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연중 되었던 달빛 소나타입니다...
오랜만에 가져온 글이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진 모르겠습니다.
전반부는 많이 바뀌지 않았지만..
후반부쪽에서는 대폭 수정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새롭게 찾아온 달빛소나타...
재밌게 읽어주세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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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은성에겐 남자친구가 있다.
은성의 친구들은 그를 일컬어 ‘친절한 현수씨’라고 칭한다.
현수는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하다.
소위 말하는 꽃미남에 호남 형. 이 두 단어면 금상첨화다.
더 이상의 수식어는 귀찮은 존재 일 뿐이다.
갸름하고 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커다란 눈동자.
항상 웃음을 지우지 않는 상냥한 현수씨.
현수는 은성 너무너무 사랑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나 뭐라나.
은성을 보는 눈은 또 어쩜 그리 다정하고 기름기가 줄줄 흐르다 못해 넘쳐나는지.
더군다나 둘이서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자면, 꼭 선남선녀를 보는 듯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워낙 출중한 외모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은성의 마음이다.
현수에게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뭐랄까?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아쉬운 존재랄까?
현수는 가끔씩 은성의 그러한 무딘 신경에 무던히도 지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성을 놓아 줄 수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건 알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현수의 생각에 지금 은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통한 진실 된 마음.
그 마음이 뭔지 알지 못하는 은성에게 현수는 그 마음이 바로 이런 거다, 라고 알려주고 싶은 거다.
#01.
달빛 아래 그 달빛을 머금은 가로등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은성이 있고 현수가 있다.
지금 그 둘은 달빛과 달빛의 환한 빛을 모조리 빨아들여 더 밝은 빛을 내는 가로등 아래에서 달콤한 키스를 한다.
저녁에 먹은 피자의 맛이 감미롭게 배어 나오는 달콤한 키스…
라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로맨스가 굳이 따로 필요치 않겠지만
피자의 페퍼로니가 짠 맛을, 크러스트의 치즈 맛이 느끼함을.
그 위에 뿌려진 핫 소스의 매콤한 맛을 한꺼번에 느끼는 조금도 황홀하지 않는 키스라서 문제가 있다.
아!! 황홀하지 않은 키스니, 달콤한 키스가 아니라 달콤해 보이는 키스라고 정정 해야겠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조금도 황홀하지 않는 키스임에도 불구하고 두 녀석은 아주 끈덕지게도 붙어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지나가는 사람이 문득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이 외려 무안할 만큼 오랜 시간을 말이다.
“내 꿈꿔라.”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키스였지만, 그래도 끝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 끝에서 풍선껌처럼 달달한 목소리로 현수가 말했다.
“조심히 가.”
“그래. 내일 보자.”
“응.”
은성도, 일단 미소를 띠워준다.
그것이 은성에겐,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눈을 보며 너무도 예쁘게 웃는 남자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하지만―
“역시, 이건 아니야.”
점점 멀어져가는 현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푸우~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마는 게 바로 은성의 본심이다.
“조금도 달라지는 게 없잖아. 조금도 낳아지는 게 없다고.”
무언가 많이도 답답한 듯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는 은성의 안면엔 짙은 안개가 서려있다.
“나는 조금 더 설레고 싶다고. 후우… 정말.”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젖던 은성은 잔뜩 쳐진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 위쪽에서부터 바리톤의 상당히 매력적인 음성이 들려온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달콤하긴 더럽게 달콤하더만.”
“…오늘은 일찍 들어 온 모양이지?”
누군가가 인기척을 냈다면 적어도 그 얼굴 한번쯤 확인 해 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 일 텐데,
은성은 그 매력적인 목소리에 꼼짝도 하지 않는다.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터벅터벅 계단을 밟아 이층으로, 그리고 옥상으로 향할 뿐이다.
