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심훈
육조(六曺)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 시집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 1949)
................................................
지난해 3.1절 100주년 중앙기념식에서 윤봉길 의사의 종손인 배우 윤주빈이 심훈 선생의 ‘편지’를 낭독했다. 심훈이 옥중에서 어머니께 보낸 이 편지의 낭독은 애절한 음악이 더해져 듣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경성고보 3학년이었던 심훈은 학생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3월 5일 덕수궁 앞 여관에서 체포되어 11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어머님! 오늘 아침에 고의적삼 차입해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길 없으셨으니, 그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투옥되고서 상당 기간이 지나 그해 8월에서야 어머니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하오나 저는 이곳까지 굴러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고생을 겪었지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 집에 와서 지냅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를 썼을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순사를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나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개선문’은 서대문형무소 인근의 독립문으로 짐작된다. "어머님! 제가 들어 있는 방은 28호실인데 성명 삼자도 떼어버려 2007호로만 행세합니다. 두 칸도 못되는 방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했는데 그중에는 목사님도 있고 시골서온 상투장이도 있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난 천도교 도사도 계십니다. 그 밖에는 그날 함께 날뛰던 저의 동무들인데 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귀염을 받는답니다."
수인번호 2007호 심훈은 생선두름 엮이듯 수감생활을 보낸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홍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짓무른 살을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은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마음에 꾹꾹 눌러 이 낭독을 들었다면 이 대목에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지면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먹기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평소에 삶은 콩을 좋아하니 콩밥 먹는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내용이다.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위로하려는 심훈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심훈의 편지는 이어 감방에서 순국한 천도교 도사(천도교 경성대교구장 장기렴)의 죽음과 날이 밝도록 그의 주검 곁을 지킨 이야기를 담고 있다.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겨 내리고 높은 담 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같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 둘 생기가 나서 목침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어머님! 며칠 동안이나 비밀히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니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다운 듯 먼 촌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이렇게 1919년 8월 29일 쓴 편지는 기록하고 있다.
"어머님,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독립이라는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고초를 괴로워하고 하소연 해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도 적혀있다. 약관의 나이임에도 심훈의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은 이토록 절절했다. 이 편지를 쓰고 얼마 안 있어 집행유예로 풀려난 심훈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문학공부를 한다. 사실 심훈은 사진으로 보는 그의 이미지에서 짐작하듯이 1901년 노량진에서 양반 가문(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포시라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의 두 형은 친일파로 분류할 수 있고 1917년 나이 18세에 왕족인 전주 이씨 이해영과 혼인한다.
그의 인생에서 분수령이 된 사건은 당연히 3·1운동이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운 세계질서의 개편이 요청되던 시기에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존재와 김규식 박사가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각성하였던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조국광복의 그날을 염원하면서 1930년 3월1일에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시는 ‘그날’이 찾아왔을 때 폭발하듯 터져 나올 격정과 환희를 절규의 목청으로 노래하고 있다. 처음 시를 대했을 때 지나칠 정도의 극한적 표현과 자기희생의 비장한 목소리가 사진으로 본 그의 말끔한 이미지 위에 오버랩 되어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낭독된 ‘옥중편지’전문을 처음 접하고서 그 의심을 거두어들였다.
심훈 선생이 조국광복의 ‘그날’을 강인한 신념으로 갈구하였듯 이 시대에도 통일조국의 ‘그날’을 절규하며 염원할 시근이 꽉 들어찬 젊은이들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