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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노동자 11명과 일본인 11명이 사망한 나나쓰다테 사건현장을 방문한 마쓰다 도키코의 현장사진. 그녀 옆으로 나나쓰다테 사건의 조혼비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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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쓰다의 필치는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가 교감하는 장면을 끌어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마쓰다의 폭넓은 시야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노동자인 한, 광부인 한 생사를 같이 한다. 내 동생은 강씨보다 더 비
참하게 죽은 게 아닐까? 일본인도 조선인도 중국인도 미국인도 노동자인 한, 자본가에게 묶여 군대에 끌려가는 한 싫든 좋든 총알받이가 될 뿐이다.(3장, 9)
이러한 작가의 시점에 계급과 신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노동자를 보는 공평한 시선이 투영돼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작가 마쓰다는 ‘일본과 조선과 중국 노동자의 연 깊은 역사’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하나오카 그 후>(일중우호신문, 1972년 11월 30일). 노동자의 국제연대까지를 염두에 둔 생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나쓰다테 사건은 중국인 포로들을 하나오카 광산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마쓰다는 그런 상황을 “포로 296명이 일본 정부의 알선으로 최초로 ‘화북노공협회’의 손에서 그 광산의 댐이나 수로 공사를 담당하게 된 가시마구미에게로 넘어간 것은 1944년 7월. 그런데 약 2개월 전인 5월 29일, 난굴작업이 초래한 하나오카 강 침수로 함몰해 나나쓰다테 광상은 일본인 11명과 조선인 11명을 일거에 낙반으로 삼켰다”라고 증언했다.
따라서 어째서 그토록 마쓰다가 조선인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동정을 표명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마쓰다가 “나나쓰다테 희생자 22명의 유골은 결국 어찌됐을까? 또한 그 희생을 두 번 다시 하나오카와 일본의 모든 광산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라는 문제로 끊임없이 고뇌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고뇌를 품고 있었기에 당연히 마쓰다는 이웃나라 노동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마쓰다의 수필 <하나오카 사건과 나>에는 “하나오카 광산에는 지금도 희생당한 포로들의 유골이 산과 들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도 아키타의 광산에서 출생한 만큼 몸을 찢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라는 고백이 새겨져 있다. 회고하는 마쓰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조선인이나 중국인 희생자를 진심으로 위무하는 감정이 배어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고찰해보면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으로 이웃나라 사람들이 동원돼 희생당한 역사적 사건이 마쓰다에게 얼마나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쓰다가 사건 발생 5년 후인 1950년 하나오카 탐방조사에 착수한 뒤, 1961년과 1972년 계속 현장을 찾은 것은 사건 진상을 폭로하고 역사적 진실을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하려는 집념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경악스러운 참극이었기에 일찍이 하나오카 사건에 대해서는 진상규명 작업이 추진되었고, 중국인 연구자들에 의해 여러 각도에서 연구도 진행돼 왔다. 그러나 그 모티브가 됐던 나나쓰다테 사건에 대해서는 유족이나 관계자 이외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윽고 2009년 5월 29일, 오다테시(大館市) 하나오카쵸(花岡町) 신쇼지(信正寺)에서 처음으로 한일공동으로 ‘나나쓰다테 사건 65주년 추도식’이 열렸고 그날 <하나오카 광산과 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도 개최되었다.
나나쓰다테 사건은, 한일 미래와 평화공존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아니, 그 사건은 단지 그러한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선 ‘일제강점기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등식이 타파되고 국적과 성별이 다름에도 대등한 자격을 지닌 계층이 대등한 관계를 견지하며 무엇보다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이른바 지위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적인 세계와 휴머니즘 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이야말로 공시적, 통시적 관점을 뛰어넘어 통용되는 중요한 가치로 마쓰다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일찍이 사건규명에 몰두했던 것이 아닐까.
