 30%가량을 충당했다. 이는 정·관계의 입김이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불간섭' 요구는 단호했다. 부산영화제는 개·폐막식을 비롯한 공식 행사를 진행함에 있어 조직위원장의 간단한 인사말 외에 어떠한 외부인사의 축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관 주도 문화행사의 구태를 처음부터 배제한 것은 부산영화제의 자랑이다. 조직위원회와 집행위원회간의 갈등으로 와해 위기에 처한 부천국제영화제, 광주영화제와 비교해 봐도 부산영화제는 이러한 관계를 깔끔하게 정립해 왔다. 그러나 부산영화제가 지역 축제로 과소 평가되던 초창기는 이러한 대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꽤 괴로움을 겪었다. 1997년 대선을 두달 앞두고 개막된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선거 열기와 함께 덩달아 후끈 달아올랐다. 개막식 직후 주말을 맞아 몰려나온 인파들로 덮인 남포동 피프광장에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등장했다. 그는 문정수 시장을 앞세우고 야외무대에 올라 간이 유세를 벌일 작정이었다. 당시 대선 후보들에게 남포동에 집결한 수십만 인파가 전부 표로 보였을 것이다. 그 때 무대 위에서 행사를 진행 중이던 오석근 사무국장이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양팔로 이회창 후보의 진입을 저지하면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맞섰다. 문정수 조직위원장은 당황했다. 조직위원장이 수행하고 있는 거물급 후보를 잡상인 취급해도 되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얼굴이 벌게진 문 시장은 "알만한 사람이 왜 이러냐"며 오석근 사무국장을 밀치려 했다. 순간 문 시장은 안경 너머로 글썽글썽한 눈물을 발견하고는 그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 국장의 눈물에서 단호한 의지를 읽은 조직위원장은 미련없이 돌아섰다. 이회창 후보도 오석근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겸연쩍은 모습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 시장은 이회창 후보를 연단에 올리지 못한 죄로 "도대체 당신은 어느 당 시장이냐"는 질책에 시달렸으며 이후 정치적 행보에도 타격을 입었다는 후문이다. 연예인 당원을 앞세워 개막식에 참석한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는 아예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준이었다. 손님 접대를 제대로 안해주니 불쾌해진 국민회의 의원들이 김동호 위원장을 찾아가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이용관 부위원장은 대선 후보들이 한바탕 소란을 떨고 부산을 떠난 후 피프 데일리지를 통해 "영화제의 성공적인 개최에 기꺼이 협조해 준 후보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괘씸죄를 무마하기 위한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오석근 당시 사무국장은 "조직위원회나 외부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영화제는 끝이다"는 심정으로 피프광장이 유세장으로 전락할 위기를 막았다고 말한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설사 대통령이 영화제 개막식에 참가한다 해도 영화제와 상관없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위해 시간을 내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영향력있는 인사 한 두명을 거명하거나 연단에 올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설명한다. 그는 "체코 대통령 하벨은 10번 이상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개막식에 참가했지만 경호원들이 따르면 서로 불편하다며 조용히 나타나서 개막식만 지켜보고 돌아간다"고 덧붙였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영화제 관할 부처인 문화관광부 장관도 마찬가지다. 이창동 전 장관과 정동채 현 장관은 김동호 위원장의 의지를 존중해 몇해째 개막식에 참석해 열심히 박수만 쳐주다 돌아가곤 한다. 이용관 부위원장은 "사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에 해당한다"면서 대만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시아지역 모든 영화제는 예외없이 형식을 중요시하는 정관계 인사들의 간섭과 입김으로 피곤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싱가포르 영화제의 경우 조직위원장의 연설이 30분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 조직위원회와의 원만한 관계구축을 조기에 완성하고, 지원을 고려해 누구의 편의를 봐주거나 비위를 맞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프는 지난 10년간 큰 위기없이 내달렸다. 부천 광주 전주가 부러워하는 부산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지원은 받되 간섭은 철저히 봉쇄한' 뚝심이다. - 05/06/23 - | ||||
<13> 영화 청년 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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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역경을 딛고 영화제 성공을 이끈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지금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영향력있는 인물이다. 한국의 영화 대통령, 영원한 영화 청년 김동호의 파워는 경이롭다.
