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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사도행전16장 13~34절 2003년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기독교는 지금 우리의 문화와 같이 기독교에 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 속에 탄생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에 대해 듣는 사람들은 이를 위험하고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의 진리에 대한 사례들은 너무도 강력해서 전체 사회를 변화시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상류계급이었던 데오빌로에게 쓰여진 책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서 이러한 기독교의 메시지들과 진리의 사례들을 봐왔습니다.
오늘은 포커스를 살짝 바꿔서 메시지들이 무엇인가보다는 어떻게 그 메시지들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전달되었으며,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경의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개종(conversion) 사례들이 나옵니다. 특히 16장에서는 바울 일행들이 빌립보에서 교회를 개척했으므로 당연히 많은 개종의 사례들이 있었을게 틀림없습니다만, 누가(Luke)는 오늘 본문의 3가지 케이스를 선택해서 얘기합니다. 마치 과학적으로 선택한듯이요. 이 3가지 개종 케이스들은 우리에게 크리스챤으로의 개종이 각기 얼마나 다른지와 동시에 또한 얼마나 서로 비슷한지를 보여줍니다.
크리스챤이 된다는건 무엇인가?
어떻게 크리스챤이 되는가?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려주기 위해서 누가가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3가지 케이스를 살펴보겠습니다.
루디아와 여종 그리고 간수입니다.
루디아 케이스는 종교적인 자에게로의 복음이며, 여종의 케이스는 억압받는 자에게로의 복음이며, 간수의 케이스는 세속적인 자에게로의 복음입니다.
첫번째 케이스로 루디아부터 보시겠습니다. 먼저 루디아의 프로파일을 보겠습니다. 당시 자주색 염료는 매우 비쌌으므로 그녀가 자색 옷감 장사라는 의미는 그녀가 자기 사업을 하는 명품 패션업계의 CEO로서 요즘으로 치자면 햄튼(뉴욕의 부촌)에 아파트를 소유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다른 한가지는 그녀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하나님을 섬기는'이라는 의미는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기쁘게하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을 구하는 이방인을 의미했습니다.
바울 일행들이 기도할 곳을 찾아 문 밖 강가에 나갔다는 의미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장소 즉 일종의 초창기 회당에 갔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음은 어떻게 루디아에게 왔을까요? 루디아에게 복음은 합리적인 담론을 통해서 왔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respond) 하신지라'에서 respond는 끌렸다는걸 의미합니다. 그녀는 심미적 (aesthetic) 체험을 한겁니다. 합리적인 담론을 통해서 복
음을 깨달은겁니다.
아마도 이렇게 진행됐을겁니다.
바울이 '성경에서 배운것을 말해보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배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를 통해서 세상 온 민족을 축복하실거라는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모세에게 오셨으며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훌륭하지만 완전히 따르기에 불가능하므로 율법 외에 예배소와 제단과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복잡하고 완전히 이해는 안되지만 위대한 율법에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물과 희생제들로 어떤식으로든 죄에 대한 죄값 지불이 가능하게 해주셨습니다.'라고 답했을 겁니다.
바울은 '내가 전체 성경의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성경의 모든 것이 이해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열쇠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세상 온 민족들이 축복을 받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 율법의 완성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하게 의롭게 사신 유일한 인간이셨으며,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자신보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궁극적인 희생양이었습니다.
다른말로하면,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율법에 온전히 따르심으로 하나님께 축복받을 권리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에 십자가로 가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저주는 그분께 전가되며 그분의 축복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즉 모든 선지자, 모든 제사장, 모든 영웅, 모든 양, 모든 희생물, 모든 고난받는 종, 모든 지극히 높은 왕, 모든 돌아오실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라고 복음을 전합니다.
루디아가 이를 들었을 때 복음은 아름다웠으며 납득이 갔습니다. 심미적 체험을 한겁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한겁니다.
바울이 루디아에게 얘기해준 다른 한가지는 여러분에게도 매우 중요한겁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복음이 필요합니다. 루디아는 종교적이었지만 복음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밖에서 안으로 향합니다. 내가 정말 옳게 살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온전히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으므로 하나님을 기쁘게하고 싶은겁니다. 우리가 자주 말했듯이 두개의 완전히 다른 원동력입니다.
종교에서 하나님은 유용합니다. 나는 유용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뭔가를 주시고, 어여삐 여기시고, 건강을 지켜주시고, 천국에 데려가실테니까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걸 가졌기 때문에 뭔가를 얻기위해서 순종하는것이 아닙니다. 심미적으로 순종하는겁니다.