나나쓰다테 사건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한일 빈민층이 공생을 위해 어떻게 화합하고, 연대를 위해 어떻게 교류하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잘 보여준 실례다. 이런 신념하에 나나쓰다테 사건의 의미와 그 진실을 작품에 새기려 했기 때문에 마쓰다의 뇌리에선 언제나 조선인 노동자의 선명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오곡면(悟谷面)에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
그럼 마쓰다 도키코는 조선인 노동자(징용자)를 어떻게 그렸는지 살펴보자. 조선인 노동자 대표 역할을 수행하는 임씨는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출신으로 소개된다. 나나쓰다테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강씨 또한 오곡면에서 하나오카 광산으로 징용당한 노동자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마쓰다는, 강씨가 나나쓰다테 갱내의 어둠속에서 생사를 헤맸던 그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하나오카 광산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강씨의 심경을 그리며 그의 가족과 오곡면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곡면에는 강씨의 양친이 있었다. 강씨의 형들은 만주국에서 개척민이 되어 있었지만 양친은 일본에서 말하는 시골뜨기 농민이었다. 재배한 쌀의 반 이상은 지주가 가져갔고, 그나마도 공출로 빼앗겼다. 공출을 재촉할 때는 일본인 면직원이 부추기면 농민 한둘은 물어뜯어 죽일 수 있는 셰퍼드를 앞세웠다. 봄에는 물을 머금은 소나무 줄기 내피를, 여름에는 쑥을, 가을에는 칡덩굴을 끌어안고 굶주림을 피했다. 면의 각 농부 집에는 식용수를 위한 우물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오곡면으로 강씨는 돌아가는 것이다. 동일한 오곡면의 농부 집에서 똑같이 징용되어 온 임씨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오는 자와 남는 자.(3장, 2)
이 장면을 그렸을 당시의 마쓰다는 눈을 감고 오곡면의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조선인 노동자의 마음 깊은 곳까지 헤아릴 정도로 비참한 이국 노동자에게 동정과 이해의 마음을 표명하는 작가는 조선인의 괴로운 심경과 초라한 생활을 충분히 그려낼 만한 정보를 이미 접하고 있던 상태였을까? 리얼한 표현은 조선인 노동자의 생생한 증언을 수없이 들었을 작가 개인의 체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곡성군은 전라남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고 전라북도 남원시와 순창군에 인접해 있다. 예부터 전 지역에 준봉이 솟아 있는 곳으로 하나오카 광산 지역의 풍경과는 정취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농사일에 전념하는 일상에서 자그마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소박한 사람들의 고장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평화로운 조선 남부의 오곡면 주민에게 ‘공출’을 강요했음은 물론, 임씨나 강씨 같은 청년을 하나오카 광산으로 강제연행해 탄압을 일삼으며 노동력을 착취했다. 조선인 노동자의 괴로움과 애절함, 그리고 임씨와 강씨의 운명적인 이별을 그리는 마쓰다의 내면은 조선인 노동자와 완전히 일심동체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조선인 노동자의 심경을 어느 부분 하나 간과하지 않고 꿰뚫어보는 마쓰다의 예리한 필치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시공, 국경을 초월해 인간의 가치와 인권을 소중히 여긴, 그와 같은 글로벌한 시야 때문일 것이다. 마쓰다는 조선인의 시점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열차 안과 열차 밖에서 세 사람은 모국어로 짧게 이별의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굳게 약속했다. 이때만은 강씨의 창백한 얼굴에 생생하게 혈기가 비쳤다. 그리고 강씨는 두 사람에게 요코타 사다키치에게 전할 말을 부탁했다. 그 당시 누구보다 먼저 동굴에 뛰어들어 자신을 구출해 준 지주공, 그 일본인 광부(강씨는 그 사내가 요코타 사다키치라는 사실도 임씨와 정씨에게서 전해 듣고 비로소 마음에 새겼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출발하는 자신의 마음을 아무쪼록 두 사람을 통해 전하니 용서해 주도록. 그리고 단 하나의 손녀딸을 잃은 오스에 할멈에게, 한참 일할 나이의 남편을 잃은 시즈에게, 도움을 준 모든 이에게 서운함 없이 고마움을 표하고 싶지만 말이 부자유스러워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두 사람에게 거듭 부탁했다.
“여러분, 고마워요. 여러분, 고마워요.”
