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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마슬로바가 끼여 있는 죄수 이송단은 7월 15일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날 그녀를 따라갈 준비를 했다. 출발 전날 밤 네플류도프의 누이와 매형이 동생을 만나
러 시골에서 올라왔다.
네플류도프의 누님인 나탈리아 이바노브나 라고진스카야는 동생보다 열 살이나 위였다.
그는 어느 정도 누님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누님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사랑했고 그 후 출가
하기 전만 해도 같은 나이 또래처럼 의좋게 지냈었다.
누님은 스물다섯 살의 처녀였고, 그는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그의 친구 니콜렌카 이르체네프를 사랑하고 있었
다. 남매는 둘 다 니콜렌카를 사랑했는데, 그들은 그에게서나 자기들에게서나, 모든 사람들
과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그 무엇을 발견하고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 후 두 남매는 타락하고 말았다. 그는 군대에 입대해서 방탕한 생활을 했고, 그녀는 성
적으로 사랑한 남자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들 남매가 한때 사랑하고 소중히 여
기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았
다. 그녀가 생활신조로 여기고 있던 도덕적 완성이라든가, 만인에 대한 봉사라든가 하는 모
든 동경을 그는 자기 멋대로 생각해서 이기심만을 만족시키고 뭇 사람들 앞에 돋보이려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매형 라고진스키는 가문도 보잘것없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무척 유능한 관리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사이를 요령있게 누비고 헤엄쳐 다니면서 이 두 사조 중에서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 생활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쪽을 이용하고, 특히 여자의 마음을 휘
어잡는 뛰어난 수완을 이용하여 비교적 유능한 재판관으로서 지위를 쌓아올린 것이었다.
이미 청년기가 지났을 무렵, 그는 외국에서 네플류도프의 일가를 알게 되어, 그 때 역시 처녀
기가 이미 지난 나탈리아를 온통 몸달게 만들어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 결혼
이 어울리지 않는 다고 생각하고 반대했다.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이런 기분을 감추려 했고
그 감정과 싸웠으나, 매형을 증오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사내의 저속한 감정과 편
협한 자부심이 네플류도프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특히 누님이 그렇게도 천박한 남자를
열정적이고 이기적으로 또 육감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여태껏 지니고 있던 좋은 점을 송두
리째 남편을 위해서 없애 버렸다는 것이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나탈리아가 텁
석부리며 대머리가 번뜩이는 자만심이 강한 사내의 아내라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네플류도
프는 언제나 괴로웠다. 그는 그의 아이들에 대해서까지 미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누님이
이제 곧 애 어머니가 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기들하고는 딴사람이나 다름없는 이 사
내에게서 누님이 무슨 병을 옮겨받기나 한 거처럼 슬픈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사내아이 하나와 계집아이 하나가 있었으나, 아이들은 데리고 오지 않고
라고진스키 부부만 왔다. 그들은 최고급 호텔의 제일 좋은 방에 들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
나는 곧 어머니의 옛집으로 마차를 몰고 갔으나, 동생을 만나지 못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
브나에게서 동생이 하숙집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갔다. 낮에도 램프를 켜고 있는,
불쾌한 냄새가 풍기는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만난 꾀죄죄한 하인이 지금 네플류도프는 없다
고 말했다.
그녀는 조그마한 두 방으로 들어가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모든 것에서 그녀는 눈에
익은 깨끗하고 빈틈 없는 동생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으나, 소박한 가구를 발견하고는 무척
놀랐다. 책상 위에는 눈에 익은 청동의 개가 달린 문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여러 서류철
이며 서류며 필기구 등이 질서 정연하게 포개져 놓여 있었고 형법에 관한 서적과 헨리 조지
의 영어판과 타르드의 프랑스어 책 사이에는 낯익은 활 모양의 상아 페이퍼 나이프가 끼워
져 있었다.
그녀는 책상을 향해 앉아서 오늘 꼭 만나러 와달라고 쓴 다음, 기막히다는 듯이 방 안을
들러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지금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동생에게 관계되는 두 가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카츄샤와의 결혼 문제였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얘깃거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도 자기 마을에서 들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
이었는데, 이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무슨 정치적 의미를 띤 불온한 행동이라고 생각들
을 하고 있었다. 카추샤와의 결혼 문제는 한편으론 나탈리아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동생
의 결단성 있는 태도가 좋았고, 동생의 그러한 결단에서 출가하기 전의 행복했던 시절의 동
생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무서운 여자하고 결혼한다고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치는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소용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을 설득해서 그의 마음
을 돌려보겠다고 결심했다.
또 하나의 문제인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것도 그녀에게는 그다지 관심거리가 되
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몹시 분개해서 그렇게 못하도록 설득하라고 말했다. 그러한 행동
은 무분별하고 정박하고 오만한 것이며 구태여 설명하자면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고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심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남편은 말했던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 땅값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쓰게 하다니, 거기에 대
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하고 그는 말했다. "만일 그러고 싶다면, 농민 은행을 통해서
그들에게 팔아 버리면 되잖아. 그거라면 그래도 의미가 있어. 어쨌든 지금 한다는 것은 아
무리 보아도 미친 짓이야."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벌써 후견인 문제를 궁리하면서 이렇
게 말하고는 처남의 엉뚱한 계획을 어떻게 해서든지 중지시켜야 한다고 아내에게 일러두었
다.
32
네플류도프는 하숙으로 돌아와서 책상위에 놓여 있는 누님의 편지를 보자, 곧 그녀의 호
텔로 찾아갔다. 저녁 때였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별실에서 쉬고 있었기 때문에 나탈리
아 이바노브나만이 동생을 맞았다. 그녀는 허리가 잘록한 검은 비단 야회복을 입고 까만 머
리를 지져 유행하는 헤어스타일로 높이 틀어올리고 있었다.
같은 연배의 남편에게 좀더 젊
게 보이려고 높은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동생을 보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옷자락을 살랑거리면서 종종걸음으로 그를 맞았다. 남매는 키스를 나누고 미소를 지
으면서 물끄러미 서로 바라보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롭고 의미심장한 진실이 깃
들인 시선을 주고받았으나, 그들은 진실이 깃들이지 않은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남매는
어머니가 별세한 이후 한번도 만난 일이 없었다.
"누님은 몸이 나고 더 젊어지셨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누님은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벙
긋거렸다.
"넌 좀 여위었구나."
"그런데 매형은?"하고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지금 쉬고 계신단다. 간밤에 주무시지 못했어."
