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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엘파소 교구 한인공동체 사목 파견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선종]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근심이나 걱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을 강력한 후원자로 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에 참 평화를 얻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을 통해 주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에 천국을 누리며 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얼굴과 삶 속에서 빛이 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의 거짓말과 유혹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고 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희망을 갖고 기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하며 준비하며 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하실 주님을 신뢰하며 참고 기다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신비스런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큰 소리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주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믿고, 조용히 때를 기다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이 그를 이기지 못합니다.
평소 기도를 안하던 형제님이 이런 글을 나에게 보내와서 깜짝 놀랐다. 요새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더니 진짜 기도를 안하고는 못배기는 때가 되었나 보다.
'기도하는 사람은'이라는 글로서 개신교에서 회자되는 것 같은데, 용어나 어휘를 조금 손질해서 올려 놓았다.
이 글은 '기도예찬'인데,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 과학적 합리주의와 극도의 인본주의인 세속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모든 것을 인간들이 다 알아서 처리하므로, 초자연이나 은총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을 찾지도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뜻일게다.
기도해야만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사랑인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없으니, 결국 인간 본성으로 살다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자력구원이 불가능하게 된다.
기도만이 살 길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본질이 사랑이라서 그렇지, 답답할 게 없으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불완전하고 약하고 죄짓는 인간에겐 하느님께서 꼭 필요하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의 은총이 있기에 결코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내려 놓거나 그 십자가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 은총으로 일이 잘 되었을 때 결코 하느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신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두 가지를 더 붙여 보았다.
그만큼 기도가 구원과 성덕을 위해 전능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이미, 아버지께 가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구원의 모범을 기도의 삶과 행위를 통해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히브5,7)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 갔다.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아."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루카 22,39~46참조) -2015.12.03. 16:31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세권의 책
사람은 일생동안 세권의 책을 쓴답니다.
1권은 '과거'라는 이름의 책이며, 이 책은 이미 집필이 완료되어 책장에 꽂혀 있습니다.
2권은 '현재'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이 책은 지금의 몸짓과 언어 하나하나가 그대로 기록됩니다.
3권은 '미래'라는 이름의 책이죠. 그러나 셋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라는 책입니다.
1권이나 3권은 부록에 불과합니다.
오늘을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생은 연령에 따라 각기 다른 키워드를 갖구요.
10대는 공부, 20대는 이성, 30대는 생활, 40대는 자유, 50대는 여유, 60대는 생명, 70대는 기다림으로 채워진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려면 투자를 해야 하는 것처럼, 내일을 여유롭게 보내려면 오늘을 투자해야 합니다.
과거는 '시효가 지난 수표'이며, 미래는 '약속 어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당장 사용 가능한 '현찰'일테니까요.
오늘 게으른 사람은 영원히 게으른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위에 남은 내 생의 첫날입니다. 참 아름다운 분량의 하루입니다.
'하루'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참으로 적당하고 아름다운 분량입니다.
이보다 길면 얼마나 지루할까요? 이보다 짧으면 얼마나 바쁘고 아쉬울까요?
해가 떴다가 지는 사이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고 느낍니다.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오면 힘들고 곤란할 겁니다. 다행히 이렇게 하루하루 꼭 알맞게 나뉘어져서 다가옵니다.
참 고맙고 즐거운 일입니다.
행복한 미래를 원한다면 오늘 하루를 사랑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밴드에서 가져온 글인데, 오늘 하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것,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돈으로 강조하니까 꼭 이렇게 속물적으로 물질적인 화폐의 개념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어쨌든 정신이 번쩍 들고 피부에 와닿기도 하는 것 같다.
신약의 히브리서 3장 7~8절에서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이라는 시편 95장 8절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오늘'로 번역된 희랍어 '세메론'(semeron)은 히브리어로는 '하이욤' (haiyom)인데, 종종 '오늘', '이날', '어떤 특별한 날'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때로는 하느님에 의해 회개가 권고되고(시편95,8), 하느님에 의해 구원이 부여되거나(시편118,24), 양자로 채택되는(시편2,7) 구원의 때를 나타낸다.
