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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변호사는 차례를 무시하고 내플류도프를 만나 주었다. 그는 곧 자기가 조사한 메니쇼프
모자 사건에 대해서 말을 꺼냈고, 근거 없는 기소에 분개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이 방화는 보험금이 탐나서 집
주인이 자기 손으로 한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자의 범죄도 전혀 증명되어 있
지 않습니다. 증거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예심판사의 지나친 특별 배려와, 검사보의
무성의에서 온 것입니다. 이 사건이 만일 지방 재판소가 아니고 여기서 심리된다면, 나는
승소를 보증하겠으며, 보수 따윈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건, 황제에게 낼
페도샤 비류코바의 청원서는 이미 작성해 놓았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 가게 되면, 가지고 가
서 직접 제출하고 탄원하십시오. 안 그러면 청원 위원회에 조회하게 되고 또 청원 위원회에
서는 한시라도 빨리 손뗄 수 있도록 제멋대로 해답을 할 것이 뻔합니다. 즉 각하되어 한시
라도 여태까지의 고생이 허사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력한 분에게 부탁을 드려
보도록 하세요."
"그렇다면 황제께 청원하란 말씀인가요?"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변호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제일 마지막, 즉 황제가 심의하는 최종심에서입니다. 지금은 그보다 낮은, 말하자
면 청원 위원회 서기나 주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위뢰하신 건 다 됐지요?"
"그리고 또 하나, 분리파 신도들이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분리파 신도들의
편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면서 말했다. "이 사람들이 써온 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사건입
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감옥의 모든 불평이 흘러내리는 깔때기나 병 모가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신 모양입니다."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많은데요. 그러시다간 감당해 내기 힘
들 겁니다."
"아니, 이것은 놀란 만한 사건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사건의 진상을 대충 설명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마을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한 농부가 복음서기를 읽기 위
해 동료 농부들과 모였다. 그러자 경찰이 와서 이를 해산시켜 버렸다.
농부들은 다음 일요일
에 다시 모였다. 그러자 마을의 경찰이 불러가더니 고소장이 작성되어, 농부들은 전원 재판
에 걸리게 되었다. 예심 판사가 심문을 하고, 검사보가 기소장을 작성하고, 재판관이 이 기
소 사실을 인정하여 재판에 붙여졌다. 검사보는 유죄를 구형했다. 테이블 위에는 증거물로서
복음서가 놓여 있었고, 결국 그들은 유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네
플류도프가 말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건의 어느 점이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사건 전부지요. 하기야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경찰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기소장을 작
성하는 검사보는 교양이 있는 인간 아닙니까?"
"그러나 바로 거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검사나 재판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무슨 새로운 자유주의적인 인물인 양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그런 인물
이었긴 했습니다만, 지금은 전연 다릅니다. 그들은 다만 월급을 받고 있는 이상, 더 많은 월
급을 받았으면 하고 원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의 주장도 이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입
니다. 그래서 그들은 닥치는 대로 기소하고, 재판하고, 유죄로 판결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단지 복음서를 읽었다 해서 사람들을 유형에 처하는 법률
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네, 복음서를 읽어 줄 때, 규정되어 있는 이외의 해석을 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교회의
해석을 비난했다는 것만 입증되면 유형정도가 아니라 시베리아 징역도 받게 됩니다. 대중
앞에서 정교의 교리를 비판한 자는 제 196조에 의거해서 거주 유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아니, 그렇습니다. 나는 항상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마
음 없이는 당신네들을 대할 수가 없다고요. 왜냐하면 나나 당신이나, 우리들 모두 감옥에 들
어가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자비에 의한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공민권을 박탈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형을 보내는 것쯤은 그들로서는 식은죽 먹기입니
다."하고 변호사는 말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식으로 법을 적용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음이 검사나 판사의 재량
에 달렸다면 무엇 때문에 재판 같은 것을 합니까?"
변호사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거 무슨 그런 질문을 다 하십니까! 공작님, 바로 그것이 철학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크게 논의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럼 토요일에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학자, 작가,
예술가 들이 모이게 되어 있으니 그 때 '일반적인 문제"를 논의하시지요." 변호사는 '일반적
인 문제'라고 하는 말에 힘주어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집사람하고는 인사하셧
겠지요? 꼭 와 주십시오."
"네, 되도록..." 내플류도프는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되도록 토요일 밤에
변호사 집에 모이는 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의 모임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재판관들이 자기들의 뜻대로 법률을 적용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면 재판따윈 무의미할
것이라고 네플류도프가 말했을 때, 변호사 및 그 동료들이 만사에 있어 네플류도프 자신과
얼마나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센보크와 같은 옛 친구들
과도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었지만, 그보다도 변호사와 그의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는 한층
더 먼 것이라고 느꼈다.
12
감옥까지는 멀기도 했거니와 시간도 이미 늦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마차를 집어타고
감옥으로 향했다. 어느 거리에 이르자, 영리하고 선량해 보이는 중년의 마부가 네플류도프를
돌아보고 건축중인 커다란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십시오, 굉장한 공사가 아닙니까?" 마치 자기가 어느 정도 건축 공사에 책임이 있다는
듯이, 또 그것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물었다.
사실 그 건물은 규모도 크고 양식도 무엇인가 기발하고 복잡했다. 꺽쇠로 단단히 잡아맨
굵다란 통나무 비계가 높이 솟은 건축중인 건물 주위를 빙 둘러쌌고, 얇은 판자 울타리가
건물과 한길 사이에 가로막혀 있었다. 비계 위에는 석회가루를 뒤집어쓴 인부들이 개미떼처
럼 오고갔다. 돌을 쌓는 사람도 있었고, 돌의 각을 뜨는 사람도 있었다. 또 무거운 나무통과
양동이를 위로 나르는 인부가 있는가 하면, 빈 나무통과 양동이를 가지고 내려오는 인부도
있었다.
건축기사인 듯싶은 살이 찌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는, 비계 한 옆에 선 채, 위를 가리
키면서 공손하게 듣고 있는 블라디미르 태생의 청부업자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건축
기사와 청부업자 옆의 문으로 빈 마차와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가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
었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일을 시키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한결같이 그렇게 하고 있
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러나 바로 이 시각에 그들의 집에서는 애를
밴 아낙네들이 힘에 겨운 일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면, 차양도 없는 모자를 뒤집어쓴 어린
것들 이 아사를 눈앞에 두고 가는 다리를 내밀며 늙은이같이 히죽거리고 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어느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 자기들에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이 궁전과도 같은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하고 네플류도프는 그 건물을 바라
보면서 탄식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건물이군!" 하고 그는 자기의 생각을 소리내어 뇌까렸다.
"왜 어처구니없는 건물이라고 하십니까?" 마부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고마운 일
이지요. 덕택에 모두들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것이 소용없단 말이오."
"소용없는 일이 아닙니다, 짓고 있는 것이니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먹
고 살아 가는걸요."하고 마부는 반박했다.
네플류도프는 입을 다물었다. 차바퀴 소리가 요란스러워서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감옥
가까이에 왔을 때, 마차가 자갈길에서 포석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얘기하기가 좋아지자 마
부는 다시 네플류도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지 모르겠어요. 무서울 지경입니
다." 마부는 마부석에서 몸을 돌려, 앞에서 걸어오는 톱과 도끼를 들고, 반코트를 입고 배낭
을 짊어진, 시골에서 오는 품팔이 농민들의 떼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보다는 많은가요?"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많고 말고요! 요즘은 어디를 가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야단입니다. 고용주는 사람을
무슨 나무토막처럼 내동댕이치는 판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천집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사람들이 늘었으니까 그렇지요. 달리 갈 곳도 없고요."
"늘었다고 무슨 상관이 있소? 왜 시골에 꽉 붙어 살지 않느냔 말이오."
"시골에 있다고 해서 할 일이 있겠어요? 땅이 있어야지요."
네플류도프는 상처를 건드렸을 때와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아픈 곳이란 일부러 거기
를 건드리기만 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실상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은 아픈 곳을 다쳤을
때만 아픔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도대체 어디나 다 똑같단 말인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마부를 보고, 당신의 마을
에 토지가 얼마나 있으며, 당신 자신은 얼마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당신은
도시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마을선 한 사람 앞에 1정보의 토지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3인분을 가지고 있습니
다." 마부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저의 집에는 아버지와 동생이 있죠. 또 다른 동생 하나는
군대에 나가 잇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동생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농사라고 별로 할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동생도 모스크바로 나오고 싶어합니다."
"토지를 빌릴 수는 없나요?"
"요새 토지를 어디서 빌립니까? 그전의 지주들은 토지를 다 없애 버리고, 지금은 상인들
손으로 그것들이 모두 넘어가 버렸죠. 상인들은 절대로 토지를 빌려 주지 않고, 자기들이 직
접 농사를 짓습니다요. 우리 마을 땅은 프랑스 사람이 소유하고 있지요. 전 지주한테서 샀습
니다만, 절대로 빌려주질 않습니다. 상대도 안 해요."
"그 프랑스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오?"
"뒤파르라는 사람입니다만, 어쩌면 나리께서도 아실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큰 극장의 배우
들 가발을 만들어 팔았는데, 장사가 잘되어서 톡톡히 한 몫을 벌었지요. 그래서 전 여지주의
토지를 몽땅 사버렸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우리들의 주인으로 우리들을 자기 마음
대로 부리고 있습니다만, 다행히 그 사람은 마음이 좋은데, 그 여편네가 러시아 출신으로 성
미가 못돼 먹어서 야단입니다. 농민들을 어찌나 못살게 구는지 큰 두통거리입니다. 자, 이제
감옥에 다 왔습니다. 어디에 댈까요? 현관 쪽에 댈까요?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13
오늘은 마슬로바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과, 그녀의 마음속에서나 옥중에
있는 다른 죄수들 전체 속에 존재하는 것같이 느껴지는 그 어떤 비밀을 생각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마음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네플류도프는 정문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자 곧
나온 간수에게 마슬로바에 관해서 물었다.