그는 부산시 및 정부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절묘한 관계를 정립했고, 국내외 영화인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영화제를 안착시켰다. 허문영 프로그래머는 김 위원장을 "관료 출신으로 행정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력이 높으면서, 형식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융통성있는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무엇보다 어떤 영화인보다 사교성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흔하지 않은 '반(半) 관료 반(半) 영화인'으로,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는 하늘이 내린 최적임자라고 허 프로그래머는 치켜세운다. 오석근 전 사무국장은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를 가졌음에도 권력의 중앙 집중은 용납하지 않는 덕장"이라고 표현한다. ★김동호는 누구인가 일흔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테니스와 조깅으로 다져진 강철 체력은 그의 최고 자산이다. 연간 100일 이상을 해외 영화제를 돌면서도 지칠줄 모르는 스태미나는 30대보다 뛰어나다. 서울법대 출신으로, 1961년 문화공보부 주사보로 공직에 몸을 담은 김동호 위원장은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걸었다.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오른 뒤 연간 100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 영화인들을 만나며 영화를 공부했다. 1996년 부산영화제 함장으로 승선한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문화부 차관까지 지냈던 정부 고위관료로서의 권위의식과 체면을 단숨에 털어냈다. 그는 오로지 부산영화제의 성공을 위해 고개를 숙였고 손을 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언제나 겸허한 자세로 자식,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과 격의없이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세계 3대영화제를 비롯해 대부분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은 절대 권한을 행사한다. 질 자콥, 모리츠 데 하델른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스타일은 권한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신 막힌 곳은 직접 나서 뚫는 해결사였다. 아랫사람들을 아우르는 통솔력도 뛰어나다. 초청작 선정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신 해외 영화제와의 관계 구축이나 정부, 자치단체 등과의 껄끄러운 사안에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3분의 1을 해외에서 보내면서도 결코 일등석을 이용하지 않는다. 프로그래머들과 똑같이 좁고 불편한 이코노미클래스를 고집한다. 이승진 전 사무국장은 "개인적 용무로 복사할 일이 있을 때 복사용지를 따로 사들고 와서 사용하더라"고 말한다. 사소한 듯 하지만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위원장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화다. ★최고자산, 마당발 인맥 제1회 영화제 때 스폰서를 통해 22억원의 예산을 모았던 성공담은 순전히 김 위원장이 불철주야 뛰어다닌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의 인맥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경기고 동기인 김우중 전 회장을 설득해 최대 스폰서로 대우를 영입한 것은 물론 문화부 차관시절 사귄 정·관계 및 문화계의 인연을 총동원해 재원을 차근 차근 확보했다. 그리고 3회부터는 정부 예산도 지원받기 시작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 예산을 따내는 일은 완전히 투쟁이었다"면서도 "그래도 문화체육부에서 10년 동안 제가 하던 일이라 나름대로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IMF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 지원이 순식간에 3분의 2로 삭감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이때 테니스 친구였던 임창열 당시 부총리와 장시간 독대 끝에 삭감된 예산을 완전 복구시켰다. 그리고 1999년 4회 때 다시 삭감위기에 처하자 국회 예결위원장이었던 김진재 의원과 마라톤 협상을 벌여 10억원을 다시 살려놨다. 지금도 정부는 "영화제가 잘되고 있는데 이제 자생력이 생기지 않았느냐"며 여전히 지원을 줄이려고만 하고 있어 김 위원장의 씨름은 계속되고 있다. 부천, 전주영화제 등 국내 4개 영화제는 지금도 김 위원장만 바라보고 있다. 피프가 예산을 따내기만 하면 형평의 원칙에 따라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산뿐 아니라 초기 영화제의 걸림돌이었던 세관 심의도 김 위원장의 수완이 없었더라면 해결되기 힘들었다. 장유엔 감독의 '동궁서궁'이 세관에 묶여 상영 무산 위기에 처하자 공직시절 안면이 있던 세관장을 만나 설득, 관세 부담없이 필름을 받아 온 적도 있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김동호 위원장에겐 '남포동 로비스트'란 닉네임이 붙었다. 