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새롭게 하시는 회복의 은혜, 언제 시작될 수 있는가? (2013.10.26 현재 수정본)
[머리말]
1. 지난 주일 OOO목사의 ‘새롭게 하시는 회복의 제단’이란 제하(題下)의 설교를 듣고 느낀 소감(所感)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지난 주일 예배도 역시, 현 사랑의교회 강단을 통해 좋은 설교를 듣고자 하는 바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원래 ‘설교 소감’이란 받은 은혜(恩惠)를 나누는 것이 정석(定石)이건만 불행하게도 필자의 실망(失望)을 나누어 드리게 되어 매우 죄송스럽다.
2. 그러나 거룩한 교회를 비진리(非眞理)와 악(惡)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요 의로운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까닭에 진리를 왜곡하고 성도를 속이는 설교를 모른척하고 넘어가는 편(便)함을 택하기보다 그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불편(不便)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이 설교에 대해 사랑넷에서 이미 여러 분들이 좋은 글들을 올려 주셔서 매우 유익(有益)했다. 필자는 신학도가 아니기에 설교를 비평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생애에 설교를 비평해야 할 때가 올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이 설교를 듣고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에 계속 마음이 괴롭고 힘들었다. 그래서 비록 받은 바 달란트는 적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고 둔필(鈍筆)을 들게 되었다.
쓰다 보니 긴 글이 되어 버렸다. 바쁜 일상에 긴 글을 읽기 힘든 분들에게는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비록 긴 글이지만 틈틈이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고, 지난 주일 설교에 대한 생각들을 서로서로 다시 함께 나누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첫째, SGMC 즉 새 예배당(禮拜堂)을 다시 성전(聖殿)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3. SGMC건축 초기에 성전이란 말을 사용하다가 깨어있는 성도들의 지적에 한 동안 공식적으로는 SGMC=성전이란 말이 사라졌고, 대신 서초예배당이란 말로 바뀌었다. 몇 개월 전 어느 주일예배 광고시간에 사회자 김은수 목사가 “사랑의교회가 SGMC를 공식적으로 ‘새 예배당’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벌써부터 그렇게 사용해 오고 있는데, 아직도 ‘성전’이란 말로 교회를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과연 그들이 사랑의교회 교인인지 궁금합니다”라는 멘트로 성도들을 꾸짖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4. 그런데 OOO목사가 복귀하고 난 후, 특히 지난 특새 때 박신일 목사가 설교를 한 후 그 동안 유통금지 되었던 이 단어가 다시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는 “새 성전에 입당(入堂)하기 전에 우리 몸이 먼저 성전 되어야 한다”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묘한 화법을 구사했고, 이제 오목사는 그 말을 종종 인용하는 방식으로 SGMC를 다시 성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5. 성전이라는 표현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각 지역 지(支)교회 예배당을 아예 성전이라고 부르며 교회 이름까지 성전으로 명명(命名)한다. 개혁적 복음주의 장로교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도 종종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른다. 장로들의 주일 대표기도에 종종 등장하는 표현이다. 성전이라 불러야 좀 더 거룩한 느낌이 나는가 보다. 특히 예배당을 증축 또는 신축할 때에는 어김없이 예배당이 성전으로 바뀐다. 왜 그럴까?
6. 건물로서의 성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용도폐기(用途廢棄) 된 단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성전은 단지 예수님을 예표(豫表) 하는 그림자였고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신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따라서 성전의 그림자가 아니라 바로 그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님을 성경이 확실히 증거해 주고 있다.(히9:24)
7. 한편 ‘하나님의 임재(臨在)’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구약시대에는 성막 또는 성전이 그 기능을 담당했으나(왕상8:11, 시11:4)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롬8:9) 성령(聖靈)이 거하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3:16-17, 고전6:19) 또한 그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후6:16, 엡2:21) 따라서 SGMC는 ‘예배당과 그 부속건물’일 뿐이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아니다.
8. 여기에 우리가 주목(注目)해야 할 귀중한 교훈이 있다. 더 이상 성전이 아닌 곳, 단지 건물에 불과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계속 강단에서 선포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왜곡된 진리의 선포에 무분별하게 ‘아멘’으로 화답해서는 안 된다. 이런 목사와 성도들이 있는 공동체라면 그 곳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따라서 목사와 성도는 모두 단어 하나 하나의 개념을 바로 알고 사용해야 한다.
9. 설교자가 뻔히 알면서도 건물을 성전이라고 강단에서 선포한다면, 그것은 신약성경과 예수님의 구원사역과 복음을 부정하는 죄를 범하는 행위다. 그것은 진리의 성령에 따른 정직한 설교가 아니며(요 16:13) 거기에는 분명 설교자가 노리는 다른 불순(不純)한 의도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우리는 그릇된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이나 이에 화답하는 무리들 속에 과연 진리의 성령이 거하시는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의 말씀에 죽고 사는 성도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둘째, 설교자가 토저목사님의 글을 설교에 인용했다.