간수는 잠깐 조사해 봤더니 마슬로바는 지금 병
원에 있다고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병원으로 갔다. 병원의 수위는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노인으로서 곧 그를 안으로 들여 보내고, 누구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은 다음 소아과 병실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온몸에 소독약 냄새가 밴 젊은 의사가 복도에 있는 네플류도프에게 오면서 무슨 일로 왔
느냐고 딱딱하게 물었다. 이 의사는 죄수들에게 관대하게 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간수들
이나 심지어 병원장하고도 자주 불쾌한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네플류도프가
무슨 규정에 어긋난 부탁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또 누구를 위해서도 예외적인 일
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짐짓 화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여긴 여자라곤 없습니다. 소아과 병실이니까요." 의사가 말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감옥에서 넘어와 간호사 겸 잡역부로 일하는 여자가 있을 텐데
요."
"네, 그런 여자가 둘 있는데, 누굴 찾으시는데요?"
"나는 그 중의 마슬로바라는 여자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잠깐 만나고 싶습니다만, 나는 그 여자의 사건에 대해서 상소하기 위해 지금 페테르부르
크로 갈 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 전해 주고 싶은데요. 사진입니다." 하고 네플류도프는
호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 것쯤은." 의사는 부드러운 태도로 이렇게 말하고,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노파에게 간호사로 있는 여죄수 마슬로바를 불러오라고 했다.
"여기 앉으시든지, 그렇잖으면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감사합니다." 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의사의
태도를 보고, 병원에서 마슬로바의 평판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전의 그 여자의 환경을 생각하면 지금은 일을 잘하고 있는 편입니
다." 하고 의사는 말했다.
"저기 오는군요."
한쪽 방문으로 늙은 간호사가 들어오고, 뒤따라 줄무늬 옷 위에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마
슬로바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에는 스카프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얼굴
을 붉히면서 망설이듯 발을 멈칫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내리깔고는 양탄자가 깔린 복
도를 재빠르게 걸어 네플류도프에게 왔다.
그녀는 그의 옆에 와서도 처음에는 선뜻 손을 내
밀지 않다가 잠시 후 손을 내밀더니 한층 더 얼굴을 붉혔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감정을
폭발했던 것을 사과한 이후 통 만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심정의 마슬로
바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서려 있었다.
수줍으면서도 무언가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러면서도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듯
한 데가 있었다. 그는 마슬로바에게 의사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하고, 페테르부르크로 가
겠노라고 말한 다음, 파노보에서 가져온 사진이 들어 있는 봉투를 내주었다.
"이것은 파노브에서 찾은 옛날 사진인데, 기뻐할 것 같아서... 받아두도록 해요."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까만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고는 그 흘기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바
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왜 이런 것을 주느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봉투를 받아 에이프런 속에 집어넣었다.
"거기서 당신의 이모님을 만났었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러셨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여긴 괜찮소?"
"괜찮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고생스럽지 않소?"
"네, 별로. 아직 익숙하지는 못하지만요."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소. 아무래도 거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거기라니, 어디 말씀이세요?"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했다.
"저기 감옥 말이오." 네플류도프는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
"어떤 점이 좋단 말씀이세요?" 그녀는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거기 있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거기 있는 사람들 같
은 사람들이 있을라고."
"거기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메니쇼프 모자의 사건도 힘써 보았는데, 아마 석방될 것 같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
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참 보기 드문 좋은 할머니예요."
그녀는 항상 그 노파의 말ㅇ르 할 때마다 하는 칭찬을 되풀이하면서 살며시 미소를 띠었
다.
"나는 오늘부터 페레르부르크로 출발하오. 당신 문제는 곧 재심이 있겠지만, 제발 판결이
취소되었으면 좋겠소."
"취소되든 말든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말했다.
"이제는 마찬가지라니 어째서?"
"그건..." 그녀는 무엇인가 물어 보려는 듯 그를 힐끔 바라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그 말과 그 눈초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아직도 자기의
결심대로 실행을 할 것이지, 아니면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여 그의 결심을 변경시켰는지 알
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왜 당신이 마찬가지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무죄가 되건
유죄가 되건 나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요. 그 어느 쪽이 되든 내가 말한 대로 할 각오요."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까만 사팔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옆으로 올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얼굴 가득히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말을 했다.
"그런 말씀은 하셔도 소용이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 그렇소."
"그 이야기는 이제 끝난 것이니까 새삼스럽게 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숨기면서 말했다.
병실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부르고 있나봐요." 그녀는 불안스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자, 그럼." 그는 말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내민 손을 짐짓 못 본 체하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표정을 감추려 애
쓰면서 빠른 걸음으로 양탄자가 깔린 복도 위를 사뿐사뿐 걸어갔다.
'도대체 그녀의 마음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를 떠보려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인
가?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없거나, 아니면 하기 싫은 것일까? 기분은 좀 풀
어진 것일까? 그렇잖으면 더욱 원망하고 있단 말인가?' 네플류도프는 자문해 보았으나, 그
에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영혼 속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변화로 인
해서 그는 그녀와 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변화를 일으켜주신 하느님과도 연결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그를 기쁜 환희와 겸손한 감정으로 이끌어 주었다.
마슬로바는 여덟 개의 소아용 침대가 놓여있는 병실로 돌아오자,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나, 시트를 들고 너무 몸을 뒤로 젖혔기 때문에 하마터면 미끄러
져 넘어질 뻔했다. 목에 붕대를 감은 회복기에 있는 사내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마슬로바도 참을 수 없어서 침대에 걸터앉으며 큰 소리로 웃어 댔기 때문에 여러 아이들도 그
녀를 따라 '와아'하고 웃어 댔다. 간호사는 화를 내며 그녀를 나무랐다.
"어쩌자고 그렇게 깔깔거리는 거야? 여태까지 있던 곳에 되돌아갈 테냐? 어서 저녁 식사
나 가지고 와요."
마슬로바는 웃음을 거두고 식기를 가지고 가라는 장소로 나가려다 목에 붕대를 감은 사내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슬로바는 혼자 있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정신 없이 들여
다보곤 했다. 마슬로바는 일을 다 끝내고 밤이 되어 다른 잡역부와 함께 기거하는 방에 혼
자 있게 되면 사진을 꺼내서 여러 사람의 얼굴과 옷, 발코니와 계단, 그리고 자기와 네플류
도프, 두 고모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되는 숲의 작은 부분까지 세세히 눈으로 핥
듯이 들여다보았다.
누렇게 퇴색된 그 사진은 오랫동안 꼼짝 않고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싫
증이 나지 않았다. 특히 이마 언저리에 머리칼이 내려와 있는, 싱그럽고 아름다운 자기 얼굴
을 바라볼 때, 그녀는 황홀감을 느꼈다. 그녀는 너무 사진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
잡역부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뭐니? 그분이 준 거야?"하고 뚱뚱하고 착해보이는 잡역부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물
었다. "이게 너야?"
"나 아니면 누구겠어?" 마슬로바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구? 그분? 이것이 그의 어머니겠네?"
"고모야. 정말 날 못 알아보겠니?" 마슬로바가 물었다.
"어떻게 아니? 정말 모르겠어 얘, 전연 딴 얼굴인데. 이건 한 10년쯤의 사진이잖아!"
"10년이 다 뭐야, 한평생도 더 지났는걸."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밝던
표정이 사라지고 얼굴에 침울한 빛이 감돌면서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렇지만, 생활은 편했을 테지?"
"편했고말고!" 마슬로바는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나 감옥보다는 못했어."
"어째서 그래?"
"어째서라니" 밤 8시부터 아침 4시까지, 그것도 매일 밤일걸."
"그럼 왜 그만두지 않고?"
"그만두려고 생각은 해도 그렇게 안돼. 다 쓸데없는 짓이야!"하고 마슬로바는 외치더니 벌
떡 일어나 사진을 테이블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분한 듯 눈물을 삼키면서 문을 쾅 닫고 복
도로 뛰쳐나갔다. 사진을 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거기 찍혀 닜던 시절의 자기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 당시의 행복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결혼하면 행복해지겠거니 하고 공
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친구가 한 한 마디는 현재의 자기 모습과 옛날 그곳에 있었
을 때의 자기 모습을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당시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지만 굳이 생각하
지 않으리라고 하던 그 생활이 온갖 공포를 상기시켜 주었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 당시의
무서웠던 밤들이 생각났다.
그 중에서 사육제 날 밤 자기를 빼내 주겠다고 약속한 대학생들
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술에 얼룩이 지고 가
슴이 넓게 노출된 진홍빛 비단옷을 입고, 흐트러진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그녀는 새벽 2
시경에야 손님을 다 보내고 술에 취해 지쳐서 춤을 추다 잠깐 쉬는 사이에, 바이올린의 반
주를 하는 비쩍 마른 부스럼투성이 여자 피아니스트를 붙잡고 신세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자기도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겠으므로 생활을 바꾸어 봤으면 좋겠다고 말
했다. 때마침 클라라가 와서 세 사람은 이런 생활을 집어 치우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오늘
밤으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제각기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뜻하지 않게 현관에서
취한 손님들의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린이 '전주곡'을 켜기 시작하고, 피아
노반주자가 카드릴의 제 1절의 경쾌한 러시아 민요를 피아노로 반주하기 시작했다.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만취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딸꾹질까지 하면서 마슬로바를 잡아
끌었다.
역시 연미복을 입고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또 한 사람이 클라라를 끌어안았다. 그리
고는 한참 동안 빙글빙글 돌며, 떠들며 뛰며 마셨다. 이렇게 해서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났다. 그 동안 왜 그런 생활을 바꾸지 않았을까! 이것은 모두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그에 대한 원망스럽던 옛 생각이 홀연히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그를 욕하고 책망해 주고 싶었다. 오늘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뱃
속을 환히 알고 있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옛날에는 육체적으로 나를 마음대
로 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자기의 관대함을 표시하는 도구로 삼
으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에요'하고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
친 게 분했다.