루디아에게 전에는 유용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만, 이날 그녀는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만난겁니다.
이전에도 그녀는 안식일을 지키며, 간음하지 않으며, 부모를 공경하고 도덕적으로 살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후에도 그녀는 안식일을 지키는 등 순종하며 이전과 다름없이 도덕적으로 살았을겁니다. 차이가 없을까요?
아뇨. 엄청나고 완전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담은 없어졌고 짓눌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용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그분을 기쁘게하려고, 찬양하려고, 기쁨으로 순종합니다.
이 원동력은 당신을 진빠지게 하는게 아니고 채워줌으로써 계속해서 자라게합니다.
루디아가 합리적인 담론을 통해서 복음을 깨닫고 성경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겁니다.
저는 아마도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가장 복음이 필요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이들은 그들이 모른다는걸 알고있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들이 복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매우 율법적이거나 혹은 늘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준에 맞게 산다고 생각할 경우에 그들은 매우 율법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몰아세웁니다. 반면에 기준에 맞게 살지 못할 경우에는 율법적이진 않겠지만 스스로 죄책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종교적이었던 루디아는 합리적인 담론을 통해서, 심미적인 체험을 통해서 복음을 가졌습니다.
두번째 케이스는 여종의 경우로 억압받는 자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오는가 입니다.
누가가 두번째 케이스로 여종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의 상황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루디아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루디아는 부자였으며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던 반면, 여종은 단지 가난하기만 했던게 아니라 말그대로 노예였습니다. 그녀는 한없이 무력했으며 착취당하는 노예였습니다. 또한 여종은 도덕적인 측면이나 영적인 측면에서도 루디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루디아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으며, 성경을 읽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반면 여종은 단지 종교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귀신에 씌여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반대상황이었던거죠.
루디아는 영적으로 조용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만, 여종이 어땠는지는 알기조차 힘듭니다. 그녀는 말그대로 바울과 실라를 따라다니며 괴롭게 했습니다. 그녀가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고 소리 친것을 보면 그녀는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가지 케이스 중에서 그녀가 가장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만 동시에 그녀는 가장 큰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고통 속에 있었던겁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그녀가 전혀 무관심했다고도 말할 수는 없는겁니다.
루디아가 현재 버젼으로는 햄튼에 사는 사업가 같았다면, 여종은 이스트사이드의 다리 밑에서 일하는 마약에 중독된 어린 창녀였습니다. 자, 그럼 복음이 그녀에게는 어떻게 왔을까요?
우리가 알아야할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복음이 루디아의 케이스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루디아에게 복음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담론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여종에게는 엄청나고 깊은 실존하는 능력과의 대면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우며 또 특별히 우리 크리스챤들이 주목해야하는 점은 이 여종에게는 귀신이 주인 노릇할 뿐아니라 인간 주인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귀신에게 매여 있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매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귀신에게 정신적으로 억압받고 있었듯이 사회적으로도 착취당하고 있었던겁니다. 그리고 그녀가 복음에 의해 자유로워졌을 때, 그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여종은 내적으로, 개인적으로 자유해졌을 뿐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쫒겨나자 더이상 그녀는 이전의 착취당하던 시스템에 맞지않게 된겁니다. 당연히 귀신들렸던 그녀가 미래를 점침으로 인해서 그녀를 착취하며 돈을 벌었던 사람들은 광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사회 시스템을 흔들었다는 이유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거죠.
그녀가 복음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자유 뿐아니라 사회적 자유도 필요했던겁니다. 단지 개인적인 선택으로 내적인 자유를 통해서만이 아니고 크리스챤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묶고 있는 사회적, 영적, 경제적 매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통해야 합니다. 무슨 얘기인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독교 목사였던 로버트 린티컴의 저서 'City of God, City of Sata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957년에 당시 학생이었던 린티컴은 중서부의 어느 도심에서 한 교회의 청소년부를 여름동안 맡고 있었으며, 여기서 만났던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난한 청소년들과 정부의 주택지원 프로젝트 일을 하고있을 때, 14살의 에바가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삶은 마약과 범죄로 찌든 그녀의 가족들로 인해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끔찍했다. 선생님들은 단지 처벌만 했으며, 에바는 14살임에도 읽거나 쓰는법을 거의 몰랐다. 그러나 청소년부 사역을 통해서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시작했으며 돌아오기를 소망했다. 내가 떠나기를 준비하던 여름의 끝 무렵에 에바는 동네의 큰 갱단이 소녀들을 모아서 부자 백인남성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고있으며 그들이 자신을 노리고있어서 큰 스트레스가 있다고 상의했다. 돈은 갱단이 벌고 소녀들은 노예와 다름없다고 했다. 나는 성경에 사탄에 저항하면 결국 사탄은 떠난다고 했으니 청소년부에 계속 참석하고 매일 기도와 성경공부를 지속하면 유혹을 이길 수 있다고 답해준걸 기억한다. 나는 순진했었다. 나는 그녀가 진짜 크리스챤이며, 진짜 크리스챤은 유혹을 이길거라 생각했었다. 몇 달 후, 내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더이상 청소년부에 참석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수소문해서 그녀를 찾아냈으나 그녀는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해서 갱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했다. 나는 완전히 냉담하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져물었다. 그녀는 갱단이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를 때려서 병원에 입원시켰으며 어머니까지 협박해서 그들의 말을 따랐다고 했다. 나는 왜 경찰한테 신고하지 않았냐고 소리쳤다. 이에 에바는 그들이 그들이라고, 모두가 한패라고 답했다.'
