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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평>
제목: 더 늦기 전에 하나님 편에 서기를
[글을 시작하며]
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두 가지 증거
A. 첫 번째 증거- 초자연적인 기적
B. 두 번째 증거 - 기도의 응답
다. 두 가지 적용
A. 첫 번째 적용- 막게다 굴에 숨은 다섯왕
B. 두 번째 적용- 길갈의 교훈
[글을 마치며]
[글을 시작하며]
1. 미안한 평가지만 여호수아 프로젝트 시리즈 설교는 총체적(總體的) 실패다. 동기와 설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무형적인 개념을 SGMC라는 유형적인 건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구약 사건의 영적 교훈을 신약적 상황에서 재해석 했어야 하는데, 구약 사건을 SGMC건축과 입당를 위해 인위적으로 적용하려다 보니 영적 의미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계속 무리수가 생기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 서두에 “흥미진진한 여호수아서 강해”라고 표현했지만, 가면 갈수록 여호수아 프로젝트의 허구성만 더욱 드러내어 주고 있다. 필자는 설교자가 이렇게 하자 많은 ‘여호수아서 시리즈 설교’를 모아 책으로 출간할까 걱정스럽다.
2. 왜 그렇게 교인들을 대상으로 SGMC의 홍보(弘報)에만 열을 올리는지, 가나안이 어떻고 약속의 땅이 어떻고 하며 SGMC를 불필요하게 미화시키는지,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 일을 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여기에 담임목사의 허물까지 설교로 덮으려고 하니 제대로 된 성경적 설교 한 편이 나오기 힘들다. 설교는 정직해야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 시대 상황 속에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성도들과 함께 고민하며 성경적 답(答)을 찾아가는 설교여야 한다. 목회자의 인격이 설교 속에 녹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OOO목사의 설교는 그 어느 하나도 충족이 되지 않는 설교다.
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오늘은 여호수아 10장1-27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제목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였다. 매우 훌륭한 제목이다. OOO목사를 추종하는 성도들이나 그를 반대하는 깨어있는 성도들이나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여호수아를 ‘하나님 편’에 서게 하는 것이 오랜 훈련을 통한 연단으로 가능했다면,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내 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4. “하나님 편에 서 있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러나 오늘 설교는 ‘하나님 편’이란 개념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생략하고 뛰어 넘어 버렸다. 사실 이 개념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대면한 사건의 기록에서 잘 나타나 있다.(수5:13-15) 여호수아가『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아니라(Neither)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고 답했다. 즉 그는 자기가 이스라엘의 편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적군 편도 아니고 여호와 편이라고 답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명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성결과 순종의 삶’을 의미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5. 이 본문은 ‘하나님의 편’이라는 개념을 정리하기에 적합한 본문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아마도 필자의 글에서 이미 다루어졌던 것이어서 자신의 설교 소재로 삼기에 신선한 맛이 없었던지 모른다. 대신 설교자는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에 있는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한 여호수아의 선언적 신앙고백을 인용했다.(수24:15) 그러나 그 본문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섬기겠다는 ‘결단’을 칭송하기에는 좋은 본문이지만 ‘하나님의 편’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는 적절한 분문이 아닌 것 같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에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라는 제목을 굳이 사용한 것을 보면 SGMC의 입당을 앞 둔 이 시점에 OOO목사 자신은 ‘하나님의 편’에 섰던 여호수아와 같고 자기를 따르는 교인들은 이스라엘과 같다는 생각의 구도를 한 번 더 심어줌으로써 지지세력의 응집력을 높이는 한편, 영적 정통성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용어선점의 의도로 보여진다.
7. 이 세상은 거대한 영적 전장(戰場)이라고 볼 수 있다. 가나안 전쟁은 그 예표요 그림자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도가 추구해야 할 존재적 목표는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해야 할 사명은 내 안팎에 있는 ‘가나안 정복’이다. 즉 내 안팎의 죄와 싸워 마귀의 일을 멸하는 한편(요일3:8),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8. 이와 같이 매 순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 즉 ‘하나님 편에 선다’란 말의 의미와 그 사명에 대한 기초적 설명은 생략한 채, 설교자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증거부터 설교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달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증거’라면, 목표 자체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증거가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무엇을 위한 증거인가? 매우 비논리적이다. 그것은 목적지도 모르고 차를 탄 사람이 그냥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물 맑고 산 좋은 곳’에 내린 다음 그 엉뚱한 곳이 자기의 목적지라고 생각하는 바보와도 같다.