이같이 자신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네플류도프를 부질없이 원망하는 마음을
씻어 버리기 위해 그녀는 술을 마시고 싶었다. 여기가 만약 감옥이었다면, 그녀는 자기의 맹
세를 어기고 술을 마셨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여기서 술을 구하려면 조수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그녀는 이 조수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가 줄곧 그녀에게 지분거렸기 때
문이었다. 남자들과의 관계라면 이제 진저리가 났다. 오랫동안 복도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친구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기의 망쳐진 생애
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14
네플류도프는 페레르부르크에 세 가지 용무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마슬로바에 관한 대
심원 상소였으며, 다음은 청원위원회에 제출해야 할 페도샤비류코바의 사건이었고, 마지막의
하나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서 의뢰받은, 슈스토바의 석방을 헌병대 본부 또는 제 3
부에 신청하는 일과, 그리고 역시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 서면으로 의뢰받은 요새 감옥
에 있는 청년에 대한 그 어머니의 면회를 신청하는 일이었다.
이 마지막 두 건을 그는 제 3
의 용건으로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용건은 복음서를 읽고 해설했다는 이유만으
로 가족과 헤어져 카프카스 지방을 유형된 분리파 신도들의 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을 위해서 보다도 자가 자신을 위해서 가능한 한 전력을 다해 명백히 밝히겠다고
결심했다.
최근 마슬레니코프를 방문한 이후, 특히 시골을 다녀온 후부터 네플류도프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을 해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자기가 생활해 온 상류 사회를 마음속으로 혐오하
게 되었다. 그것은 소수의 편의와 만족에 대한 보장 뒤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같은 고통
이 갖은 수단으로 숨겨져 있는 사화여서, 이 사회의 사람들은 이 같은 고통을 보려고 하지
도 않을뿐더러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네의 생활이 얼마나 잔인하고 죄악에 가
치가 있는가를 책망하는 마음이 없이는, 이 사회의 사람들 속에 끼여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날의 생활 습관과 친척 관계, 그리고 친구관계에 끌려 이 사회와 손을 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를 그런 사회로 이끌어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현재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관심사, 그러니까 마슬로바를 비롯하여 그가 도와
주고 싶은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존경은커녕 때로는 혐오와 경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싫더라도 그런 사회의 사람들에게 원조와 호의를 청하지 않으면 안되겠기 때
문이었다.
페레르부르크에 도착한 그는 큰이모이자 전 국무장관 부인인 챠르스카야백작 부인의 집에
여장을 풀고, 그렇게도 자기와는 인연이 멀다고 생각되던 귀족 사회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에겐 그것이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모 집에 머물지 않고
호텔에라도 가면 이모를 모욕하는 것이 되었다. 더욱이 이모는 발이 넓기 때문에 이제부터
운동하려고 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 없는 힘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
"네 소문은 만힝 듣고 있다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정말 이산한 소문이더구나." 카테
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그가 도착하자 커피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주
하원드가 됐다더구나. 죄인을 도와서 감옥을 돌아다니며 개혁을 하고 다니다니..."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떠냐, 좋은 일인데. 그런데 거기에 소설 같은 사연이 있다면서? 말해보려무나."
네플류도프는 자기와 마슬로바와의 관계를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래, 생각난다. 네가 고모 집에 가 있었을 때, 불쌍한 엘렌(네플류도프의 어머니)이 그
비슷한 얘기를 했었어. 네 고모들은 널 그 양녀하고 결혼시키려고 했었지(카테리나 이바노
브나 백작 부인은 네플류도프의 고모인 두 자매를 항상 경멸하고 있었다). 그래, 그 처녀였
구나. 지금도 그렇게 예쁘냐?"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이모는 60세의 노부인이긴 했지만 아직도 건강하고 쾌활하고 정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키가 크고 뚱뚱했고 윗입술 언저리에는 거무스름한 잔털이 나 있었다. 네
플류도프는 이 이모를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이모의 정열적인 활동과 쾌활한 성격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모님. 그것은 모두 옛날 이야기입니다. 저는 다만 그 여자를 도와 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첫째로 그녀는 아무 죄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그 점에 있어서는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녀의 운명 전체에 있어서도 역시 저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줄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라면서?"
"네,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 여자는 원하질 않습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내리깔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없
이 조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만족스러운 기색이 되었다.
"그래, 그 여자는 너보다 영리하구나. 정말 넌 어쩌면 그렇게 바보냐? 넌 진심으로 그 여
자와 결혼하겠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그런 데 있던 여자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다 제 죄니까요."
"아니, 너 정말 철부지로구나!"하고 이모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넌 정말 철부
지야. 하기야 그런 철부지이기 때문에 넌 널 좋아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이 철부지라는 말
이 자신이 생각해도 조카의 정신적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해 준 말로 여겨졌던 모양인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 그렇지. 참 좋은 수가 있다."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알린이라는
사람이 창녀 갱생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나도 한번 가 보았다. 그러나 알린은 그 일에다 심
신을 다 바치고 있거든. 그러니 너의 그 여자를 알린한테 맡기면 어떻겠니? 그런 여자들을
올바르게 만들어 줄 사람은 알린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 여자는 징역을 선고받았어요. 그래서 저 그 선고의 취소 운동 때문에 여기
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모님께 부탁하고 싶은 첫째 용건입니다."
"그랬구나! 그 여자의 사건은 어디서 맡고 있지?"
"대심원입니다."
"대심원? 그래 대심원에 내 사촌 레부시카가 있긴 한데. 하지만 그 사람은 상훈국에어서
말이야. 글세 그쪽에는 아는 사람이 없군 그래. 그쪽은 독일 사람들뿐이라서, '게'라든가, '
페'라든가, '데'라든가 하는 첫 글자가 붙은 사람이 아니면, 이바노프, 세묘노프, 니키티치라
든가, 또는 이바넨코, 시모넨코, 니키첸코라든가 하는 이상한 이름의 사람들뿐이야. 모두 딴 사
회의 사람들이지. 하여튼 이모부한테 얘기해 보마. 너의 이모부는 여러 방면의 사람들을 알
고 있으니까. 그러나 자세한 건 네가 설명하도록 해라. 내 얘기라면 언제나 잘 알아 듣지 못
하니까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모부는 모르다고만 하니 말이야. 항상 판에 박힌 대
답이란다. 남은 다 알아듣는데, 그분만은 모른다는 거야 글세."
이 때 긴 양말을 신은 하인이 은쟁반 위에 편지를 얹어 가지고 들어왔다.
"마침 알린한테서 왔구나! 너도 키제베테르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다."
"누굽니까, 키제라베티르란 사람은?"
"키제베테르 말이냐? 오늘 밤 보려므나.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거다. 그 사람의 설교만
듣고 있으면 아무리 흉악한 범인이라도 무릎을 꿇고 울면서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단다."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이상하게도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기독교의 본질은
속죄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녀는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교의를
전도하는 모임에 빠짐없이 나가기도 하고, 또한 자기 집으로 신자들을 불러오기도했다.
이 교의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의식과 성상은 물론 일체의 성례까지 부정해야 했는데 그러면
서도 백작 부인의 집에는 어느 방이나, 심지어 침대의 위에까지 성상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
러면서도 그녀는 아무 모순도 느끼지 않고 교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l행하고 있었
다.
"그러니 너의 막달레나(회개한 매춘부)도 그분의 설교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틀림없
이 개심할 거야."하고 백작 부인은 말했다.
"오늘 밤에는 꼭 집에 있도록 해라. 그분의 얘기 좀 들어 보라고. 참 훌륭한 분이란다."
"별로 흥미가 없는데요. 이모님."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그러니까 꼭 참석하도록 해라. 그리고 또 무슨 부탁이 있니? 아
주 털어놓고 말해보렴."
"또 하나는 요새 감옥의 일입니다만."
"요새 감옥? 아, 거기라면 크리스무트 남작에게 소개장을 써 주지. 부탁할 만한 문이야.
너도 알 거다. 네 아버지와는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강신술에 빠져 있었지만, 뭐 그런 건 아
무것도 아니다. 착한 사람이지. 그래 거긴무슨 용건이지?"
"거기 수가되어 있는 청년에게, 그의 어머니를 면회시켜 주도록 부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엔 그건 크리그스무트 남작의 관할이 아니라, 제르뱐스키의 관할이라고 하더군요."
"체르뱐스키라는 사람은 싫지만, 그는 마리에트의 남편이니까 그녀에게 부탁해도 되겠지.
날 위해서라면 그만한 일쯤 해줄 거야. 그녀는 참 친절한 여자거든."
"그리고 또 한 여자의 일도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벌써 여러 달 수감되어 있는데 그 이유
를 모르고 있어요."
"아니, 그럴 수야 있나? 이유는 그 여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텐데. 난 그런 여자들을
잘 알고 있어. 그런 단발녀(허무주의를 지향하는 여자들을 뜻함)들에겐 당연한 일이지."
"당연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요, 여하튼 고생하고 있으니까요. 이모님은 기독교
인이시고 복음서를 믿고 계시면서 그런 잔혹한..."
"괜찮아. 복음서는 복음서고, 싫은 건 싫은 거니까. 난 그런 허무주의자, 특히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은 아주 질색이거든.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체하는 것은 더 나쁘지 않겠니?"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질색이라는 말씀이시죠?"
"그 3월 1일(알렉산더 2세가 암살된 날)의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걸 묻니? 오히려 그런 걸
묻는 네가 이상하구나."
"그렇지만, 그런 여자들이 모두 3월 1일 사건의 참가자는 아니잖습니까?"
"마찬가지야. 자기가 할 일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참견을 하는 거야? 그런 일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니야."
"그럼, 저 마리에트도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마리에트? 마리에트는 마리에트지. 그녀가 어떤 여자라는 건 하느님도 아실 거다. 그런데
할츄프키나라는 여자가 사람을 가르치려 드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도와 주어야 할 사람과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쯤은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농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나는 얼마 전에 시골에 다녀왔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데, 우리들
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네플류도프는 마
음이 좋은 이모에게 끌려서 무의식중에 품고 있던 것을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그럼, 나도 일을 부지런히 하고 아무것도 먹지 말기를 마라는 거냐?"
"아닙니다. 이모님더러 잡수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플류도프는 웃으며 말했
다. "다만 같이 일하고 다같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이모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 깔더니, 호기심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넌 제대로 죽지도 못하겠구나." 그녀가 말했다.
"왜요?"