에바의 답을 듣는 순간 린티컴은 에바와 그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유롭게하기 위해서는 단지 개인적인 선택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들의 사회적 구조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에바는 경찰이 갱단과 한패였으므로 신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지역에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요?
단지 개인적인 결정만으로는 부족하며 사회적 구조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잘하고 있다거나 잘하고 있는 다른 교회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건 아닙니다만,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에 진실한 교회는 개인적인 전도를 통해서 각 개인에게 내적 자유를 주는 것 만큼이나 사회구조에도 관심을 갖고 관여해야 한다는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개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 만큼이나 분명하게 사회적인 변화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심으로 승리하시고,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심으로 부해지시고, 온전히 섬김으로 권한을 가지시면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가 당신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면 다시는 가난한 자들을 이전과 같이 대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당신의 경력, 자산, 지위 등은 더이상 의미가 없음을 알게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진실한 교회는 개인의 온전한 변화에 못지않게 사회적 정의 이슈에도 분명하게 관여하고 참여하게 됩니다.
두번째 케이스인 억압받던 여종의 경우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복음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오는 마지막 세번째 케이스인 간수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간수는 거의 확실하게 전직 로마병사였을겁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좋은 직업으로 여겨지던 공무원 직종은 대부분 은퇴한 로마병사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한 거의 확실히 알 수 있는 점은 간수의 삶은 루디아처럼 성공적이지도 않았고, 여종처럼 엉망진창으로 비참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케이스의 중간으로 그야말로 평범한 삶이었을겁니다. 간수는 길고 심오하며 지적이고 합리적인 담론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깊고 강한 감정적인 대면도 원하지 않았을겁니다.
간수는 전직 군인으로 블루칼라의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합리적인 담론이나 감정적인 대면을 원하지 않았을거라는 사실은 다음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죄수들이 탈옥했다고 생각했을 때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그가 칼을 뽑아든 이유는 그는 감상적이고 감정적이기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군인 타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수를 잃자 자결하려합니다.
루디아가 햄튼에 사는 사업가이고, 여종이 이스트사이드의 다리 밑에서 일한다면, 간수는 퀸즈에 사는 집배원 정도일 겁니다.
그는 이성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았으며, 현실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수는 세가지 케이스 중 영적으로 가장 무관심했으며, 전혀 하나님을 구하지 않은 경우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거나 예배하지 않았으나, 영적으로 크게 타락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좋은 사람도 아니고 아주 나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영적으로 무관심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보이는 아주 중요한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여종에게도 복음의 큰 힘과 대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간수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며, 그가 바울에게 와야만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복음은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말로 전달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보여줘야합니다.
간수는 두 명의 매맞은 죄수를 받았습니다. 죄수들은 몽둥이로 맞아서 피흘리고 있었을 겁니다. 죄수들이 처음 왔을 때 그랬어야했지만 간수는 마지막에서야 죄수들의 상처를 돌봐줍니다. 그들은 그냥 갇힌게 아니라 죽을만큼 매맞고 갇혔습니다만, 간수는 그냥 발꼬를 채우고 가둬버립니다. 간수는 무관심하고 배려없이 매맞은 죄수들을 대했습니다만, 죄수들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간수는 그가 생전 겪어본 적 없는 두가지 일을 보게되며, 이것이 그를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근본적으로는 한가지 일입니다만,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간수가 본 것은 죄수들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죄수들은 그들의 고난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던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기쁨의 뿌리는 너무도 깊이박혀서 있어서 그들의 돈을 빼앗거나, 자유를 빼앗거나, 평안을 빼앗거나, 생명을 곧 빼앗을 것처럼 보여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기쁨이 있는겁니다. 간수로서는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두번째로 간수가 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간수가 죄수들을 잃을 경우에는 간수가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간수가 죄수들이 탈옥한걸로 생각했을 때 스스로 죽으려고한 것은 어차피 처형당할 상황에서 공개적인 굴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지진으로 옥문이 깨지고 죄수들의 매였던 것이 풀렸을 때 바울과 실라는 탈옥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차피 그들이 감옥에 갇힐 죄를 지은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탈옥하면 간수가 처형될거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죄수들이 탈옥하더라도 간수는 처형될거라는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수들의 탈옥을 막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악을 선으로 갚은겁니다.
