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합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21,25)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고 하실 것이며,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그를 예언자로 믿는 군중이 두려워, 그들은 “모르겠소.”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하십니다. 대단한 지혜이십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하늘에서 온 것과 사람에게서 온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영spirit’이 하느님을 향한 것이겠지요.
세례자 요한이지만 그가 ‘하느님의 영Spirit’을 향했기에,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인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그는,
율법을 완성할 “얘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밝혀준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의 회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느님을 향하느냐?
인간을 향하느냐? 내가 누구에겐가 상처를 입었다면,
나는 인간을 향한 것입니다.
내가 인간에게 기대한 만큼 상처를 입기 때문이지요.
상처를 입었다하더라도,
하느님을 향한다면,
안타까운 마음, 안쓰러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입니까?
인간입니까? 인간이 존엄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방법은? 기도와 정화입니다.
I.능동적인 기도와 정화의 방법
1.성서 묵상
1) 기도
(1)매일 미사책의 복음을 2번~10번 읽습니다.
(2)성령께 의탁하여 등장 인물 중에 한 인물이 되어 영화 처럼 상상해서 복음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3)예수님을 만나서 질문을 합니다.
(4)30초~1분 무념무상으로 있습니다.
2)정화
(1)묵상 중에 만났던 예수님을 모시고 생활합니다.
2. 단순기도: 상상으로 기도가 잘 안 될 때 단순기도로 들어갑니다.
1)정화
(1)지성으로 내 앞에 예수성심 계시다고 믿고,
(2)기억으로 내 안에 기억을 다 비워서 예수님으로 채운다는 소망으로,
(3)의지로 내 안에 모든 것을 사랑 자체이신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2)기도
사랑자체이신 예수성심 안에 무념무상으로 30초~1분 머뭅니다.
II.수동적인 기도와 정화의 방법
기억이 다 봉헌되어 없을 때, 몸 봉헌을 시작합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30)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마음으로 순교하면 주님은 진짜 순교로 받아주십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함께 치명된다고 상상하고 함께 순교합니다.
순교된 내 몸을 예수성심 안에 봉헌합니다.
예수님 머리는 내 머리,
예수님 심장은 내 심장,
예수님 손은 내 손,
예수님 발은 내 발이 이미 되었다고 믿고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matthew21,23-27>
23 When he had come into the temple area,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approached him as he was teaching and said,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An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24 Jesus said to them in reply, "I shall ask you one question, and if you answer it for me, then I shall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do these things.
25 Where was John's baptism from? Was it of heavenly or of human origin?" They discussed this among themselves and said, "If we say 'Of heavenly origin,' he will say to us, 'Then why did you not believe him?'
26 But if we say, 'Of human origin,' we fear the crowd, for they all regard John as a prophet."
27 So they said to Jesus in reply, "We do not know." He himself said to them, "Neither sha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do these things.
<책 소개> Part05
불황에도 끄덕없는
‘창재’로 거듭나라
창재는 위기 대처 능력이 탁월하다.
이들이 본격적인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은 회사가 위기 상황에 빠질 때다.
기막힌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해 낸다.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스타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이들의 능력이 타고난 게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24)
천재보다 환영받는 이름, 창재
천재의 기준은 한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다. 선천적이며 독창성이 있다.
창재의 기준은 사회적으로 창조적이면서 성공한, 유능한 사람들을 말하며, 후천적이며 문제해결 능력이 탁월하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27-229)
창조력은 생존의 문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알게 모르게 창조적 학습이 진행 중이다. 대입 논술 고사가 그 좋은 예이다. 수업도 물론이지만 시험에도 어떻게든 창조성을 자극하려는 문제가 출제된다. 특히 모의시험이나 입시에선 창조성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공부도 창조의 과정이다. 요즈음 입시 문제는 수학, 과학, 사회 등이 뒤엉켜 있어 어느 과목의 문제인지도 알 수 없다. 학생의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틀에 박힌 학교 교과서만 달달 외운 학생은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낼 응용력이 없다.