"그 때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장군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카테리나 이바노
브나의 남편이며 전 국무장관인 차르스키 백작이었다.
"여어, 드미트리, 잘 있었나?" 그는 말쑥하게 면도한 뺨을 내밀면서 말했다. "언제 왔니?"
그러고는 그는 가만히 아내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얘는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백작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다. "이 애가 나더러 냇가
에 가서 빨래를 하고, 감자나 먹으라지 안하요? 정말 철부지지 뭐예요." 그녀는 말을 바꾸었
다. "그건 그렇고 당신도 들으셨지요? 카멘스카야 부인이 몹시 낙심하고 있다고요. 생명이
위태롭다던데요."하고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때요?"
"그거 참 안됏군." 남편이 말했다.
"그럼 이 애하고 가서 얘기나 하세요. 난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네플류도프가 응접실 앞방으로 나가자마자, q인은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
"그럼 마리에트에게 편지를 쓸까?"
"네, 이모님."
"단발머리 여자에 관해서는 네가 써넣도록 여백을 남겨 두겠다. 마리에트는 남편에게 말
해 줄 것이고, 그럼 남편도 잘해 주겠지. 나를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걱정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무슨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마음에 안드는 것뿐이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거야.! 그럼 다녀오렴. 저녁에는 꼭 와야한다. 키제베테르 씨의
설교가 있으니까, 함께 기도하자꾸나.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네게도 반드시 보람이 있을
거다. 엘렌이나 너나 모두 이런 면에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으니까. 그럼 다녀오너라."
15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전 국무장관이었으며, 매우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의 젊은 시절부터 신념은 다름이 아니라 마치 새가 벌레를 먹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 다니는 것이 천성인 것처럼 그 자신도 고급 요리사가 만든 고급
요리로 배를 채우고, 몸에 잘 맞는 값진 옷을 입고, 기분 좋고 빠른 준마를 타고 다니는 것
이 천성에 어울리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안흥면 안 돈다는 것
이었다.
더욱이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국고에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으면 받을소록 좋
았고, 훈장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을 포함해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며, 남녀 누구나 신
분이 높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으면 많을스록 좋다고 생각했었다.
이 같은
기본적인 신념에 비해 그 밖의 일체의 것은 이반 미하일로비치의 눈으로 볼 때 보잘것없고
흥미없는 것이었다. 이 신념에 따라서 이반 미하일로비치는 40년 동안 페테르부르크에서 생
활하고 활약한 나머지 국무장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이 이 지위를 얻게 된 중요한 자질은, 첫째 공문서나 법률의 의미
를 잘 이해하고, 서툴렀지만 그럭저럭 서류를 초안할 수 있었으며, 철자법도 틀리지 않게 문
장을 쓸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둘째로는 풍채가 좋고, 때에 따라서는 의젓한 정도가 아니라
남이 근접할 수도 없을 만큼 위엄 있는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야비할만큼
비굴하게 아첨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셋째로, 그는 도덕적인 면이건 국가적인 면이건
일반적인 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전연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누구에게나 찬성할 수 있
었고,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누구에게나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같이 행동하면서 그
는 줄곧 그의 체면을 유지해 갔고, 오직 뚜렷한 자가 당착을 보이지 않겠다는 데만 신경을
써왔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행동이 도덕적이거나, 부도덕적이거나, 또 자기 행동으로 해서
러시아 제국이나 전세계에 최대의 해악이 생기건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는 그의 세력권 내에 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
람들과 측근자들이 있었는데, 일반 사람들과 바로 그 자신까지도 자기 자신이 자신이 지극
히 총명한 국가적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한 세월이 지나가도 그는 이렇다 할
만한 일을 하지 못했고, 아무 수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생존 경쟁의 법칙에 따라
그와 같이 서류나 작성하고 해석하는 것을 배운, 정견도 없는 무주의 무절제한 관리들에게
떠밀려 퇴직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똑똑한 인간이 아닐뿐더러 자존심만 강
할 뿐, 실상은 천박한 교양도 없는 다른 관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깨닫고 있었으나, 이 사실이 해마다 막대한 국고금을 축내며 자기 예복에 다
는 새 장식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확신을 조금도 흔들리게 하지는 않았다.
이 확신은 노무 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를 반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
암아 일부는 은급이라는 형태로, 일부는 정부 최고 기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그 박의 갖가
지 위원회의 회장이라는 자격으로 매년 수만 루블의 돈을 받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새로운 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깨와 바지에 새로운 몰
을 달고 연미복 밑에 새로운 술과 에나멜의 성장을 다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었다. 이 때문
에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여러 방면에 연줄이 닿게 되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네플류도프의 이야기를 옛날 부하들의 보고를 듣는 듯한 태도
로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두 통의 편지를 써 주겠다고 말했다. 하나는 대
심원 상소국의 볼리프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잇지만, 어쨌든 훌륭한 사람이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
런데다가 내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라면 해줄거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이 준 또 한 통의 편지는 청원 위원회의 유력자 앞으로 보내는 것
이었다. 백작은 네플류도프가 말한 페도샤 비류코바 사건에 대해서 커다란 흥미를 가졌다.
네플류도프가 황후 폐하에게 청원서를 올릴 생각이라고 말했을 때, 사실 이 사건은 감동적
인 사건이므로 기회를 봐서 자기가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절차를 밟아서 청원서를 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기회가 있어서
목요일의 소위원회가 소집된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서 얘기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작이 써 준 두 통의 편지와 마리에트에게로 발길을 향했다. 그는 그녀를 처녀 시절 째
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귀족 가문에서 자라났으나, 처세술에 능
한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 남자에 대해서는 네플류도프도 좋지 못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수백 수천의 정치범에게 냉혹하게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그의 큭별
한 직무가 되어 있을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금 네플류도프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대하는 사람 측에 서지 않으면 암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학대하
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그들 자신도 필시 모르고 있을 평소의 잔악한 처사를 몇 사람의 특정
한 인물에 대해서만이라도 다소 완화해 주기바란다는 식의 부탁을 함으로써 마치 그들의 행
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케 되는 것이 못 견딜 지경이었다.
이런 경우 그는 항상 내적 불만
과 혼란 때문에 부탁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은 부탁하기로 결심하곤 했다.
그 자신은 마리에트와 남편에게서 쑥스럽고 치욕스러운 불쾌감을 맛본다 하더라도, 그 대신
독방에서 고생하는 불편한 여성이 석방되어, 그녀와 그의 친척들이 고민하지 않아도 좋게
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이럴 때 그는, 이쪽에서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친구로서 취급하는 사람들 틈에 의뢰자가 되는 것이 어딘지 거짓이 숨겨져 있
는 것 같아서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 사회 속에서 이전의 습관의 괘도에 뛰어
들어가 이 서클을 지배하고 있는 경박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벌써 이것을 이모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에서 체험했다.
오늘 아침에도 이모와 가장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농담으로 빠져들어가고 말
았었다.
오랜만에 와서 보는 페테르부르크는 항상 그렇듯이 육체적으로는 자극을 주면서도 정신적
으로는 둔화시켜 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곳은 모든 것이 깨끗하고 편리하고 설비가
잘되어 있었으며, 특히 사람들이 도덕적인 면에 무관심한 탓으로 생활이 유달리 안이하게
보였다.
단정하고 말쑥하며 겸손한 마부가 그를 태우고 역시 단정하고 말쑥하고 겸손한 순경 옆을
지나 단정하고 깨끗하게 물을 뿌린 포장길과 집들을 지나 마리에트가 살고 있는 운하 쪽에
자리잡은 집으로 그를 데려다 주었다.
현관의 주차장에는 눈을 가린 영국풍의 말 두필이 끄는 마차가 있었으며, 수염으로 뺨을
절반쯤이나 가린, 영국인 같은 제복을 입은 마부가 거만하게 채찍을 들고 마부석에 앉아 있
었다.
말쑥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곳에는 금몰이 달린 더 말쑥한
제복을 입은, 보기 좋게 턱수염을 기른 하인 한 사람과, 깨끗하게 새 정복을 입고 총검을 든
당직 사병이 서 있었다.
"장군님의 면회는 사절입니다. 사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외출하십니다."
네플류도프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편지를 건네고, 명함을 꺼내어 방문객의
명부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가서, 만나뵙지 못해 대단히 유감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때 하인이 층계 쪽으로 급히 달려가고 문지기는 현관으로 달려가더니 "준비!"하고 외쳤다.
당직 사병은 양손을 바지 솔기에 대고 부동 자세를 취했다. 당직 사병은 이러한 근엄한 태
도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총총걸음으로 층계를 내려오는 홀쭉하고 자그마한 귀부인을 눈
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털이 달린 큼직한 모자를 쓰고, 검은 옷에 소매 없는 검은 외투를 걸치고 까만 장갑을 낀
마리에트는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베일을 치켜올리고 빛나는 눈동자의 귀여운 얼굴을 내밀면서,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공작님 아니세요?"하고 그녀는 쾌활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제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잘 알고 있어요. 전 동생과 둘이서 당신을 사모한 적도 있었는데요."하고 그녀는 프랑스
말로 말했다. "많이 변하셨군요. 마침 나가려던 참이어서 섭섭해요. 그렇지만 잠깐이라도 올
라가실까요?" 그녀는 망설이면서 발을 멈추며 말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역시 안 되겠어요. 카멘스카야 댁의 영결식이 있어서. 그분은 몹시 상심하고 계세요."
"카멘그카야란 누구시죠?"
"어머, 모르세요? 구분의 자제분이 결투를 해서 죽었어요. 포겐하고 결투를 해서 죽었어
요. 외아들이었는데, 무서운 일이지요. 어머니께서 어찌나 상심하시는지..."
"네,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럼 갔다 오겠어요. 내일이나 오늘 밤에 와 주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현관문을 향
해서 재빠르게 사뿐사뿐 걸어갔다.