그런데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의 주도적 권세와 관련된 신학적 주제로 둘러싸인 이 단어를 과거의 구약적 상황에서 신약적 상황으로 옮겨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독자들이 당대에 듣게 되는 '그분의 목소리'는 모세를 통해 들려주신 지난 날의 음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들려오는 오늘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현재적 책임을 부과하기 위해서 '세메론'(semerom)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였음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에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가운데서 역사(役事)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음성이 성경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 심령과 영혼에 울려퍼진다.
루카 복음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이러한 성경의 '오늘'이라는 단어는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hic et nunc; here & now) 잘못 살면 내세도 없다는 말이고, '지금 여기'라는 '현재'가 내세와 영원에 연결되어 있고 개방되어 있다는 말이다.
영어로도 '오늘'이라는 '현재'는 'present', 곧 '선물'인데 이 '오늘이라는 24시간의 현재라는 선물'을 어떻게 잘 쓰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만큼, 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이제는 내일이 더 이상 없는 것처럼 잘 사용해야 하고, 잘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성경 말씀처럼 주님 마음에 드는 하루하루 순간 순간이 되어 우리의 삶과 늘 동행하시는, 시간의 주재자이신 주님께서 역사(役事)하시는 '오늘'이 되도록 하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6,34) -2015.01.16. 04:48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감사 십계명
1. 생각이 곧 감사이다. 생각(think)과 감사(thank)는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 일으킨다. 아니 깊은 생각을 통해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고찰하고 하느님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2. 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바다도 작은 물방울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에 먼저 감사하라. 그러면 점점 더 큰 감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3. 자신에게 감사하라. 성 아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높은 산과 태양과 별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들어 높이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하고 좋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잘못한 것은 용서하고 좋은 것들은 칭찬해 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4. 일상을 감사하라. 숨을 쉬거나 맑은 하늘을 보는 것처럼, 너무 흔한 것들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일상의 작은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를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감사이지만 해야만 한다.
5. 문제를 감사하라. 모세가 갈대바다와 파라오의 군대 사이에서 그의 기도로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었고, 마라의 쓴 물이 모세의 기도 안에서 응답받은 나무가지가 단물로 바꾸어 주었듯이, 문제에는 항상 해결책과 해답도 항상 그안에, 아니면 가까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 문제에 대해 감사하여야 한다.
6. 더불어 감사하라. 나무 장작도 함께 쌓여 있을 때 더 잘 타는 법이다. 가까운 가족끼리 감사를 나누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돌아온다. 같은 뜻을 가지고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감사하면, 그만큼 감사가 배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이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nevertheless) 감사하라.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말고, 문제 앞에서도 감사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믿는 이들안에서 모든 것을 선(善)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하느님, 악(惡)에서도 선(善)을 끌어내시는 전능의 하느님께서 역사(役事)하시기 때문이다.
8. 잠들기 전에 감사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의 피곤과 걱정, 짜증과 불평을 안고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잔다. 잠들기 전에 십자성호와 함께 성삼위의 이름으로 자신을 강복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 그 감사는 영혼을 청소하고 성령의 평화를 주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찬양을 한, 또 하나의 시메온이 되게 한다.
9.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사제가 매일 드리는 미사 경문의 성찬 기도문에 빵과 포도주을 들고 최후 만찬 때의 경문을 읽을 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체와 성혈이 되는 것에 대해 미리 감사할 때, 그대로 말씀대로 이루어 지기에 '성체성사'라는 말이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 곧 '감사'라는 의미를 가지듯이, '감사'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단어이기에 그 자체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감사하면 감사한대로 이루어진다.
10. 모든 것에 감사하라. 우리의 삶에서 감사와 은총이 아닌 것은 단 한가지도 없기에, 좋고 기쁘고 행복한 일들 뿐만 아니라, 슬프고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일과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고, 안배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느 형제님이 새해 새아침에 보내온 감사의 십계명을 다시 한번 살을 붙여서 신앙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사실 나의 좌우명과 같은 테살로니카 1서 5장 16절에서 18절의 말씀에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잘 실천하기 위해 암송하는 방법은 바로 첫 글자를 따서 '언기','끊기','모감'이라고 우리 카페 운영자가 이미 명명했다.