죄수 중 한명이라도 탈옥하면 간수는 죽었을겁니다. 간수가 매맞고 갇힌 바울과 실라를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음에도 그들은 악을 선으로 갚았으며, 이는 간수로서는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바울과 실라의 성품 한복판에는 완전히 새로운 패턴이 있음을 압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궁극적인 예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이며, 죽으시면서 죽인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바울과 실라가 간수의 생명과 자신들의 자유를 바꾸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의 생명과 바꾼 자유를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선으로 악을 극복하는 것을 본 이 합리적인 담론도 통하지 않고, 감정적인 대면도 통하지 않았을 현실적인 간수는 그자리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내가 가지지 못한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그걸 원합니다'.
실제로 간수가 본것은 바울과 실라의 삶 속에 한 이야기가 들어와서 그들로 하여금 고난과 학대를 버틸 힘을 준것입니다.
루디아는 합리적인 담론을 통했고, 여종은 강한 늠력과의 대면을 통했다면, 간수는 완전히 변화된 성품의 전형을 맛봤던겁니다.
또 한가지의 이같은 예를 소개하겠습니다.
웨인 윌러만은 목사이자 듀크대학의 교목이었습니다. 그 곳 교수진의 주요 일원이었으며, 미니스트리를 이끌었는데 그의 미니스트리 초창기 시절에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역 초기에 나는 내가 목회하던 교회의 한 여자가 막 아기를 낳은 병실에 도착했다. 나는 출산에 문제가 있었음을 전해 들었었다. 부부가 병실 침대에 앉아서 의사를 기다리고 있었고, 의사는 내가 도착한 직후에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이 부부 앞에 앉아서,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나 문제가 있음을 설명했다. 아기가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아기에게는 고칠 수 있는 작은 호흡기 이상이 있다고했다. 의사는 자신이 권하고자 하는 것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몇일 후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했다.
부부는 의사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했지만, 남편은 호흡기 이상이 쉽게 고쳐질 수 있다면 고치길 원한다고 말했고 여자도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의사는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런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다고 하며 이런 고난을 다른 두 자녀에게까지 겪게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말했다. 의사가 고난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여자는 드디어 이해하는듯이 보였다. 그녀는 그녀의 두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걸 갖고있으며 고난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고난을 겪을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하나님의 손길이 이 일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아이가 왜 우리가족에게 왔는지는 확실히 알겠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의 아이들은 괜찮을 것이며, 생각해보면 이건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겁니다 라고 말했다. 의사는 완전히 당황한듯 보였으며 그가 떠날 때 복도까지 배웅하던 나를 돌아보면서 저 부부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부부는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나 그들의 이성이 의사에게는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에 성공한 최고의 그림이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교회는 세상에서는 무엇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있는 '고난'같은 단어 조차도 그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이 커플은 그들을 위해서 살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고난을 통해서조차도 구원 될 수 있음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인겁니다.
이것을 그 간수가 본것이며, 그의 삶 속에도 이것을 가지기를 소망한겁니다. 이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고난과 학대를 대할 수 있기를 원했던겁니다.
왜 내 생명과 바꿔서 당신들의 자유를 찾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다른 분이 스스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심으로 인해서 이미 자유를 찾았습니다. 이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수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3개의 케이스에서 3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넘버 1, 복음은 모두를 위한겁니다.
누가가 말하려는 사실은 복음은 어떤 특정 타입의 사람들에게 더 잘맞는게 아니라는겁니다. 인종을 예로 들면, 오늘 본 3개 케이스는 각각 다른 인종의 경우였습니다. 루디아는 아마도 중동인이거나 인도인이었을 것이며, 여종은 정확히 알 수 조차 없는 인종이며, 간수는 로마인으로 유럽출신입니다.