더군다나 적나라한 키스 장면을 엿본 상대에게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불쾌 해 하지 않는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뒤에서 호박씨 깔 거면 차라리 빨아대지나 말던가. 이건 뭐, 단물 쓴 물 다 빨아먹고 투덜대는 꼴이라니. 쯧쯧.”
“어디까지나 예의상이었다고.”
“시발. 그놈의 예의 하번 더럽게 따진다. 한두 번만 더 따지면 아주 볼만 하겠어.”
“빈정댈래?”
“안 돼?”
한울은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뻔뻔스럽게도 물었다.
그에 은성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하얀 얼굴을 붉혔다.
무언가가 뻥 터질 것처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바심을 일게 하는 얼굴이었는데, 의외로 은성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은 단조로웠다.
이미 이런 상황들은 익숙하다 못해 지겹다는 듯이.
“너한테 피해 주는 건 없잖아. 즐거움을 줬다면 또 모를까.”
꼭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 얘기 하듯 말 하는 은성이지만,
그녀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사람은 사람인지라 마지막엔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찌푸린 얼굴을 보며 한얼은 하하하, 신나게 웃는다.
“하하하. 그건 그래. 인정!”
“짜증나, 박한얼!”
“알았다, 자식아! 오늘은 이 오라버니가 백보 양보해서 스탑(step!) 해준다!! 까짓것!”
“퍽이나 인심 쓰신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이제 얼굴 좀 펴라. 좀!”
“몰라. 짜증나.”
“왜? 키스가 영 마음에 안 차서? 그러게 내가 가르쳐 준다니까.”
뭐가 그리 좋은지, 잔뜩 심통 난 은성의 얼굴을 싹 무시한 채 한얼은 능청스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런데, 반응이 더 이상하다.
분명 그 말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은성은 별로 상관없다는 표정이니 말이다.
“아직도 생각중이냐?”
“남이사, 생각을 하든 말든. 지지고 볶든지 말든지, 그대는 제발 신경 좀 꺼 주시지.”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한번 생각 해 봐라. 이 오빠가 이래봬도 키스 하나는 끝내주잖냐.”
“누가 그래?”
“누구긴 누구야. 나를 스쳐간 수많은 계집애들이 그러지.”
“하나같이 정신이 나갔군. 나갔어. 쯧쯧.”
으레 당연하다는 듯(사실 짜증이 이만 저만 아니니) 미간을 찌푸리는 은성을 따라 이번엔 한얼도 미간을 팩하고 찌푸렸다.
“쯧쯧? 어감이 상담이 거슬린다?”
“네 귀에 거슬린 건 알면서, 내 귀에 거슬리는 건 모르는 거야? 도대체 그 말을 지껄이고 다니는 골빈 년들 면상이 궁금하다, 궁금해!!”
“고, 골빈 년들?”
“왜? 내 말이 틀렸어?”
“야!!”
“왜?”
“너 나랑 키스 해봤어?!!”
버럭! 소리치는 한얼의 격한 반응에 은성은 놀라기 보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내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뭐, 그래도 이미 옥상에 다 달았지만.
그러고 보니 뭔가가 이상하다.
분명 은성도 한얼도 옥상에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깝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좁혀질 수 없는, 이를테면 불변의 법칙인양, 고정 된 제한 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은성과 한얼 사이에 있는 난관과 그 아래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바닥이다.
다시 말해서, 한얼과 은성은 같은 집이 아니라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사촌인 샘이다.
둘은 아주 어려서부터 바로 이 집에 살았으며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보다 더 돈독한 우정을 쌓고 살아왔다.
“지금 그거, 웃으라고 하는 소리냐?”
달칵 거리는 라이터 소리가 들린다.
이어 한얼의 입술에 물린 새하얀 담배 한 개비.
그 연기가 하필이면 바람을 타고 은성에게로 온다.
은성의 매끄러운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골초새끼.”
분명 기분 나쁜 욕이었지만, 뭔가 폭발 할 듯 붉게 달아오르던 한얼의 얼굴도 이내 하하하 웃는다.