여기 말씀에서 관건은 세 가지 단어인데,'언제나', '끊임없이', '모든'이다.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고, 기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열심히 기도할 때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감동적이고 행복한 일이 생겨 감사가 절로 나올 때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그 반대일때, 너무나 안좋고 슬픈 일이 발생했을 때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지, 성모송 한번도 힏들고 만사가 귀찮을 때 기도가 가능한지, 정말로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안좋은 일만 생기고 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과연 감사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테살로니카 1서 5장 18절 후반부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처지, 모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몸소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안배하시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역사의 주인되심과, 전인적 구원의 절대권을 가지심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 육신 생명의 참부모이시기에 당신께서 목숨바쳐 사탄에게서 구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처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믿음의 자녀는 우리 인간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할 때, 주고 받는(give & take)식의 소유(所有)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신 분이시기에, 존재(存在)의 차원에서 그분은 당신 자녀인 우리를 결코 버릴 수 없는 부모라는,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015.01.10. 05:14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국제 시장 미국의 어느 도시에 들렸다가 지인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해서 조금은 늦었지만, '국제 시장'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를 하필 지금 상영하는 이유가 뭐냐?
왜 가장의 가족에 대한 무한 책임과 십자가의 정신을 지금의 후손들에게 대물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현 정치인들이 이런 영화를 통해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사랑을 떠벌릴 자격이 있는가?
참~~한국 사람들은 말도 많다.
그 시절 그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에겐 뼈아픈 전쟁과 가난의 체험이어서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이 비처럼 내리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다.
그냥 순수한 것을 순수하게 보면 얼마나 좋을까?
미국 영화관의 포스타 제목은 '국제 시장'이 아니라, 'Ode to my father', 말하자면 '아버지께 바치는 전상서'라고 번역해야 될 것 같다.
6,25 때 흥남 부두에서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게 된 '덕수'(황정민 역)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고모댁이 '꽃분이네'라는 이름으로 장사하는 부산의 국제 시장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간다.
국제 시장이 소재하는 부산 중구 대청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였고, 한국 전쟁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을 때 이북 출신 피난민들이 몰려와 새로운 상권을 형성했던 곳이다.
언젠가 헤어진 아버지를 부산의 고모댁 가게인 '꽃분이네'에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족들을 아버지 대신에 돌보기 위해 그 뻐저리게 가난한 시절, 죽마고우(오달수 역)와 함께 서독 탄광 광부를 자원하고 그곳에서 죽을 고비를 맞는다.
탄광의 막장에서 석탄을 캐던 중 매탄 가스가 폭발하여 두 친구 (황정민과 오달수역)는 석탄에 매몰되고 만다.
그러나 애국심과 동료에 대한 의리로 충만한 한국 광부들이 당국의 불허를 뚫고 들어가 두 친구를 구하는 장면은 눈물겹다.
난 그 장면에서 마르코 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예수님 코 앞에 매달아 내려놓는 동료들의 믿음과 사랑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함께 죽고 함께 사는','동고동락'의 형제애가 그들을 구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첫사랑인 간호사 '영자'(김윤진 역)를 만나게 되고, 그때 부상으로 말미암아 한국에 돌아와 '꽃분이네'를 물려받아 나중에 함께 지내게 된다.
그리고 또 한번 월남 파병을 통해 또 한번의 돈을 벌 기회를 잡았으나, 그곳에서 베트콩으로부터 어떤 아이를 구해주다가, 그것은 마치 흥남 부두에서 찢어진 옷자락과 함께 헤어진 여동생(나중에 미국 LA에서 입양되어 사는 여동생을 만나게 됨)과의 생이별을 떠올리게 하는데, 거기서 '덕수'는 한쪽 다리에 총탄을 맞게 된다.
그는 다시 부산 국제 시장 '꽃분이네' 가게로 돌아오게 되지만, 그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가게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언젠가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젊은 '덕수'가 백발이 하얀 노인네가 되기까지 그는 아버지 대신에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감으로 살아간다.