10.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 분이 토저의 책을 읽는다고?” 토저목사님(Aiden Wilson Tozer : 1897-1963)의 글은 세속화된 사이비 목사들이 싫어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설교자가 자기 이야기일 수도 있는 그 글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담담하게 설교에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도인을 새로워지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상태’가 모두가 자기의 상태였으며, 특히 세 번째인 ‘부패한 상태’에 대한 설명은 더욱 정확한 ‘자기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토저의 글을 정확히 인용했느냐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11. 설교 중에서 그는 “부패한 상태란 자신이 병들어 냄새 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주변사람들까지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만일 그가 “이 상태가 바로 저의 모습입니다”라고 진정한 회개의 고백이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토저의 글을 설교에 인용하면서 자기도 그 내용을 정말 공감하는 양, 그리고 꼭 들어야 할 사람들이 따로 있는 양, 그러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양 시종(始終) 위선적인 태도를 취했다.
12. 토저목사님은 ‘복음주의의 양심(良心)’ 또는 ‘이 시대의 선지자(先知者)’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 변질되어 가는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성경에 기초한 선지자적인 말씀으로 엄하게 꾸짖었으며, 진리와 성령에 목마른 자들에게는 생수와 같은 말씀으로 영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신 분이시다. 나의 소견에는 40여권에 달하는 토저의 책들은 오늘날 세속화되어 가는 성도들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특효약(特效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제천에서 자숙할 동안 토저의 책들을 탐독하고 정독하는 가운데 성도로서의 자신은 물론 목회자로서의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더라면, 그래서 그가 제천기도동산이 떠나갈 듯이 통곡하고 회개하였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모두 그의 회개의 열매를 볼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며 때 지난 헛된 몽상(夢想)에 잠시 빠져보았다.
13. 나는 이 설교를 들으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가 토저의 책을 직접 읽고 이 글을 인용했을까?” 아니면 “설교자료실에서 남이 뽑아 준 것을 그냥 읽은 것에 불과할까?” 전자의 경우, 그가 책을 직접 읽고 나서 이 부분을 인용했다면 그의 영혼은 말씀에 도전조차 받지 못하고 양심의 찔림조차 느끼지 못하는 심각한 병에 빠졌으니 설교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다.
14. 후자의 경우, 그가 책을 직접 읽지 않았으며 단지 남이 준비해 준 설교 원고를 자기 것인 양 말씀을 전했다면, 그런 부도덕한 양심으로도 그는 설교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정상적인 설교자라면 설령 남이 뽑아 준 자료를 인용하였더라도 설교 전 그 요지를 묵상할 때 마음에 찔림이 있었어야 마땅한 것이다. 설교자가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해보지도 않고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것은 수 많은 영혼을 파괴시키는 폭탄을 가지고 올라가는 것과 진배없다.
15. 어쨌거나 위에 언급한 두 경우 중 하나에는 해당되기 마련인 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는 더 이상 강단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설교자도 사람이니 잘못을 범할 수 있다. 특히 말씀 전하는 자로서 말씀대로 살려고 회중보다는 더 힘써 노력하겠지만 신행일치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부족한 삶에 대한 겸허하고 진솔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설교자에게서 ‘온전함’(Perfection;고후13:11)만을 보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치열한 ‘구도자(求道者)의 모습’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救援)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참된 ‘제자(弟子)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빌2:12)
셋째, 설교에 소개된 ‘3C 공식’(公式)은 많은 문제점과 허점을 내포하고 있다.
16. 설교자가 밝히지 않아 이 공식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공식을 자신의 목회적 입장을 변호하고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리어 자신의 무지(無知)와 무개념(無槪念)을 더 노출시키고 만 셈이 되었다. 그는 이 공식을 적용하기에 앞서 먼저 세 단어의 올바른 정의(定義)를 제대로 규명했었어야 했다.
가. 세 단어의 올바른 정의
A. Community ; 교회
17. 여기서 공동체란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의 주(主)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된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히 ‘알곡과 쭉정이’가 있다.(눅3:17) 그것이 지상의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또한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마13:25-26) 그래서 지상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13:29에서는 곡식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마지막 때까지 가라지에 대한 심판을 유보(留保)하신다는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볼 수 있다.
18. 그러면 사랑의교회는 어떠한가? 우리도 다른 교회와 다르지 않다. 곡식과 가라지 즉 성도(聖徒)와 성도를 가장한 비성도(非聖徒)가 섞여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다른 건강한 교회들과 분명히 다른 점, 핵심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영적 지도자(指導者)의 문제다. 건강한 공동체와 건강하지 않은 공동체의 차이는 ‘영적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다. 담임목사가 올바른 주님의 종(從)이 되지 않고서는 그가 섬기는 교회가 결코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自明)한 이치다.
19. 따라서 말씀이 왜곡되고, 거짓 복음이 선포되고, 거짓이 용인되고, 불법이 합리화되는 작금의 사랑의교회는 주님께서 ‘사데(Sardis)교회’에게 하신 말씀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다.(계3:1) 따라서 사랑의교회는 지금 살아있는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죽은 신앙공동체란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B. Contents ; 복음
20.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터”다.(딤전3:15) 그 진리의 핵심은 ‘복음(Gospel)’이다.(막1:1) 복음은 무엇인가?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 때 구원(救援)은 반드시 회개가 전제(前提)되어야 한다. 회개(悔改)는 말만이 아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인격과 삶 속에 지속적으로 맺어 나가는 상태를 말한다.