할 말은 태산 같았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을 서로 눈으로
얘기했다.
"아까 너한테 갔었단다."
"네, 알고 있어요. 난 집을 나와 버렸어요. 혼자 살기엔 너무 넓고 쓸쓸해서. 그리고 난 아
무것도 소용 없으니 누님이나 모두 가져가세요. 가구든 뭐든."
"글세,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도 그러더라. 거기에도 들러 봤어. 고맙긴 하지만..."
이 때 호텔의 하인이 은제 찻잔을 날라왔다. 그들은 하인이 찻그릇을 늘어놓는 동안 잠자
코 있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테이블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가서 묵묵히 차를 따랐다.
네플류도프도 말이 없었다.
"그런데 드미트리, 난 모든 걸 알고 있단다." 나탈리아는 흘끔 동생을 보고 결심한 듯 입
을 열었다.
"누님이 알고 계시다니 기쁩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해 온 여자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탈리아 이바
노브나가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조그마한 의자에 똑바로 앉아서 누님의 얘기를 잘 듣고 잘 대답하려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마슬로바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일어났던 기분은 아직 그의 영혼을 조용
히 기쁨과 모든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으로 넘치게 해주었던 것이다.
"난 그 여자를 바로잡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바로잡으려는 거예요."하고 그
는 대답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아니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테네."
"그래도 난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뿐만 아니라 결혼을 함으로써 내가
남에게 소용이 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했다. "네가 행복해지라고는..."
"문제는 내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 물론 그렇겠지. 그런 그 여자에게 양심이 있다면 그 여자는 행복해 질 수가 없을
거야. 또 그것을 바랄 수조차도 없을 거고."
"그 여자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알겠어.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은..."
"인생이 뭡니까?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일을 요구할 뿐, 인생은 그 밖에는 아무것도 요구
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과 입언저리에 잔주름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도 앎다운 누님의 얼
굴을 바라보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다.
"난 모르겠다." 그녀는 한숨을 내귀면서 말했다.
'가엾게도! 어쩌면 저렇게 변해버렸을까?' 네플류도프는 결혼하기 이전의 누님을 상기
하고, 자기가 아직 어렸을 때 맛보던 상냥하던 누님의 마음씨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때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바싹 쳐들고, 널찍한 가슴
팍을 내밀고, 안경과 대머리와 검은 구렛나루를 번쩍이면서 경쾌한 걸음걸이로 빙그레 비소
를 띠며 방으로 들어왔다.
"참, 오랜만이군요." 그는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말했다.
걸혼 후 얼마동안 두 사람은 친밀한 '자네', '형님'이라는 말을 쓰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었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그나치 니키포로치는 가볍게 안락의자에 앉았다.
"얘기하는 데 방해가 도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말이나 행동을 누구에게도 감추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과 털투성이 손을 보고, 보호자연하는 자신만만하고 너그러운 말투를 듣자, 부드
러웠던 네플류도프의 기분은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우린 지금 동생의 계획에 대해서 얘기하던 참이예요."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가 말했
다. "차를 드시겠어요?" 그녀는 찻잔을 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음, 그런데 그 계획이란 어떤 것이지?"
"실은 내가 죄를 끼친 여자가 시베리아로 가게 되어 같이 따라갈까 합니다."하고 네플류
도프는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따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이 있다고 하던데."
"네, 그 여자만 승낙한다면 결혼할까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나 별 지장이 없다면 동기를 이야기해 줄 수 없겠어요? 나에겐 납득
이 가지 않는군요."
"그 동기라는 것은, 그 여자가... 타락의 길로 접어든 그 첫걸음이..." 네플류도프는 적당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짜증을 냈다. "그러니까 동기는 내게 죄가 있는데 그녀가 벌을 받았
기 때문입니다."
"벌을 받았다면 그 여자도 죄가 없지는 않을 텐데."
"그 여자는 전연 죄가 없습니다."
네플류도프는 필요 이상을 흥분하면서 그 경위를 얘기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재판장의 실수였군요. 그리고 배심원의 답신이 소홀했던 것에도 원인
이있고요. 그러나 이런 경우를 위해서 대심원이 있지 않던가?"
"대심원에서도 기각됐습니다."
"기각되었다면, 요컨대 충분한 상소 이유가 없었던 게로군." 대심원의 결과는 언제나 진실
하다는 속론을 믿고 있는 듯, 이그나치 니키로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대심원은 사건의 본질
적인 심리에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판결에 잘못이 있다면 황제에게 청원해야 해요."
"수속을 했습니다만, 전옂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법무부에 조회가 가면 법무부는 대심
원에 조회하고 대심원은 자기네 판결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결국 전과 마찬가지로 죄없는
여자가 처벌되고 마는 겁니다."
"법무부가 대심원에 조회할 리가 있을까요?"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관대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재판소에서 상세한 것을 요구해서 잘못을 발견하면 그에 의해 새로 판결
을 내려요.
그리고 죄 없는 자는 절대로 형벌을 받지 않아요. 어쩌다 받는다 해도 극히 드문
일이지요. 역시 벌을 받는 것은 죄가 있는 사람입니다." 천천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와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네플류도프는 매형에 대한 반감을 품으면서
말했다.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사람들의 과반수가 무죄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
다."
"그건 어째서지요?"
"문자 그대로 무죄니까요. 이를테면, 그 여자는 독살 사건에 누명을 쓴 것이고, 요즈음 내
가 만난 농부는 자기가 범하지 않은 살인 사건에 말려 있어서 무죄이며, 그리고 방화범으로
잡혀 있던 모자도 무죄였습니다. 이 모자는 집주인이 저지른 방화 때문에 하마터면 유죄 판
결을 받을 뻔했습니다."