그가 늘 괴롭고 힘들고 할 때 마다 쳐다보는 한 장의 영정같은 '아버지의 사진', 그것은 그로 하여금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적과 힘과 에너지를 주는 소통의 도구였다.
그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께 보고하고, 아버지께 위로와 칭찬을 해 달라고 하고, 때로는 너무 힘들었다고 눈물을 토하며 아버지의 사진 앞에서 대화한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기도'가 무엇인가?
이게 기도가 아닌가?
일상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감없이 진솔하게 나누는 것, 이것이 기도가 아닌가? 를 생각했다.
'덕수'는 여기에서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고 용기를 내어본다.
아마도 그래서 미국에서의 영화 제목이 '국제 시장'이 아니고, 'Ode to my father'(아버지께 바치는 전상서)가 된 것 같다.
전쟁과 가난의 아픔과 애환, 태극기 앞의 경례, 가족을 꾸려가야 하는 장남의 책임감과 고민 등이 여러 가지를 많이 생각하게 했고, 독일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의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그들을 통해 아주 오래 전에 뉴욕에서 만났던 서독 광부와 간호사 출신의 교우들도 떠올랐다.
조금 늦게 들어가 본 영화이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생각하고 눈물도 서너 차례 흘려 나의 선하고 순수한 감정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부산 사투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뿜어 나오는 욕들은 오히려 어느 식당의 욕쟁이 할머니처럼 진한 향수와 사람사는 냄새를 풍겨 주었다.
"네가 젊어서 아무 것도 벌어들이지 못했다면, 늙어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느냐? 백발 노인으로서 판단력이 있고, 원로들로서 건전한 의견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집회서25,3~4)
백발이 된 '덕수와 영자'(황정민과 김윤진 역)부부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부산 국제 시장을 집의 옥상에서 바라보면서 그들 곁에서 한 마리 하얀 나비가 날아간다.
그 나비를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못 만날 아버지를 떠올리며 영화는 종착역에 도달한다~~^*^ -2015.02.02. 07:47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또 다시 사순절
작년에 이어 아직 살아있어 맞는 사순절이다.
'재의 수요일', '성금요일'에는 '단식, 금육', 사순절 매 금요일에는 '금육'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 감각이 없으며, 그걸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신비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하심의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고, 그 신비를 일상의 삶가운데에 살아내야 하는 시기이다.
일년 365일이 모두 주님 은총 안에 있지만, 우리 영혼의 교과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마음을 찢어 회개하고 참회하는 시기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인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은 은총의 단비가 가장 많이 내리기에 일년 중 가장 은총이 많은 시기라고 한다.
옛날에 노인 신부님들이 이 사순절이 '영혼의 농사를 짓는 때'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자신의 육신과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노예가 되어 이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이 때만은 머리를 들어 하늘(천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구원과 성화(聖化)의 문제, 영혼의 문제,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묵상하는 때이다.
이 사순절은 일년 365일 중에서 '내 마음의 광야'를 마련하고, 기도처를 마련해서 '시간의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 '피정의 시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고해성사를 보아도 바뀌지 않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본성과 원죄성과 하느님의 은총의 도우심을 받아 정면 대결을 하며 한판 겨루어 보는 시간이다.
'하느님 말씀 중심', '성체 중심', '기도 중심'의 삶을 살아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죄와 악습과 어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부활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양심의 평화와 성령의 기쁨, 영생에 대한 확신이 더욱 더 강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우리 각자 내가 좋아하는 김치와 커피, 내가 즐기는 TV조배와 게임, 취미 생활을 접고서 영적인 삶을 살며, 내가 희생하고 절약하여 모아 놓은 성미와 금전으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금 굶주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애덕을 실천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게 하자~~^*^ -2015.02.17. 15:29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영적 체험의 메모리 유대인들의 전통처럼 교회 전례력은 항상 주일과 대축일의 축일표가 가르쳐 주듯이 그 전날 저녁부터 그 다음 날로 넘어간다. 그래서 그 전날 성무일도도 제1저녁기도와 제1끝기도를 시작하면서 주일과 대축일을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만17년 전에 성소의 위기를 느끼고, 이 사제직이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이 와서 목숨걸고 기도를 하다가 성령을 체험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수도원의 주보요, 수도원 창립 기념일인 성 요셉 대축일 (1998년 3월 19일) 전날 밤 제1저녁기도와 제1끝기도를 마치고, 방에 앉아 관상 기도를 하는 중에 내 등 위로 성령의 전률이 내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소 불문, 시간 불문 기도할 때마다 등 위로 성령의 전률이 내려 왔다.