"오늘 밤에는 못 오겠습니다." 그는 그녀와 같이 현관으로 가면서 말했다. "실은 당신에게
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밤색 말 한 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이겁니다. 이모님이 쓰신 편지인데 이 속에 다 쓰여 있습니다."하고 큼직하게 이름을 박
아 놓은 긴 봉투를 내밀면서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이것들을 일거 보시면 다 아실 수 있습
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제가 남편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 줄 아실 거예요. 그
건 오해입니다. 전 그의 일에 참견할 수도 없거니와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백작 부인
이나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런 규칙을 깨뜨리겠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까만 장갑을 낀
손으로 포켓을 뒤적이며 그녀가 말했다.
"실은 요새 감옥에 어느 여자가 하나 수감되어 있는데, 그 여자는 병자인데다가 사건에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무엇인데요?"
"슈스토바, 라지야 슈스토바입니다. 편지에 쓰여 있습니다."
"잘 알았어요. 힘껏 노력해 보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흙받이의 옻칠이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는, 푹신거리는, 푹신푹신한 깔개가 깔려 있는 사륜 마차에 사뿐히 올라타고는 파라
솔을 펼쳤다. 하인은 마부석에 올라앉아 마부에게 떠나라고 신호했다.
그 때 그녀가 파라솔
로 마부의 등을 치자, 윤기 있는 털에 미끈하게 생긴 말은 고삐가 당겨진 목을 움츠리고 날
씬한 다리로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꼭 오세요. 용건 없이 말씀이에요." 그녀는 스스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고 의식하면
서, 빙긋이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러고는 마치 연극이 끝난 뒤 막을 내리듯이 베일을 내렸
다. "자, 가요." 그녀는 다시 파라솔로 마부를 툭쳤다.
네플류도프는 모자를 들었다. 순종의 밤색 말은 코를 벌름거리며 포장길을 발굽소리도 높
이 달려갔다. 마차는 가끔 울퉁불퉁한 길에 고무바퀴를 가볍게 퉁기며 신나게 달려갔다.
16
마리에트와 환한 미소를 생각하면서 네플류도프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또다시 그 생활에 휩쓸려 들어갈 뻔했군.' 그는 자기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야할 때마다 항상 일어나는 자기 분열과 의혹을 느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헛걸음치지 않으려고 어디를 먼저 가고 어디를 나중에 가야 하나를 생각한 끝에 네플
류도프는 먼저 대심원으로 가기로 했다. 대심원에서 사무실로 안내된 그는, 장엄한 실내에
서 단정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많은 관리들을 볼 수 있었다.
마슬로바의 상소장은 수리가 외었으며, 이모부가 편지를 써 준 대심원 의원 볼리프에게
심리, 보고되도록 회부되었다고 관리들이 네플류도프에게 설명해 주었다.
"대심원 회의는 이번 주에 있을 예정인데, 마슬로바의 사건은 이번 회의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청원하시면 이번 주 수요일 회의에 상정될 수는 있습니다."하고 한
사람이 말했다.
대심원 사무실에서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네플류도프는 또 다시 결투에 관
한 이야기와 카멘스키가 피살된 경위를 자세히 들었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페테르부르크
전체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사건의 전멀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은 이러했다. 수명의 장고
들이 어느 술집에서 굴을 곁들여 술을 잔뜩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카멘스키가 근
무하고 있는 연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카멘스키는 그를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욕설을 퍼부
었다. 그러자 그는 카멘스키를 때렸다.
그 이튿날 결투가 벌어져 카멘스키는 복부에 총을 맞
고 두 시간 후 숨을 거두었다. 살해한 남자와 입회자들은 체포되어 영창에 들어갔으나 2주
일 후면 석방되리라고 했다.
대심원의 사무실에서 나온 네플류도프는 청원 위원회에 세력이 있는 보로비요프 남작을
찾아갔다. 그는 웅장한 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문지기와 하인은 면회일 외에는 남작을 만날
수 없으며, 더구나 오늘은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셨고, 또 내일도 보고하러 가실 거라고
엄숙한 어조로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편지를 내주고 대심원 의원인 볼리프
한테로 갔다.
볼리프는 마침 아침식사를 끝내고, 여느 때와 같이 소화를 잘 시키기 위해 궐련을 피워
물고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네플류도프를 맞아 주었다. 그는 자기의 이 특징을 높이 평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이 특징으로 인해 자기가 원했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
었다.
결국 결혼을 함으로써 1년에 1만 8천 루블의 수입이 있는 재산을 손에 넣었으며, 자기
노력으로써 대심원의 의원의 자리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빈틈없고 치밀한 사
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한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렴이라는 말은
그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요구하는
일체의 일을 노예같이 실행하면서, 그 대신 여비라든가 보수라든가 대여금이라든가 하는 모
든 종류의 돈을 국고에서 받아내는 것은 별로 파렴치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전에 폴란
드의 어느 현의 지사로 있을 때 단행한 일이지만, 그 지방의 주민들이 자기 나라의 국민을
너무 많이 사랑하고 종교에 너무 충실하다고 해서 수백 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파멸
시키고 재산을 몰수하고 유형에 처하거나 감금했는데, 그는 이것을 별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결하고 남자답고 애국적인 위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에게 반한 아내와 처제의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고도 파렴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의 가정은,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내와,
재산은 형부에게 빼앗기고 토지는 매각되고 돈은 형부 명의로 예금되어 있는 처제와 , 그리
고 얌전하고 어리벙벙하고 못생긴 딸로 구성되어 있었다.
딸은 괴롭고 외로운 생활을 보내
고 있었으며, 요즈음에는 복음서의 탐독과, 알링의 집이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부인의 집에
서 열리는 모임에 나가 겨우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의 아들은 사람이 좋기는 했느나, 열다섯 살 때부터 턱수염을 기
로고 술을 마시며 방탕해지기 시작하여 스무 살이 되도록 학교 하나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
고, 못된 친구들하고 어울려 빚을 져서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
로 마침내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번은 그의 아버지가 230루블의 빚을 갚아 주었고, 두
번째는 600루블의 빚을 갚아 주었다. 그 때 아들에게 이것이 마지막이니 개심하지 않으면
집에서 쫓아내어 부자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들은 개심하기는 커녕 또
천 루블의 빚을 짊어진데다가 오히려 아버지에게 집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고문을 받는 것
이나 마찬가지라고 대들었다.
그 때,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아들에게 어디든지 가버리
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아비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 때부터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는 것처럼 말해 왔으며, 가족들도 누구 하나 그의 앞
에서는 아들 이야기를 감히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가장 현명하
게 가정을 정리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볼리프는 상냥하면서도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이것이 그의 평소의 버릇이었는데 다
른 사람들보다 탁월하다는 무의식적인 표현이었다 실내를 거닐던 걸음을 멈추고 네플류도프
와 인사를 한 다음,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이리 앉으십시오. 죄송하지만 거닐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상의의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아담하고 정돈된 넓은 서재를 대각선으로 가볍게 걸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만나
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의 부탁은 될 수 있는 대로 힘을 써 보겠습니
다." 그는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살며시 입에서 궐련을 떼고, 향기로운 파란 연기를 뿜으면
서 말했다.
"네, 네 , 잘 알았습니다. 니즈니에서 첫 번 기선으로 가겠다는 말씀이시죠? 알고 있습니
다." 언제나 남의 말을 듣기도 전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는 거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
했다. "피고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마슬로바..."
볼리프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다른 서류와 함께 철해 둔 서류를 뽑아 들여다보았다.
"아, 그렇군, 마슬로바. 좋습니다. 동료들에게 부탁해 놓겠습니다. 수요일에 이 사건을 심
리하겠습니다."
"그러면 변호사한테 전보를 쳐도 되겠습니까?"
"변호사에게 의뢰하셨나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그야 원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만."
"상소의 이유가 허술한 것 같아서 말씀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그러나 이 사
건에 관한 선고는 오해에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글쎄올시다. 그러나 대심원에서 꼭 사건의 본질을 심리한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하고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담뱃재를 바라보면서 엄숙한 투로 말했다. "대심원은 다만 법의
적용과 그 해석이 올바른가를 조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예외라고 생각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무슨 사건이든 모두 예외적인 것이니까요. 우리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은 꼭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담뱃재는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곧 떨어질 상태
에 있었다. "페레부르크에는 자주 오지 않으십니까?" 볼리프는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궐련
을 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도 담뱃재는 풀풀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볼리프는 가만히
재떨이로 가서 털었다. "카멘스키의 사건은 참 끔찍한 일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게다가 외아들이었죠. 그의 어머니의 심정이란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그 당시 페테르부르크에서 떠돌아다니던 카멘스키의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
었다.
그리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일과 부인이 열중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적 경향
에 대해서 말한 다음,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자신은 그것에 대해 비난도 찬성도 하지 않
았지만, 그의 태도로 볼 때 그 종교는 그에겐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는 벨을 눌렀다.
네플류도프는 일어섯 작별인사를 했다.
"시간이 있으시면 저녁 식사나 드시러 오십시오." 볼리프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수요
일리면 좋겠군요. 그 때는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미 시간이 늦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곧장 마차를 타고 이모네 집을 향해 달려갔다.
17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집에서는 7시 반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식사는 네플류도프가 일찍이 보지 못한 색다른 방식으로 행해졌다. 요리를 식탁 위에 차
려 놓으면 하인들은 곧 물러가 버리므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요리를 날라
다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들은 부인들에게 쓸데없는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고, 또 여자
들보다 힘이 센 남성으로서의 남성다운 모든 수고를 도맡아 하면서, 부인들에게 음식을 날
라다 주기도 하고 자기네들도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백작 부인은 접시 하나가 비게 되면
벨을 눌렀다. 그러면 하인들은 소리도 없이 들어와 재빨리 치우고 다른 접시와 바꾸어 놓고
나서 요리를 날라왔다.
요리도 퍽 맛이 좋았지만, 술도 손색이 없었다. 밝고 넓은 부엌에서
는 프랑스인 요리장이 휜 옷을 입은 조수 두 명을 거느리고 일하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
은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백작 부처, 팔꿈치를 식탁에 괴고 있는 무뚝뚝한 근위장교인 아
들, 네플류도프, 가정 교사인 프랑스 여인,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백작가의 총지배인이었
다.