강씨가 마지막으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었던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3장, 2)
임씨와 정씨, 그리고 강씨에게 일본은 조국의 주권을 강탈한 추악한 권력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그저 감정적으로 밉다고만 생각하던 지배자 일본.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였고, 일제에 대한 보복이야말로 자신들 조선인 노동자의 임무라고 하는 사실을 임씨는 정씨의 가르침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3장, 2)라는 서술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런 만큼 차라리 응징하기 위해 대항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은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조선이라는 구도, 더욱이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 제국주의를 증오해 거기에 대항하려 한다는 단순한 해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른바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간적인 유대, 인간을 동물처럼 혹사하는 무자비한 권력에 의한 빈민층의 피와 눈물, 극단적인 상황에서 동료를 구출한 뒤 이웃나라 노동자와 서로 포옹하는 감동이 형상화된 격정적인 장면이 앞서 배치돼 있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강씨는 요코타 사다키치에게 구출된 뒤 현실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어서 오곡면으로 귀향할 수밖에 없지만, 요코타를 비롯해 오스에 할멈, 시즈 등 일본인 광부 일행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조국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피식민지인 입장에서 하나오카 광산까지 끌려와 일본 제국주의에 혹사당한 과거의 시간을 생각하면 일본에 대한 증오가 어떤 것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강씨는 감동할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일본인 노동자와의 교류를 통해 절실하게 맛보게 된다. “여러분, 고마워요. 여러분, 고마워요”라고 속내를 드러내는 강씨. 하지만 “강씨가 마지막으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었던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는 내용에서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는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의 교감, 조선인 등장인물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일본인 작가 마쓰다 도키코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나나쓰다테낙반으로 일제의 하수인에 맞서는노동자(광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되었던 판화)
임씨와 도쿠코의 사랑
조선인 징용자와 일본인 노동자의 동지애가 임씨와 도쿠코의 관계로 발전하는 곳에서 마쓰다 도키코의 작가로서의 기개, 시대와 식민지주의를 초월한 글로벌리즘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도쿠코가 임씨를 우연히 만난 장소는 갱내였다. 복장도 갱내복 그대로였다.
도쿠코와 임씨는 어지간히 우연한 경우가 아니면 갱내에서 만날 수 없었다. 교대 순번이 다르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만나면 어느새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것은 한쪽이 다이너마이트 상자를 안고 스쳐지나가는 너무나도 한순간의 일이었다.(3장, 3)
도쿠코는 생모와 둘이서 살고 있었고 모친은 갱내에서 광차에 광석 채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연명을 위해서 도쿠코 자신도 갱내 노동을 해야만 하는 몸이었기에 이성에 눈뜰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갱내에서의 조우로 도쿠코는 임씨에게서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되며 임씨는 도쿠코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존재로 부상한다.
일본인 노동자 도쿠코와 조선인 징용자 임씨의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작가의 의도적 설정에 의한 것일 터인데 “모친으로부터 ‘조선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도쿠코는 흠칫했다. 그와 동시에 임씨의 얼굴이 마음에 파고들었다. 웬일인지 눈물이 나왔다.”(2장, 3)라는 표현에서도 도쿠코의 마음이 얼마나 임씨를 향하고 있는지 간파할 수 있다.
같은 광산노동자 입장일지라고 신분 등 여러모로 보아 임씨와 도쿠코의 만남은 공개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도쿠코의 모친이 도쿠코에게 “사다키치나 임씨하고 너, 엉덩이 흔들며 붙어 다니는 건 아니겠지? 사다키치는……하여간에 임씨는 조선인이다”, “조선인과 실수라도 해봐라. 출세에 평생 방해가 되니까”라고 나무라는 장면이 있는데 도쿠코 모친의 언설은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런데 임씨를 향한 도쿠코의 연정은 얼마만큼 깊은 것이었을까? 작가는 “임씨를 만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의 불안이나 슬픔과는 별도로 도쿠코의 가슴이 뛰었다. 임씨 …….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임씨의 한꺼풀 눈과 꼭 다문 입매가 눈에 떠올랐다”라고 새겨 넣었다. 임씨를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두근거리며 임씨를 만나야겠다고 다짐하는 도쿠코의 모습은, 연대감으로 맺어진 남녀노동자의 사랑이 현실적 제약을 뛰어넘어 제도와 신분의 속박을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국이 다른 이성임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애절하다 못해 절실한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작가가 임씨나 도쿠코의 시점에서가 아니라 화자의 시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을 보면 그러한 사실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만난 순간 두 사람은 어둠을 헤치고 그냥 눈빛만을 서로 바라보았다. 넘치는 행복감으로 두 사람은 입술에 미소를 띄웠다. 두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어쩐지 쑥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가끔 도쿠코는 두 사람의 은밀한 행복을 나나쓰다테에서 세상을 뜬 다스코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듯해서 미안함과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3장, 3)
작가는 화자를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의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독자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생각해 보니 놀랍게도 나나쓰다테 갱 붕괴로 목숨을 잃은 다스코와 구출된 강씨의 관계에도 작가는 여운을 남기지 않았던가. 동료였던 도쿠코를 통해 다스코가 살아 있다면 강씨와 인연이 되었으리라는 내용을 암시하는데, 거기에서 조선인 남성노동자와 일본인 여성노동자의 특별한 설정을 독자에 대한 뜻 깊은 의미로 포착하려한 마쓰다의 의도가 읽힌다.
