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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예레미야애가 5장 1-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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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성경책의 이름은 책의 처음 단어를 따서 지었습니다. 창세기는 책 이름이 처음에(베레쉬트), 출애굽기는 이름들(쉐모트), 민수기는 광야에서(베미드바르), 신명기는 말씀들(데바림) 이런 식으로 책의 시작하는 첫 글자가 책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책인 예레미야애가의 이름도 첫 글자인 ‘에카’라는 단어인데, 이 뜻은 “슬프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에카”와 한자인 “애가(哀歌)”가 발음이 비슷합니다. 에카라는 단어는 1절 1절의 처음에 나오고, 2장 1절, 4장 1절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책이 슬픔에 젖어 예루살렘의 멸망과 비탄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노래한 책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애가를 예루살렘멸망기념일(성전파괴기념일 – 아브월<현 7~8월> 9일)에 낭독하며 비통의 날을 기억하며 지냅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념일을 ‘티샤베아브’라고 부르며 지금도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날은 단식하는 날로 음식과 일체의 물을 마시지 않으며 목욕도 하지 않습니다. 기름이나 향수도 바르지 않고 가죽신을 신지 않습니다. 물론 일도 하지 않고 부부간에도 잠자리를 멀리합니다. 사람들은 슬픔을 함께 한다는 의미로 마룻바닥에서 돌베개를 베고 잡니다. 회당에서는 불을 꺼서 성전 파괴당시 암흑상황을 재현하고, 회당 안에는 검은 휘장을 치고, 회중들은 바닥에 앉아 구슬픈 음성으로 기도를 합니다.
예레미야는 실제로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잡혀가는 상황을 라이브(직접)로 목격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쓰시는 선지자이기 전에,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의 심정으로 자신의 나라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당시의 참혹한 참상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탄에 젖어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복잡한 심경을 다섯 장의 애절한 노래에 담아 기록했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책이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성경에는 개인적인 애가(슬픈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다윗은 사울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가를 지어 불렀고, 욥기 3장과 17장에서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애가로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예루살렘을 위한 예수님의 애가도 있습니다.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른 선지자들은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 미가 선지자가 있습니다. 이 많은 애가들 중에서 예레미야의 애가가 가장 비통하고 심금을 울리는 슬픈 노래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을 줍니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의 강제 합병을 경험해 본 분들, 그리고 6.25 전쟁을 겪어본 세대들은 그 시대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패망한 예루살렘 성에서는 점령군에 의해 무자비한 살육으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살육과 약탈, 방화와 겁탈의 광풍이 지나갔습니다. 극심한 공포와 수치 속에서 그나마 버려지듯 남아있는 자들은 슬픔의 울음도 메말라 버렸습니다. 넋 나간 사람들이 방황하는 폐허가 된 성은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유령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예레미야는 비탄과 낙심에만 빠져 있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부르짖음과 기도를 행한 몇몇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성경은 남은자들(the remnant)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렇게 영원토록 고통 받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나라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피를 토하는 비탄과 절규의 애가를 노래하면서,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열망을 담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인 애가의 마지막인 5장은 ‘긍휼을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않고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요청하는 절절한 간구의 부르짖음입니다.
1-18절 까지는 패망한 백성들이 겪고 있는 상황 등을 낱낱이 고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아뢰며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5장이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죄의 대가는 달게 받겠으나, 현실적인 고난이 너무나도 힘들다는 인간적인 솔직함을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합니다.
“당한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당할 만큼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하면 됐으니 좀 멈추시면 안 됩니까?”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희는 당해도 마땅합니다.”라고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말입니다. 또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지금도 쎄게 당하고 있으니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읍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한 치욕을 살펴보옵소서”라는 말도 항변하는 내용이 아니라,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간구입니다.