"그야 물론 재판상의 착오란 항상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테죠. 인간이 만든 제도니
까 완벽하다고 할 수야 없는 겁니다."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이 자라난 특정한 환경 때문에 자기들이 저지른
행위를 범죄로 보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례지만, 그건 좀 지나친 편견인 것 같군요. 어떤 도둑이라도 도둑질이 나쁘다, 도둑질
을 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은 사람의 도리에서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까요." 여전히 다소 남을 멸시하는 듯한 자신 만만하고 침착한 미소를 디면서 이그나치 니
키포로비치는 말했다. 그 미소는 네플류도프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아뇨, 그들은 모릅니다. 그저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은 공장주가 임금을 착복해서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는 일이며, 정부가 숱한 관리를 사
용해서 조세라는 명목으로 계속 그들의 돈을 수탈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건 벌써 무정부주의로군요."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처남의 말을 조용
히 이렇게 단정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사실대로 말했을 따름입니다." 네플류도프는 말
을 계속했다. "그들은 정부가 자기네들의 돈을 수탈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어야 힐 토지를 우리네 지주들이 그들에게서 빼앗고 그들을 약탈하고 있다
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빼앗긴 토지에서 농민들이 자기네 난로에 땔 나뭇가
지를 꺾어 가면 우리들은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도둑이라고 단정짓는다는 것을 알고 있
습니다. 도둑은 그들이 아니라 실은 그들의 토지를 훔친 자들이며, 도둑을 맞는 것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자기네들의 가족에 대한 의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잘 모르겠군. 비록 안다고 하더라도 찬성할 수가 없군요. 토지는 그 누구의 토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만일 당신이 토지를 분배해 준다면..."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네플류도프
가 사회주의자이며 또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은 모두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해 줘야 한다는 것
에 있다고 믿고, 이렇게 분배하는 법은 몹시 어리석은 것이며, 또 그 어리석음을 쉽사리 증
명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 만만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가령 오늘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해
준다고 하더라도, 내일에는 그 토지가 근면하고 수완있는 사람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 것
입니다."
"아무도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려는 생각은 안합니다. 토지는 아무도 사유해서는 안 되
니까요. 사거나 팔거나 빌리거나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유권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거예요. 기 사유권이 없이는 토지
를 경작하려는 따위의 흥미는 애당초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사유권을 없애려면, 우린 야만
시대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토지 사유에 대한 갈망은 토지가 필요한 증거라는 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반론을 되풀이하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마치 그것에 대한 권위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 반대입니다. 아무도 토지를 소유하지 않게 되면 오늘날과 같이 지주라는 인간들이 건
초위에 누워 개처럼 아무일 하지 않고 자기는 토지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
며, 그리하여 토지는 방치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이봐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그건 정신 나간 짓이야. 오늘날에 와서 토지 사유제를 폐
지할 수는 없는 일이오. 그건 당신의 낡은 도락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겠는
데..."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의 얼굴은 청백해지고 목소리는 떨렸다.
이 문제는 그의 마음에 자극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이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에 나서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도록 권하고 싶군요."
"당신은 내 개인 문제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특별한 지위에 놓여 있는 우리들은 모두 이 지위에서 생기는 의무를 수
행해야 하며 또 우리가 태어나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생활 상태를 유지하여 자손들에게
전해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바."
"그러나 내가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례지만,"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가로채이지 않으려고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말을 계
속했다. "나는 자신을 위해서나 자기 자식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자식
들은 생활이 보장되어 있으며, 나 자신도 가족이 먹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은 벌어 놓았어
요. 자식들도 걱정 없이 살 수가 있겠지요.
그러므로 기탄없이 말하겠는데,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개인적인 이해 관계에
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당신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더 깊이 생각
하고, 책이라도 좀 일고..."
"아니, 내 문제는 나 자신이 해결하게 내버려두세요. 무슨 책을 읽어야하며 무엇은 읽지
않아도 좋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말했다.
그의 두 손은 싸늘해졌으며, 자신을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 말없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33
"그런데 조카들은 잘 있나요?" 다소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네플류도프는 누님에게 물었
다.
누님은 시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을 시골에 남겨 놓고 왔다고 대답했다. 남편과 동생과의
논쟁이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 그녀는, 옛날에 네플류도프가 어렸을 때 검둥이라든가 프
랑스 계집애라고 이름을 지은 인형을 가지고 놀던 시절처럼, 요즘 자기 아이들도 인형을 가
지고 여행 놀이를 하며 논다고 얘기했다.
"그걸 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네플류도프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글쎄, 그 애들이 노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너와 닮았는지."
불쾌한 대화는 끝났다. 나탈리아는 마음이 놓였지만 남편 앞에서 동생하고 둘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세 사람이 다 아는 화제를 꺼내려고, 결투에서 외아들을 잃은
케멘스카야 부인의 슬픔은 페테르부르크까지 퍼져 화제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결투에서 사람을 죽인 자를 일반 살인죄에서 제외하는 제도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의견은 네플류도프의 반감을 샀다. 그래서 끝장을 보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논쟁을 시작할 생각이 치밀어올랐으나, 두 사람은 다 입 밖에 내지는 않고 서로 마
음속으로만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각자의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네플류도프가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
기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의 그릇된 판단을 낱낱이 지적해 주고 싶었다. 한편 네플류도
프는 매형이 토지 문제에 대해서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을 밉살스럽게 여겼으나, 말로 표현
하지는 않았다(하긴 그는 마음속으로 매부나 누이나 조카들이 그의 상속인으로서 발언할 권
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편협한 인간이 자신 만만하고 침착한 척하며 저
열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결투 사건이 틀림없이 합법적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 데 대해
서는 울화가 치밀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만심이 네플류도프를 화나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재판소는 어떻게 하면 된단 말씀입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결투에서 사람을 죽인 자도 일반 살인자와 똑같이 다루어서 징역형을 선고해야겠지요."
네플류도프의 손은 또다시 싸늘해지고, 어조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된다는 거죠?" 그는 물었다.
"그래서 공평하게 되는 겁니다."
"당신의 말은 공평하다는 것이 재판소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들리는군요."하고 네플류
도프는 말했다.
"그럼 다른 목적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어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재판소란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들 지주
계급에 유리한 현행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행정상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정말 새로운 의견인데."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말했다.
"그러나 일반 재판소에 대해서는 좀 다른 사명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지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소의 목적은
현재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일반 사회의 수준 위에
올라서서 사회를 향상시키려던 사람들, 이른바 정치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수준 이하의
이른바 범죄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처벌하는 것입니다."
"찬성할 수 없군요. 정치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우리들 일반 수준보다 높은 자리에 있
기 때문에 처벌된다는 데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역시 좀 색다른 데가 있긴
하지만 지금 당신이 수준 이하라고 보고 있는 범죄형의 죄수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쓸모 없
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재판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
다. 분리파 교도들은 모두 정신적이며 지조가 굳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자신의 말을 한번도 방해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이 그러
듯, 네플류도프의 말에는 전혀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네플류도프의 비위에 거슬리든 말든
아랑곳없다는 듯, 네플류도프가 말하는 도중에도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재판소가 현행 사회 체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의견에도 찬성할 수가 없습
니다. 재판소는 재판소의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인을 올바른 길로 인
도한다든지..."