나.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두 가지 증거
자 그러면 어쨌든 설교자 OOO목사가 말하는 증거들을 고찰해 보자. 그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두 가지 증거로, ‘초자연적인 기적’과 ‘기도응답’을 들었다.
A. 첫 번째 증거- 초자연적인 기적
9. 설교자는 아모리 사람들에게 가해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증거로 들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설명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실 초자연적인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한 방편이었으며, 말씀으로서의 계시가 부족했던 옛 시대에 필요했다. 그러나 신구약 66권 정경의 완성으로 특별계시가 최종 충족 완료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도 못하실 일은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법칙이라는 일반계시 속에서 이 우주만물을 운행하고 다스리고 계신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는 맑은 하늘에서 큰 우박이 내려 적군을 치고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게 하는 기적을 더 이상 행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영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10. 한편 초자연적인 기적을 ‘증거’로 삼아 설교할 때 따르는 위험성이 있다. 설교자의 의도와 달리 ‘성경’ 대신 기적과 표적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경향, 즉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와 신사도주의적 경향을 가진 교인들을 고무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이런 교인들은 적그리스도들에게 미혹되기 쉬운 ‘마음 밭’을 가지고 있기에 설교자는 이런 부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단도 기적을 행하며 성도들을 유인하기 때문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11. 오늘날 진정한 의미의 초자연적인 기적은 무엇인가? OOO목사도 설교 말미에 잠깐 언급했듯이 우리가 예수 믿고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진정한 기적은 소우주(小宇宙)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내면의 속 사람이 변한 것이다. 진정한 기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듯 믿고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죄와 불순종이란 단어로 상징되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진두지휘하시고 택하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에서 싸우고 계신다. 이 대목에서는 참으로 좋은 간증과 예화들이 많을 것인데, OOO목사는 ‘청진동 해장국 집 주인의 증언’ 같은 가벼운 예화로 설교의 수준을 격하시켜 버려 아쉬움을 남겼다.
12. 이런 예화 하나에도 볼 수 있듯이 OOO목사가 설교자로서 보여 주는 한계는, 그가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해결되지 않은 죄들로 인하여 성령님의 밝은 조명을 피하려는 몸짓이 느껴진다. 그러니 성도들은 불행하게도 가슴을 때리는 회개의 설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깊은 설교, 영혼을 뒤흔드는 영적 설교를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신행일치의 삶을 통한 모범을 볼 수 없으니 더욱 그런지 모른다.
13. 필자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증거로 ‘초자연적인 기적’ 같은 이차적인 현상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로 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기브온 사람들의 구조 요청을 접한 후 여호수아가 전쟁터로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수10:8) 하나님의 약속, 이것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14. 우리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요, 그 의미가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라면,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내가 그 목표에 도달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말씀이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매일 그리고 매 순간 ‘나에게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말씀에 내가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B. 두 번째 증거 - 기도의 응답
16. OOO목사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는 두 번째 증거가 기도의 응답이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4) 그렇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설교자는 기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할 필요가 있었다.
17. 그러나 설교자는 이 12-14절의 여호수아의 기도를 근거로, 기도 중에서도 특별히 ‘명령기도’를 강조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기도가 명령기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아뢰어”(Joshua said to the Lord: NIV)라고 표기되어 있다. “태양아 달아” 하는 명령법은 ‘아살의 책’이 서사시(敍事詩)였기에 기도의 문학적 표현 방법이 아니었을까? 분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아뢰었다는 것이니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명령기도라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8. 그러면 명령기도는 무엇인가? 오늘날 명령기도란 말은 축사(逐邪)기도 선포기도 치유기도 등을 포함한 기도로 특히 은사주의와 오순절 계통의 교회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 방식은 합동측 장로교단에서는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물론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도 꽤 많은 분들이 다른 집회에 다니며 소위 은사주의적 성령 사역에 대한 영적 갈증(?)을 해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 필자도 과거에 이런 류(類)의 명령기도를 종종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입장은 이 방식의 기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나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달리 말해, 이 명령기도를 “누가? 어떤 동기로?” 사용하느냐를 먼저 보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성령사역자란 사람들이 능력을 행한다는 미명하에, 이 명령기도를 오용 남용하며, 말씀을 왜곡하고 복음의 본질을 손상하며 비인격적인 언행을 하는 행태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20. 이 글에서는 명령기도에 관한 시비(是非)를 논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 OOO목사가 왜 이런 시점에 명령기도에 관한 설교를 했는가 하는 점이다. 명령기도 같이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않았고, 또 우리 교단에서는 환영 받지 않는 기도 방식을 공 예배 석상에서 설교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기도의 깊은 경지에 이르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 설교를 하는 목사인 자신은 분명히 기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갔다는 말일 것이니, 자신은 늘 명령기도를 사용하면서 목회하고 있다는 뜻인가?
