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판매기
/최승호
오렌지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버렸다
습관이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 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 나라로 끌고 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을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주스를 줄 것인가
-덧붙임
“돈이란 神을 경배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물의 차이, 혹은
사물의 다양성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짐멜(독일 철학자)-
“돈의 광신도는,
그것이 주는 안정과 평온의 감정에 매료되어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타인들이나
주변의 사물에 시선을 던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은 갖고 싶고, 사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쓸 때가 아니라,
나의 자아가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쓸 때 더 큰 가치를 발휘한다.
돈을 어떻게 쓸지는 스스로 정할 일이다.”
-백영옥(소설가)-
‘블랙박스형 종교’가 있다.
블랙박스란, 자동판매기 같은 기계이다.
기계의 내부구조는, 기술자는 잘 알고
있겠지만, 일반이용객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 구조를 몰라도 전혀 지장없이
우리들은 기계를 이용할 수 있다.
지폐를 넣고 금액단추를 누르면(입력),
음료와 거스름돈이 자동적으로 나온다(출력).
이처럼, 내부의 구조를 잘 몰라도
이용할 수 있는 기계를 ‘블랙박스’,
즉 ‘검은 상자’라고 부른다.
종교 중에도, 블랙박스 같은 것이 있다.
절이나 교회에 가서 불전이나 헌금을 인푸트한다.
그러면, 홀연 이익이 아웃푸트된다.
혹은, 기도(인푸트)를 하면,
병이 낫거나 장사가 번성하거나
한 결과(아웃푸트)가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익=아웃푸트’가 있다고 하는
그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혹? 神佛은 답할 수 있을까.
불교설화에 이러한 것이 있다.
어느 사람이 절에 시주를 했다.
다액의 돈을 냈는데도
스님은 조금도 “고맙다”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많이 시주했다.
이번에는 ‘말해주겠지’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아무런 반답이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렇게 많이 시주했는데
어째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말해주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스님은,
“왜, 내가 그대에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까.
그대는 자신의 불도수행을 해서
보시를 한 것이 아닌가요.
내가 고맙다고 말하면 그것이
백지가 되어 버립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것과 비슷한 것이 성서聖書에도 있다.
헌금을 해서 상대에게 칭찬을 받으면
그것으로 그 “보답을 받아버리고 있다”
이를테면 백지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헌금할 경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것이 최고이다.
유럽에서는 익명을 조건으로
기부하는 분들이 참 많다.
당신은 보시(헌금)할 때,
보답을 바라고 하는가/아닌가!?
-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