나는 이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아니 보시는 것 같아도 다 보고 계시고, 아니 들으시는 것 같아도 다 들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를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바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부터 성령 운동에 연루되었고, 심령기도와 치유를 위한 안수 기도를 하게 되었으며, 그해 10월 로사리오 성월 9일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데, 새벽 기도 전(前) 새벽 3시부터 한시간 반 정도 '로꾸엘라'(Loquella)라는 '천상 음악'를 들었다.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악기들의 연주였고, 너무나 아름다워 깨고 싶지 않았으며, 악기의 연주만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천국은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상상한 적이 있다.
벌써 그렇게 하느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체험한 때가 만 17년이 흘렀다.
확실히 성소를 포기하려 했던 내가 성소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어둠 속에서도 보화를 찾는 사람이 되었으며, 기도와 말씀과 성체, 자선과 애덕 실천의 삶을 지향하면서 하느님을 많이 의식하는 삶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때 이후로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었고, ABC해 3년 동안 제1독서의 중요한 부분을 피앗사랑 카페에서 주해하고, 지금은 매일의 복음을 주해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役事)이다.
확실하게 성령 체험 전(前)과 후(後)의 하느님 중심 생활로의 변화는 성령께서 주신 큰 선물이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처럼 자신의 성소와 은사에 교만하지 말라고 정신적이고 영적이며 수동적인 고통도 선물로 받았으니 확실히 성령과 고통 봉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깨닫는다.
자연인(自然人)이 초자연(超自然)에 개방되다보니 처음에는 얼마나 불편했던지,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內的) 평화와 기쁨, 존재론적 안정 때문에 고통은 끊임없이 있어도 늘 평화롭고 기쁘다.
수도원의 첫 사제로서 마치 유대인 집안의 동물의 맏배나 맏아들처럼, 성령 체험 이후는 나는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죽이시든 살리시든 하느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당신 마음대로 쓰시도록 내어 놓여졌다는 걸 느낀다.
이 세상에 있지만, 나는 가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도 바오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처럼, 첫 사랑을 잃지 않도록 육체를 찌르는 가시를 주었듯이, 나도 살아계신 주님 체험의 첫 사랑을 잃지 않도록, 나를 365일 24시간 내내 강의와 피정 지도 외에 줄곧 영들이 함께 한다.
너무나 말도 안되는 억울하고 터무니없는 고통을 당할 때에는 솔직히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욱 더 사랑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안배와 계획 안에서 내 성소(聖召)를 생각하기 때문에, 축적된 경험의 창고인 기억이라는 메모리 속에서 나쁜 것보다는 좋았던 은총의 날들을 떠올리며 늘 새날 새 아침을 맞는다. -2015.03.18. 15:04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 2015년 9월 23일(수)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장례미사 천주성삼 성직수도회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미국 엘파소 교구 한인공동체 사목 파견 중에 현지시간 2015년 9월 14일(한국시간 15일 새벽) 57세(수도서원 32년)의 일기로 선종
미국의 사막 텍사스주 엘파소 성 김대건 한인성당 주임신부로 이민사목을 하시며 국내외에서 성령지도와 피정과 교육을 하셨습니다.
1985년 8월 22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에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 첫사제로 서품받으셨고 2015년 8월 22일 사제 서품 3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2015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에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로 선종하셨습니다. (미국 시간 '십자가현양 축일')
성모님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동정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고집하여 그날 홀로 서품을 받고, '기도가 내 소명이다'하시며 바쁜 일정중에도 묵주기도를 하루 6~7시간 하루에 100단씩 바치셨던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나는 영신노동이 기도가 내 성소(vocation 소명)이기 때문에. (故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자비의 9일기도
일곱째 날 "오늘은 특별히 내 자비심을 공경하고 찬양하는 영혼들을 내게 인도하여라.