큰 웃음소리는 아니었지만 매력적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난간을 넘어왔다.
현수 보다는 약하지만 나름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있는 한얼.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난간에 반쯤 기댄 채로 은성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처음부터 나지막한 의자위에 앉아있었다.)
은성은 그를 등지고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는다.
물론 맨바닥은 아니었다. 작은 돗자리 같은 게 있었다.
“팔은 왜 그러냐? 또 한판 뒹굴었냐?”
“야야, 너무 그렇게 빤하다는 투로 말 하지 마라. 빈정 상한다.”
“하루를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지?”
“조용조용하면, 그 무슨 재미냐?”
은성은 한얼의 왼쪽 손목에 감겨진 압박 붕대를 보며 말 했다.
누구랑 작은 시비라도 있었나보다.
그러고 보니 한얼의 그 뚜렷한 이목구비 위에,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지만, 조금은 서늘하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얼굴 선 한쪽에 작은 딱지가 앉아있다.
손톱 따위에 긁힌 것보단 누군가의 주먹에 휘둘려 실핏줄이 터지고, 그로 인해 생긴 상처 같아 보인다.
“야, 내일 뭐하냐?”
“몰라. 왜.”
“할 일 없으면 유리의성으로 나와라.”
“싫어.”
“지랄 말고 나와. 소개 해 줄 사람 있으니까.”
“소개? 너 또 여자 생겼냐?”
“꼬나보지 마라. 눈 까리 확 파먹어 버리기 전에.”
“생겼구나. 미친 새끼.”
보통 사내놈들끼리 주고받는 투박한 단어들을 거침없이 남발하는 은성.
조금 전 남자친구 앞에서, 아무리 예의상이라지만 그렇게 예쁜 웃음을 지어보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다른 모습이다.
정말이지 가식의 정석을 달렸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 이번엔 얼마나 갈 거냐? 일주일? 이주일? 아~ 그래? 그래도 이번엔 보름은 갈 거라고? 십팔. 보름이나 이주나. 하루차이 아니냐?”
“자꾸 까불래, 너?”
굳이 한 번 더 강조를 하자면―
날카로운 얼굴선에 뚜렷한 눈, 짙은 눈썹, 딱 봐도 한 성깔 할 것 같은 한얼이 상당히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그러면서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은성을 쏘아본다.
그러나 은성은 본채 만 채, 제 할 말을 아주 잘 지껄이고 있다.
“이 주 이상 가는 걸 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그도 그럴 게 넌―”
“시끄러.”
“어디서 말은 자르고 지랄?”
“십팔. 넌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지금 다른 건 둘째 치고 다리만 안 다쳤어도 훌쩍 날아가서 몇 대 두들겨 줬을 거다.”
주먹을 불끈 쥐고 위협적으로 말을 내 뱉는 한얼과 그를 보며 절재 쫄지 않는 은성.
외려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뀔 듯 보이는 거만한 자태.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아버리기도 잠시,
내내 표정에 변화가 없던 은성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너, 팔만 다친 게 아니었어?”
흠칫, 한얼이 제가 내 뱉은 말에 제가 놀랐다.
짤막한 욕설이 들렸다.
말실수 했다는 듯, 스스로가 짜증난 한얼은 아주 잠시였지만 은성의 시선에 뒤통수를 대고 스스로에게 비난을 쏟아 붙인 것이다.
붕어마냥 입만 벙긋하면서.
“하여튼 가지가지 해요. 박한얼.”
“걱정을 하는 거냐, 고소해 죽게 다고 약을 올리는 거냐.”
“네가 나라면 어느 쪽이겠냐?”
“당연히!! 후자겠지. 십팔.”
“하하하. 알긴 아는구나?”
“졸 짜증나!!”
한얼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아무튼!! 내일 나와라, 너!”
“은근히 명령조다?”
“그래서, 꼽냐?”
“며칠이나 됐냐?”