21. 특히 치유명령기도의 예화에 등장한 리처드 포스트는 뉴에이지적 영성 신학자로 분류된 사람이다. 레노바레(Reonvare) 운동의 창시자요 관상기도(觀想祈禱)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요주의(要注意) 인물이다. 필자는 OOO목사에게 “도대체 당신의 신학적 정체성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은 사례가 이 외에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필자가 느끼는 OOO목사의 신학은 초교파 신학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적 원칙도 없고 체계적인 신학도 없다는 말이 된다. 오직 교회성장을 위한 번영신학이 그 분의 신학적 배경이라고 할까?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기업윤리도 없이 돈 되는 일은 무엇이든 다하는 문어발 기업적 사고방식인 것 같다.
22. 다양한 신앙적 수준이 모인 주일예배에서는 정통적 교리에 입각한 보편적 진리로 성도들을 먹여야 한다. 그래야 부작용이 없다. 그렇게 해도 얼마든지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오늘 본문으로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주제로 하여, 죄악이 관영(貫盈) 한 땅 가나안의 아모리 사람과의 전쟁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 싸워주셨듯이, 영적 전쟁에서 죄와 싸우는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어야 했다. 아울러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잠시 짚어주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을 것이다.
23. 설교자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을 때라는 확신이 생기면 명령형 기도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부분도 참 막연한 표현이 아닌가? 애매하고 막연하게 설명하면 교인들이 각자 주관적으로 적용하게 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리처드 포스트의 경우 아들의 병이 나았기에 그것을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낫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해야 하는가?
24. OOO목사와 가깝다는 손ㅇ식 목사란 분이 몇 달 전 사랑의교회 강단에서 설교 중 선포기도에 관한 예화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는 “자기 딸이 28살을 넘기지 않도록 선포기도를 했더니 훌륭한 신랑을 만나 시집갔다”고 자랑하면서, “딸이 28살 이전에 시집 못 가는 것은 모두 선포기도를 하지 않은 아빠의 책임이다”라고 했다. 과년한 딸을 둔 필자로서도 듣기에 참 기가 막힌 설교였는데 그가 이것을 진담으로 했다면 그는 사이비 목사임에 틀림없고, 만일 농담으로 했다면 귀한 예배 중에 성도들을 농락한 셈이 된다. 이와 같이, 기도에 관한 설교를 들어보면 설교자의 신학적 건강성과 영성의 깊이를 알 수 있다.
25. 설교자는 마땅히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높여 주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축(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무조건 많이 오래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새벽을 깨우는 것으로 유명한 한국교회가 기도를 적게 해서 이렇게 부패하고 세속화되어 가는가? 새벽마다 설교하는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기도를 적게 해서 영적 지도력을 잃었는가? 아니다. 바른 기도를 하지 않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설교자들은 ‘성경적인 기도’에 대한 바른 설교를 해야 하고, 어떻게 하는 기도가 바른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며 가르쳐야 한다.
26. 비단 명령기도뿐만 아니라 일반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도했는데 내가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한 증거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물론 우리는 일차적으로 응답 받지 못할 장애물이 있었는지 영적으로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겠지만, 때로는 기도의 응답은 더디 오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 것과 정반대의 것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도응답이라고 믿어야 한다. 어쨌든 오늘 OOO목사의 설교는 기도응답을 단(單)세포적으로 이해하게 한 점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는 설교였다.
27. 그 나마 다행이 설교자도 마지막에 인용했단 말씀처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대로’ 하는 기도를 들으신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기도였기 때문이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그랬다. 성령님도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8:27)
28.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또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신다. 신실하신 하나님,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아끼시겠는가? 바른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게 한다.
29. 그래서 우리는 기도했으면 응답 받은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기도했으면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다. 기도 응답은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천인천색으로 주어진다. 기도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산수공식처럼 기도응답의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모름지기 '기도란 결코 도깨비 방망이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축복을 받기 위한 주문(呪文)이 아님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기도응답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요 결과물이다.