임씨와 도쿠코의 사랑이 클라이막스에 이른 장면은 중국인 포로가 연행당하는 순간을 목격한 도쿠코에게 임씨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가르쳐 달라며 애걸복걸하는 부분이다.
“우바사와에는 어떻게 가지? 도쿠코, 자 가르쳐줘.”
“임씨, 그걸 물어서 뭘 하려고요, 왜 우바사와로 가려는 거죠? 그 포로들은 중국인 포로예요. 조선인이 아니에요.”(생략)
“도쿠코, 넌 일본인이니까 그렇게 있을 수 있어. 난 조선인이야. 조선인도 중국인도 지금은 일본에게 학대당하고 있지. 도쿠코, 하지만 난 사다키치나 넌 일본인이라도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자, 도쿠코. 너의 은혜는 잊지 않을게. 그러니까 도쿠코, 제발 가르쳐줘. 난 잠자코 있을 수 없어.”(생략)
도쿠코는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나는…….”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괴로움, 그리고 애달픔, 그 고통 때문에 도쿠코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임씨는 따뜻하게 감싸듯 도쿠코를 주시했다.
“도쿠코, 우리는 서로 똑같은 광부야. 자, 이제 됐으니까 길을 알려줘. 정말로 조금이라도 알려줘.”
임씨는 달래듯이 자신과 동갑내기 정도의, 하지만 자신의 목 정도밖에 차지 않는 도쿠코를 들여다보았다. 둘러쓴 수건 밑으로 갱 내의 유황진흙 냄새가 밴 도쿠코의 머리칼이 임씨의 코끝을 자극했다. 임씨는 이 도쿠코가 지금에야 비로소 가여운, 또한 자신이 감싸줘야 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략)
그것이 두 사람을 평생 이어주는 연애의 싹인지 임씨는 알지 못했다.(2장, 5)
일본 제국주의에 침략당한 처지의 민족 입장에서 중국인 포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임씨가 중국인 포로의 숙소를 도쿠코에게 캐묻는다. 중국인 포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채근하는 임씨와 일본인으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하며 임씨가 처할 상황을 염려해 주저하는 도쿠코의 모습에서 애절함이 느껴진다. 서로 문답하는 과정 속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듯한 장면으로 읽히는 것은 중국인 포로에게 동정과 공감을 느낀 조선인 징용자 임씨가 일본인 여성 도쿠코를 단지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임씨를 보고, 도쿠코는 염려하고 배려한 나머지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려고 하지만, 결국 어찌하지 못하고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으며 심적 교감을 나누는 상황이 독자들에게 무한의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두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시종 일치한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는다. 도쿠코에게 전쟁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조선으로 가자고 권하는 임씨의 말에 도쿠코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도쿠코는 차라리 임씨와 함께 죽고 싶다고도 생각하지만 “전쟁만 해결된다면 징용도 없어지고, 비참한 죽음도 지금보다는 줄어들 것이며 임씨도 조선으로 돌아가 모친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5장, 3)라고 읊조리지 않았는가. 각자의 어머니를 사모하고 각자의 조국을 생각하는 두 사람의 개별성을 강조해두는 것도 마쓰다는 잊지 않았다.
이 점은 일제의 침략주의에 분노와 염증을 품으면서도 마쓰다가 ‘내 고향이여, 조국이여’라고 표현한 것처럼 자신의 조국과 고향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않고 있었다는 근거이다. 그와 같은 열정이 작품 속에서 도쿠코를 임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지는 않는, 자기결정권을 지닌 여성으로 자립시키고 있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작가 마쓰다는 무엇보다 도쿠코에게 길을 안내받은 조선인 노동자가 중국인 포로와 조우하는 장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임씨와 정씨가 중국인 포로를 만나 비로소 ‘두 나라의, 두 민족의 마음을 언어 이상으로 강하게 이어 주는’ 그 무엇인가를 확인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렇다. 하지만 조선인 노동자가 중국인 포로를 만나 교감을 나누기까지의 과정에 임씨와 도쿠코의 신뢰와 사랑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두 민족의 마음’을 포착하기 위한 모멘트로 임씨와 도쿠코의 관계를 설정한 마쓰다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연령, 성별을 불문하고 일본인 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 인식 속에는 노동자를 비하하거나 멸시하는 대상에 대한 분노, 혹은 혹사와 학대를 견디며 연명할 수밖에 없던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작가의 애절한 시선과 동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따라서 작품 곳곳에는 ‘그런 내용을 어떻게 작품 속에 그려 넣을 것인가’ 하고 고뇌하는 실천 작가 마쓰다의 열정이 투영돼 있음에 틀림없다.