"그럼 감옥에 넣으면 올바른 사람이 되겠군요."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혹은 제거한다든지."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완강히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즉 사회의
존재를 위협하는 야수 같은 놈들과 방탕자들을 제거하는 그것을 실행할 만한 방법이 없습
니다."
"그것은 어째서지요? 모를 소리군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물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합리적인 형벌이란 단 두가지 방법밖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에 사용되었던 체형과 사형이지요. 그러나 이 형벌은 인간의 성정이 부드러워져서 지금
은 폐지되어 가고 있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당신한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며 또한 놀라운 일이군요."
"혼을 내서 다시는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
해서 해롭고 위험한 자의 목을 베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겠지요. 어쨌든 이 형벌은 합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태하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놓고 근심
걱정 없이 강제로 게으르게 만들며, 더 타락한 인간들 속에 처박아 두는 것은, 대체 무슨 의
의가 있을까요? 그리고 무슨 심산인지 모르지만, 한 사람당 국고에서 5백 루블 이상이나 들
여 툴라 현에서 일쿠투스크 현으로, 혹은 루크스카야 현에서 또다른 현으로 이송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관비 여행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관비 여행이나 감옥
제도가 없다면 우리는 이토록 태평스럽게 앉아 있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감옥은 우리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만한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영원
히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석방되는 날이 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 밑에서
는 도리어 죄수들의 죄악과 타락이 극한에 이르게 되어 결국 위험만을 증대시킬 따름입니
다."
"그렇다면 감옥 제도를 완전하게 하려면 국민 교육에 소용되는 비용보다 오히려 다 많은
비용이 드니까 국민에게 새로운 부담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감옥 제도의 결함 때문에 재판소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다시 이
그나치 니키포로비츠는 처남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얘기만 되풀이했다.
"그 결함은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다 죽어야 합니까? 아니면 어느 정치가의 말대로 눈알을 빼
버려야 합니까?"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승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좀 잔인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서는 효과적입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
는 제도는 잔인할 뿐만 아니라 아무 효과도 없고, 또 몹시 우매합니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
들이 어째서 이런 형사 재판과 같은 우매하고 잔인한 일에 관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
습니다."
"나도 바로 그런 일에 관계하고 있는걸요."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얼굴이 창백해지면
서 말했다.
"그야 당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 같군요."하고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떨
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재판소에서 검사보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불쌍한 소년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죄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또 어떤 검사가 분리파 교도
를 심문하고 복음서를 읽었다는 죄로 유죄로 만들려던 것도 보았습니다. 요컨대 재판소의
일은 그렇게 무의미하고 잔혹한 것뿐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근무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그나치 니키포로비
치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플류도프는 매형의 안경 밑이 이상하게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 아닐까?'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사실 그것은 눈물이었다. 모욕을 받아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었
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창가로 다가갔다. 손수건을 꺼내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안경을 벗
어들고 눈물을 훔치고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그는 소파로 돌아오자, 담배를 피워 물고 잠잠
히 있었다.
네플류도픈 이렇게까지 매형과 누이를 괴롭힌 것이 가슴 아프고 부끄럽게 생각
되었다. 더군다나 내일 출발하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서
먹서먹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한 말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어, 적어도 그는 반박을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를 모욕하고 가엾은 누님을 슬프게 만든 것을
보면, 나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나 보군.'하고 그는 생각했다.
34
마슬로바를 포함한 죄수 이송대는 3시에 역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 일행이 감
옥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같이 역까지 따라가기 위해 네플류도프는 12시 전에 감옥으로 가
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날 밤, 네플류도프는 소지품이며 옷과 서류 등을 챙기면서 일기장에서 최근에 쓴 부분
을 드문드문 읽어 보았다. 그 마지막 부분은 그가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카추샤는 나의 희생을 바라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려 든다. 그녀도 이겼고 나도 이긴 것
이다. 그녀에게 내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믿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그녀는 부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몹시 괴로운 동시에
즐거운 일을 경험했다.
그녀가 병원에서 좋지 못한 짓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갑자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에 빠졌다. 이렇듯 못 견디도록 괴로울 줄은 몰랐다. 나는 그녀와 이
야기할 때 혐오와 증오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 후에 문득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는 나 자
신은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가를 깨닫게 되자, 나 자신에 짜증이 났고 동시에 그녀가 불쌍
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우리가 항상 제때에 각자의 흠을 발견할 수만 있
다면 우리는 더 선량해질 것이다.
' 그리고 그는 오늘 날짜로 이렇게 써놓았다. '오늘 나탈
리아 누님을 방문하여 자기 만족 때문에 악의에 찬 말을 퍼부어서 마음이 무겁다. 그렇지
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낡은 생활이여 안녕, 영원히
안녕. 여러가지 느낌이 너무도 많이 겹쳐 있어서 하나로 정리할 수가 없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네플류도프는 매형의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을 후회했다.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가서 사과를 해야지.'
그러나 시계를 들여다보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죄수 이송대가 출발하는데 늦지 않기 위
해서 서루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히 떠날 채비를 한 다음, 하숙집 문지기와 같이 떠날 페
도샤의 남편 타라스에게 짐을 지워서 직접 역으로 가게 하고는, 네플류도픈 처음에 눈에 띈
마차를 집어타고 감옥으로 행했다.
죄수 열차는 네플류도프가 탈 우편 열차보다 두 시간 앞
서 출발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하숙비를 다 치렀다.
7월의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무더웠던 전날 밤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거리의 포석
과 집집의 돌벽과 함석 지붕들이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공기 속에서 열기를 내뿜고 있었
다. 간혹 바람이 불어올 때는 먼지와 폐인트 냄새가 뒤섞인, 역하고 후근한 공기가 몰려왔
다.
거리에는 행인들도 드물었다. 있어도 그들은 집 그늘 밑으로만 걸어다녔다. 까맣게 햇볕
에 그을린, 낡은 인피 짚신을 신은 도로 인부들만이 길 한복판에 앉아서 타는 듯한 모래바
닥에 깔린 돌을 망치로 다지고 있었다. 표백이 덜된 흰 제복을 입은, 침울해 보이는 경찰관
은 오렌지색의 끈이 달린 권총을 차고, 기운 없이 발을 바꿔 디디면서 길 한복판에 부루퉁
한 채 서 있었다.