다. 두 가지 적용
이제 여호수아서10장16-27절의 본문으로 두 가지 적용에 들어간다.
A. 첫 번째 적용 - 막게다 굴에 숨은 다섯 왕
30. 첫째로 막게다 굴에 숨은 다섯 왕을 찾아내어 완전 처단한 사건의 적용이다. 설교자는 우리 속에서 사악한 생각과 행동의 동굴 속에 숨어있는 사악한 영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밟고 정리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 죄를 완전 처단하는 은혜가 있기를 빈다고 했다.
31. 지당한 적용이다. 그런데 적용은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 우리 속의 죄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말로만 하는 적용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지금 우선적인 문제부터 찾아보자. 사랑의교회 가운데 있는 이 오랜 분쟁과 아픔의 원인은 무엇인가? 누구로부터 어떻게 야기되었는가? 문제의 진앙지(震央地)는 바로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자가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 본문 말씀을 적용하면 교회의 평화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32. 필자는 처단해야 할 다섯 왕(王)을 청산해야 할 다섯 가지 죄목(罪目)으로 규정하고 아래와 같이 풀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계명의 권위로 고발하는 이 다섯 가지 죄목을 완전 청산하지 않고는 사랑의교회의 회복과 평화는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33.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죄를 고발한다. 잘못된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이익의 도구로 삼았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여호수아 설교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성도들을 미혹시킨 죄를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임할 것을 맹세해 놓고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34. 둘째는 살인의 죄를 고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살인은 두 가지 종류의 ‘영적 살인’이다. 하나는 믿음이 어린 교인들이 목사의 부도덕과 비인격적 언행으로 인해 실족해 예수 믿는 믿음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다른 하나는 거짓 복음과 가르침으로 많은 영혼들이 담임목사의 추종자가 되어 선악을 분별할 줄 모르고 심지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까지 짓게 되어 지옥행 열차를 타고 있으니 그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35. 셋째는 도적질의 죄를 고발한다. 논문을 대필하였든 표절하였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두 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니 도적질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포체스트룸 대학이 권고했던 대로 표절로 피해를 입혔던 해당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37. 넷째 거짓 증거의 죄를 고발한다. 권영준 장로가 자신을 협박했다고 거짓 증거하였으나 아직 거기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회개를 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책임을 지고 이 죄를 해결해야 한다. 그 외에도 자신의 입으로 남에게 죄를 덮어 씌우고 바른 지적을 했던 사람들을 마귀의 세력이라고 했으니 그 모든 분들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38. 다섯째 탐심의 죄를 고발한다. 교회의 재산을 탐내었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곡간인 교회의 재정을 사적으로 사용했거나 더 절약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사치하고 낭비했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거짓을 남발하여 건축헌금을 끌어 모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SGMC를 자신의 욕망을 따라 건축한 죄를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39. 한편 간과하면 안 될 사실이 있다. 성경을 보면 가나안 남부 동맹국들의 다섯 왕은 처단했으나 그 다섯 나라 중 세 나라(라기스, 에글론, 헤브론)만 멸했고, 다른 두 나라(예루살렘, 야르뭇)는 공략하지 않고 철수함으로써 뒷날의 화근(禍根)으로 남기게 되었다. 즉 여기서 우리는 왕만 처단한다고 가나안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는다. 죄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개혁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이야기다. 따라서 OOO목사의 회개와 책임(사임)이 있어야겠지만, 그를 추종하고 옹호하는 세력들도 동일한 이유로 회개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멍에를 같이 멜 수는 없는 것이다.
B. 두 번째 적용- 길갈의 교훈
40. 설교자가 말한 두 번째 적용은 길갈에 관한 말씀이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수 10:15) 설교자는 길갈이 이스라엘을 위한 회복의 장소요 영적 캠프라고 했다. 따라서 마치 지난 30년 동안 강남예배당이 우리에게 길갈의 장소가 되게 해 주셨듯이 앞으로는 서초예배당이 길갈의 장소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서초예배당 즉 SGMC는 태생적인 불법이 있어 결코 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길갈의 장소가 될 수 없다. 도리어 다섯 왕을 장사지낸 막게다의 굴이 될 까 염려된다. 길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41. 첫째, 길갈은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건너자마자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세운 곳이다. 그 목적은 장차 오고 올 후손들에게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손의 능하심을 알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기 위한 기념비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필자가 믿기는 SGMC는 한국교회를 부끄럽게 하는 세속적 대형교회의 상징물이며 후손들에게 반면교사 이상의 유익을 줄 수는 없다. 그곳은 자녀들을 세속화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다.