김 위원장이 세계적인 로비스트로 떠오른 과정에는 '술'이 강력한 무기였다. - 05/06/30 - 글=손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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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두주불사 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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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인가, 친구 소개로 이용관 교수를 알게 됐죠. 마음이 잘맞아 경성대 앞 고기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는데 그때 백면서생(白面書生)풍의 안주킬러 한명이 종종 합석을 했어요. 술은 입에도 안대면서 영화제 타령을 하더라고요." 문제의 그 백면서생이 경성대 시간강사 김지석이었다. 일행은 "현실성 없는 소리 그만 하고 술이나 먹으라"고 타박했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알코올 분해효소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술도 못하는' 사람이 부산영화제에서 10년을 버틴 것이 대단한 이유는 부산영화제가 곧 술영화제이기 때문이다. 세살 때부터 막걸리를 마셨다는 전설적인 주당을 집행위원장으로 영입한 덕(?)에 영화제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술독과 영화에 동시에 빠져 10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다. 매년 피프를 찾는 국내외 영화인들은 싱싱한 생선회를 안주삼아 밤새 홀짝이던 소주의 쌉싸름한 맛과 미포 밤바다의 낭만을 잊지 못한다. 노천카페에서 들이켜던 시원한 맥주 한잔, 인정 사정없이 투하되던 김동호표 폭탄주의 위력도 결코 못잊는다. 지난 10년간 김동호 위원장과 그 일당이 마셔댄 소주, 맥주병을 한 줄로 세우면 지구를 한바퀴 돌고도 남지 않을까. 특히 김 위원장에게 술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촉진하는 윤활유이며 막힌 곳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만능 해결사다. 폭탄주가 정답게 오고가는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김동호의 친화력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그는 스폰서를 끌어들일 때, 정부 예산을 따낼 때, 그리고 공륜 관계자와 세관장을 설득할 때 으레 술자리를 마련해 엉킨 매듭을 풀어왔다. 김동호 위원장의 술 스타일은 소탈하다. 남포동 길거리에 신문지를 깔고 '스트리트 바'(Street bar)를 만들거나, 해운대 포장마차 순회를 즐긴다. 말술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한 적은 거의 없는 깔끔한 매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4년 전 칸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밤늦게 칸의 숙소에 도착한 김 위원장은 짐도 풀기 전에 큰 양주병을 들고 한국 영화인들과 기자들이 모여 있던 방으로 직행했다. 그는 족히 서른명은 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잔을 돌리고 받아 마시기를 반복했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새벽까지 어울렸던 김 위원장은 불과 몇시간 뒤, 조깅복 차림으로 호텔 마당에 나타나 젊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열몇시간의 비행기 여정 직후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이밖에도 김 위원장과 술에 얽힌 사연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는 체력이 옛날만 못하다며 술 앞에 장사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지난해 피프기간 중에 타이거회 멤버들과 폭탄주를 마시다가 프랑스영화의 파티에 참석했어요. 마이크를 들고 인사말을 했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니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더라고." 그러나 당시 위원장을 보좌했던 홍보팀장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술을 약간 드신 듯 했으나 멀쩡했다"고 증언했다. 타이거회는 김동호 위원장이 세계 영화계의 주당들과 결성한 사모임이다. 회원은 사이먼 필드 전 로테르담집행위원장, 허우 샤오시엔 감독, 네덜란드 기자 피터 반 뷰렌이었으나 뒤에 칸 집행위원장 티어리 프레모가 가세했다. 김동호 위원장의 이름 끝자와 로테르담 영화제의 트로피 이름을 따 '타이거'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난해 티어리 프레모가 로테르담 영화제를 처음 방문한 것도 순전히 타이거회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영화제 때마다 만나는 이들은 날을 잡아 밤새워 술잔을 돌리며 노래부르고 춤을 추며 세계 영화의 흐름을 논한다. 1996년 1회 영화제를 마친 직후, 이런 일도 있었다. 여러가지 갈등으로 인해 심신이 지친 이용관 프로그래머와 오석근 사무국장이 동시에 사의를 표명했다. 거의 석달 열흘간 이들을 만류하던 김동호 위원장은 급기야 "나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홧김에 피프 해산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이별주나 한잔하자며 술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비장한 고별사를 남긴 뒤 큰 맥주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 원샷으로 연거푸 마셔버렸다. 순간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놀란 이용관과 오석근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그리고 영화제 해체는 없던 일이 됐다. 그 이듬해에는 상영작 필름 일부분을 영사기사가 실수로 태워버린 사건이 있었다. 일본 영화 '사랑하기'란 작품이었는데 이는 도저히 국제영화제에서 있을 수 없는 망신스러운 사건이었다. 고민하던 김 위원장은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함께 훼손된 필름을 들고 직접 일본으로 갔다. 후쿠오카 영화제에서 만났던 인연을 앞세워 위원장은 우선 필름의 주인인 구마이 케이 감독을 만났다. 한잔 두잔 술잔이 오가고 한일 양국의 두 주당은 마음이 통해 버렸다.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는 동안 이 심각한 사건은 저절로 무마됐다. 일본 노감독이 김 위원장의 소탈한 스타일에 반해 타버린 필름은 잊어버린 채 대작을 즐겼다는 후문이다. 2005/07/07 | ||||||