21.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行爲)를 동반(同伴)해야 한다. 행위란 믿음의 표현(表現)이기에, 성도의 믿음은 그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모습으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이 회개-믿음-구원-성화의 과정은 ‘진리의 말씀’과 ‘진리의 성령’에 의한 ‘성결(聖潔)의 삶’이 그 축(軸)이 되고 지지대(支持臺)가 되어 성숙되고 이루어져 간다. 따라서 거짓(falsehood)과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는 복음적 삶에 반대되는 내용이며 결코 구원 받은 성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덕목(德目)이 아니다.
22. “우리 교회에 진정한 복음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왜 우리 교회에 진정한 복음이 없을까? 그것은 우리 사랑의교회에 십자가(十字架)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강단 뒤에는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고 각종 악세사리에는 십자가 형상이 남아 있지만,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 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십자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눅 9:23)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시늉만 할 뿐 정작 자기 십자가를 지지는 않는다.
23. 그런데 이것을 어찌할꼬? 십자가가 없는 그 자리에는 거짓과 자기합리화와 세속화와 부정(不淨)이 똬리를 틀고 자리잡고 말았다. 십자가가 사라진 그 곳에 자리잡은 것 중 대표적인 것이 황금만능주의 우상 ‘맘몬’에 대한 헌물이자 가짜 십자가인 대형 호화 건축물- ‘SGMC’이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막11:13-14) – 열매가 없는 가짜 복음, 이것이 현재 사랑의교회의 콘텐츠(contents)다.
C. Culture ; 문화
24. 설교자는 교회가 시대정신을 선도하는 문화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설명이 미흡했다. 그는 그러한 새롭고 앞선 교회문화가 복음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culture(문화)와 context(상황)을 동의어처럼 쓰는 등 설교자면서도 설교에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모습이 역력이 보였다. 설교를 듣는 자의 입장에서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교회의 새롭고 앞선 문화(culture)가 그 시대(context) 속에서 그 시대정신(the spirit of the times)을 선도(先導)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25. 시대정신이란 말을 놓고 보면 설교자는 문화를 바로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시대정신을 선도하려면 교회의 ‘고결한’ 정신문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그는 문화를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이거나 기술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듯한 허점을 보였다. 그가 어렸을 때 교회가 그 지역문화의 센터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하면서 예를 든 것이, 맨 먼저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언급했고, 교회교육에서는 융판이나 환등기 같은 교육기자재를 주된 예로 들면서(구연동화를 예를 들기도 했지만) 교회교육이 학교교육보다 항상 앞서 갔다고 회상했다.
26. 그는 시대정신이란 거창한 말로 설교를 시작해 놓고 건물이나 교육기자재 같은 물질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서 필자는 그가 이런 3C개념과 세 가지 공식을 설교에 도입한 이유가 단지 SGMC를 변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의 문화에 대한 이해(理解)에는 물질적인 부분이나 외면적인 부분, 달리 말하자면 문화(文化)의 하위개념인 문명(文明)에 더 비중을 두는 경향성(傾向性)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27. 그에게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은 핵심 사항이 아니므로 일단 젖혀두자. 그러면 교회가 반드시 최고의 문화를 구비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교회의 문화’를 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청소년기였던 1960년대는 우리나라가 최빈국 대열에 끼어있을 때였다. 필자도 교회를 ‘구제품(救濟品) 교회’라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교회는 선교사들로 인해 서구 선진문명의 영향을 가장 빨리 전수(傳受)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교회가 지역문화의 센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교회가 놓여 있던 그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 시공(時空)을 초월한 전체 세계교회의 보편적이고 당위적인 특성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논리학적으로도 ‘성급한 일반화’(hasty generalization)의 오류에 해당된다.
28.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첨단 시설과 환경을 구비해 놓아야 하는가? 또 교회의 주된 관심과 인적 물적 자산이 그런 외형적인 것에 우선적으로 배치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도 없다. 더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교회가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그것은 대도시의 부유한 초대형교회(超大型敎會)니까 할 수 있는 배부른 이야기일 뿐이다. 참으로 사랑의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성경을 펴놓고 읽어가며 새롭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막10:23)
29. 현 담임목사는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 특히 교회교육에 첨단 I.T.적 기술을 적용하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감히 충고하고자 한다. 디지털(digital)적인 방식의 목회에 치우치지 말고 아날로그(analogue)적 방식의 목회로 방향을 바꾸라. 아날로그적 목회란 더 인간친화적이고 더 영적이고 더 성경적인 방식의 목회다. 아날로그적 목회를 하는 한 ‘목회의 덫’인 대형교회(大型敎會)가 자리잡을 수 없다.
30. 주일학교 교육은 헌신되고 잘 훈련된 선생님들에 의해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사랑과 영적 권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첨단 교육기자재나 첨단 영상물을 비롯한 물질과 기술, 그리고 쾌적한 환경과 편리한 시설로 승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도 물질과 기술을 활용할 수 있으면 더 좋겠으나 그것들이 교회의 우선적 관심사나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되어 더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회가 그 지역사회의 문화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말 속에는 SGMC를 합리화하려는 그릇된 의도(意圖)가 보이므로 동의할 수가 없다.
31. 사실 문화는 정신문화(精神文化)가 그 핵심이다. 문명의 이기(利器)들은 문화의 산물(産物)로서 문화의 일 부분일 뿐이다. 정신문화가 빠진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도구들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회는 물질보다는 정신문화를 주도(主導)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며 정체성이고 비교우위가 있는 영역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과 도덕적 주도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철학적 또는 인문학적인 세상의 정신문화와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기독교 정신문화’로 사회와 역사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
나. 3 C 공식(公式)의 문제점
32. 위에서 언급된 세 단어의 올바른 정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다.