여기서도 결투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황제가 어떤 태도로 나
올 것인지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황제가 피살된 청년의 어머니에 대해서 깊은 동정을
베푸셨음을 알자 그들은 모두 그 어머니를 동정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해서 동정은 했다
고 하더라도 황제가 군복의 명예를 지킨 가해자에 대해서 엄격하게 다스릴 의사가 없는 것
도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군복의 명예를 지킨 가해자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다만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만이 본래의 경솔한 성미대로 가해자를 비난했을 뿐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술을 마시고 훌륭한 젊은이를 마구 쏘아 죽일 테죠. 나로서는 결코 용
서할 수 없어요."하고 그녀는 선언했다.
"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로군."하고 백작이 말했다.
"네, 그러시겠죠. 당신은 언제든지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까요."백작 부인은 네플류도프
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다 알아 주는데, 남편만은 몰라 준단다. 나는 그 어머니
가 불쌍해.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하다는 건 싫어."
이 때 여지껏 잠자코 있던 아들이 가해자의 편을 들면서, 장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
으며 또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연대에서 쫓겨났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제법 거칠게 대들었다.
네플류도프는 대화 속에 끼여들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남을 죽인 장교와 감옥에서 만난 적이 있는, 역시 결투를 해서 살
인한 탓으로 유형을 선고받은 젊고 잘 생긴 죄수를 자기도 모르게 비교해 보았다.
어느 쪽
이나 다 술취한 김에 저지른 살인이었다. 그런데 한쪽의 농부는 격분한 순간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아내와 가족, 그리고 친척과 헤어져서 쇠고랑을 차고 머리를 박박 깍이고 유형을 가
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쪽의 장교는 영창 안의 깨끗한 방에서 좋은 요리에 맛있는 술을 마
시고 책을 읽으면 내일 쯤은 석방되어 전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더욱이 특별한 관
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바를 밖에 내고 말았다. 처음에는 백작 부인도 조카의
의견에 찬성을 하는 듯했으나 나중에는 곧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도 자기가 무슨 불쾌한 말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 밤 식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넓은 홀에는 멋지게 조각이 된 높다란 등받이 의
자들이 마치 설교를 들을 때처럼 여러 줄로 놓여지고, 큰 테이블 앞에는 설교를 들으려고
모두 모여들었다.
현관에는 번듯한 값진 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호화롭게 장식된 홀에는 비단과 비로드와
레이스로 성장하고 머리는 덧머리를 얹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여맨 귀부인들이 앉아 있었다.
부인들 틈에 군인과 문관이 자리잡고, 평민도 다섯 사람 2명의 문지기와 장사꾼, 그리고
하인과 마부가 섞여 있었다.
키제베테르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체격이 우람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영어로 말하자, 코안
경을 쓴 젊고 빼빼마른 여자가 재치 있고 재빠르게 통역을 했다.
우리들의 죄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죄악에 대한 벌도 크며, 더욱이 그것은 피하기 어
려운 것이므로, 그 벌을 예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에 생각을 돌려 봅시다. 그
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또 자비로운 하느님께 어
떻게 죄를 범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
리는 용서받을 수 없고, 이를 피할 길도 없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파멸하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하고 그는 울음섞인 떨리는 목소
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형제들이여,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까요? 이미 불길이 집을 둘러쌌으니 벗어날 길은 없습
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8년 동안 설교를
해 오면서 무척 마음에 드는 이 대목에 이르면, 그 때마다 틀림없이 목이 떨리고 코가 메어,
눈물이 더욱더 그를 감동시켰다.
방 안에는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백작 부인은
모자이크 된 테이블 곁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괸 채 살찐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마
부도 놀란 얼굴로 독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그의 마차채에 부딪치
게 되어도 비켜서려고 하지 않을 때 짓는 그런 표정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작 부
인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은 볼리프의 딸은 최신 유행의 의상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설교자는 갑자기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배우들이 기쁜 표정을 지을 때처럼 미소를 지으
면서 달콤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있습니다. 그것은 쉽고도 기꺼운 길입니다. 그 구원이란, 우리를 위
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하느님의 독생자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인 것입니다. 그
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우리들의 구원의 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하고 그
는 또다시 눈물어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는..."
네플류도프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쾌해져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수치스러운 생각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발끝으로 걸어나와 자기 방으로 갔다.
18
이튿날 네플류도프가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 하인이 모스크바에서 온
변호사의 명함을 가져왔다. 변호사는 자기 용무도 겸해서 만일 마슬로바의 사건이 곧 가까
운 시일 안에 심리가 된다면, 대심원의 심리에도 출석하겠노라고 온 것이었다.
네플류도프가 친 전보는 그와 엇갈렸던 것이다. 네플류도프에게 마슬로바의 사건이 심리
되는 날짜와, 심의관 누구라는 것을 듣자, 변호사는 빙긋이 웃었다.
네플류도프가 친 전보는 그와 엇갈렸던 것이다. 네플류도프에게 마슬로바의 사건이 심리
되는 날짜와, 심의관이 두구라는 것을 듣자, 변호사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다면, 세 가지 타입의 심의원이 전부 모임 세이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볼리프는
페테르부르크 형의 관리고, 스보코로드니코프는 학자형의 법률학자이며 베는 실제형의 법률
가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이 그 중에서 제일 수완가죠." 변호사는 말했다. "어쨌든 이 사람
이 제일 믿음직합니다. 그런데 청원 위원회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사실은 이제부터 보로비요프 남작을 방문할 참입니다. 어젠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보로비요프가 어떻게 남작이 됐는지 아십니까?" 네플류도프가 이 러시아적인 이
름에도 외국어의 칭호를 한데 붙여 우스꽝스럽게 부른 데 대해 대답하면서 변호사는 말했
다.
"그것은 파벨 황제께서 무슨 포상으로 그의 조부에게 내려 준 것이지요. 그의 조부는 궁
중에서 하인들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황제께서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를 남작으
로 임명하겠으니 불평들은 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보로비요프 남작이 탄생한 겁
니다. 그는 이걸 여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아요. 아주 교활한 늙은 여웁니다."
"어디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가 볼까요?" 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마침 잘됐습니다. 함께 가십시다. 제가 마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두 사람이 출발하려고 나왔을 때, 하인이 옆방에서 마리에트로부터 온 편지를 들고 네플
류도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저의 주의 주장을 버리고, 당신이 보호하고 계시는 사람을 위
해서 남편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여자분은 곧 석방될 것입니다. 남편이 요새 사령관에
게 편지를 보냈으니까요. 볼일이 없으셔도 놀러와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M
"자, 어떻습니까?" 네플류도프는 변호사에게 말했다.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7개월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있던 여자가 아무 죄도 없다니, 그
것도 석방하는 데 단 한 마디면 되다니."
"언제나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나 어찌 됐든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된 셈이군요."
"네, 하지만 이 성공은 도리어 통탄할 일입니다. 도데체 거기서는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무엇 때문에 그 여자를 가두어 두었을까요?"
"그런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리면 어떨지?"
그들이 현관 앞으로 나왔을 때 변호사가 말했다. 변호사가 타고 온 훌륭한 마차가 현관으
로 다가왔다.
"보로비요프 남작을 뵈러 가시는 거죠?"
변호사는 마부에게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그 멋진 말들은 곧장 네플류도프를 남작 집으
로 데려갔다. 남작은 집에 있었다. 첫째 방에는 제복을 입은 젊은 관리 한 사람과 두 귀부인
이 있었다. 그 관리는 무척 기다란 목에 후골이 튀어나온 경쾌한 걸음걸이의 남자였다.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후골이 튀어나온 젊은 관리가 부인들로부터 경쾌한 걸음으로 네플류도프에게 걸어와서 정
중하게 물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 명함을 주었다.
"남작께서도 공작님 말씀을 하시더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젊은 관리는 문을 열고 한 방으로 들어가더니, 상복을 입고 울고 있던 부인을 데리고 나
왔다. 부인은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앙상한 손으로 헝클어진 베일을 내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젊은 관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제 문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고
네플류도프를 향해서 말했다.
서재에 들어간 네플류도프는 프록 코트를 입고 머리를 짤막하게 깎은 중키의 몸집이 탄탄
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큼직한 사무용 테이블 옆 안락의자에 앉아서 즐거운 표정으로 앞
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콧수염과 턱수염 속에서 유달리 불그fp하게 보이는 얼굴이 네플류
도프를 보자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당신의 어머님하고는 예로부터 잘 아는 친구였지요. 당
신도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지요. 장교였을 때도 본 일이 있고요. 자 앉으십시오. 무슨
일인지 말씀하세요."
그는 네플류도프로부터 페도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짧게 깎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
다.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잘 알았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정말 동정할 만한 여자군요. 그
래, 청원서는 제출했나요?"
"네, 청원서는 준비해 왔습니다만." 네플류도프는 호주머니에게 청원서를 꺼내면서 말했
다.
"특히 각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려 주셨으면 하는 것
입니다."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내가 직접 청원하겠습니다." 하고 남작은 유쾌한 얼굴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동정의 빛을 띠면서 말했다.
"정말 동정이 가는군요. 그녀는 아직 어렸으므로 남편이 너무 노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싫어져서 반항을 한 게 분명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좋습니다. 내가 직접 청원해 드리지요."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도 황후께 청원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플류도프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작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어쨌든 청원서를 사무소에 먼저 내도록 하십시오. 나도 힘닿는 데까지 해볼 테니까요."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이 때 젊은 관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그는 자기의 걸음걸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부인이 한 말씀만 더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들여 보내요. 참 그 여잔 눈물도 많지. 그 눈물을 닦아 줄 수만 있다면 좋겠
는데, 어쨌든 되는 데까지 해볼 수밖에." 부인이 들어왔다.
"아까 부탁드린다는 것을 잊었습니다만, 그이가 그 애를 다른 데로 보내지 않도록 해주세
요. 그렇지 않으면 그이가 무슨 짓을 할는지..."
"그래서 해드리겠다고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작님, 부탁입니다. 제발 이 어미를 살펴주시는 셈치시고..." 그녀는 남작의 손에 키스를
했다.
