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기를 보는 두 개의 시각 : 구리 박사와 코코아 선생, 누가 옳을까?
200804-세계경기를 보는 두 개의 시각.pdf
미래를 내다보는 구리 박사
미래 경제에 대한 예측은 비단 경제학자에게만 주어진 숙제는 아닐 겁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동네에서 장사를 하는 가게 사장님들부터 국가의 경제정책을 설계하는 당국자까지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모든 인간에게 경제예측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습니다. 하지만 경제예측은 매우 지난(至難)한 일입니다. 변수가 워낙 많고 복잡해서 종종 일기예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 어려운 작업을 돕기 위해서 많은 선행지표들이 나와 있는데요, 국제원자재시장도 선행지표의 하나로 유용하게 쓰입니다.
대표적인 품목이 바로 구리입니다. 동(銅)으로도 불리는 이 비철금속은 전기전도성과 열전도성이 우수하고 합금성이 용이해 각종 전기전자제품 재료, 전기선, 동판, 동관, 각종 기계부품재료, 건축재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한마디로 스마트폰부터 주택까지 안 들어가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용처가 다양한 만큼 수요와 가격이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성이 있어 시장에서는 구리를 경기예측의 참고지표로 활용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구리 박사가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구리 박사의 성적표는 어떨까요? 부침이 있는 편입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2001년 IT 버블 붕괴 당시 구리 가격은 1년 전부터 약세를 나타내며 뚜렷한 선행성을 보였고, 2012~2016년 구리 가격의 장기약세는 세계 성장률의 하락과 궤를 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위기 직전까지 고공행진을 지속하며 별다른 경고음을 내지 않았고, 위기가 터진 이후에는 동행 내지 후행하는 모습을 보여 체면을 많이 구겼습니다. 2011년에도 예측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소시에떼 제네랄은 ‘구리 박사는 죽었다(Dr. Copper is dead)’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구리 가격을 경기의 가늠자로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산업재로서 구리의 수요는 유지될 수 밖에 없고, 특히 투명성이 부족한 중국 경제 현황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구리 박사가 때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 어떤 지표도 미래를 항상 정확히 맞추지 못한다는 점에서 구리 박사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구리 가격과 미국 제조업구매관리자지수(PMI) 비교>
구리 박사의 아성에 도전하는 코코아 선생과 커피 선생
국제원자재시장에 구리 박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유, 코코아, 커피, 금, 옥수수 등 다른 품목들도 예측 지표로 활용되곤 합니다. 원자재는 수요와 가격이 경기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많은 품목들이 경기에 선행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구리 박사라는 용어는 광의적으로 모든 원자재의 경기선행성을 의미한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예측 지표로 꽤 자주 활용되는 품목들이 있습니다. 바로 코코아 선생과 커피 선생입니다. 스케일이 구리에 비해서 작아 박사 타이틀을 달 정도는 아니지만, 가격 움직임을 보면 가계의 소비심리와 고용상황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코코아는 일종의 사치재라 할 수 있는 초콜릿과 과자의 원료로서 불황기(호황기)에 수요가 감소(증가)하는 경향이 강해 가계의 소득 현황과 구매욕구를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코코아 가격을 글로벌 경제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척도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커피는 흥미롭게도 실업률과 연관성을 가집니다. 즉 커피 수요의 감소는 실업의 증가를 반영하는데, 특히 집 밖에서의 커피 수요(consumption outside of the home) 증감 여부가 실업률을 잘 설명한다고 일부에서 주장합니다.(출처 : 미국 커피협회. National Coffee Association of USA) 다만 최근에는 스타벅스 등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에 대한 충성고객이 늘어나면서 커피 선생의 예지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코코아 가격과 미국 미시간大 소비자심리지수 비교>
이 밖에 금은 예로부터 고물가 및 달러 약세에 대한 헤지용으로 활용되어 왔다는 점에서 인플레이션과 달러화 예측에 특화된 원자재이며, 옥수수 등 곡물은 소위 애그플레이션(농산물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인플레이션을 전망하는 데 유용하게 쓰입니다.
원유의 경우에는 좀 특별합니다. 원자재 중의 원자재이며 사용처가 구리를 능가한다는 점에서 박사 학위를 서너 개 수여해도 부족하지만 예측 지표로 잘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원유가 실물자산인 동시에 금융자산이며 정치적 자산인 탓에 수요와 가격에 미치는 변수가 너무 많아 정작 경기요인을 제대로 반영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기예측 시 유가를 전적으로 무시해서는 안되고, 참고 지표로는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구리 박사와 코코아 선생이 보내는 상반된 시그널
런던금속거래소(LME)의 구리 선물가격은 8.3일 톤당 $6,490로 3.23일 저점에 비해 40%나 상승했습니다. 연간으로는 5% 높은 수준으로 차트 상으로 명백한 V자형 반등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향후 전망도 밝습니다. 경기부양을 위한 중국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예고되어 있고 주요국들도 경기부양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어 수요 기반이 탄탄한 상황이고, 반면 공급은 핵심 생산국인 중남미에서 코로나19 확산과 잦은 파업 등으로 광산들의 폐쇄가 속출하고 있어 구리 가격 상승세가 하반기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시각이 많습니다. 구리 박사의 관점에서 보면 향후 세계경제 전망은 상당히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코코아 선생과 커피 선생의 입장은 다릅니다. 인터콘티넨탈거래소(ICE)의 코코아 선물가격은 8.3일 톤당 $2,469로 최근 2주 사이 반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2월 중순의 연중 고점에 비해 17% 낮은 상황이고, 커피 선물도 파운드당 ¢117.90로 3월 중순의 연중 고점보다 9% 낮습니다. 아직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코로나19 재확산 우려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 수요 회복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코코아 선생과 커피 선생이 보는 미래는 어둡다고 하겠습니다.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구리 박사와 코코아 선생은 요긴한 참고 지표
구리 박사와 코코아 선생 중 누가 옳을 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현재의 양측 간 이견(異見)은 시장 컨센서스 부재(不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기업의 생산, 즉 공급측면에서는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표출되고 있는 반면 소비자의 구매력, 즉 수요측면에서는 향후 경기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것으로 중간 정리를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같은 초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다양한 지표들의 움직임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검토하는 것이 예측 오류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구리 박사와 코코아 선생 등 국제원자재는 이런 관점에서 매우 요긴한 참고 지표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가격 움직임에 내포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도 지금보다 훨씬 넓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