흰 두건을 쓰고 그 사이로 귀가 삐져나온 말들이 끄는, 햇볕이 내리쬐는
한쪽만 차일로 가린 철도 마차들이 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거리를 덜거덕덜거덕 앞서기 뒤서
거니 하며 왕래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감옥에 도착했을 때, 죄수들의 대열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고, 감옥에서
는 아침 4시부터 시작된 이송 죄수들의 성가신 인계 사무가 계속되었다. 이번에 이송되는
죄수는 남자 623명에다 여자가 64명이었다. 이들 전원을 일일이 죄수 명부와 대조하고 병약
자를 골라내서 호송병에게 인계시켜야 했다.
신임 소장과 두 명의 부소장, 의사와 그의 조
수, 그리고 호송 장교와 서기가 바깥뜰의 담장 그늘에 마련된, 서류와 사무용품으로 쌓인 테
이블 곁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씩 호명해서 연달아 나오는 죄수들을 검사하고 심문하고는
장부에 적어 넣었다.
테이블은 벌써 반쯤이나 햇빛으로 덮여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다 바람은 없고 서 있는
죄수들의 입김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야.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 키가 크고 몸집이 뚱뚱한, 얼굴이 붉
고 어깨가 치켜지고 팔이 짧은 호송 장교는 수염에 덮인 임으로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
들이면서 이렇게 뇌까렸다. "이거 정말 못해 먹겠는걸. 대체 어디서 이렇게 숱하게 긁어모아
왔어? 아직도 많이 남았어?"
서기가 장부를 조사했다.
"아직 남자 죄수 24명에 여죄수가 그냥 남아 있습니다."
"야, 뭘 우물쭈물해! 빨리 와!" 호송 장교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한자리에 몰려 있는
죄수들을 향해서 외쳤다.
죄수들은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며, 그것도 그늘이 아니라 뙤약볕에서 세 시간 이상이
나 서 있었다.
감옥 안에서는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밖에서는 문 옆에 여전히 총을 든 경비병이
서 있었고, 죄수들의 짐과 병약한 죄수들을 태워 갈 마차가 스물네 대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모퉁이에는 죄수들의 친척과 친구들이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하려고, 그리고 될 수만 있으면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고 이송되어 가는 사람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려고 죄수들이 나오는 것
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도 이 사람들 속에 끼여 있었다.
그는 거의 한 시간이나 서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문 안으로부터 쇠사슬 소리, 발 소
리, 호령하는 소리, 기침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5분 가량
계속되고 있는 동안 간수들이 옆문을 들락날락했다. 이윽고 출발 명령이 내려졌다.
감옥문이 '쾅'하고 천둥같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자, 철거덕 쇠사슬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
다. 흰 하복에 머스킷 총을 든 호송병들이 밖으로 나와서, 익숙하고 잘 훈련된 동작으로 문
앞에서 널찍하고 둥근 열을 지어 정렬했다.
정렬이 끝나자 새로운 구령 소리가 들리고 박박
깎은 머리에 핫케이크 같은 모자를 쓴 죄수들이 어깨에 배낭을 메고 쇠고랑을 찬 발을 질질
끌면서 한 손으로 등의 배낭을 붙들고 또 한손으로는 보조를 맞추어 흔들면서 두줄로 서서
걸어나왔다.
처음에는 남자 죄수들이 나왔는데, 그들은 모두 회색 바지에 등에 번호가 찍힌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젊은이, 늙은이, 여윈 사람, 뚱뚱한 사람, 창백한 사람, 얼굴이 붉은
사람, 검게 탄 사람, 윗수염을 기른 사람, 턱수염을 늘어뜨린 사람, 턱수염이 없는 사람, 러
시아 사람, 타타르 사람, 유대 사람 -- 그들은 모두 발에 찬 쇠고랑을 쩔그렁거리며 마치
여행을 떠나기나 하듯이 씩씩하게 팔을 흔들면서 나왔다.
그러나 열 발짝쯤 나오더니 멈춰
서서 조용히 네 사람씩 열을 지었다. 뒤이어 계속해서 똑같이 머리를 박박 깎고 똑같은 복
장을 한 죄수들이 발에 쇠고랑만 안 찼다 뿐이지 두 사람씩 수감에 채인 채 줄지어 나왔다.
이들은 유형수들이었다. 그들도 씩씩하게 걸어나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네 사람씩 줄을 지었
다. 다음은 농민 조합원들이었고 뒤이어 같은 순서로 여죄수들이 나왔다.
선두는 회색 죄수
복에 수건을 쓴 징역수들이었고, 그 뒤에는 자원해서 유형수를 따라가는 도시 복장과 시골
복장을 한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회색 죄수복 자락에다 젖먹이를 싸 안은 여자들도 몇
명 끼여 있었다.
여자들과 함께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이 따라나섰다. 이 아이들은 말무리 속의 망아지
처럼 여죄수들 사이에 붙어 따라갔다. 남자 죄수들은 이따금 기침을 하고 간혹 말을 주고받
을 뿐 묵묵히 서 있었으나, 여죄수들은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마슬로바가
나왔을 때 이내 그녀임을 알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인파 속에 곧 묻혀 버렸다. 인간다운 모
습을 잃고 아이들을 거느리고 배낭을 메고 남자 죄수들의 뒤를 떠들어 대면서 따라가는, 여
자다운 데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동물의 인원 점호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호송병들이 아까
의 인원수와 맞추어 보려고 다시 인원수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 인원 점검은 오랫동안 계
속되었다. 여러 죄수들이 이곳저곳 자리를 떠나서 인원 점검이 무척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
호송병은 욕설을 퍼붓고, 얌전하면서도 증오에 찬 죄수들을 떼밀면서 다시 점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점호가 끝나자 호송 장교가 뭐라고 호령했다. 그러자 죄수들의 무리 속에서 대혼잡
이 일어났다.
병약한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마차 쪽으로 달려가서 먼저
배낭을 얹어놓은 다음 올라타기 시작했다. 앙앙 울어 대는 젖먹이를 안은 여자와, 자리 다툼
을 하는 철부지 아이들과, 침울한 표정의 죄수들이 제각기 짐마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 사람의 죄수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호송 장교한테로 걸어가서 뭔가 부탁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은 짐마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었다. 호
송 장교는 부탁하는 죄수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없이 담배만 뻑뻑 빨고 있더니 느닷없이
짧은 팔을 한 죄수 앞에 휘둘렀다.