<15> 야외상영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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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지면서 사무국엔 비상이 걸렸다. 영화제가 5회까지 이어지면서 줄곧 화창한 가을날씨의 도움을 받은 탓에 우천시의 대비책이 없었다. 이날 수영만 야외상영장에서 상영될 작품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인 '어둠속의 댄서'. 이미 5000석의 좌석은 완전 매진된 터라, 빠른 시간 안에 상영여부를 결정해야했다. 5000석이면 입장수익이 3000만원에 달한다. 상영을 취소한다면 솔직히 금전적인 손실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무국은 회의 끝에 원하는 관객에겐 환불을 해주되 상영을 강행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해가 떨어지고 영화는 시작됐다. 불안한 마음으로 현장에 도착한 오석근 사무국장과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1회용 비옷을 입고 빼곡히 자리를 메운 수천명의 관객들이 장대비를 맞으며 대형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중에 자리를 뜨는 사람도, 우산을 펴든 관객도 거의 없었다. '어둠속의 댄서'는 공장 노동자인 엄마가 시력을 잃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처형당하는 이야기다. 감동적인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의 얼굴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물기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모습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열정을 느낀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흥분했다. 전화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전양준 프로그래머도 "부산영화제는 분명히 성공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가을 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수영만 야외상영장은 부산영화제의 명물이다. 가로 26.65m, 세로 14.76m, 6층 건물 높이의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세계의 수작들은 실내 스크린에서 맛볼 수 없는 생생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부산시민회관과 벡스코 전시장으로 오픈시네마 상영관이 몇 차례 옮겨다니는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부산시민과 관객들은 야외 상영을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꼽는다. 외관상으로 부산영화제 최고의 이벤트인 '야외 상영'은 그러나 영화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고육지책이었다. 영화제의 틀을 짜던 초창기에는 수많은 선택이 필요했다. 이미 쇠락의 길로 들어선 도쿄영화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일단 비경쟁 영화제로 간다는 방향은 정해졌는데 아무도 자신하지 못했던 것이 영화제의 '흥행'이었다. 전용 상영관도 없이, 허름한 시내 상영관으로 관객의 발길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마니아와 대중을 아우르는 영화제로 콘셉트를 정한 이상, 관객 없는 영화제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중성있는 흥행작들을 초청해서 바닷가에서 상영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열기를 남포동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죠." 김동호 위원장은 야외상영을 도입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교통 체증을 뚫고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가는 동선의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수영만 야외상영장은 첫 해부터 관객 열기로 폭발했다. 오픈시네마 섹션 작품들은 대부분 매진됐다. 영화의 문외한일지라도 야외상영관에서의 영화 관람은 색다른 매력이었다. 전용관조차 없는 최악의 조건으로 시작한 신생영화제의 핸디캡을 야외상영으로 극복한 것은 피프 사무국의 승리였다. 그러나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야외상영이 비록 관객들에게 낭만과 추억을 제공하는 매력은 있지만 솔직히 요트경기장은 영화를 보기에 너무 가혹한 환경"이라고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우리의 벤치 마킹 대상은 로카르노 영화제입니다. 