교회의 3요소
설교자의 정의
종려나무의 정의
교회 (Community)
믿음 공동체
건강한 신앙공동체
복음 (Contents)
복음과 진리의 선포
(십자가를 통과한) 진짜 복음의 선포
문화 (Culture)
문화를 선도하는 시대정신
거룩한 기독교 정신문화
33. 설교자 오목사는 이 세 단어를 조합하여 만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식을 소개했다.
교회 + 복음 – 문화 = 극단적 근본주의
교회 + 문화 - 복음 = 잘못된 자유주의
복음 + 문화 – 교회 = 교회 밖 단체
34. 이제는 이 세 가지의 공식의 문제점들에대한 필자의 비평(批評)과 소감(所感)을 말할 차례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위와 같은 사회적 현상을 간단한 덧셈 뺄셈 같은 단편적인 공식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무리한 발상이다. 원래 사회적 현상이란 복합적(複合的)이고 유기적(有機的)이기 때문에 1+1=2와 같은 단순 셈으로는 가늠하거나 분석할 수 없는 법이다.
35. 예를 들자면 당장 첫 번째 공식 [교회+복음–문화=극단적 근본주의]는 말이 되지를 않는다. 교회가 있고 복음이 있는데 문화가 없다고 해서 ‘극단적 근본주의’가 된다는 말은 매우 비논리적(非論理的)이고 비현실적(非現實的)이다. 믿음의 공동체가 있고 그 곳에 복음과 진리가 선포되고 있는데 어떻게 극단적 근본주의 같은 잘못된 시대정신이 발 붙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교회는 그 이전부터 이미 병든 신앙공동체였고 바른 복음과 진리가 선포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 공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6.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즉 세 단어의 ‘바른 정의(定義)’를 토대(土臺)로 했을 때 설교에서 소개했던 산술적 공식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기 첫 번째 공식의 경우, ‘건강한 신앙공동체’와 ‘진짜 복음’이 있는 곳에는 ‘거룩한 기독교 정신문화’가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극단적 근본주의가 될 수 없다. 두 번째, ‘건강한 신앙공동체’와 ‘거룩한 기독교 정신문화’가 있는 곳에는 ‘진짜 복음’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잘못된 자유주의가 발 붙일 수가 없다. 세 번째, ‘진짜 복음’과 ‘거룩한 기독교 정신문화’가 있는 곳에는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교회 밖 단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필자 주: 교회 밖 단체- 설교자가 그 구체적 대상은 밝히지 않았지만 부정적인 의미였다.)
37.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볼 때,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공식을 무리하게 설교에 적용한 저의(底意)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즉 “현 담임목사가 극단적 근본주의자도 잘못된 자유주의자도 아니며, 교회 밖 단체를 옹호하는 자도 아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다른 말로 하자면 영적으로 혼탁한 이 시대에 담임목사 자신은 치우침이 없이 균형 잡힌 신학에 근거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건강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와 교회 밖 단체
38.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고찰해 보면 여기야 말로 참으로 많은 허점(虛點)이 보이는 대목이다. 필자의 글이 많이 길어졌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여야 할 필요를 느끼니 양해를 바란다.
A. 극단적 근본주의
첫째,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란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해서 생긴 신앙운동을 말한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에서 부정하는 다섯 가지의 기본교리를 강조한다. 성경 무오설과 그리스도에 관한 4개의 교리, 즉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재림이 그것이다.그래서 이것만 보면 근본주의가 매우 건전한 신앙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 신학이 정치적 극우주의(極右主義)를 만나면서 원래의 신앙적 순수성을 잃게 되었다. 종교적 배타주의와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적인 면까지 띠게 된 것이다. 즉 ‘근본주의 신앙운동’ 자체가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피해자가 되고 만 셈이다. 그것이 곧 근본주의가 네가티브(negative)한 의미로 쓰여지게 된 이유다.
39. 극단적 근본주의의 구체적인 패해(弊害)를 말하자면, 그들은 교회를 자유주의적 세속화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으로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하며 정치무대에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한편 부패한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됨으로써 정치판의 부패를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부패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게 되어 함께 세속화 되고 만다.
40. 그런데 우리의 설교자 오목사는 왜 이 시점에 문화가 없으면 극단적 근본주의가 된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를 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SGMC건축을 반대하는 많은 성도들을 타겟(target)으로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SGMC를 반대하는 사고패턴이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을 닮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실질적 내용이나 형식 논리에도 맞지 않는 엉뚱한 적용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용어를 가지고 건축반대자=극단적 근본주의자라는 라벨을 달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41. 한편 오목사 자신은 어떤가? 극단적 근본주의자는 배타적이긴 하지만 그 만큼 신앙적 소신에는 투철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기회주의적인 오목사는 극단적 근본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가 공부를 충실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가 수학(修學)한 탈봇신학교(Talbot Seminary)는 온건한 근본주의 계열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도 교리적인 면보다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극단적 근본주의자들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멘토로 삼고 있는 조용기목사는 과거부터 기독교정당을 만드는 일에 발벗고 나섰던 정치지향적인 분이다. 종교인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조용기목사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적 영향력을 꿈꾸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 오목사는 어떤 야심(野心)을 가지고 있을까?
