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 사람이 일찌기 말하길 "도적은 상인과 같은 사람이다. 시장이 서면 도적은 상인으로 바뀌고 시장이 금지되면 상인은 도적으로 바뀐다."고 하였다. 포르투갈인이 처음 왔을 때 이전 "왜구"들이 그들과 상거래를 하며 연계를 맺었다. 당시 기록은 "해상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내지의 간사스러운 상인 왕직, 서해등이 중국의 재물을 빼돌려서 번객(番客)과 교역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번객이란 포르투갈 상인을 의미한다.
1542년 세 명의 포르투갈인이 중국배를 타고 일본 규슈의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에 상륙하였고 그 배에는 유생 왕오봉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해적두목 왕직이었다. 왕직은 히라도에 당나라식의 가옥을 짓고 살았는데 이때부터 중국 상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크게 신망을 얻었는데 일본인들이 그를 중개상인으로 추대하였다. 그러자 그는 일본사회의 하층에서 수탈당하고 압박받는 빈궁자 3,000명을 끌어들여 히라도에서 자창 휘왕이 되었으며 중국, 동남연해로 돌아와서 밀무역을 하였다.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직의 무리 3,000명이 잠항(절강성 정해현 서북), 주산(절강성 정해현)으로 도망쳐 의거하더니 마침내 절강 동부, 강소 북부로 돌아다니며 겁탈을 자행하여 복건, 광동에도 만연하게 되었다.
후에 가정 36년(1557년) 왕직은 호종현의 계략에 말려들어 체포되었지만 잔당은 절강, 복건, 광동, 연해에서 계속되는 밀무역을 하였다. 포르투갈인 역시 그들이 마카오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른바 "마카오의 오랑캐 포르투갈인들은 일본 종놈(倭奴)을 받아들여 하수인으로 삼고, 유랑민을 받아들여 심복으로 삼았다."고 하니 양자의 관계가 친밀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 사람 사조제는 "광동의 해주, 조주, 경주, 애주에서 기회를 노리는 중개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익을 도모하여 바라보기를 육지처럼 여기며 일본 보기를 이웃집처럼 여겨 왕래하며 교역하는데 피차간에 끊임이 없다." 라고 쓰고 있다.
첫댓글 그럼, 각국의 상선, 영국사략해적까지 공격했던 일본왜구들을 포루투칼이든가 네덜란드가 정책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