로카르노는 8월에 개최되죠. 게다가 자연발생적 유럽 고도시로 야외상영의 환경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요.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자연스레 야외상영장이 형성된 겁니다. 부산하곤 다르죠." 바닷가에서의 영화상영은 낭만적이지만, 동시에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개최시기가 들쑥날쑥하면서 11월에 영화제가 열렸던 2001년, 2002년 관객들은 체감온도가 0도 가까이 뚝 떨어지는 추위속에서 바닷바람과 싸우며 영화를 봐야했다. 담요, 침낭을 둘러쓰고 영화를 보는 진풍경은 해외 토픽에 날 만한 일이었다. 피프 전용관이 들어서는 2008년 이후에도 야외상영의 전통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현재로선 수영강을 끼고 조성될 수변공원으로 야외상영장을 옮겨간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된다면 바닷바람이 적절히 차단되고, 아파트단지의 불빛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쾌적한 환경에서 관객들은 낭만과 즐거움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2005/07/14 - | ||||||
<17> 워스트·베스트 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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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220여명이었던 영화제 게스트가 지난해엔 5000명을 넘어섰다. 톱스타와 배우들이 관객에게는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피프 초청팀에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이다. 게스트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초청장 발송, 항공편과 숙소 배정, 방문 기간 중 스케줄 관리 등 초청팀의 업무는 산더미다. 더군다나 수천명 게스트 중에는 기상천외한 말썽으로 초청팀의 애를 먹이는 사람도 한두명이 아니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이들을 '크리미널 게스트'라고 지칭한다. 전 프로그래머가 들려주는 크리미널의 유형은 갖가지. 호텔룸의 미니바를 동내고, 산더미같은 룸서비스를 시켜먹고 달아나는 잡범(지금은 톱스타가 된 국내배우 A), 미모의 자원봉사자에게 호텔방 번호를 가르쳐 주는 호색한(유명한 국내감독 B), 꽃미남형 남자 스태프에게 은밀한 눈길을 보내는 동성애자(해외 게스트 중에는 게이가 적지 않다)도 있다. 술에 취해 사소한 실수를 하는 게스트는 허다하다. 중요한 해외 어드바이저인 C의 경우, 성격의 기복이 심하고 참을성이 없어 수시로 부르르 화를 내는 통에 스태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사생활은 그 사람의 영화 세계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스태프들은 너저분한 사생활 뒤치다꺼리를 해주다보면 그 감독의 작품이, 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가식적으로 느껴지며 무엇보다 부산영화제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한다. 물론 깔끔한 매너와 예의를 갖춘 점잖은 게스트가 훨씬 많다. 누구보다도 진지한 태도로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해 갈채를 받았던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 홍콩 감독 진가신 등은 우수한 게스트에 속한다. 개·폐막작 단골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도 '초록물고기' 난장 파티에 홀딱 반해 그 이후로 피프 홍보에 앞장서고 있는 훌륭한 게스트로 꼽힌다. 지난 2001년 '태국영화 특별전'을 위해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과 함께 피프를 찾았던 태국 프로듀서 듀앙카몰 림차로엔은 한국 영화인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그녀를 '마마상'이란 닉네임으로 소개했다. 후덕한 외모의 '마마상'은 태국영화를 산업적으로 근대화시키고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한 대단한 파워우먼이다. 그녀로 인해 태국영화는 2001년 칸영화제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3국 합작 '쓰리'의 프로듀서로 참가하고 피프와도 깊은 인연을 지속해 왔던 그녀가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재능있는 젊은 영화인의 죽음은 태국 영화계로선 큰 손실이다. 그해 겨울, 꽃을 사들고 그녀의 유골이 보관된 집으로 뒤늦은 문상을 간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그녀의 부모에게 림차로엔이 태국 영화계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피프와 어떤 인연인지를 상세하게 들려줬다. 부모는 딸을 잊지 않고 찾아온 김 프로그래머의 손을 붙잡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프로그래머들이 꼽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게스트'는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특히 아시아 영화 담당인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마흐말바프는 게스트가 아니라 친구 이상의 존재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종교와 정치적인 문제로 큰 시련을 겪고 있지만 마흐말바프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라면서 "수천년 문명의 힘을 영화로 보여주는 진정한 페르시안의 후예"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1998년 개막작 '고요'와 함께 피프를 처음 방문한 마흐말바프는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과분한 접대를 받다니 이게 맞는 거냐"고 반문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세계 유수 영화제가 인정한 이란의 보석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나치게 겸손했다. 