42. 오목사는 대체적으로 매우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회 내에서 VVIP들을 특별 관리한다는 말이 있다. 장로를 세울 때도 신앙이나 인격보다는 사회적 힘과 능력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관법조계 교인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거나 아니면 재정적인 힘이 있는 기업인들 또는 고급전문직 종사자 들을 우선한다는 여론이 있다. 교인들 중 유명인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다. 법률자문을 해 주는 로펌(Law Firm)은 항상 가까운 곳에 두고 있으며, 돈으로 언론을 다루는 부분에도 특별한 은사가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능력이 이번 SGMC 건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B. 잘못된 자유주의
43. 둘째,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자유주의란 성경의 진리를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 진리로 보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신학 사조를 말한다. 성경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으로 보며 계시보다 이성과 경험을 더 중요시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권이나 환경보호를 위한 운동가나 소외된 인종이나 계급을 위한 혁명가가 되기도 한다. 인권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위해 동성연애도 인정하는 도덕적 타협이 이루어진다. 반전주의와 세계평화라는 목표를 위해 무신론(無神論)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잡는다. 종교의 화해와 연합과 일치라는 애큐메니칼(Ecumenical)적 명제를 걸고 캐톨릭은 물론 불교와 이슬람 등 모든 종교와 연합하고 교류를 한다. 십자가와 예수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적 다원주의(多元主義)를 지지한다. 여기에 WCC란 국제단체가 그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44. 오목사는 3 C공식에서 복음이 빠지면 잘못된 자유주의가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면 오목사 자신은 복음이 있는 목회를 하고 있는가? 필자는 이 질문에 ‘NO’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진정한 복음을 모르는 형식적 복음주의자 같다. 즉 자신의 삶에서 보여주는 대로 진정한 회개가 없는 값싼 복음을 믿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목사로서 ‘부족한 크리스천’, 즉 십자가와 회개를 모르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세속적이고 감성적인 크리스천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45. 오목사는 하버드대학 펠로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서 무슨 과목을 몇 달이나 공부했고 얼마나 많은 영어 텍스트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버드대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本山)이다. 아울러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듯이 그의 주변 교계 인맥을 보면 오목사를 더 잘 알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자요 평화주의자인 새들백 교회 릭웨렌(Rick Warren) 목사와 20년 이상 오랜 교분을 쌓아 왔으며, 국내에서는 조용기목사나 김삼환목사 같은 초대형교회 목사들과 교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릭웨렌은 동성연애 지지 발언으로 유명하며 국내의 두 목사님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WCC의 한국측 대표적 인물들이다. 특히 김삼환 목사는 금번 10월 30일에 부산에서 개최될 ‘제10회 WCC 세계대회’의 대회장이다.
46. 우리 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은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공식적으로 WCC개최 반대를 표명하고 있으나, 합동교단 소속 사랑의교회 오목사는 한 번도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즉 반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지(支持) 내지 묵인(默認)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런 점은 오목사가 명색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목사이면서도 진리에 대한 원칙보다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기회주의적인 성향의 인물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합리적인 근거가 된다.
47. 한편 그는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도 선교(宣敎)란 명분으로 가깝게 지낸다. 중국 선교를 한다는 명분으로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정부의 종교성 당국자들과도 가까운 인맥을 형성했다. 물론 모든 것은 ‘돈의 힘’이다. 물론 이 돈은 모두 성도의 귀중한 헌금이다. 중국정부 고위관료들을 움직이는데 얼마나 많은 돈을 썼겠는가?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말한다. 종교성과 삼자교회(三自敎會)를 통해 중국선교를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난센스’(Nonsense)라고 말이다. 오목사가 중국선교를 한다지만 도리어 중국 정부는 역(逆)으로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의교회를 중국 종교성의 한국지부(支部)쯤으로 여긴다고 한다.
48. 그는 북한에도 여덟 번 이상 다녀 왔으며 아리랑 축전에도 세 번이나 참가한 적이 있었다. 북한을 위한 선교비란 명목으로 북한 당국자에게 오억이란 거금(巨金)을 건네 주기도 했다. 공산권을 대상으로 이러한 여러 가지 이벤트적이고 가시적(可視的)인 선교를 하는 사람이 탈북자의 북송 저지(沮止)나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의 구명(救命)을 위한 일에 관심이 있겠는가? 턱도 없는 소리다. 특히 그는 북한의 대남도발을 한번도 공식적으로 비난한 적이 없었으며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말이 없었다.
49. 오목사, 그는 왜 이렇게 이념적(理念的)으로 좌(左)와 우(右)를 넘나들며 종교적(宗敎的)으로도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경계를 넘나드는가? 오랜 관찰을 통한 나의 생각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의 관심사는 교회성장(敎會成長)이고 성공목회(成功牧會)다. 나아가 최종 목적은 세계경영(Global Ministry)이다. 사천억짜리 SGMC건축은 그 시작을 알리는 휘슬(whistle)이다.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압도하는 더 큰 규모의 교회를 꿈꾸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 잡을 수 있고 또 그 성장을 기반으로 세계경영의 꿈이 펼쳐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C. 교회 밖 단체
50. 셋째, ‘3 C 공식’의 세 번 째 이슈인 ‘교회 밖의 단체’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설교자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단체들을 지칭(指稱)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교회 밖 단체라 함은 일반적으로 선교단체나 기독교 NGO등의 파라처지(Para-Church)인데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왜냐하면 영향력의 크기는 물론 웬만한 교회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파라처치도 많기 때문이다.