죄수는 때리는 줄 알고 박박 깎인 머리를 움츠리면서 비
켜섰다.
"뻔뻔스런 소리를 하면 맛을 보여 줄 테다!"하고 장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걸
을 수 있잖아!"
장교는 발목에 쇠고랑을 찬 키가 후리후리하고 비틀거리는 노인 한 사람을 태우기로 했
다. 이 노인은 핫케이크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으면서 마차옆으로 갔으나, 노쇠한 다리에 쇠
고랑이 채워져 있어서 다리를 쳐들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마차에 기어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마차에 앉아 있던 시골 여자가 손을 잡아 끌어 주는 네플류도프는 보았
다.
모두 짐마차는 배낭으로 가득 찼고, 그 배낭 위에 타는 것을 허가받은 죄수들이 모두 자
리를 잡자, 호송 장교는 모자를 벗어 이마와 대머리와 붉은 살찐 목덜미를 손수건으로 훔치
고는 성호를 그었다.
"앞으로 갓!"하고 그는 호령했다.
호송병들은 총을 절그럭거렸고, 죄수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성
호를 긋는 사람도 있었다. 전송나온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자, 죄수들도 이에 호응하여 외쳐
댔다. 여자들 사이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흰 튜닉을 입은 호송병으로 호위된 죄소 이
송대는 쇠사슬로 묶은 발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송병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쇠고랑을 찬 징역수들이 절그렁 소리를 내면서 네 줄로 뒤따르고, 그 다음은 유형
수와, 두 사람씩 손에 수갑을 찬 농민 조합원, 그리고 여죄수들이 따랐다. 또 그 뒤를 배낭
과 병약자들을 태운 짐마차가 따르고 있었고, 한 마차 위에서는 얼굴을 가린 여자가 한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35
죄수의 행렬은 꽤 길었기 때문에 선두가 시야로부터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배낭과 병약
자를 태운 짐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마차가 움직이자, 네플류도프는 기다리고 있던 승
합 마차를 집어타고 대열을 앞질러 가라고 일렀다.
그것은 남자 죄수들 속에서 안면이 있는
죄수가 없나 알아보기도 하고, 여자 죄수들 속에서 마슬로바를 찾아내어 그녀에게 보낸 물
건을 받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였다. 바람 한점 없었다. 천여
개의 발길이 일으키는 먼지구름은 길 한복판을 걸어가는 죄수들의 머리 위를 뽀얗게 맴돌았다.
죄수들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가 탄 마차의 느린 속도의 말로
는 쉽게 그들을 앞지를 수가 없었다. 대열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이 낯설고 괴상한 인간
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복장을 하고, 같은 신발을 신은 수천 개의 발을 보조에 맞추어 가며,
마치 기운을 돋우려는 듯이 팔을 흔들며 걸어갔다. 그토록 많은 인간이 그토록 똑같은 복장
을 하고 그토록 기묘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보자니까, 무슨 무서운 생물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살인범 표도로프를, 유형수 속에서 익살꾼 오호틴과, 그리고 언젠가
힘을 빌려 달라고 부탁해 온 부랑인을 발견하자, 그의 이러한 인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거의 모든 죄수들이 그들 옆을 지나가는 승합 마차를 바라보며 타고 있는 신사를 곁눈질했다.
표도로프는 네플류도프를 알아보았다. 신호로 고개를 끄덕해 보였고 오호틴은 눈을 껌벅
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혼이 날까봐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여죄수들의 대열과 나란히 가게 되
자, 네플류도프는 곧 마슬로바를 찾아냈다.
그녀는 두 번째 줄에 있었다. 맨 끝에는얼굴이
붉고 다리가 짧으며 눈이 까만 못생긴 여자가 있었는데 -- 옷자락을 허리띠에 찔러넣고 있
었다 -- 바로 그 멋쟁이 여자였다. 다음은 간신히 발을 끌고 가는 애를 밴 여자였고, 그 셋
째가 마슬로바였다. 그녀는 배낭을 메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조용하
고 단호한 결의가 나타나 있었다.
그녀와 같은 줄의 네 번째 여자는 짧은 죄수복에 시골 여
자처럼 머릿수건을 치켜쓴, 씩씩하게 걸어가고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페도샤였다. 네플류
도프는 마차에서 내려, 차입한 물건과 마슬로바의 건강을 알아보고 싶어서 여죄수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랬더니 옆에서 걸어가던 호송병 하사관이 이를 보고 급히 달려왔다.
"이봐요, 행렬에 접근하면 안 됩니다.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가오면서 외쳤다.
곁에 가까이 와서 그가 네플류도프임을 알자(감옥에서는 누구나 네플류도프를 알고 있었
다.), 하사관은 거수 경례를 하고 옆에 멈춰 서서 말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역에 가서라면 모르겠습니다. 여기선 안 됩니다. 이것 봐, 처지면 안
돼! 어서 걸엇!" 그는 이렇게 죄수들에게 외쳐 대고는 이런 더운 날씨에 번쩍거리는 새 장
화를 신고 위엄을 부리면서 재빨리 자기자리로 되돌아갔다.
네플류도프는 포석길로 돌아가서 마부에게 뒤에서 따라오라고 이르고 대열을 지켜보면서
걸어갔다. 이 대열이 지나가는 거리거리에서 동정과 공포가 뒤섞인 눈초리가 죄수들에게 쏟
아졌다. 마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들이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
았다. 걸어가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이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몇 사람은 다가와서 그들에게 적선을 베푸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은
호위병이 받았다. 그 중에는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대열을 따라가다가 멈춰 서서 고
개를 흔들며 눈으로만 전송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저기 현관이나 문에서 서로 부르면서
달려나오기도 하고, 창문에서 고개를 내민 채 꼼짝 않고 말없이 이 무서운 행렬을 보고 있
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네거리에서 이 행렬 때문에 아주 호화로운 사륜 마차가 지나가다가
멈추어 서게 되었다. 마부석에는 얼굴이 번들거리고 엉덩이가 큰, 등에 단추가 두 줄이나 달
린 옷을 입은 마부가 앉아 있었다. 마차 뒷자리에는 부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내는 마
르고 창백한 여인으로 밝은 색의 모자와 화려한 양산을 쓰고 있었다. 남편은 실크햇에 밝은
색의 훌륭한 여름 코트를 입고 있었다. 맞은편 앞자리에는 그들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금발머리를 늘어뜨린, 역시 화려한 양산을 쓴 꽃같이 어여쁜 소녀와, 가늘고 긴 목과 광대뼈가
튀어나온, 긴 리본을 단 수병모를 쓴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남자는 적당한 때
를 틈타 죄수들 행렬에서 발이 묶이기 전에 빨리 대열을 앞질러 가지 못했다고 화가 나서
마부에게 야단을 쳤으며, 여자는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비단 양
식으로 거의 얼굴을 가리다시피하여 햇볕과 먼지를 막고 있었다.