그는 2000년 특별전 '마흐말바프가의 영화들'을 위해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시 부산에 왔다. 현재 그의 부인과 큰딸 사미라, 작은딸 하나는 모두 메이저영화제의 인정을 받은 감독이 됐다. 이어 2003년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하기 위해 그는 다시 부산을 찾았다.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담은 '칸다하르' 이후 마흐말바프의 가족 영화학교는 폐쇄됐다. 지난해 이란을 방문했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문을 닫은 그의 영화학교에서 타지키스탄으로 쫓겨난 마흐말바프에게 전화를 했다. 집과 차를 팔아 찍은 영화로, 이란 영화의 힘을 세계에 알린 그는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도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김 프로그래머는 울컥했다. 그는 마흐말바프에게 "사랑한다"는 말밖에 할수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얘기하면서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미친 개에게 먹이를 주다 손등을 물리고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피프를 방문했던 일화, 술에 취한 남자가 차를 가로막고 누워있는 것을 보고 그를 흔들어 깨우던 모습, '칸다하르'를 찍기 위해 아프간에 머물던 시절 굶주린 현지인들 생각에 차마 식사를 하지 못하던 모습, 그리고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현지 취재차 아프간으로 들어가는 KBS 다큐멘터리 팀에 들려보낸 액자 선물에 감동해 영상 편지를 보내온 일 등 가슴 찡한 사연들은 마흐말바프의 인간미를 잘 보여준다. 마흐말바프의 삶이 곧 영화이며, 영화는 곧 그의 삶이다. - 2005/07/28 - | ||||||
<18> 세계 영화인 사교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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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대중적 친화력이 열등한 유럽 영화들은 소박한 기술을 예술성과 실험정신으로 커버하면서, 이를 한데 모아 '영화제'를 개최함으로써 자존심을 지켜왔다. 역사를 가진 영화제가 유럽에 집중돼 있는 이유다. 명성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지의 작가주의 영화들을 총망라,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는 작품을 소개하는 데 영화제들은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작품성만을 따져 무조건 초청할 만큼 영화제는 순수하지 않다. 칸 베니스 베를린은 철저히 계산적으로 초청작을 결정한다. 대륙과 국가의 안배, 감독의 지명도, 그 나라 영화계와의 밀월 관계 등 영화 외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따져서 초청작 리스트를 정한다. 세 영화제의 경쟁은 말할것도 없다. 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도 "심사위원과 프로그래머의 취향에 따라 수상작이 결정되는 것이 영화제의 특성"이라며 자신 또한 운이 좋았다고 말할 정도다. 물론 외적 요인들을 따지기 전에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기간에, 김동호 위원장 주재로 마련된 티어리 프레모 칸 집행위원장과 김기덕, 홍상수 감독의 오찬회동은 곧 올해 칸 영화제에 두 감독 모두 초청받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여기서 해외 영화제들간의 경쟁에 뛰어들어 피프와의 관계를 잘 구축해온 김동호 위원장의 외교력에 주목해야 한다. 김동호 위원장의 행보는 연초부터 분주하다. 1월 로테르담 영화제에 참석하고, 파리에 있는 칸 사무국에 들렀다가 2월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한다. 영화제 석달 전 칸 방문은 의미있는 일정이다. 위원장은 한국 영화의 동향과 주목할만할 작품들을 질 자콥 회장과 티어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에게 소개하면서 5월을 대비한다. 주류 영화제들의 틈바구니에서 김동호 위원장이 진땀을 흘렸던 일도 많다. 1998년 2월초. 김동호 위원장은 로테르담과 칸을 들러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런데 당시 집행위원장인 모리츠 데 하델른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질 자콥과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 칸과 피프는 어떤 밀월 관계냐, 왜 1회 피프때 에리카 그레고르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냐 등 별러왔던 사안들을 조목조목 따졌다.(에리카 그레고르는 하델른의 라이벌인 올리히 그레고르 베를린 포럼 집행위원장의 부인) 김동호위원장은 마치 죄인처럼 심문에 대답해야 했다. 이듬해 김동호 위원장은 하델른 집행위원장을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로 선정, 상패로 수여하는 부채를 들고 찾아갔다. 