42. 둘째,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하여 40년 만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한 곳이다.
할례 후 하나님은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란 뜻으로 길갈이란 이름을 주셨다.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 즉 죄를 회개하고 삶 속에서 입증하는 것이다. 과연 OOO목사와 그 추종자들이 지금이라도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있을까? 도리어 악한 전략은 더 공교해지고, 반대하는 성도들을 욕하고 핍박하는 정도는 더 세어지고 있지 않은가?
43. 셋째, 길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처음으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킨 곳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기억하는 이 절기는 오늘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기억하는 ‘성찬식’으로 그 의미가 새롭게 승화(昇華)되었다. 그것은 진정한 구원 즉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주님과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빌립보서 2장1-8절 말씀처럼 구원 받은 백성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즉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과연SGMC란 화려하고 비싸고 큰 건물이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죽음과 어울리는 건물일까?
44. 넷째, 길갈은 남북 가나안을 가르는 중간지역에 있었기에 전략적 요충(要衝)이었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위한 이스라엘 군대의 본영(本營)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서 전쟁을 치렀든지 전쟁을 마친 후 돌아 와 쉴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길갈은 이스라엘의 쉼터였고 재충전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성도가 쉴 수 있는 공간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교회냐가 문제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 교회는 성령의 위로와 새롭게 하심이 있고, 사람이 주인이 된 교회는 탐욕과 갈등과 분쟁으로 인해 성령이 떠나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위로와 영적 능력이 사라지게 된다.
[글을 마치며]
45. 설교자 OOO목사는 설교 초두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내 평생의 간절한 관심사요 기도제목”이라고 말했다. 거듭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진실된 고백이 아닌 것 같다. 거짓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마귀는 거짓을 제 것인 줄 알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함(Holiness)이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하나님 편에 서려면 거룩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거룩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거짓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 동안 고민해야 하고 기도해야 할 만큼 거창한 주제가 아니다. 문제는 실천이다.
46. OOO목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지금 귀하를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양심적인 성도들이 많다. 그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금 통과하고 있는 줄 아는가? 필설(筆舌)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OOO목사께서는 영적 지도자요 공인으로서 자기가 그 동안 범했고 지금도 범하고 있는 많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속히 물러나면 된다. 그것이 오늘 성도들과 함께 복창한 말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따르겠노라』(수24:15)고 한 여호수아의 고백에 부합되는 신앙적 결단일 것이다.
47. 영적 지도자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거짓 없는 삶을 살았으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반면교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진실된 지도자를 원한다. 미련을 버리고 깨끗하게 물러 나 주시기를 바란다. 당신이 넘겨 주는 바통을 이어 받을 주자(走者)는 많이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 교회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지나친 책임의식’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
48. 설교자 OOO목사께 간절히 부탁 드린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 모두 패자(敗者)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거꾸로 만약 결단의 시간을 당기면 당길수록 우리 모두가 승자(勝者)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우리의 남은 인생은 길지 않다. 귀하가 잘 쓰는 슬로건이 있지 않은가? “한 번뿐인 인생 곧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만 영원하리라” 제발 우리 모두 삶을 허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첫댓글 2003년 9월 7일 이후 약 360회의 주일 설교에서, 70번 이상의 창세기 본문, 그리고 근자의 여호수아시리즈는, 모든 상황을 본인이 초기부터 마음에 둔 건축물로 귀결 지으려는 목적 행위로 보입니다. 상납 받은 내용으로 설교하되, 큰 방향은 본인이 취사선택하고 지시했겠지요. 족장들과 여호수아의 권위에 오버랩시키는 기법과 알레고리風의 사자성어(그래서 오류가 다분해도 대충 넘어갈 수 있는)가 주요한 특징이라 보입니다. 그가 행하는 설교 특히 이즈음의 부분 결론은 듣지 않고도 쉽게 맞출 수 있겠습니다. 거대한 내 건축물이 영적 이상향이라는 설득과 주장이지요.. 진정 목자의 심정으로 쓰시는 선교사님의 말씀을 귀하게 읽습니다.