“살펴보옵소서”라는 히브리어는 “주목하여, 주시하다”라는 두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상으로 “본다”라는 뜻입니다. 뜻이 비슷한 두 단어를 연속해서, 그것도 명령형으로 쓴 것은, 하나님이 긍휼하심으로 꼭 보아주실 때임을 절실하게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치욕을 살펴보옵소서”라는 말에는 예레미야의 너무나도 간절함이 베여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심한 고통을 당하면 절규한다는 말을 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술작품인 뭉크(에드바르트 뭉크-노르웨이)의 ‘절규’라는 작품을 연상해 보십시오. 절규 한다는 표정이 잘 연상이 되실 것입니다.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처럼, 너무나도 힘들어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이 기도하는 모습이 1절에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부르짖고, 인정하고 시인하는 기도, 치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애절한 기도가우리의 삶에서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내 자신이 잘 안되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만인 앞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공개한다는 것은 발가벗기는 수치를 당하더라도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지 당하겠다는 자기 포기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꺾고 백기 투항 하는 행동이니 보통의 다짐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다~나 때문입니다”라고 입을 여는 것이 긍휼을 구하는 기도의 시작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돌이킴의 의지를 진심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들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어렵게 된 것은 모든 원인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방향을 하나님께로 맞춥니다. 내 것 포기합니다. 하나님 말씀 안 들은 것 후회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집나간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하나님께로 시선을 향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는 것이 긍휼을 구하는 자의 자세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정하고, 들이키려는 자세로 기도하는 자만이 긍휼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가 아니면 수 백, 수 천 번,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목숨이 있어도 다 부지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죄인입니다. 괜한 자존심을 부려서 지금 안 되는 상황을 자꾸 고집부리지 말고 한 시 바삐 긍휼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완성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이십니다. 십자가의 사랑, 부활의 권세와 능력, 영원한 나라의 소망은 긍휼하신 은혜로만 소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면 나는 종의 신분이 되기 때문에,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주인행세를 하다가는 치욕과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치욕을 당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긍휼하신 은혜 아니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긍휼하심이 없다면 용서도 없고, 감사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잠시의 치욕은 주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가려질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주님 앞에 내가 현재 당하고 있는 치욕과 수치를 꺼내 놓으십시오.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기도의 자리와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수치, 말씀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삶의 실패와 좌절의 치욕, 감사가 없이 교만함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수치, 사랑 없음으로 독선과 비판에 열을 올려 대적자를 만들어가는 치욕, 내가 잘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막아버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수치.....너무나 많은 치욕과 수치들을 부끄럽지만 다 꺼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긍휼을 구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구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광명교회 모는 교우들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십자가 앞에 “치욕을 살펴보옵소서!”부르짖으며 긍휼을 구하는 기도로 나아가는 사순절 기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절에서 18절까지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고 있는 치욕의 내용이 구구 절절히 열거 됩니다. 2절에서는 기업, 즉 땅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기업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선물입니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언약의 결과물을 빼앗겼으니 회복시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외국인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제주도 같은 경우는 토지소유주가 외국인, 특히 중국 자본의 진출로 중국인의 토지 소유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제주도는 이미 중국 땅이 됐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니 심각한 수준인 것 같습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외국인들에게 넘어 갔으니, 그것도 하나님이 그토록 갈망하던 가나안 땅을 주셨는데 다 빼앗겼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신세가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비참한 집단인 고아와 과부가 됐다고 합니다. 4절에서는 물과 나무, 그냥 흔하게 취할 수 있는 것도 다 돈을 주고 구해야 하는 신세라고 합니다. 우물은 다 메꾸어졌고, 산은 다 불타서 어느 것 하나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자품귀 현상이라 부르는게 값입니다. 5절에서는 사람의 신체 중에서 숨을 쉬는 가장 중요한 곳인 목이 눌렸다고 합니다. 사나운 짐승이 먹이를 사냥하면 가장 먼저 숨통을 송곳니로 막습니다. 잡혀서 죽게 된 사냥감처럼 이러한 지경이 지금의 이스라엘입니다.
6절에서는 애굽 사람,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며 식량을 얻습니다. 선민이라고 자부하며 살았었는데 이방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치욕인데, 거의 구걸하다시피 식량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9절에서는 도시 외곽을 벗어난 광야에서는 칼로 죽이고 식량을 탈취하는 살벌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10절에서 “굶어서 피부가 아궁이와 같이 검었다”라는 말은 극심한 영양실조로 피부가 윤기가 없고 검붉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가죽만 남아 뼈가 드러날 정도의 아사 일보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11절에서는 부녀들과 처녀들이 욕을 보입니다. 전쟁이 나면 여자들은 무방비 상태로 성 노리개로 전락합니다. 승전국가의 군인들에게 승리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여성들을 마음껏 하라고 전리품으로 내어주는 것이 야만족의 특징입니다. 12절에서는 지도자들(유다 혈통의 왕족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고문을 위해 손을 묶어 공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나이 많은 장로들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지위가 박탈되어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취급(평범한 노인네)당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청년들이 득세하고 부녀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약자가 됩니다.