학교만이 아니다. 회사 입사 시험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입시와 승진도 창조성이 좌우한다. 회사도 새로운 변신과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면 서서히 기울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지 않고 잘나가는 명품에만 의존했다가 문을 닫은 기업이 어디 한둘이던가.
길거리에 나가 보면 번뜩이는 창조성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간판부터 실내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쳐흐른다. 음식점들은 계속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손님들이 먹어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끔 만든다. 창조성 교육을 따로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재나 영재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주인 의식, 변/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창조의 계기가 되고, 바탕이 되었다.
천재와 수재는 선천적인 면이 강하지만, 창재는 후천적 능력이 만든다. 미래는 이런 창재들의 무대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낡은 것에 쉽게 식상해하는 습성이 있다. 새것에 대한 거의 병적 강박증이다.
이제 창조는 생존의 전략이다. 문제는 창조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 다시 강조하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 해도 넓게, 깊게,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창조는 시간 싸움이다. 한발만 늦어도 허탕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30-232)
최고의 창재,
빌 게이츠의 비밀 많은 사람이 빌 게이츠를 천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로보면 그는 천재가 아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세계 최초의 무언가를 독창성 있게 창조해 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서보면 오히려 매킨토시 컴퓨터인 애플의 OS 를 개발한 스티브 잡스가 독창적인 천재다.
빌 게이츠는 탁월한 비즈니스맨이자 아이디어맨이다. 창재다. 그는 19세 때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설립했다. 10대부터 컴퓨터에 몰두해 초인적 에너지와 기발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부호가 된 것이다.
그의 탁월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는 윈도 95를 심야 0시에 첫 발매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지금 안 사면 놓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소비자들이 점포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의 몰입도와 집념, 초인적인 에너지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가 사업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무슨 일이든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주문 날짜를 맞추었다. 한 번 거절하면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지않을 것이라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업이 승승장구할 때도 ‘누가 나를 따라잡기는 않을까’ 하면서 항상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나 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긴장하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그의 오늘은 이러한 ‘불안의 힘’ 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의자에 앉으면 몸을 앞뒤로 흔드는 그의 습관도 어쩌면 불안을 털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일지 모른다. 사실 그렇게 몸을 리듬감 있게 움직일 때 세로토닌 분비가 촉진되어 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도수 높은 안경, 헝클어진 머리칼, 제멋대로의 복장, 맥도날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는 그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몸을 흔들며 소년 같은 웃음을 지을 때면 전혀 세계적 부호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의 천진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쓸데없는 데 정력이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철저한 비즈니스맨이다.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하버드 대를 중퇴한 것반 봐도 그렇다. 그는 세상 어떤 것보다 실익을 앞세운다./
그리고 그의 성공 요인 중 또 하나는 높은 임큐(EQ)다. 그것이 훌륭한 비즈니스 파느너를 얻게 했고, 세계적 규모의 사업을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 되었다. 사전적 의미의 천재라기보다는 성공적 비즈니스맨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한 현대판 창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업가 기질을 보여 주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이기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못 이기는 인간의 변명일 뿐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33-235)
—//—
제1장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352 “나는……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20,2)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전능하신 분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이 우리의 하느님이요 주님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도 그분 위에 모실 수 없고, 그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되며, 어떤 일이나 사람에게 그분보다 앞서는 우선권을 주어서도 안됩니다. 하느님을 인식하고 섬기며 흠숭하는 일이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인 우선권을 지닙니다.[2083-2094, 2133-2134]
십계명은 결코 임의로 부과된 의무가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기주의와 증오와 거짓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줍니다. 십계명은 인간을 종으로 만드는 모든 거짓 신들, 즉 하느님을 몰아내는 자기애와 권세욕과 향락 추구를 겨냥하는데, 그것들이 법질서를 무너뜨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이 지닌 인간다운 품위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시나이 산에서 한 말, 2002년 2월 26일)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온전한 믿음을 보이기를 고대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에게 두고, 사랑의 모든 능력을 그분에게 쏟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81)/
아부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다른 모든 계명들의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십계명의 첫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4,19)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82)
제1장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208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를 이 말씀으로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태22,37)(루카10,27 “네 마음을 다하고….” 참조). 이것은 바로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신명6,4)라는 장엄한 부르심에서 울려 나오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 십계명은 먼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한다. 이어서 계명들은 인간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의 응답을 제시한다. 제1절 첫째 계명
너의 하느님은 나 주님이다. 바로 내가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다.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출애20,2-5)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마태4,10)
I. “너희 하느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섬겨라”
->2084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59)/
이끌어 내었다.”(신명5,6)고 말씀하시는 그 백성의 역사 안에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해방시켜 주시는 당신의 행업을 상기시키심으로써 당신을 알리신다. 첫째 말씀에는 율법의 첫째 계명이 담겨 있다.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경외하고 섬겨라……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가면 안 된다”(신명6,13-14). 하느님의 첫째 요청과 정당한 요구는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흠숭하라는 것이다. ->2085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께서는 먼저 당신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신다.(출애19,16-25; 24,15-18 참조). 인간의 소명과 진리에 관한 계시는 하느님에 관한 계시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창세1,26) 창조되었으니, 이에 걸맞게 자신의 행업으로써 하느님을 드러내는 소명을 받았다.