궁둥이가 큼직한 마부는
이 길로 가라고 시켜 놓고 이제 와서 부당하게 비난을 퍼붓는 주인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얼
굴을 찡그렸다. 그는 굴레 아래에서 게거품을 내뿜는, 번들번들거리는 검정 수말이 달려가려
는 것을 간신히 잡아 두고 있었다.
경찰은 이 호화로운 마차의 주인을 위해서 죄수들을 잠시 멈추고 마차를 통과시키려고 했
지만, 이 대열에는 그 어떤 부귀한 신사라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침통한 엄숙함이서려 있
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서 경례만 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마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죄수들을 엄한 눈초리로 노려 보는 것이 고작
이었다. 그 때문에 마차는 대열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배낭과
병약자들을 실은 마지막 짐마차가 요란스럽게 지나갔을 때에야 가까스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신경질적인 여자는 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으나, 이 호화로운 사륜 마
차를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이 때 마부가 고삐를 살짝 늦추자 두 필의 검정 말은 포장길을
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고무바퀴 위에서 경쾌하게 흔들리는 사륜 마차를 끌고 별장을 향해
달려갔다.
남편과 아내와 딸과 그리고 목이 가늘고 광대뼈가 불거진 소년은 그들의 별장으
로 놀러 가는 길이었다.
부모는 방금 죄수들의 대열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지금 본 광경의 의미를 제각기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녀는 부모의 표정을 보
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부모나 친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나쁜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대우
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녀는 그 대열이 무서웠으므로 그 대열
이 멀리 사라져 가자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눈도 깜빡 않고 죄수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던, 목이 길고 가는 소년은 이 문제
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도 자기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며, 그러므로 누군가 해서
는 안 될 나쁜 짓을 그들에 대해서 한 것이라고, 마치 신에게서 계시라도 받은 듯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었다.
죄수들이 불쌍해졌으며, 동시에 쇠사슬에 묶이고 머리를 깎인 사람이
나, 그들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머리를 깎은 사람이나, 다같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서 그는 곧 울음이 터질 듯이 차츰 입술을 오므렸지만, 이런 때 우는 것을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36
네플류도프는 죄수들과 보조를 맞추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는 얇은 옷에다 여름 코
트를 걸쳤을 뿐인데도 지독하게 더웠다. 더욱이 거리를 뒤덮고 있는 먼지와 그들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숨이 콱콱 막혔다. 그는 2,300미터쯤 걸어가다가 다시 마차
를 타고 갔으나 마차가 길 한복판에 나오자 더위가 한층 더 심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어제 매형과 논쟁한 것을 상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침처럼 그렇게 흥분되지는 않았다.
감옥을 떠나올 때의 인상과 이 행렬에서 받은 인상은, 그런 생각을 멀리 떨쳐 버리게 하고 말았
다. 아니 그것보다 더위 때문에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울타리 옆의 나무 그늘에서 모
자를 벗은 두 실업 학교 학생이 쭈그리고 있는 얼음 장수 앞에 서 있었다. 한 소년은 뿔로
만든 숟가락을 빨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고, 또 한 학생은 뭔지 누런 것을 컵에 가득 담아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마실 것을 구할 만한 곳이 없소?" 네플류도프는 억제할 길 없는 갈증을 못 견디고
마부에게 물었다.
"바로 저기 좋은 곳이 있습니다." 마부는 이렇게 말하면서, 모통이를 돌아 큼직한 간판이
걸려 있는 입구로 네플류도프를 안내했다.
계산대에 있던 루바시카 차림의 뚱뚱한 점원과 한때는 깨끗했겠으나 지금은 더러워진 옷
을 입은 급사가 손님이 없어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낯선 손님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
면서 주문을 받았다. 네플류도프는 소다수를 주문하고 창가에서 좀 떨어진 더러운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다른 두 사람이 차 도구와 투명한 유리컵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무엇인가 계산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살결이 검고 머리가 벗어진 남자였는데, 이그
나치 니키포로비치처럼 검은 머리털이 뒤통수 가장자리에만 남아 있었다. 그 남자를 보자,
네플류도프는 어젯밤 매형과 함께 논쟁하던 일과, 떠나기 전에 매형과 누님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했던 생각이 났다.
'떠날 때까지는 그런 여유가 없을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보다 편지를 쓰는 쪽이 좋겠다.' 그는 종이와 봉투와 우표를 가져오라고 이르고 거품이
이는 찬 소다수를 들이키면서 어떻게 쓸까 하고 궁리했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해서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정다운 나타샤 누님! 간밤 자형과 그런 논쟁을 한 괴로운 인상을 갖고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쓰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뭐라고 쓸까? 어제 한 말을 용서해 달라고
쓸까?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대로 말한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한 말을 취소했
다고 생각하겠지. 아니야, 그럴 수 없어. ' 네플류도프는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를 이해해 주
지않는, 남이나 다름없는 인간에 대해서 치밀어오르는 증오감을 느끼면서 쓰다 만 편지를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셈을 치는 다음, 거리로 나와 마차로 행렬을 쫓아갔다.
더위는 극심했다. 벽과 돌은 흡사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는 듯했다. 발은 뜨거운 보도에
델 것만 같았다. 바니시칠을 한 마차의 흙받이에 그의 손이 닿았을 때 불에 덴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말은 먼지가 쌓인 울퉁불퉁한 포장길을 일정한 발굽 소리를 내면서 나른한 걸음걸이로 천
천히 걸어갔다. 마부는 줄곧 졸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무심히 앞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언덕길에 접어들자 커다란 집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총을 든 호소병 한 명이 서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의 마차를 급히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이지?"하고 그는 마부에게 물었다.