"모든 일을 다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네플류도프도 작별 인사를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법무성에도 연락해 두겠습니다. 그 곳에서 회답이
오면, 그 때는 가능한 한 도와 드리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서재를 나와 사무실 쪽으로 나왔다. 대심원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이 곳에서도 장엄한 건물 안에, 복장에서부터 말씨에 이르기까지 단정하고 겸손하고 엄격하
고 또렷또렷한 관리들을 많이 보았다.
'많기도 하군. 모두 기름기가 흐르고, 깨끗한 셔츠와 손, 반짝이는 구두, 도대체 누가 이토
록 사치스러운 짓을 시키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죄수들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고, 농민
들에 비해서도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네플류도프는 무의식중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
페레르부르크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인물은, 수많은 훈장을 가
지고 있으면서도 보통 때는 단춧구멍에다 백십자 훈장 외에는 아무것도 달지 않는 독일계
남작 출신의 노장군이었다.
숱한 세월에 걸쳐 많은 공적을 세웠으나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망령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스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 곳에서 특별히
그를 예찬해 주는 이 십자 훈장을 탔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그가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입고 총검으로 무장된 러시아 농민을 지휘해서 자기네들의 자유와 집과 가족을 지키려던 천
명이 넘는 삶들을 학살한 공로로 받은 훈장과 제복에 달 장식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몇군데에서 더 근무했지만, 지금은 늙고 쇠약했기 때문에 훌륭한 저택과 수당과 현재의 명예
로운 지위에 매달리게만 되었다. 그는 상부의 명령을 엄격히 이행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부로의 명령에 그는 일종의 특별한 의의를 부여했기 때문에,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변경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명령만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직무란 정치범들을 요새 감옥의 독방에 감금해 두는 일이었는데, 10년 동안에 그들의 과반
수가 일부는 발광하고 일부는 폐병이거나 자살로 죽어가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굶어 죽거나,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끊거나, 목을 매거나, 분신 자살을 하거나 했다.
노장군은 그러한 일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마치 벼락이라든가 홍수같이
자연히 일어난 불행이 그의 양심을 동요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전혀 그의 양심에 영향을 주
지 못했다. 이러한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 즉 황제 폐하의 이름에 의해서 생기는 일
들이었다.
이러한 명령은 필연적으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 만큼, 그 명령의 결과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노장군은 그런 문제 따윈 애당초 생각해 보려고 하
지 않았다.
노장군은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명령의 수행
을 조금이라도 소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섣불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애국자로
서, 또한 군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주일에 한 번씩 노장군은 직무 규정에 따라서 모든 감방을 순찰하고 죄수들에게 무슨 소
망이 없느냐고 물었다. 죄수들은 가지가지의 청을 다 했다. 그는 그들의 말을 냉정하게 잠자
코 들어 주기는 했지만, 이제껏 단 한번도 실행에 옮겨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요청은 하나
같이 모두 규칙에 어긋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네플류도프는 노장군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마침 종밭의 시계가 가냘픈 종소리로 신을
찬미하는 국가인 '하느님의 영광이 있을 때'를 울리고, 이어 2시를 쳤다. 이 종소리의 음악
을 들으며, 네플류도프는 불현 듯 전에 데카브리스트들의 수기에서 읽은 것을 상기했다.
매시간 되풀이되는 이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종신 징역수들의 마음에 어떻게 만향되었을까에 대해
서 쓴 것이었다. 네플류도프가 그 저택의 마차 대는 곳에서 내렸을 때, 노장군은 어두컴컴한
객실에서 자개를 박은 조그만 테이블 앞에 앉아, 자기 부하의 동생인 젊은 화가와 함께 접
시를 가지고 점을 치고 있었다.
화가의 가늘고 작은 손가락이 노장군의 뻣뻣하고 주름투성
이의, 뼈가 드러난 손가락과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이 깍지낀 두 손의 알파벳을 써 놓은
종이 위에서 엎어 놓은 접시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접시는, '사자의 영혼의 죽은 뒤에 서
로 상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하는, 장군이 낸 문제에 대답하고 있었다.
하인의 일을 맡아 보고 있는 사병이 네플류도프의 명함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는, 접시를
통해서 바야흐로 잔 다르크의 영혼이 말하고 있을 때였다. 잔 다르크의 영혼은 알파벳의 문
자를 한 자 한 자 이어서 '서로 상대를 식별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대답이 종이에 쓰여
졌다.
사병이 들어 왔을 때, 접시는 한번 P자 위에 멎었다가 O자 위로 갔다가, 다시 S자 위로
가서 멎더니 좌우로 뒤뚱거렸다. 접시가 흔들렸다. 왜냐하면, 장군의 생각에 의하면 다음 문
제는 당연히 L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잔 다르크가 영혼은 모든 지상의 것으로부터
자기를 정화시킨 후에 비로소 서로 식별하게 되었다든가, 혹은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해야 했
으므로 다음 문자는 반드시 L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가는 다음 글자는 반드시 V자여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화가는 영혼이
란 에테르체에서 나오는 빛에 의해서 서로 식별하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리라 예측하고 있
었던 것이다. 장군은 굵고 흰 눈썹을 한참 손을 보고 접시가 저절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서
L자 쪽으로 접시를 끌어당겼다.
한편 핏기 없는 푸른 창백한 눈으로 객실의 어두운 한구석
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떨면서 V자 쪽으로 접시를 끌어당겼다. 장군은
자기의 놀이를 방해한 데 대해서 미간을 찡그리더니 얼마 후에 명함을 집어들고 코안경을
썼다. 넓적한 허리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며, 저린 손가락을 펴면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
다.
"서재로 안내해."
"각하, 나머지는 저 혼자 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화가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전 영혼이 거기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좋아, 혼자 해보게."
장군은 엄하고 결단적인 말투로 말한 다음, 다리를 쭉 뻗고 적당히 보조를 맞추면서 성큼
성큼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잘 오셨소." 장군은 네플류도프에게 사무용 테이블 옆의 안락 의자를 권하면서 괄괄한
음성으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온 지 오래 되셨소?" 네플류도프는 온 지 얼마 안 된다고 대답했다.
"공작 부인인 당신 어머니께서도 건강하시오?"
"어머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 참 안되었군. 내 아들 녀석이 당신을 만났다고 하던데."
장군의 아들은 부친과 같은 출세길을 밟아 육군 대학을 나온 뒤 첩보국에 근무하고 있으
며, 거기서 맡은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은 첩보원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난 당신 아버지하고 같이 일하고 있었는데,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 그래 지금은 어디 나
가고 있소?"
"아무데도 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장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사실은 각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좋소, 무슨 일이죠?"
"만인 저의 부탁이 부당한 것이라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저로서는 청을 드리지 않
을 수 없습니다."
"대체 무엇이오?"
"각하, 이 곳 요새 감옥에 구르게비치라는 청년이 수감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안 되면, 책이라도 차입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네플류도프의 청에 대해서, 만족한 빛도 보이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뭇 생
각에 잠긴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실제는 네플류도프의 청원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없었다. 규칙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다만 머리를 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오." 잠깐 틈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면회에 관해서는 황제께서 정하신 규칙이 있으므로 그 규칙이 허용하는 범위라면 허가해
줄 수 있지. 그리고 책에 대해서는 영내에도 도서관이 있어서 허가된 책만을 볼 수 있고."
"그렇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학술 서적입니다.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까요."
"그런 소릴 곧이들어선 안 되오." 장군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공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귀찮게 굴어 보겠다는 것뿐이니까."
"그러나 괴로운 처지에 있으니까 시간을 보낼 무엇인가가 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들은 항상 불평만 늘어놓고 있소." 하고 장군은 반대했다.
"그들의 일이라면 우린 샅샅이 알고 있단 말이오." 장군은 그들이 마치 무슨 불한당인것
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감옥에서 볼 수 없는 편의를 받고 있소."하고 장군
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수감자들이 받고 있는 편의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늘어놓
았다. 마치 죄수들을 살기 좋고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데 이 감옥의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사실 전에는 꽤 가혹하게 대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호강들을 하고 있지. 하루에
세 끼를 먹는데, 그 중 한 끼는 비프스테이크나 비프 커틀릿 따위의 고기 요리를 먹거든. 일
요일에는 그 밖에 더 좋은 일품 요리가 제공되고 말이오. 그래서 모든 러시아 국민이 이와
같은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요."
장군은 딴 노인들과 똑같이, 일단 자기가 잘 알고 있는 화제가 나오게 되면 만족스러울
때까지 되풀이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죄수들이 버릇이 없고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
기 위하여, 수없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서적과 낡은 잡지도 주고 있소. 우리 도서관에는 서적들이 비치되
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좀처럼 읽지 않아.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는 듯하지만, 곧 내
던지 새 책은 반밖에 읽지 않고 나머지는 페이지가 붙은 채로 그냥 남아 있지. 우리는 가
끔 시험을 해보는데 헌책은 아예 집어 본 흔적도 없단 말이오." 장군은 미소도 아닌 야릇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종이를 끼워 놓아 보기도 하지만 그대로 있거든.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글 쓰는
것까지 금하고 있지는 않소."하고 장군은 말을 이었다.
"석판도 석필도 주고 있으니까. 무엇이든지 써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지우고 또 쓸
수가 있거든. 그런데도 역시 그들은 쓰지 않아. 그렇지만 그들은 곧 얌전해지지. 처음 얼마
동안은 떠들어 대지만, 좀 있으면 살도 찌고 몹시 조용해진다고." 장군은 자기가 하고 있는
말 속에 그 얼마나 무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잇는지 조금도 의식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
다.
네플류도프는 그 늙은이의 쉬어빠진 목소리를 들으면서, 뼈가 앙상한 손과 발과 흰 눈썹
밑의 퀭한 눈과 군복 깃에 걸치다시피 하여 축 늘어진 면도질한 볼이며 잔인한 살육의 대가
로 받은, 유난히도 자랑거리로 알고 있는 그 십자 훈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
을 반박하거나, 그의 말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도, 도무지 무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에 대해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오늘 아침 석방 명령이 나왔다는 소식
을 들은 슈스토바라는 여죄수의 일이었다.