51. 이 대목에서 필자는 얼마 전 사랑넷에 설교비평을 올렸던 imagodei님의 분석이 생각났다. 즉 그는 ‘교회 밖의 단체’라는 말에 사랑의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교회 밖의 성도들을 기억했다는 것인데 공감이 간다. 오목사가 이 표현을 할 때 그런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했을지 여부는 상관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가장 적합한 그룹의 사람들이 바로 방황하고 있는 사랑의교회 교인들이다. 그 한 부류는 사랑의교회 교적(敎籍)은 그대로 두었지만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들이 될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아직 몸은 사랑의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나 담임목사로부터 마음이 떠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성도들이 될 것이다.
52. 특히 전자의 경우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나 있는가? 교회가 그들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왜 그들이 홈리스(homeless) 교인이 되었단 말인가? 수 년 또는 수십 년 아니 평생 다녔던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서 ‘떠돌이 교인’의 신분으로 예배를 드리는 그들의 심정이 오죽 하겠는가. 정말 가슴 저리고 피눈물이 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속담이 현실이 된 교회의 슬픈 자화상(自畵像)이다. ‘새롭게 하시는 회복의 제단’이란 설교- 이들을 내팽개쳐 놓고 무엇을 새롭게 한다는 말인가? 지난 주일 설교는 이들에게는 블랙코미디(black comedy)에 가까운 희화적(戱畵的)인 설교로 들렸을 것이다.
53.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잘못된 목사의 맹목적 추종자들인 ‘양심에 화인(火印)맞은’ 교인들 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방황하는 성도들을 더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진리를 외면하면서 현재의 조직교회 안에서 기득권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교인들보다, 조직교회 밖에서 교회의 순결(純潔)을 위해 기도하며 싸우는 고통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더욱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넷째, 제발 속히 우리 사랑의교회에 저주가 물러가고 독이 빠지게 되기를 바란다.
54. 마지막으로 오목사의 설교 중에 결코 사소하게 들리지 않았던 한 가지를 말을 나누고 싶다. 오목사는 설교 끝 무렵에 “사랑의교회가 회복되어서 우리 앞에 있는 저주(詛呪)가 물러가고 독(毒)이 빠지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두어 차례 했다. 설교자는 오늘 설교 중 이 말에 마지막 방점(傍點)을 찍은 듯싶었다. 참으로 한심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진정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후반 그리고 이순(耳順)의 나이를 앞두고 아직도 이렇게 주제와 상황 파악을 못하는가?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 누구로부터 어떻게 말미암았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 터인데 아직도 남의 탓만 하고 있다.
55. 오목사의 가장 큰 죄과는 반복된 거짓말이다. 그는 4만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따라서 그는 영적지도자로서의 도덕성과 설교자로서의 신뢰를 잃었다. 이미 그의 영권(靈權)은 땅에 떨어졌고 그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은 그쳤다. 자고로 선현(先賢)들이 말하기를 무신불립(無信不立)이요 사필귀정(事必歸正) 이라고 했다. 얼마나 더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릴 것인가? 사랑의교회 위에 저주가 물러가고 독이 빠지기 위해서는 먼저 오목사 자신이 깨끗하게 물러가야 한다. 그가 물러가는 그 날, 비로소 사랑의교회의 치유와 회복이 시작될 것이다.
[끝맺는 말]
56. 이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설교자 오목사님은 지난 주일 설교도 실패했다. 아무리 설교를 잘 하려고 인위적(人爲的)으로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다. 속이 변하지 않은 외식적(外飾的)인 설교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솔직하지 않은 설교는 스스로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에 빠지게 한다. 치열한 내적 고뇌(苦惱)가 없는 설교는 사람의 영혼에 울림을 줄 수 없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설교는 귀는 잠시 즐겁게 해 줄지 모르나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회개가 없는 자의 설교는 다른 사람을 회개의 길로 초청할 수 없다.
57. 간절히 바라건대 ‘교회를 새롭게’ 하려면 담임목사 자신이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 오목사님이먼저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 드린 번제나 화목제는 반드시 피와 죽음을 동반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十字架)의 제물이 되어 주셨다고 해서 나에게 죽음이 면제된 것이 아니다. 나도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
58. ‘회복(回復)된 교회’을 염원하신다면 오목사님이 먼저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것은 곧 자기부정(自己否定)이다. 십자가의 길을 거친 사람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 ‘자발적 자숙’은 당신의 계획이었지만 ‘자발적 사임’은 하나님의 뜻이다. 더 이상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길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새로운 회복의 기회를 주실 것이다. 오목사님에게 주어진 현재의 자기 십자가는 사임(辭任)의 십자가다.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지시기 바란다. 그것이 바로 당신과 사랑의교회 모두의 ‘진정한 회복’을 위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조건임을 꼭 기억해 주기를 간절히 부탁 드린다.