트리폰 씨, 태초로부터……우주를 창조하고 질서 지어 주신 신 외에 다른 신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며, 태초부터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께서 당신들의 신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조상들을 “그분의 힘있는 손과 팔을 들어”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어떤 신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당신들과 같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2086 “첫째 계명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포함한다. ‘하느님’ 이라고 하면, 한결같고 변함이 없으며 항상 동일하신 분, 성실하고 악이 전혀 없는 온전히 의로우신 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그 누가 전능하고 인자하며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호의와 애정을 생각하면, 누가 그(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60)/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계명의 시작과 끝에 ‘나는 주님이다.’ 라고 반복하신다.”(‘로마 교리서’, 3, 2, 4: P, Rodriguez 편(바티칸-팜플로나 1989), 408-409면) 믿 음 ->2087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계시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안에 우리 윤리 생활의 원천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복종’ 을(로마1,5; 16,26 참조) 첫째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무지’ 가 모든 도덕적 탈선의 시작이고 이유라고 설명한다.(로마1,18-32 참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증언하는 것이다.
->2088 첫째 계명은 현명하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믿음을 기르고 지키며, 믿음과 대립되는 모든 것을 물리칠 것을 요구한다. 믿음을 거슬러 짓는 죄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다.
믿음에 대한 고의적 의심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고 교회가 믿으라고 제시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의심하는 것은 믿기를 망설이거나, 신앙에 대한 반론이나 신앙의 어두움으로 생겨나는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심을 고의적으로 키우면, 정신적으로 소경이 된다. ->2089 불신은 계시 진리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동의하기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단(異端)이란 세례 받은 후 거룩한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이고, 배교(背敎)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며, 이교(異敎)란 교황에게 순종하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61)/ 나 그에게 속하는 교회 구성원들과 친교 맺기를 거부하는 것이다.”(교회법 제751조)
희 망 - >2090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을 부르실 때,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사랑에 온전히 응답할 수 없다. 인간은 그 사랑에 응답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의 계명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께서 주시기를 바라야 한다. 희망은 하느님의 복과 지복직관을 확신에 넘쳐 기다리는 것이다. 희망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2091 첫째 계명은 희망을 거스르는 죄, 곧 절망이나 자만과도 관련된다. 절망으로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 주시거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버린다. 절망은 하느님의 선함과 의로움과(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성실하시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로움을 거스르는 것이다.
->2092 자만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늘의 도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자만하는 형태도 있고, (회개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용서를 얻고 공로 없이도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를 과신하는 형태도 있다. 사랑
->2093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진실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라는 요청과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계(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62)/
명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보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명한다.(신명6,4-5 참조) ->2094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여러 가지로 죄를지을 수 있다. 무관심은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 사랑의 힘을 부인하는 것이다. 배은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냉담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주저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며, 그 역동적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영적 게으름(acedia)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증오는 교만에서 비롯된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죄를 엄단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여겨 저주하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63)/ 간추림 ->2133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6,5).
->2134 첫째 계명은 인간에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