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화상
최재우
한낮의 미술관은 쓸쓸하다. 관람객을 안내하는 몇몇 아르바이트 대학생 말고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세상에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화가인가 보다. 이곳에서는 지난 3월부터 5월말까지 세달 동안 ‘그림 그리기 좋은 날’이란 주제로 우리 지역 향토작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곳에 어느 빨치산 화가의 그림이 있다. 나는 그림에 대하여 거의 문외한이고, 그림의 작품성을 보는 눈도 어둡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는 나를 이곳으로 이끄는 어떤 울림 같은 게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편의 드라마 같은 화가의 파란만장한 삶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그러한 화가의 삶이 고스란히 그림에 투영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대에 어울리지 못하고, 이웃들에게 외면당한 채 우울하고 쓸쓸하게 살아간 어느 화가의 모습을 그림에서 반추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념과 삶이 함께 어울리는 삶을 사는 데, 그에게는 그것이 서로 어그러지는 삶이었다.
화가 김형식(金瀅植)(1926~2016), 그는 왜정시대에 괴산군 소수면 숫골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머리가 비상한 수재였다. 배재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간다. 그가 대학생활을 하던 해방직후에는 좌익과 우익의 분열로 사회가 매우 불안하던 때였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사회주의 좌익사상에 빠져든다. 대학에서 럭비부 주장을 맡을 만큼 체력도 강했고, 리더십도 있었던 청년 학도였다. 뒷날 그의 진술처럼, “남쪽에 있으면 우익세력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 그는 월북한다. 그리고 남로당 간부들이 세운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6·25 전쟁 때 남으로 내려온다. 경상도 울산 산악지대에서 ‘추일(秋一)’이라는 이름으로 빨치산 부대를 이끌다가 체포되었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할아버지(김용응)와 아버지(김태규)가 독립운동을 한 공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 후 20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1972년에 풀려난다. 북쪽 공산주의 실상이 그가 생각하였던 이상과는 거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후 북쪽을 거부하고 자유대한으로 전향하여 여생을 괴산 고향에서 살아갔다.
그는 자화상과 고목(古木)의 화가였다. 전시장에 있는 수백 점의 그림에는 유난히 자화상과 고목 그림이 많다. 이십여 년 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고향은, 동심 속 고향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스팔트 길이 뚫리고, 고래등 같은 그의 옛 기와집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죗값을 다 치루었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전력으로 누군가에게 감시당한다는 불안함이 늘 그를 엄습하였을 것이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딱히 마주앉아 대화가 통할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우울한 외로움을 견디면서 수없이 자신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화상은 대부분 흑백으로 그렸다. 반쯤 머리가 벗어진 초상은 어둡고 쓸쓸한 모습이다. 자화상 속에서 화가는 형형한 눈길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왜정시대 윤동주는 자화상이라는 시를 남겼다. 시인은 그 시에서 암울한 시대를 사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다. 시에 나오는 사나이는 아마도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나는 시간을 내서 화가의 고향을 찾아가보았다. 오래된 옛날 기와집 본채는 다 허물어졌고, 주춧돌만이 덩그러니 옛터를 지키고 있다. 집 뒤로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본다. 거기에는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녹음을 드리우고 있다.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는 거대한 밑 둥지는 썩고 허물어져서 검은 속을 다 드러내었다. 위로는 세숫대야만큼 구멍이 뻥 뚤렸다. 화가가 수도 없이 그렸던 바로 그 고목이었다. 고목은 또 다른 그의 자화상이었던 게다. 세월은 흘러갔고, 세상은 변했다. 자화상을 그리면서, 고목을 그리면서 쓸쓸함과 울적함을 달랬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연필로 그린 어느 자화상에 화가는 자필 메모를 남겼다. “텅빈 가슴에 피 눈물 흐르고 고목도 운다. 너는 왜 이제 왔는가고.”
윤동주는 자화상 시에서 어쩌면 자기 자신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갔다가, 가엾어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 들여다보니 그리워진다 하였다.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게, 역사라는 게 다 그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파아란 하늘 끝으로 보이는 고목의 어린 가지는 더욱 푸르러 보였다.
첫댓글 불행한 역사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