댓글을 본인이 달지 못하니까 가족까지 동원해서라도 달라고 했는데, 저 양반들 큰일 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저들의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감사합니다..선교사님
선교사님의 충정어린 이 말씀을 ㅇㅁㅅ가 꼭 들어야 할텐데, 그리고 결단해야 모두가 사는 유일한 길인데. "알란가 몰라. "
ㅇㅁ쪽의 눈 감은 성도들께서도 이 글 정독하시고 잠에서 깨어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선교사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글은 오목사가 꼭 읽어야 할 내용인데 정작본인은 안볼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안수집사회 회보도 오목사는 안본다고 하는 것 같던데 ...
신학을 하지 않은 저와 같은 집사들은 설교의 숨은 의도와 오류들을 잡아내기 어려운데, 이렇게 분별을 주는 글 감사합니다. 에덴의 범죄가 아주 작은 거짓말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말씀의 진의를 성경의 조명으로 밝히 드러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정말 이런 수고까지 해야 할 지경으로 몰아간 담임목사님이 원망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이때까지 종려나무님처럼 이렇게 제대로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잘 정리된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귀한 글입니다.
위장된 오류의 설교를 예로하여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데 소중한 교훈이되고 공부가 되게 인도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선교사님! 감사합니다. 피폐해지고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생수가 되는 시원한 글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주일 설교에서는 도무지 은혜가 안되는데..마음이 편해지며 불쌍한 ㅇ ㅁ ㅅ 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훌륭한 글들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5,8번: '하나님의 편, 이라는 개념정리나 언급없이 '하나님의 편에 선다.'라는 말의 의미와 그 기초적 설명은 생략한 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가지 증거부터 설교하기 시작했다. ㅡ(그렇습니다!) 신구약66권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 앎으로써 내 꿈과 소망이 그분의 것으로 완전히 바뀌어지는 것의 전제와 점검이 필요한 것이며 사람들끼리나 쓸 수있는 이편, 저편, 내편, 네편...(편)이라는 용어를...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자인 인간됨을 성찰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감히 스스로 "내가 하나님 편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말일 뿐더러, 그것은 하나님께서만이 아는 일인 것이며
언젠가도 말했듯이...주가 내안에 내안에 주의 말씀으로 (큰 동그라미의 하나님께 나의 작은 동그라미가 빠져만 있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기도의 방식이나 응답, 증거...이런 것은 사실 아무런 소용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13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ㅡ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의 꿈과 소망으로 가득하고 주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믿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때에 눈앞에 증거로 실현되니까요.
그렇게 주님과 살기만 하면...실상은 무얼 이루거나 바라는 기도라는 것도 그다지 필요할 것도 없는 것이며, 그냥 주님의 마음과 눈이 되어서 내가 할 일만 보이고... 그냥 주님과 이런저런 얘기하면서...두런두런 사는 것으로 압니다.
선교사님... 모호하고 선동적인 표현이 대부분인 주일 설교를 분명하게 쉽고도 깊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 이제 그 본문이 좀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교사님 같은 분들로 인하여 ㅇㅈㅎ씨에게 설교 준비가 무척 힘들게 되겠고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아주 큰 도전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사랑넷의 설교비평으로 당신의 날들을 단축시키리라 기대됩니다. 죄송하고 염치없지만 계속 깊이 있는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저도 부탁 드립니다. 박성철 목사님의 글을 통해 귀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는데 박믁사님도 이제는 더 이상 글을 올리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종려나무 선교사님은 끝까지 계속 귀한 글을 올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까지 종려나무 선교사님이 올린 거의 모든 글을 제 폰에 저징해 두었습니다.
한번씩 시간 날 때마다 다시 읽어보는데 하나님께서 선교사님에게 뜩별한 은사를 주신 것 같습니다.
다음에 교회가 회복되고 나면ㅈ이벗 사건에 대한 백서를 만들거라고 생각되는데 그 백서에는 선교사님의 글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목의 설교를 들으면 항상 가슴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선교사님의 설교비평을 읽고 속이 확 뚤리는 동치미같은 글 감사드립니다. 항상 선교사님 부부 영육간 강건하시고 혹 귀국하시면 마당기도회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박석우집사 드림.
네.. 박집사님, 마당기도회를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설교에 대한 바른 비평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비평 감사합니다.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말씀을 오목사가 기억한다면 두려움이 앞서겠지요,그런데 화인 양심이니 거룩한 두려움은 없겠지요.종려나무님 좀더 신랄하게 비평해 주세요.보는 사람들이 움찔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