장로님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까운 분께서 나에게 말하길 지금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것은 "망한 부잣집 아들이 깡통을 들고 비럭질을 하는것 같다"고 푸념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갈라파고스의 생물처럼 점점 악의세력에게 함몰되는 지금의 형편을 보면서 하나님께 구하면서 "어떻게 할까? 무엇을 할까?" 하고만 있습니다.
25번이하로...해 아래에서 그가 말하는 새시대란 없다. 현재에도 해 아래는 새것이 없으며 이미 있던것이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다시 하는 것 뿐... 그러므로...출애굽한 족속에게 신신당부하신 애굽땅(과거)의 풍속 뿐이 아니라 현재나 미래적인 모든 세상문화(풍속)이라는 것에 대한 주의와 경계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레18장, 20장, 롬12:29, ...)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며...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약4:4, 요일2:15~16)
그러므로 거짓이고 가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고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요8:44)
이 글 안에 예수님의 진리의 빛이 있습니다. 이제 모든것이 더욱 분명하게 보입니다. ㅇ목사님의 본질은 절대 변할수 없음을 거듭 느낍니다.... 모든 성도들이 깨닫고 거짓을 알아보고 그 무리에서 떠나 과감히 진리의 편에 서게되길 빕니다. 당회 장로님들의 눈에 비늘이 벗겨져 그동안 보지못했던 진실을 깨닫고 보게되는 성령님의 역사가 오늘 일어나게 되길 간절히 빕니다. 장로님! 진리의 등불을 계속 높이 들어 모든이들이 바른길로 모이게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선교사님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비평 글에서 우리 교회의 희망을 봅니다. 저는 듣기도싫고 보기도 싫어 예배 내내 머리 숙이고 성경말씀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무슨 ㅅㄹ하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제가 회피하고 도망한 것 같아 부끄럽군요 이번 주부터는 똑 바로 지켜 보면서 반면서생으로 모셔서 은헤받아야겠어요
설령 누가 설교 자료를 만들어 준다 하더라도 본인이 깊게 연구, 묵상하고 본인의 것으로 만들어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능력도 없고) 강단에 서니 깊이가 없는 단편적이고도 왜곡된 내용을 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을 공유해 주신 선교사님께 감사드리며 ㅇㅁ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사임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저도 단숨에 읽었습니다.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성도들을 홀리고 자기의 본 모습을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하는 자. 폭주하는 기관차를 몰고가는 그의 정체를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귀한 글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속고있는 성도들의 귀와 눈이 속히 열리게 하소서!
방금 수정본을 올렸습니다. 늦은 밤에 올리다 보니 눈이 침침해져서 오자 탈자가 발견되어 몇 자 고치는 김에 문장도 조금 더 다듬었습니다. 전체 내용은 변함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의 글에 귀한 댓글을 달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격려와 도전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랑의교회를 통해 반드시 당신의 귀한 뜻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종려나무님의 종교철학 내지는 기독교 신학적 분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댓글을 달려고하니 하도 잘 삭제하기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3C 공식은 어느 책에서 끌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를 숫자 다루듯 더하고 빼는 것은 너무 심한 단순화하고 생각됩니다. 3C는 너무 광범위 하기도 하지만 복합적인 뜻이 있기 때문에 개념이 분명치 않습니다. 문화만 하더라도 기독교문화와 세속적인 문화가 아주 다른데 물론 여기서는 기독교문화를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사실 기독교문화 라고 하면 community와 contents도 다 들어가는 것인데 3C를 가지고 더하고 빼는 것은 공식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말장난에 불과함.
첫댓글 장로님. 감사합니다. 설교비평의 지침이 되고도 아주 적절하고 핵심을 짚는 소상한 글, 유익했습니다.
심정을 담아 쓰시는 글에 저를 등장시켜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도 그간 설교비평 통합본을 준비중인데, 잘 정리해서 화답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신 장로님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선교사님의 글은 늘 저를 새롭게 깨어나게 합니다. 내 십자가의 한 부분으로 ㅇㅁㅅ가 사임하고 ㅅㄹㅇㄱㅎ가 애초의 그 거룩성을 회복하는데 피흘리는 참여를 하겠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ㅇㅁ이 빨리 사임하는 길만이 모두가 살 길 입니다
긴글이지만 너무도 좋은 글이라 꼼꼼히 정독했습니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많은분들이 읽었으면합니다
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형편이라.ㅠㅠ O땡땡의 지난설교를 듣지는 못했느나 선교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지럽던 제 마음이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계속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홈리스교인으로 그분 설교 클릭조차 하지 않지만 선교사님께서 잘 지적 해 주셔서 가슴이 시원합니다
장로님 공해로 오염된 불량식품을 먹다가 웰빙 무공해식품을 먹는 기분입니다 명쾌한 설명 감사합니다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 진리의 말씀과 본질에 부합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글 감사합니다. 교회(교인)가 바르게 깨어있지 않으면 거짓이나 잘못된 말씀 왜곡을 분별하거나 막기가 어려워 모두 잘못 인도당할 것입니다.
장로님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까운 분께서 나에게 말하길 지금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것은 "망한 부잣집 아들이 깡통을 들고 비럭질을 하는것 같다"고 푸념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갈라파고스의 생물처럼 점점 악의세력에게 함몰되는 지금의 형편을 보면서 하나님께 구하면서 "어떻게 할까? 무엇을 할까?" 하고만 있습니다.