중요한 부분이니 잘 들어보십시오.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한 지역, 한 인종에 의해 주도되지 않은 유일한 종교입니다. 이슬람은 인구학적, 지리학적으로 언제나 중동지역이 주도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구학적, 지리학적으로 늘 인도 중심이었습니다. 유교는 중국, 불교는 아시아 지역이었죠.
기독교는 중동지역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퍼져나가면서 헬라 지역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후 다시 북유럽 중심이었다가 북미가 중심이 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아프리카, 라틴, 그리고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지역 크리스챤의 수가 유럽과 북미를 합친 크리스챤의 수보다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이 더 필요한 특별한 타입의 사람들이라는건 없으니까요. 기독교 복음은 사람의 성격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도덕적이거나 부도덕하거나 구분하지 않으며 인간의 어떠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난 저런 타입은 아닌거 같아. 난 크리스챤 타입이 아니야'라고 생각했었다면, 오늘의 본문과 설교 내용을 깊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챤이고 당신 주변의 누군가를 보면서 '저런 사람은 절대 크리스챤이 될 수 없어' 라고 생각하셨다면. 당신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로부터 구원받은걸 모르는겁니다. 당신은 당신 생각과 다르게 크리스챤보다 종교적인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넘버 2, 이 세상에서 복음보다 사람들을 더 화합시킬 수 있는 요인은 없습니다. 저는 교회에서는 전혀 분파가 생기지 않는다거나, 교회는 늘 평화롭다거나, 비극은 없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복음에 따라 살아갈 때 복음이 할 수 있는 일을 말하는겁니다.
바울 당시 고대에는 유대인 남자들이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는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내용으로 오늘날 온라인에서도 온갖 갑박을론이 있습니다만 저는 오늘 이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려는게 아닙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 남성들이 아침에 눈뜨자마자 기도했던 내용이므로 바울 역시 매일 기도했을 기도문의 내용은 '오! 주 하나님! 저를 여자나, 노예나,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아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였습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당연히 수 십년 간 매일 아침마다 저렇게 기도했을겁니다. 그리고 그가 빌립보에 개척한 첫 교회의 첫 3명의 개종자는 여자, 노예, 이방인이었던겁니다. 이제 그들이 바울의 가족이 된겁니다.
(** Converted를 개종자로 번역했으나 '변화된 자'가 더 적합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이 바울을 변화시켰을까요? 어떤 능력이 저토록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문화적 장벽을 허물고 화합하기에 실패했던 기독교의 역사를 어떤식으로든 포장하려는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할 수 있는건 만일 당신이 5년차 크리스챤이라면 당신에게는 이전에는 절대 장벽을 넘어서 사귈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을 사람과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경우가 벌써 서너 경우는 있을거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가까이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지금은 당신의 형제 자매가 된 경우가 분명히 있을겁니다. 맞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떠나서는 당신은 누군가는 구분짓게 됩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민족주의자라면 다른 민족 특히 적대관계의 민족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에 근거한다면 당신은 누구도 구분짓고 적대 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받았음을 아니까요.
제가 아는 한 복음보다 더 강한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요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 복음은 모두를 위한것이며 복음은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이제 넘버 3는 복음은 정형화될 수 없다는겁니다. 저는 복음이나 성경을 공부하고 여러 사람들과 나눌 수 없다는게 아닙니다. 그건 좋은겁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접근방식입니다. 여기 3개 케이스에서의 접근방식들을 보십시오.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장례식에 참여하시러 나사렛으로 가시며, 예수님을 처음 맞은 여인은 마르다였습니다. 그녀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이다' 라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만나십니다.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수님께서는 단지 눈물을 흘리십니다.
두 자매가 그녀들의 오라버니가 죽은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합니다. 정확히 같은 상황,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 자매에게 전혀 다르게 반응하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스마트하셔서 그들이 각자 필요로하는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잘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요구하시고 동시에 받아 들이십니다. 당신의 상황에 요구하시면서 동시에 받아 들이시는겁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을 받아 들이기만 하시면 당신은 변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황에 요구만 하시고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당신은 그분을 멀리하고 듣지 않을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적절하게 얼만큼 요구하시고 얼만큼 받아들이실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우리는 그분처럼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루디아에게는 충분히 아름다우셨으며, 여종에게는 충분히 능력있는 분이셨으며, 간수에게는 충분히 현실적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필요로하는 어디에나 계시며, 무엇이든 당신의 필요에 맞추시기 위해서 당신에게 요구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첫댓글 정말 좋습니다. 추천드려요 !!!!!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