“오늘이 일일이다.”
“그래, 이번이 몇 번째지? 아마 오십 번째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맞냐?”
대 놓고 빈정거리는 은성의 말을 잠자코 들어줄 한얼이 아니다.
역시나, 그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져 졌다.
그리고 실룩실룩 거리며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술의 근육은, 아마도 목구멍 끝까지 차 오른 욕을 힘겹게 삼키고 있는 모양새다.
명색이 친구라고.
“그래, 이번에는 얼마나 갈 생각이냐? 아니, 이런 질문은 내일 만날 네 여자 친구한테 해줘야 하나?”
“야, 신은성. 분명히 말 하는데, 이 다리를 하고도 넘어 갈 수가 있다는 걸 명심해라.”
“왜? 자존심 상해? 그러면 뭐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래,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도대체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네가 찬 여자는 얼마나 되냐? 설마, 하나도 없진 않지?”
“계집애가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봐. 저게 친군지 원수인지 모르겠다. 진짜.”
“은근슬쩍 말 돌릴 생각 말고 뚫린 입으로 한번 지껄여봐라, 좀.”
한얼의 얼굴이 조금 전 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정말 그 난간을 뛰어 넘을 것만 같다. 주먹을 불끈 쥐고.
그러나 한얼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둘 중 하나는 내가 먼저 깠어.”
“둘 중에 하나?”
“그래. 이 화상아.”
“그 말은 둘 중에 하나는 네가 먼저 까였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게 자랑이냐?”
오 십 명 중에 한명이나 먼저 찬 사람이 있냐고 물을 때는 언제고
그래도 반반이라는 한얼의 말에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혀끝을 끌끌 차대는 은성의 얄미운 얼굴을 보며 한얼 매끈한 얼굴은 정반대로 붉으락푸르락 해졌지만, 은성은 개의치 않았다.
아주 조금도.
#02.
도대체 모르겠다.
생긴 건 멀쩡한데, 속고만 살은 걸까?
아니, 아무리 봐도 속고만 살았을 만큼 맹한 인상과 성질 머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걸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어. 박한얼.”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방해는 되지 말아야지! 하며 곱 고운 이마에 핏대를 새우는 은성이다.
이유인즉슨, 점심시간 때부터 매 시간마다 걸려온 전화. 발신자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원수 박한얼.
성질머리대로라면 핸드폰을 진즉 박살내도 냈을 텐데,
뚝뚝 끊어질 듯 탱탱하게 솟아오른 핏대마저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참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친구’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머지않아, 난 성인군자가 될 거야.”
미운정도 정이라고, 어쩔 수 없다는 심보로 체념하며 교문을 나서는 은성 앞에
새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은성을 유혹하는 현수가 짠! 하고 나타났다.
“은성아.”
꽃처럼 화사한 미소에, 붉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달콤한 멜로디 같은 음성.
이 모든 것들이 부드럽게 은성을 유혹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로맨스겠지만 그들에게 달콤한 로맨스 따윈 그림의 떡이다!
자상하고 분위기를 즐길 줄 알며,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선물 할 줄 아는 로맨티스트 현수.
매끄럽게 잘 빠진 얼굴에 함박웃음까지 지어줄 줄 아는 그를 향해 은성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더워.”
푹푹 찌는 날씨로 인해 축 쳐진 찐득찐득한 한 마디의 말 뿐.
잔뜩 반가운 얼굴로, 너무 기쁜 나머지 장미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쪼르르 달려가 팔짱을 끼우는 행위가 아닌, 그저 그런 옆집 친구를 보는듯한 얼굴.
매일 보는 짝꿍을 보는듯한 무미건조한 웃음을 띤 채로 똑같은 걸음걸이로 다가가는 것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냥한 우리의 현수씨, 내내 웃는 얼굴로 은성에게 먼저 다가간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푹푹 쪘어.”
“그래? 에이, 뭔가 재밌는 일 좀 있었으면 좋았을 걸.”