"슈스토바? 슈스토바라... 그들의 이름을 낱낱이 외고 있을 수도 없지. 하도 많으니까." 그
는 죄수가 너무 많은 것도 그들의 탓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벨을 눌러 서기를 불러
오라고 일렀다.
서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정직하고 결백한 사람은 특히 황제를 위해서, 또 '조국을 위
해서' 필요하다고 말하고, 은연중에 자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면서
네플류도프도 봉직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긴 했으나, '조국'이라는 말은 곁다리
로 붙인 말에 지나지 않음이 명백했다.
"나는 이렇게 늙기는 했지만 힘껏 일하고 있소."
마침내 불려온 서기는 영리해 보이면서도 불안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는데, 말라서 바삭바
삭 소리가 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나이로서 그는 슈스토바가 어딘가 이상한 요새에 갇혀
있으며 명령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명령서가 오기만 하면 그 날로 석방될 거요.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 두지 않소. 남아 있다
고 해서 고마울 게 조금도 없으니까."하고 장군은 말하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늙은 얼굴을 찡그리게 할 따름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무서운 노인에 대해서 느낀 혐오와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
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노인대로 틀림없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
는 이 경박한 청년, 자기의 옛 친구의 아들에 대해서 너무 엄격하게 다루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의 훈계도 없이 그대로 보내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잘 가요. 그러나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오. 나는 당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얘기
하는 것이니까. 여기 감금되어 있는 무리들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오. 죄가 없는 자라곤
없으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다시 없는 부도덕한 자들뿐이오. 우리들은 그들을 잘 알고 있
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사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것이 사시로가 어긋난다면
자기 자신 마음껏 훌륭한 생활을 누려 온, 존경을 받을 만한 영웅이 아니라 젊을 때부터 자
기 양심을 팔아 왔고, 늙어서까지 계속 팔고 있는 악덕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가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봉직을 해야지."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황제께서는 성실한 인간을 필요로 하시니까. 또 조국을 위해서도."하고 그는 덧붙였다.
"가령 나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봉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도대체 누가
남겠느냔 말야? 그냥 제도를 비판만 하고 정부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네플류도프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너그럽게 내민, 뼈만 앙상
한 큼직한 손과 악수하곤 방을 나왔다.
장군은 불만스러운 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곤 허리를 문지르면서 다시 객실로 갔다. 객
실에는 아까 그 화가가 잔 다르크의 영혼에서 얻은 회답을 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은
코안경을 쓰고 읽었다.
'영혼이 서로 상대를 식별하는 것은 그 에테르체에서 발산하는 빛에 의한다.'
"허!" 장군은 눈을 감고 감탄해 마지 않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어느 영혼의 빛도 똑같다면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묻고, 또 화
가의 손가락을 맞끼고 테이블에 앉았다.
네플류도프의 마차는 문을 나섰다.
"거긴 무척 따분한 곳이죠, 나리." 마부는 네플류도프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기다리다 못해 가버릴까 했습죠."
"사실이야. 참 지리한 곳이야." 네플류도프는 심호흡을 하면서 연기와도 같이 흘러가는 하
늘의 구름과 보트와 기선이 지나간 뒤에 남은 네바 강의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마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
20
이튿날 마슬로바의 사건 심리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대심원으로 갔다. 그
는 벌써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있는 대심원 건물의 장엄한 문 앞에서 변호사와 만났다. 장엄
한 본관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자, 구석구석까지 죄다 알고 있는 변호사는 재판법
제정 연대가 새겨져 있는 왼쪽 문으로 갔다.
기다란 첫 번째 방에서 외투를 벗고, 심의원 전
원이 모였다는 것과 맨 마지막 의원이 방금 들어갔다는 것을 수위로부터 듣자 파나린은 하
얀 와이셔츠의 가슴팍이 보이는 연미복에 넥타이를 맨 채 유쾌하고 자신있는 태도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방 오른쪽에는 큼직한 옷장과 테이블이 있고 왼쪽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는데, 마침 이 때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제복을 입은 의젓한 관리가 내려왔다. 이 방에
서 먼저 눈에 띈 것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신사복에 회색 바지를 입은,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관리가 공손히 서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옷장 곁으로 가더니 훌쩍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 때 파나린은 자기와 똑같
은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동료 변호사를 보고 곧 그와 쾌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
했다. 네플류도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방청인들은 모두 합쳐서 15
명이 있었는데 그 중 두명은 여자였다. 한 사람은 코안경을 쓴 젊은 여자였고, 또 한 사람은
백발의 노파였다. 신문의 명예 훼손 사건의 공판이 있는 탓인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대부분은 신문사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근엄한 제복을 입고 볼이 불그스름하고 잘생긴 정리가 서류를 한 손에 들고 파나린에게로
다가오더니 그가 관계하는 사건이 무엇인가를 묻고, 마슬로바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자 무엇
인지를 기입하고 물러갔다. 이 때 옷장문이 열리면서 그 속에서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 나타
났다. 그러나 양복을 입지 않고 반짝이는 금속 기장을 가슴에 달고 금몰이 달린 옷을 입고
있어서, 그 법복 차림은 흡사 새를 연상케 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에는 그 노인 자신도 당황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여느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입구완느 반대쪽의 문을 열고 허둥지둥 들어갔다.
"저 사람이 베 씨입니다. 모두들 존경하고 있지요." 파나린이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이
어 그는 네플류도프를 그의 친구에게 소개한 다음 그의 가장 흥미있는 사건, 즉 오늘의 소
송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심의는 곧 시작되었다. 네플류도프는 방청인들과 함께 왼쪽 법정으로 들어갔다. 파나린도
다같이 방청석으로 정해져 있는 칸막이 저쪽으로 갔다. 페테르부르크의 변호사만 칸막이 앞
의 테이블 곁으로 갔다.
대심원의 법정은 지방 재판소보다 좁았고 구조도 간단했다. 심의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에는 녹색 나사가 아니라, 금몰을 박아 넣은 빨간 비로드가 덮여 있는 점만이 지방 재판소
와 달랐다. 그리고 다른 재판소에서도 다 비치해 놓은 거울과 성상과 황제의 초상화들이 걸
려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정리가 "개정!"하고 장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일제히 기립하고
법복을 입은 심의원들이 입장하여 등받이가 높은 안락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의젓한 태도
를 보이려고 애쓰면서 테이블 위에다 팔꿈치를 괴었다. 모두가 지방 재판소와 똑같았다.
심의원은 4명이었다. 의장 니키틴은 말쑥하게 면도를 하고 길쭉한 얼굴에 쇠처럼 차가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볼리프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하얀 손으로 사건 기록을 넘기고 있었다.
다음 스코보로드니코프는 곰보에 뚱뚱하고 육중한, 학자 출신의 법률가였다. 네 번째인 베는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다음에 심의원들과 함께 서기관장 겸 검
사국차장이 들어왔다.
그는 말쑥하게 수염을 깎은, 무뚝뚝하고 얼굴빛이 까맣고, 검은 눈에
슬픈 빛이 감돌고 있는 중키의 청년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남자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5,
6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는데도 불고하고, 그가 대학 시절의 가장 친했던 친구의 한 사람
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은 검사국 차장 셀레닌이 아닙니까?" 그는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그 사람이라면 잘 압니다. 훌륭한 사람이죠."
"검사국 차장으로 있는데 수완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부탁할걸 그랬군요."하
고 파나린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그럴 시간이 없군요." 파나린은 시작된 심의에 귀를 기울이면서 속삭
이듯 말했다.
지방 재판소의 판결에 아무런 수정도 없이 채용된 공소원의 판결에 대한 상소심이 막 시
작되었다. 네플류도프는 귀를 기울여, 지금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심의의 의미를 이해하려
고 노력했으나, 역시 여기서도 지방 재판소 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점에 변론이 이르지 않고, 완전히 지엽적인 일만 문제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의되고 있는 사건은 모 주식회사 대표자의 사기 행위를 들춰 낸 신문의 사설 기사에 관한
것이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대표자의 배임 행위가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이라면 그러한 배임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야 하는지의 여부가 마땅히 심의되어야 한다고 생각
했으나, 이에 관해서는 하등의 논의가 없었다.
다만 그런 기사를 게재할 권리가 법률상 신문
발행자에게 있는지 없는지, 또 그것을 게재했다는 사실이 어떤 범죄에 속하게 되는지, 즉 명
예 훼손이냐 중상이냐, 그렇잖으면 명예 훼손죄에 중상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혹은 중상죄에
명예 훼손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하는 문제라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법률 조문이나 판례라
든가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힘든 문제에 관해서만 논의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보고한 볼리프가 어제 자기에게 대심원은 사건의
본질을 심의할 수 없다고 그토록 엄숙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관해서는 분명히
공소원 판결의 기각에 유리한 듯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대해 평소 소극적인 성
격의 셀레닌이 격렬한 어조로 반대 의견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셀레닌이 네플류도프를 놀라
게 할 만큼 열변을 토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가, 주식회사의 대표자가
돈에 대해서는 매우 치사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더군다나 볼리프는 이 사
건의 전날 밤에 그 대표자한테서 굉장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지금 볼리프가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분명히 편파적인 보고를 하는 것
을 보자, 셀레닌은 버럭 화가 나서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의견을 말하
게 된 것이다. 그 반론은 틀림없이 볼리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듯싶었다.
볼리프는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었으나, 입밖에는 내지 않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근엄하면서도 화
가 난 표정으로 다른 심의원들과 함께 회의실로 나가버렸다.
"당신이 어떤 사건에 관계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심의원들이 나가자 정리가 다시 파나린
에게 물었다.
"마슬로바 사건이라고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하고 파나린이 말했다.
"아, 그러셨지요. 그 사건은 오늘 심의가 됩니다만, 그러나..."
"그러나 어떻단 말씀입니까?"하고 변호사가 물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사건이 저쯤 되었으니 심의원들이 판결 후 다시 출정하실지 어떨
지 알 수 없군요. 그렇더라도 말은 해보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무튼 말은 해보겠습니다." 정리는 부전지에다 무엇인가 써넣었다.
사실인즉, 심위원들은 명예 훼손 사건의 판결을 선고한 마슬로바의 사건을 포함하여 나머
지 사건은 회의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며 처리해 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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