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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참고말씀: 시3:5; 107:28,29; 119:71; 마15:28; 16:24; 막4:37,38,40,41; 9:24; 눅8:25; 17:5; 22:32; 요16:33; 롬8:17; 고후11:23-27; 골1:24; 딤후3:12; 히13:5; 약1:2-4
읽을말씀: 마8:23-27
주제말씀: 마8:23,24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첫째, 예수님을 따라가도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마8:23,24)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풍랑도 만날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배를 타고 가다가 갈릴리 호수 한 복판에서 무엇을 만났습니까? 풍랑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23,24절) 물결이 얼마나 세차던지 배가 어떻게 될 지경이었습니까? 물결에 다 덮일 지경입니다.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24절 중) /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4:37)
이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 배에 아니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같은 배에 타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24절 하) 예수님이 안 계셨던 것도 아닌데, 왜 제자들은 이 같은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모를까 왜 그들은 이런 위기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도’ 얼마든지 인생의 풍랑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이 동행중이셔도’ 언제든지 인생의 광풍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거의 항상 주님과 동행중이었지만,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수없이 매를 맞기도 했으며,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으며, 파선 당하기도 했으며,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11:23-25)
전도여행 중에 강에 빠져 죽을 뻔했고, 강도를 만나기도 했으며, 동족들로부터 숱한 핍박과 비방을 받았으며, 이방인들로부터 각종 위험을 당했으며, 거짓 형제들로 말미암아 여러 번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며, “여러 번 여행을 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11:26)
잠을 못하고 주리거나 목말랐으며, 굶고 춥고 헐벗었던 것입니다.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7)
그러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생각은 금물(禁物)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풍랑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즉 예수님과 동행하면 고난도, 슬픔도, 아픔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은 주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일관되게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기쁨과 즐거운 길임과 동시에 ‘고난의 길’이라는 점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러므로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 어찌 해야 합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즉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도 온전히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기쁘게 여길 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역발상’(逆發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어차피 맞닥뜨려야 하는 풍랑이라면 당당하게 즐겨야 합니다. 즐기는 사람은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발리 갑니다.’(새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 2절)라는 가사처럼, 부정적인 생각으로 주눅 들거나 낙심하는 대신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쁨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 또 어찌 해야 합니까? 인내해야 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고난의 기나긴 터널을 곧 다 지날 수 있고, ‘조금만 더 참으면’ 칠흑 같은 이 어두운 밤이 다 지나고 새 아침을 맞을 수 있으며, ‘조금만 더 견디면’ 인생의 안개가 걷히고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되며, ‘조금만 더 버티면’ 온전하고 구비되어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
둘째, 인생의 풍랑을 만나도 예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8:25,26)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인생의 풍랑을 만났다면 이제 어찌 해야 합니까?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와 동행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24절 하)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십여 리나 떨어진 육지에 머물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니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 홀로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계셨습니다. 그것도 고물(배의 끄트머리)에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막4:38 상)
그러니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어도 어찌했어야 했습니까? 죽을까봐 두려워하거나 무서워서 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같은 배에 타고 계시는데, 설마 그들이 죽도록 내버려두셨겠습니까? 그들의 다급한 처지를 나 몰라라 하셨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하)
그러나 실제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러다가 자신들이 다 죽겠다고 아우성 쳤으며,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절) 공포에 사로잡혀서 어찌 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26절 상) 단체로 패닉(panic)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입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던 그들이 어쩌다가 이리 되고 만 것입니까? 예수님의 발언으로 살펴보건대, 믿음이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에 죽을까봐 두려워했고,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에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26절 중) /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2 상)
혹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인생의 풍랑 앞에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 몸이 휘청거리고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서 하늘이 샛노랗게 변하고 탄식소리나 신음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옵니까? 생각지도 못한 위기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다 죽었구나’라고 체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혹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믿음이 작아진 것은 아닌지 급히 진단해보기를 원합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 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어떤 사본에, 어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눅8:25 상)
만일 그렇다면 무엇부터 회복하기를 힘써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9:24 하) /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17:5) 그래야만 문제가 생겨도 예수님을 믿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해결해주실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기다렸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곧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도 칭찬해주셨을 것입니다. 수보로니게 여인에게 그리 하셨던 것처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 상)
지금 우리는 인생의 풍랑을 만나도, 곧 문제 생겨도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원컨대 배가 물결에 다 덮이게 된 상황에서도 곤히 주무실 수 있었던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24절 하)
참고로,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 곤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까? 항상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드신다는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3:5) 우리도 이런 확신을 가짐으로써 풍랑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인생의 풍랑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8:26,27)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상황을 정리해주시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주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아주 잔잔하게 해주심으로써 입니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26절 하)
지금 우리가 만난 인생의 풍랑도 이렇게 아주 잔잔해지기를 원합니다. 거짓말처럼 고요해지기를 원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평온해지기를 원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시107:28,29)
그러고 보니 무엇도 주님의 명령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까? 바람과 바다입니다. 즉 인생의 그 어떤 문제도 주님의 말씀 앞에서 순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7절 하)
한편,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더 깨달았습니까? 예수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7절)
이런 점에서 우리 앞에게 닥친 모든 인생의 풍랑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교보재(敎補材), 곧 예수님과 그 도를 더욱 알아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4:41) /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눅8:25 하)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러므로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이 풍랑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되, 구체적으로 주님이 어떤 점을 알아갈 수 있는지를 묻고 또 배워가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왜 사람들은 인생의 풍랑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집니까? 왜 우리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게 됩니까? 우리 중에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계신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생의 풍랑을 통해 우리 중에 계신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있습니까? 원컨대 지금의 이 풍랑을 통해 주님을 더욱 온전히 알아가고 또 의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남악주안교회] 수요저녁예배 (250528) - https://youtube.com/live/amRMNKTI_Rk?si=RBxpfYVS39D5W2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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