13절에서는 청년과 아이들이 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입니다. 한참 나이에 잘 먹고 잘 놀고 꿈을 꾸며 자라나아 하는데 강제노동에 시달림을 당합니다. 14절에서는 노인들은 성문에 앉아 쉬던 옛 날의 편안한 여가 생활을 못하며 먹을 것도 갈 곳도 없는 신세입니다. 노인이라도 더 이상 쉼터가 하나도 없습니다. 15절에서는 무너진 신앙공동체가 묘사되면서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만 남은 영적 상실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16절에서는 신앙의 근본인 면류관이 머리에서 떨어져서, 구원이 빛이 사라졌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가장 핵심이고, 인간이 누려야 할 최고의 은혜입니다. 면류관이 떨어진 것을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면서,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18절에서는 시온산(예루살렘성)이 여우가 거닐 정도로 황폐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동물들이나 오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현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교회도 술집이 되고 유흥의 장소로 바뀝니다. 더 심하게는 다른 신을 섬기고 절하는 장소로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고통과 저주가 이스라엘에 임했습니다. 패망한 유다 백성들이 당한 굶주림과 악제,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죽지도 못하고 비참한 몰골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암담한 하루하루를 그냥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의 애가를 들으면서 우리는 반성하고 가슴이 뜨끔해야 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와 내 자손들이 이런 상황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떠나면 이렇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알면, 저런 고통이 내 일이라는 심각함을 갖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19-22절을 통해서 주권자요 심판자로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최종적으로 간구합니다. 19절에,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무한히 찬양하고 경배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다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만이 왕이요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가장 높이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원히 잊어버리고 버리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회복시키실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심판의 날들이 하루빨리 가게 해달라고 탄원합니다. 21절에서는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달라고 하는지 비로소 그 요구 사항을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가고 싶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으니 주님께 시선과 마음을 맞출 수 있도록 결정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라는 말은 지금의 심정만큼은 진심이고 바꾸지 않을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달라는 호소입니다. 예레미야는 오직 한 가의 긍휼, 바로 옛 적 같이 주께로 돌이키는 것을 구합니다. 주께로 돌이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회하고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과녁을 벗어난다는 뜻이니, 다시 주님께로만 과녁을 겨냥하겠다는 간절한 회개를 드리고 있습니다. 진심은 하나님이 다 아실 것이고, 반드시 통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절인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잘못했어요. 저 버리시면 안돼요.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너무 힘들고 아픕니다” 예레미야는 21절 까지 기도를 하면서도 눈물을 흘렸겠지만, 이 마지막 말을 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이 슬프고 처절한 긍휼의 기도를 다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께 통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애가는 슬픈 노래입니다. 울면서 기도하는 노래입니다. 여자는 눈물이 무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 흘림으로 인해 동정심을 유발해서 불리했던 상황을 역전시키거나 불합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도 합니다. 남자들끼리는 여자의 눈물에 속지 말라는 말을 자주 나눕니다. 여자든 남자든 눈물은 참 뜻이 있을 때, 마음이 감동이 올 때 흘리면 아름다운 모습이 됩니다. 진심의 눈물을 흘리는 자는 참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흘려야, 진심으로 참회해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은 긍휼하심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그 모진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그 치욕이 있었기에 주님께 우리의 죄에 대해서 긍휼함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울어야 합니다. 가슴을 찢으며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주님이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제가 주님께로 돌아가겠으니, 주께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십시오. 이 한 가지만 간절히 바랍니다” 울며 엎드리어 간절히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사순절이 바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패망의 이스라엘이 겪은 고통의 상황이 나와 우리가족과 이웃의 끝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매 맞을 수 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는 슬프고 아파서 눈물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걸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께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진심으로 참회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긍휼하심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모든 슬픔을 거두어 가시고 다시 옛적과 같은 기쁘고 평안한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용서와 회복의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주께로 돌아가겠다”는 진심을 담아서 울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면서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서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사순절 기간에 모든 치욕과 수치에서 벗어나서 긍휼의 주님께로 다시 돌아서실 수 있기를, 한 없이 긍휼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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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죄악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 지경인지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의 기도가 오직 다시 주께로 돌이키겠다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과 언어도 다 주님께로 돌아가겠다는 참회와 고백이 일어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나와 우리 교회와 가정과 이웃들이 다 주께로 돌아가 처음사랑과 약속을 주셨던 옛적 좋은 시간의 모습과 같이 영원하신 주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긍휼을 베푸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잠언 26장 27절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