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언(大言)
큰소리
장유(張維, 1587~1638)
손가락 튕겨서 곤륜산을 날려버리고
콧바람 불어서 땅덩이를 깨부순다
온 우주를 가두어 붓끝으로 모은 뒤에
동해 기울여 내 벼루에 따르리라
彈指兮崑崙粉碎(탄지혜곤륜분쇄)
噓氣兮大塊粉破(허기혜대괴분파)
牢籠宇宙輸毫端(뇌롱우주수호단)
傾寫瀛海入硯池(경사영해입연지)
허풍쟁이와 통 큰사람을 어떻게 구분할까? 소인(小人)이 사실보다 과장해서 말하
면 허풍이 되고, 대인(大人)이 자신의 큰 뜻을 말로 설명하려니 구차해서 과장법
을 쓰면 이처럼 통 큰 시가 된다. 소인은 자신과 제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대인은 자신의 이익에 앞서 대의명분을 다르는 사람이다. 장유는
조신새대 문인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내세운 인조반정(1623)의 공신
이었다 그는 정주학 일변도의 조선 유학을 비판하며 학문의 다양성을 강조했
고 병자호란(1636)때 최명길과 함께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대가로 무지렁이 백성이 전쟁의 고초를 면하게 했다. 주화론은 주전론(主戰論)을
편 허풍보다 통 큰 결단이라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통 큰 대인은 누구인가?
[작가소개]
장유(張維)
조선시대 좌부빈객,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지국(持國), 계곡(谿谷), 묵소(默所), 문충(文忠)
성격 : 문신
성별 : 남
출생일 : 1587년, 사망일 : 1638년
본관 : 덕수(德水)
저작 : 계곡만필, 계곡집
경력 :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나주목사, 이조판서
관련사건 :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의> 조선시대 좌부빈객,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장례원사의 장자중(張自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이고,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생애 및 활동사항1605년(선조 39)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주 01)에 들어갔다.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해 파직되었다.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주 02)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다음 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하자 반대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칭송하였다.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백헌집(白軒集), 송자대전(宋子大全),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청선고(淸選考), 『계곡평론소고(谿谷評論小攷)』(김주한,정음사,198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유(張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