현수는 가만히 들고 있던 꽃을 내밀었고, 은성은 여전히 무료한 얼굴로 꽃을 받아든다.
꽃을 본 반가운 마음에 그 향기를 슬쩍 맡아 본다는 둥의 그 흔하디흔한 제스처 한번 없이
무거운 짐 하나 얻었다는 절망적인 얼굴로 가던 길을 재촉 할 뿐이다.
현수는 그런 은성을 보면서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지쳐 보였다.
‘그래, 아직은 이르다는 거 알아.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
하지만 은성아, 제발 상대가 베푼 성의에 미약한 반응 하나 정도는 보여 줄 수 없는 거냐?’
후우, 묵직한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지만 현수는 내색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매정하게 뿌리치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 판국이었다.
“은성아! 오늘은 뭐할까?”
잔뜩 지치고 힘든 만큼 은성을 잘 아는 현수다.
물론 한얼처럼 많은 걸 알지는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많이 알고, 그것을 감수하고 시작한 사랑이다.
그래서 현수는 힘들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씩 은성을 위해, 은성을 바꿔 더 많이 사랑스러운 여자로 거듭나게 해 주려고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고서 묻는다.
“갈 데가 있어.”
“어디?”
“얼이한테.”
“얼이? 아~ 박한얼?”
“어.”
“왜? 무슨 일 있어?”
“새 여자 친구를 소개해주겠대.”
“그세 여자 친구가 생겼나보지?”
“그런가봐.”
“나도 가도 돼?”
“그렇지 않아도 같이 오라더라.”
“얏호!”
그다지 좋아할 일 같지는 않지만 현수는 크게 소리를 치며 반가워한다.
그 모습을 은성은 이해 할 수가 없다.
도대체 남의 여자 친구 소개 밭는 자리가 뭐가 그리 좋다고 저리 호들갑인가, 싶은 얼굴이다.
#유리의 성.
현수와 함께 도착한 커피숍에 한얼은 먼저 도착 해 있다.
제 여자 친구로 보이는 한 계집애와 함께.
“웬일이냐? 네가 다 먼저 와 있고.”
누가 그 둘의 돈독한(?) 우정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보다 못하다고 할까 겁이라도 나는지,
은성은 한얼의 얼굴을 보자마자 시비를 걸어댄다.
평소 다른 날만 같더라도 바로 반격하며 으르렁 거렸을 한얼이지만,
그래도 이틀 밖에 되지 않았다는 여자 친구를 위해 ‘참을 인’자라도 새기는 모양인지 짙은 눈썹은 꿈틀 거려도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아, 안녕하세요.”
그 때, 은성의 여자 친구 아현이 먼저 은성에게 인사를 건넨다.
작은 키에, 왠지 첫 인상부터가 강한 보호본능을 불러오는 외모.
쭉쭉 뻗고 모든 게 시원시원해 보이는, 더군다나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은성과는 전혀 다른 외모.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듯 보이는 귀여운 소녀.
전혀 한얼과는 매치가 안 될 것 같은 그런 이미지의 계집아이가 지금 한얼의 옆에 앉아 은성을 보며 인사한다.
“반가워. 나는 신은성이야. 얼이랑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원수지간이고.”
상대를 조금 벙지게 하는 인사말. 아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아현은 먼저 손을 내밀어준 은성이 무색하지 않게 그 손을 잡아준다.
“채아현이예요.”
은성이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때, 현수가 살며시 끼어들었다.
“반가워, 난 정현수. 은성이 남자친구야.”
“아, 안녕하세요.”
“몇 살이야?”
“열여덟이요.”
“아, 그래서 계속 존댓말 했구나?”
“헤헤.”
“귀엽네. 후훗.”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아현을 향한 부드럽고 달콤한 현수의 웃음소리.