통찰력 있는 귀한 글 감사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 위에 바로 서기를 기도합니다.
25번이하로...해 아래에서 그가 말하는 새시대란 없다. 현재에도 해 아래는 새것이 없으며 이미 있던것이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다시 하는 것 뿐...
그러므로...출애굽한 족속에게 신신당부하신 애굽땅(과거)의 풍속 뿐이 아니라 현재나 미래적인 모든 세상문화(풍속)이라는 것에 대한 주의와 경계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레18장, 20장, 롬12:29, ...)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며...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약4:4, 요일2:15~16)
그러므로 거짓이고 가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고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요8:44)
다시 말하지만...이땅에서 새시대란 결단코 없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갈 수있는...
새사람만 준비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의 영속에서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으라...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엡4:23~24, 고후5:17)
그동안 온갖 구약시대의 용어를 다 가져다가 쓰면서 성도들을 구약으로 몰고 가서 혼을 빼더니...이제는 새시대 새것 새성전에 새롭게 새로운...그만이 계획하는 미지의 세계로 몰아부친다.
신선하고 시원한 지적... 영의 눈이 열립니다. 장로님의 글은 정독을 하면서 몇번이고 다시 읽게 됩니다. 매번 강단을 오염시키는 무서운 사단의 영이..피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헌신과 깨우침으로 어서 빨리 물러나기를 거룩하신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교사님 감사합니다.
강건하셔서 홈리스 교인들에게 좋은 꼴을 계속 먹여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긴글을 단숨에 읽게 되다니...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공부를 하게 하시네요.
백배 공감하며 이글을 읽고도 깨닫지못하는 사람은 그안에 성령님이 없다는 증거일것입니다.
이 글 안에 예수님의 진리의 빛이 있습니다. 이제 모든것이 더욱 분명하게 보입니다. ㅇ목사님의 본질은 절대 변할수 없음을 거듭 느낍니다.... 모든 성도들이 깨닫고 거짓을 알아보고 그 무리에서 떠나 과감히 진리의 편에 서게되길 빕니다. 당회 장로님들의 눈에 비늘이 벗겨져 그동안 보지못했던 진실을 깨닫고 보게되는 성령님의 역사가 오늘 일어나게 되길 간절히 빕니다. 장로님! 진리의 등불을 계속 높이 들어 모든이들이 바른길로 모이게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존경하는 장로님, 감사합니다.
장로님의 가르침으로 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착하고 좋은 꼴을 먹고 다시 건강해져서 참교회의 모습으로 새로와지길 기도합니다.
단숨에 읽었습니다..우리 모두 선교사님과 같은 영적 통찰력을 갖게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선교사님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비평 글에서 우리 교회의 희망을 봅니다.
저는 듣기도싫고 보기도 싫어 예배 내내 머리 숙이고 성경말씀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무슨 ㅅㄹ하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제가 회피하고 도망한 것 같아 부끄럽군요
이번 주부터는 똑 바로 지켜 보면서 반면서생으로 모셔서 은헤받아야겠어요
이런 글에 지식이나 논리로 대응할 수 없으니까, 명예훼손 된다고 지워 버리려는 악동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다는 말이 있지요.
설령 누가 설교 자료를 만들어 준다 하더라도 본인이 깊게 연구, 묵상하고 본인의 것으로 만들어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능력도 없고) 강단에 서니 깊이가 없는 단편적이고도 왜곡된 내용을 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을 공유해 주신 선교사님께 감사드리며 ㅇㅁ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사임하길 바란다.
두 번 정독해도 쏙쏙 들어옵니다..감사합니다...셀프회개한 자에게 만일 그것이 진정이었다면 그 회개의 열매는 반드시 자진사임이 되어야 한다는 귀결이네요
선교사님의글 잘 읽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깨어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님의 해석이 주일 설교 보다 더 은혜롭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저도 단숨에 읽었습니다.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성도들을 홀리고 자기의 본 모습을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하는 자. 폭주하는 기관차를 몰고가는 그의 정체를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귀한 글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속고있는 성도들의 귀와 눈이 속히 열리게 하소서!
방금 수정본을 올렸습니다. 늦은 밤에 올리다 보니 눈이 침침해져서 오자 탈자가 발견되어 몇 자 고치는 김에 문장도 조금 더 다듬었습니다. 전체 내용은 변함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의 글에 귀한 댓글을 달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격려와 도전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랑의교회를 통해 반드시 당신의 귀한 뜻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놀라와라 주의 사랑, 종려나무님을 통해 ㅅㄹㅇㄱㅎ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종려나무선교사님.
예리하고 바른 해석 감사합니다.
종려나무님의 종교철학 내지는 기독교 신학적 분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댓글을 달려고하니 하도 잘 삭제하기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3C 공식은 어느 책에서 끌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를 숫자 다루듯 더하고 빼는 것은 너무 심한 단순화하고 생각됩니다. 3C는 너무 광범위 하기도 하지만 복합적인 뜻이 있기 때문에 개념이 분명치 않습니다. 문화만 하더라도 기독교문화와 세속적인 문화가 아주 다른데 물론 여기서는 기독교문화를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사실 기독교문화 라고 하면 community와 contents도 다 들어가는 것인데 3C를 가지고 더하고 빼는 것은 공식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말장난에 불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