화해의 제스처였다. 그러나 이날 회동 사진이 베를린 데일리지에 게재되는 바람에 베를린 포럼쪽 관계자들이 진노했다. 김동호 위원장은 다시 에리카 그레고르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고, 그해 베니스영화제에서야 그녀와 화해할 수 있었다. 모리츠 데 하델른은 이후 베니스영화제로 자리를 옮겼고, 김동호 위원장은 축하전문과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부탁하는 서한을 보내는 등 베니스영화제와의 관계 구축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해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로 베니스 감독상을 수상했다. 열강들의 경쟁과 세 과시 속에서 새우등 터지듯 수모를 당한 적도 많고, 진땀을 흘렸던 적도 많았지만 김동호 위원장은 "영화제 집행위원장의 마땅한 소임"이라고 설명한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영화제를 돌다보면 연간 수차례씩 만나게 되는 3대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에게 '당신들, 올해 우리영화 불러줄거지?'라며 농담반 진담반 압력을 넣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과 이미 막역한 관계를 구축해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인다.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는 수백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쏟아진다. 그 가운데 한국 영화를 리마인드시키는 일은 '로비'가 분명하다. 로비 능력의 부재로 보석같은 작품들을 사장시킬 수는 없는 법. 그런 측면에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지난 10년동안 한국영화를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린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왔다고 볼 수 있다. - 05/08/04 - | ||||||
<19>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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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마침내 꿈을 이뤘구나!" 누군가가 지나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살짝 미소를 보이고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사람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여자 동창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철들면서부터 남포동 극장가를 기웃거렸던 시네마키드 김지석의 꿈이었다. 공학도의 길을 일찌감치 접고 프랑스문화원과 극장을 들락거렸던 그는 영화학과 교수가 됐고 '영화제' 창설을 노래하고 다녔다. 허황된 꿈인줄 알았던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져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모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은 '피프 10년속으로' 시리즈를 통해 열거한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운영상의 미숙과 허점을 끊임없이 노출해가며 질책도 숱하게 들었다. 성장 드라이브 속에서 시행착오를 병행하는 동안 영화제는 기적처럼 아시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부산영화제가 탄생한 1996년 이후 국내에는 부천 광주 전주 영화제를 비롯해 수십개의 크고 작은 영화제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갈등과 충돌속에 비틀거리는 영화제도 있고, 나름대로 목표에 충실하며 내실을 잘 다져온 영화제도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영화제의 역사다. 국내 영화제의 맏형으로 한국영화와 세계 영화계를 이어주는 다리로서 역할을 다해 온 부산영화제의 성공요인을 요약하자면 △민과 관의 성공적인 협조관계 △김동호 집행위원장, 문정수 조직위원장을 비롯한 탁월한 인적자원 확보 △아시아 영화 소개에 주력 △비경쟁영화제 △아시아 최고의 프로젝트마켓 PPP의 출범과 성공 △부산시민과 관객의 열정 등이다. 다만 부산국제영화제의 '10주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도약과 성장, 안정을 발판삼아 재도약의 과업이 주어진 것이다. 지난 10년의 성과를 평가하며 반성하고, 새로운 비전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벤치마킹의 대상이자 동반 협력자였던 세계의 영화제들이 이제는 긴장하며 부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도쿄영화제가 부활의 기치를 내걸었고, 홍콩과 싱가포르영화제도 재도약을 선언하는 등 아시아 정상의 자리를 위협하는 영화제들의 도전이 특히 거세졌다. 이제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시 뛰어야 한다. '포스트 김동호'를 이끌 후계자 양성을 포함한 영화제 인력 발굴, 전용관 시대를 맞아 새로운 청사진 마련, 아시아 영화 창구로서의 본연에 충실한 차별화된 프로그램, 필름마켓의 기능을 강화한 PPP의 확대 운영 등 이미 시안이 마련됐거나 계획중인 현안들을 차근차근 해결해가며 100년을 향해 달려야 한다. 피프는 이제 몸만들기와 워밍업을 마치고 마라톤 풀 코스의 스타트 라인에 서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 끝 - - 2005/08/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