은성은 현수가 그러거나 말거나 별 신경도 안 쓰는데 아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앉아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은성이 그 순간 부드럽게 건네주고 싶지만 애써 참은 한마디가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내숭 백단.’
“야야, 그만 들 앉아라. 고개 아프다.”
주문 해 놓은 아이스티는 절대 손에 대지도 않고 질겅질겅 껌만 씹던 한얼이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말 했다.
예의상 은성과 현수가 마실 음료수를 주문했고, 별 시답지도 않은 얘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네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크라제로.
간단하게 끼니라도 때우자고 햄버거를 먹으러 나온 것이다.
자리를 옮겨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볼만하다.
큰 키에 늘씬한, 이미지는 한없이 차가운 한얼과 확연히 대조되는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의 아현.
깨물어주고 싶은 얼굴에 눈웃음까지 치며 한얼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런저런 말도 많이 하고 갖은 아양도 다 떨어댄다.
그러나 어색한 웃음만 흩뿌리는 한얼. 정말이지 한 쌍의 선남선녀와는 거리가 먼 그들의 모습에 다짜고짜 웃음부터 나왔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주변을 스쳐가는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토해낸 웃음에 불쾌함을 느낀 한얼이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묵묵히 걸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뭔가 대단한 포스가 느껴졌는데, 차라리 어색한 미소보다는 차가운 얼굴이 훨씬 잘 어울리는 한얼이었다.
“어머! 저 남자 봐! 완전 멋있다!”
“조승우가 울고 가겠는데?!”
확실히 이런 말까지 들려왔다.
이어서 그 뒤를 따라가는 커플을 보자.
남자친구와 맞먹는 키에 상당히 세련된 이미지를 소유한 은성과 반대로 부드러운 이미지가 강한 현수.
그나마 한얼과 아현보다는 은성과 현수 커플이 비교적 잘 어울려 보인다.
문제는, 앞에 가는 커플과 달리 이 커플은 남자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갖은 아양을 떨고 있다는 사실.
오늘따라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너의 향기가 환상이니 어쩌니 하고 있으니, 기도 안 찰 노릇이다!
“저기요, 언니.”
햄버거 주문은 현수에게 맡겨 버리고 세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궁상떨기 아주 좋은 창가 옆 자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은성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온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 해.”
“오빠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요?”
“어느 오빠? 얼이? 아니면 현수?”
빤한 질문이지만 그렇게 시비 아닌 시비를 거는 은성이다.
또 은성은 상채를 반쯤 테이블에 기댄 체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아현을 고쳐봤다.
창 밖에 던져둔 시선을 옮긴 것이다.
허나 그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으며 곧 창밖으로 되돌아갔고,
그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이 샘솟게 한다면 그게 보통이겠지만
꼭 한 폭의 그림처럼 상당히 매력적으로 와 닿았다.
아현은 왠지 긴장이 됐다.
“하, 한얼오빠요.”
“몰라.”
“네?”
“나도 모르는 순간 어느 틈인가에 옆에 있더라고. 저 놈이.”
“그때가 언젠데요?”
“아마 초등학교 1, 2학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됐으려나?”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와!!”
하지만 아현은 놀라움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알게 된 거예요?”
“아마도 다섯 살 때 처음 봤던 것 같아.”
“그렇게 오래 됐어요?”
“응.”
“같은 동네 살아요? 혹시?”
“바로 옆집. 내가 이사 왔어. 삼전동에서.”
“아, 그렇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테이블 위에 시선을 박은 채 고개만 끄덕이는 아현을 은성은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 때까지 한얼은 별다른 말이 없다.
어제 저녁엔 뭘 했는지 몰라도 잔뜩 피곤한 기색으로 늘어지듯 소파에 앉아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채로.
그리고 그때, 현수가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햄버거를 가지고 다가온다.
“짜잔~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햄버거가 나왔습니다!!”
호들갑스러운 햄버거의 등장에 보기 좋은 미간에 잔뜩 인상을 찌푸린 한얼이 눈을 떴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아현이 방긋 웃는다.