나의 마음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이들은 나의 동정심 많은 성심의 모상들이다. 이들은 저 세상에서 특별한 빛으로 밝게 빛날 것이다.
당신의 성심은 사랑 자체이니, 당신 자비심의 위대성을 공경하고 특별히 들어 높이는 자들의 영혼을 당신의 지극히 동정심 많은 성심의 거처 안에 받아 주소서. 이들이야말로 바로 하느님 친히 발휘하시는 능력으로 힘있는 자들입니다. 온갖 고난과 반대 세력 가운데서도 그들은 당신의 자비심을 믿고 의지하여 전진함으로써 당신과 일치하였습니다. 오, 예수님, 그들은 자기들의 어깨에 온 인류를 짊어졌습니다. 이들은 엄하게 심판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자비심이 그들을 자애롭게 감싸실 것입니다.
당신 자비의 눈길을 보내 주소서. 그들은 살아 있는 복음입니다. 그들의 손은 자비의 행위로 가득차 있으며 그들의 마음은 기쁨에 넘쳐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 자비의 찬가를 노래합니다. 오, 하느님, 간청하오니 당신께 의탁하는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심을 보여 주소서.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 뿐 아니라 특별히 죽을 때에 그들에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헤어릴 수 없는 이 자비심을 공경하는 영혼들을 예수님 친히 당신 영광처럼 보호해 주소서. 아멘. Today bring to Me the Souls who especially venerate and glorify My Mercy*,
and immerse them in My mercy. These souls sorrowed most over my Passion and entered most deeply into My spirit. They are living images of My Compassionate Heart. These souls will shine with a special brightness in the next life. Not one of them will go into the fire of hell. I shall particularly defend each one of them at the hour of death.
Most Merciful Jesus, whose Heart is Love Itself, receive into the abode of Your Most Compassionate Heart the souls of those who particularly extol and venerate the greatness
Eternal Father, turn Your merciful gaze upon the souls who glorify and venerate Your greatest attribute, that of Your fathomless mercy, and who are enclosed in the Most Compassionate Heart of Jesus. These souls are a living Gospel; their hands are full of deeds of mercy, and their hearts, overflowing with joy, sing a canticle of mercy to You,
Show them Your mercy according to the hope and trust they have placed in You. Let there be accomplished in them the promise of Jesus, who said to them that during their life, but especially at the hour of death, the souls who will venerate this fathomless mercy of His, He, Himself, will defend as His glory. Amen.
*The text leads one to conclude that in the first prayer directed to Jesus, Who is the Redeemer, it is "victim" souls and contemplatives that are being prayed for; those persons, that is, that voluntarily offered themselves to God for the salvation of their neighbor (see Col 1:24; 2 Cor 4:12). This explains their close union with the Savior and the extraordinary efficacy that their invisible activity has for others. In the second prayer, directed to the Father from whom comes "every worthwhile gift and every genuine benefit,"we recommend the "active" souls, who promote devotion to The Divine Mercy and exercise with it all the other works that lend themselves to the spiritual and material uplifting of their brethren.
사도신경
The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
Eternal Father, I offer you the Body and Blood, Soul and Divinity, of Your Dearly Beloved Son,
For the sake of His sorrowful Passion, have mercy on us and on the whole world.
5단을 모두 바친 후"거룩하신 하느님,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여,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3번)
Holy God, Holy Mighty One, Holy Immortal One,
Eternal God, in whom mercy is endless and the treasury of compassion inexhaustible, look kindly upon us and increase Your mercy in us, that in difficult moments we might not despair nor become despondent, but with great confidence submit ourselves to Your holy will, which is Love and Mercy itself. 죽은 사제를 위한 기도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주님,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의 영혼이 주님의 빛 속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사제로서의 생활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의 삶을 자비로이 살피시어 잘못은 곧바로 잊어주시고 공로를 크게 보시어 위안의 은혜를 주소서. 그를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이의 정성도 어지신 눈으로 굽어보소서.