마쓰다는 그와 같은 노동자의 고통과 애환, 그것을 극복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대상으로 당시 신분과 제도로 보아도 부적절한 관계로 인식되는 조선인 징용자와 일본인 노동자의 연대, 또는 조선인 남성노동자와 일본인 여성노동자의 사랑을 독자에 대한 메시지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단순한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 남녀노동자의 동지애로 승화된 임씨와 도쿠코의 관계는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라고 하는 작가의 인식하에 치밀하게 그려진 밑그림으로 볼 수 있겠다.
맺음말
마쓰다 도키코는 <땅밑의 사람들>에서 일본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는 물론, 조선인 노동자에게도 따뜻한 시선과 한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하나오카 사건 현지탐방의 경험이 마쓰다의 체내에 깊게 뿌리내려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소생하고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마쓰다는 “나는 그 현장으로 직접 이어지는 도야시키 갱 3번 갱도의 가장 깊은 곳, 즉 궤멸 상태의 나나쓰다테 갱 차단벽에 이르러 갱내가 얼마나 전시적인, 인권무시의 난굴 때문에 위험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자신의 눈과 발과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 ‘인권무시의 난굴’이야말로 하나오카 강의 함몰을 초래했고 그 함몰은 수로변경공사를 위해 중국인 포로를 하나오카 광산으로 불러들여, 결국 하나오카 광산의 참극을 야기한 점을 상기해보면 하나오카 광산 현장을 탐방한 마쓰다의 심경을 꿰뚫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쓰다에게 있어서 하나오카 사건은 치밀하게 검증돼야할 대상이었고 평생 동안 천착해야할 과제와 같은 것이었다. 마쓰다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하나오카 사건의 근본 원인이 이 국토의 땅밑까지 점령하고 있던 일본의 천황제와 독점 지배, 그리고 그러한 맹신에 뿌리를 내린 배타적이고 침략적인 군국주의에 있다는 사실, 그것이 안으로는 자국의 노동자 계급과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고 밖으로는 노골적으로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살육과 국토 침략을 확대했다는 사실.
이곳 하나오카의 땅밑과 땅위의 모든 곳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새겨진 대상이 하나오카 사건이 아닐까.
이와 같은 언술은 마쓰다가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으로 희생된 조선인과 중국인의 영혼을 공양하는 심경으로 성찰의 일생을 보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평화를 희구하는 절실한 염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마쓰다가 얼마나 투철한 시대정신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 시대정신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며 끊임없는 투쟁을 몸소 실천하는 운동이었고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폭력세력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런 인간해방과 자유에 대한 절실함을 마쓰다는 <땅밑의 사람들>을 통해 간절히 호소했다. 작가 마쓰다 도키코는 두 번 다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은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인과 중국인이 희생당한 역사를 공개하며 일제의 가해적 행위를 만천하에 고발하였다. 이러한 마쓰다 도키코의 숭고한 정신이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는 것이다.
마쓰다 도키코는 또한 작품 속에 나나쓰다테 사건으로 촉발된 하나오카 사건의 전모를 형상화해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중일 서민층의 연대를 강조했다. 그리고 하나오카 사건의 희생자에 대해 위무하는 마음과 추도의 심경을 작품에 새겨 넣었다. <땅밑의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일본 땅으로 끌려와 온갖 시련을 겪은 이국노동자에 대한 마쓰다 도키코의 사랑과 동정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부기> 본고는 필자가 최근 일본의 ‘주오효론(중앙평론) 281호’(주오대학출판부, 2012년 10월)에 발표한 논문 ‘마쓰다 도키코의 <땅밑의 사람들>론’을 번역, 가필한 것이다(주 생략). 번역 작업 중에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도난카이 지진으로 희생된 분들의 추도비 이설 제막식 소식을 들었다(‘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현지 지원).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나나쓰다테 사건 피해자는 물론, 나고야에서 희생된 분들에 대한 공양의 마음으로 작업했다.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근로정신대 할머니 문제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피해자 문제가 하루속히 해결되길 기원한다. 논문을 기고해 받은 원고료는 소액이지만,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드린다.
첫댓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실에 책 있습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