줄 곳 창 밖에만 관심을 두던 은성의 시선도 햄버거로 향했다.
...
..
.
“언니,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기회 되면 우리 또 봐요.”
“그래.”
“현수오빠두요.”
“뭐, 나야 끼워준다면 언제든지 오케이지. 후훗.”
주문한 햄버거를 다 먹고 나서 일어서는 은성과 현수에게 아현이 상냥한 어조로 말 했다.
매너 좋기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현수는 아주 다정하게 그 말을 받아줬지만
은성은 꼭 배알이 뒤틀린 사람처럼 흘겨보다 시피 아현을 바라보고 뒤도 안 돌아보고 크라제를 빠져나왔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서너 걸음 정도 늦게 나온 현수가 부리나케 간격을 좁히며 은성에게 묻는다.
“뭐가?”
“아니, 네 표정이 너무 딱딱해서.”
“왜 갑자기 내 표정을 의식해?”
“나야 뭐 다 꿰뚫어 버렸지만― 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꼭 기분 나쁜 일 있는 사람 같단 말이야. 혹시라도 아현이가 오해할 것 같아서.”
“걱정 돼?”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현수는 급하게 손을 내 저었다.
강한 부정의 뜻을 담은 행동이었다.
“후우… 얼이가 알아서 설명하겠지.”
“맞다. 그렇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귀찮은 건 딱 질색이고, 어지간히 성격 까칠한 놈이라 하자가 있긴 하지만,
그 놈 성질에 제 친구 놈이 딴 사람한테 이러쿵저러쿵 말 듣는 거 못 보는 성질이라―”
“응. 그럴 거야. 그런데 은성아,”
“알아.”
“응? 뭘?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안다고. 나도.”
“하하, 그래?”
현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알아. 조금 더 다정해 줄 순 없는 거냐고 말 하고 싶은 거잖아.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것도 내 B.F 여자 친구한테 그렇게 냉랭할 거 없지 않냐는 말 하고 싶은 거잖아.”
맛있는 햄버거까지 먹어 놨지만 은성은 쇠죽 한 사발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하나도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천성인 걸 어쩌라고.”
“은성아, 그건 네가 그렇게 생각을 해 버려서―”
“현수야, 난 정말 아무 뜻 없었어. 그게 본래 나란 인간이라서 그랬을 뿐이야.
너한테도 못하는 거, 다른 사람한테 하도록 강요하는 거, 나 싫어. 정현수.”
상대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자기 말만 딱 끊어서 하고 마는 은성이다.
현수는 그런 은성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은성이 이럴 때면 정말이지 그렇게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현수는 제 나름대로 은성을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고 싶은 마음인데,
그걸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여자 친구를 과연 그대로 두고 봐야만 하는 게 옳은 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은성아. 그래, 너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한테까지는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그런 식으로 사람 말을 막으려 들지만 말아라. 응?’
이 순간 현수는 담배 생각이 너무 많이 났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옆에서 담배 피우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은성을 배려해 참고 또 참아본다.
‘우리도 좀 부드러운 대화를 주고받을 순 없을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한 말을 꾸역꾸역 삼켜본다.
간단하게 먹은 햄버거마저 그 말과 함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처럼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하지 못할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아는 현수였다.
‘은성아. 지친다. 정말 많이 지친다.’
어둑해지는 시간,
까만 밤하늘 아래,
총총히 빛나는 달빛조차 현수의 어두운 안색을 가려주고 있었다.
아마도 은성이 해 줄 수 없는 위로를 달님이 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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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 시작 ]
달빛소나타 #01~02
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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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16 10:20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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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어요ㅋㅋㅋ
감사합니다(__+)
이거이거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걸요 ㅋㅋㅋㅋ
아하하... 연중했던 소설이라 그런지 긴장이 더 되네요... 성실 연재 할게요..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__+)
꺅>_< 윤재두 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