자애로우신 성모 마리아님,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을 위해 비오니 그가 살아 있을 때 잘못한 모든 죄를 하루 속히 용서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 간절히 전구해 주소서. 우리의 모든 순교 성인 성녀시여, 그의 영혼이 영원한 평화를 누리도록 주님께 끊임없이 빌어주소서.
영원하신 아버지, |
마 냐 니 따 1. 먼동 틉니다. 잠을 깨세요,
사제관 뒤뜰 텃밭 첫 수확물 사막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처음 여기 왔을 때의 엉겅퀴들만 발에 밟히는 땅이었는데, 지금은 거름을 주고 씨를 뿌려 부지런히 관심을 가지고 물을 주었더니 이런 수확의 첫 열매가 나왔다. 사실은 내가 피정관계로 출타중에 이미 교우들이 첫 열매를 수확했다고 한다. 어쨌든 나로서는 처음으로 열매를 직접 손으로 따서 씻었다.
마치 이 기분은 구약의 출애굽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 후 농경 사회인 팔레스티나에 정착하여 이른 비, 늦은 비와 햇빛으로 지어진 첫 수확의 농작물을 가장 먼저 하느님께 바친 추수 감사절(오순절)의 느낌이라고 할까?
돌이켜 보면, 이곳 도시 이름의 별명이 가리키듯이 얼마나 뜨거우면 '선 시티'(Sun City)인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나올까? 했더니, 햇빛에 타들어가는 잎들과 꽃들을 보면서 여기서 살 곳이 못되는구나!하고 몇번이고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불(火)의 반대인 물(水)을 많이 주며 그야말로 정성을 쏟았다. 타들어가는 나무잎과 꽃잎을 보면서 햇빛에 강하게 살아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했다.
죽어가는 것들에 더 신경을 쓰고 기도하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도 가졌었다.
그렇게 더 신경을 쓴 것들은 이제 연두색 빛이 자주색 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사막의 것들은 여러 자연의 조건으로 정상적으로 클 수가 없지만, 이렇게 강한 야성(野性)을 드러내는 것 같다.
누구는 동물을 키우지만, 나는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식물에는 눈길이 간다.
이 황량한 사막의 기후에서 꽃들에 물을 주며, 작은 텃밭을 보면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마르4,26~29), '가라지의 비유'(마태13,24~30),'겨자씨의 비유'(마태13,31~32)등을 묵상했고, 하늘의 돌봄과 인간의 협력이 잘 어울릴 때 최고의 수확을 거둘 수 있음을 묵상했다.
이렇게 작은 텃밭에 물을 주면서도, 더 잘 자라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보거나 아예 싹수가 노란 것들을 보면, 인간의 영혼들을 대하는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막은 사막이다.'이라는 것이다. '자연위에 초(超)자연'이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종자의 문제인가? 척박한 토양의 문제인가?
나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모르겠지만, 오이는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가지는 갈라서 속을 보았더니 거의가 별로 알맹이가 없고 맨살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본 가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추는 얼마나 매웠는지, 한번 먹고는 더 이상 입에 댈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베틀레헴이 대단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대단한 고을이 된 것이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통설은 별볼일 없는 동네인 것이다.
이태리의 로톤도나 피에틀레치나도 오상의 성 비오 사제때문에 그렇게 이름있는 도시가 되었지 실제로는 별볼일 없는 곳이었다.
우리가 사는 모든 동네도 대단한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나 하나 만이라도 깨어 주님 대전에 성인들처럼 거룩하고 올바른 진리의 생활을 하면, 그곳이 주님과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대단한 곳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는 곳의 도시 이름이 여기 저기를 피정 때문에 왔다 갔다 하면서 보니 미국의 다른 데도 몇 군데 있는 것을 보았다.
'엘 파소'(El Paso), 말하자면 '더 패싱'(The Passing), 즉 '지나가는 곳'이다.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에 있는 국경 도시로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그냥 지나가는 곳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 하나 만이라도 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산다면, 원래 '엘'(El)은 '하느님'이시니 '하느님께서 지나가시는 곳', '하느님께서 역사(役事)하시는 곳'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2014.08.27. 12:26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