"죄수 중의 누가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
네플류도프는 마차에서 내려 군중 쪽으로 다가갔다. 한길 옆 경사진 포장도로의 고르지
못한 포장돌 위에, 코가 납작하고 붉은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몸집이 큰 중년 죄수가 회색
죄수복을 입은 채 발보다 머리를 낮게 하고 쓰러져 있었다. 두드러지게 탄탄한 앞가슴이 오
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뛰놀고 있었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삼키면서 눈동자가 움직
이지 않는 핏발이 선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죄수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찌푸
리며 경관, 장사치, 우체부, 점원, 양산을 들고 있는 노파, 빈 바구니를 든 까까머리의 소년
들이 서 있었다.
"몸이 허약해졌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그런 몸을 이런 폭서에
끌고 다녔으니." 점원은 누구를 책망이라도 하듯이 다가온 네플류도프를 향해 말했다.
"죽을 것만 같아요. 틀림없어요."하고 양산을 든 노파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셔츠를 풀어 줘야 해요."하고 우체부가 말했다.
경관은 굵다란 손가락을 떨면서 힘줄이 두드러진 붉은 목덜미의 끈을 서투른 솜씨로 풀기
시작했다. 그는 흥분하고 당황한 듯싶었으나, 그래도 군중을 제지해야겠다는 필요성만은 생
각한 듯싶었다.
"왜 이렇게들 둘러서 있어? 그렇잖아도 더운데. 바람을 막지 말아요."
"의사가 진찰해서 이렇게 허약한 사람은 마땅히 남겨두어야 해요. 이건 마치 죽은 사람을
호송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하고 점원은 법률 지식을 과시하려는 듯이 말했다.
경관은 셔츠의 끈을 풀고 나서,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러들 가요. 당신네들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 구경거리가 아니오!" 공감을 얻으려는
듯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며 경관은 이렇게 말했으나, 공감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자 호송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송병은 한옆에 서서 한쪽이 닳아빠진 구두 뒤축만을 내려다보면서 경관의 곤경
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관계가 있는 일인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거든. 이렇게 사
람을 죽이는 법이라도 있단 말이오?"
"아무리 죄수라 해도 모두 다같은 인간인데."하고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머리를
좀 높이 쳐들고 물을 먹이시고."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물은 가지러 갔습니다." 죄수의 겨드랑이를 붙들어서 간신히 허리를 좀 치켜들면서 경관
은 이렇게 대꾸했다.
"왜들 이렇게 모여 섰는 거야?" 갑자기 상관인 사람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깨끗하고
빛나는 제복에 한층 더 번쩍거리는 장화를 신은 경찰서장이 죄수 주위에 몰려 있는 군중 쪽
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모두 돌아가! 뭣 때문에 이런 데 서 있는 거야!"
경찰서장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지 알기도 전에 군중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
다.
더 가까이 가서 다 죽게 된 죄수를 보더니, 그는 마치 이런 일을 예기하고나 있었던 것처
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떻게 된 거야?"하고 경관에게 물었다.
경관은 행진 중에 이 죄수가 쓰러졌는데, 호송 장교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명령했다고 말
했다.
"그럼 할 수 없지. 서로 데려가는 수밖에. 마차를 불러!"
"문지기가 부르러 갔습니다." 경관은 거수 경례를 하면서 말했다.
점원은 또다시 "이 더위에..."하고 말을 꺼내려고 했다.
"무슨 참견이야, 응? 어서 자기 갈 길이나 가." 경찰서장이 이렇게 말하며 점원을 쏘아 보
자, 점원은 입을 다물고 물러갔다.
"물을 먹여야죠."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경찰서장은 네플류도프를 엄한 눈초리로 쏘아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가
컵에 물을 가져오자, 경찰서장은 경관에게 물을 먹이라고 일렀다.
경관은 축 늘어진 머리를 받쳐들고 입에다 물을 부으려고 했으나 죄수는 물을 삼키지 못
했다. 물이 턱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죄수의 윗옷 가슴 부분과 먼지가 묻은 삼베 셔츠를 적
셨다.
"머리에 끼얹어!"하고 경찰서장이 명령했다. 경관은 핫케이크 같은 모자를 벗기고 붉은 곱
슬머리와 벗겨진 머리 위로 물을 쏟아부었다.
죄수는 놀란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으나,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얼굴엔 먼지로 더러워
진 땟물 줄기가 흘러내렸으며, 입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헐떡이고 온몸을 쉴 새 없이 사시
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마차가 있잖아! 저걸 쓰지." 네플류도프의 마차를 가리키면서 경찰서장이 경관에게 말했
다. "여봐! 이리 와!"
"손님이 계십니다." 마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퉁명스레 대꾸했다.
"제 마차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렇지만 쓰시오. 요금은 내가 지불할 테니
까." 그는 마부를 보고 이렇게 덧붙였다.
"뭘 멍청히 서 있어!" 경찰서장이 소리질렀다. "어서 태워!"
경관과 문지기와 호송병은 다 죽게 된 죄수를 들어서 마차를 데려다가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죄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자리에서 미끄러졌다.
"옆으로 뉘어!"하고 경찰서장은 명령했다.
"괜찮습니다. 이대로 데려가겠습니다." 경관은 죽어가는 죄수 옆에 붙어 앉아 억센 손으로
죄수의 겨드랑이를 안으면서 말했다.
경찰서장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죄수의 핫케이크 같은 모자가 포도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모자를 집어서 뒤로 축 늘어진 젖은 머리에 씌워 주었다.
"출발!"하고 그는 명령했다.
마부는 화가 난 듯이 흘낏 바라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호송병을 따라서 경찰서
로 마차를 돌렸다. 죄수와 같이 앉아 있던 경관은,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미끄러져 떨어
지려는 죄수의 몸을 계속 바로 앉히곤 했다. 호송병은 마차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죄수의 다
리를 고쳐 주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37
보초가 서 있는 소방서 옆을 지나 경찰서(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소방서와 경찰서가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에 도착하자, 죄수가 탄 마차는 경찰서 구내로 들어가는 현관 앞에 멈추어
섰다.
구내에서는 소방수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소리로 지껄이면서 마차를 씻고 있었다.
마차가 멎자 몇 사람의 경관이 가까이 와서 마차 주위를 둘러쌌다. 숨이 끊어져 가는 죄
수의 겨드랑이와 다리에 손을 돌려 삐걱거리는 마차에서 안아내렸다.
죄수를 실어 온 경관은 마차에서 내리면서 저린 팔을 흔들고 모자를 벗고나서 성호를 그
었다. 죽어 가는 죄수는 문에서 층계를 통해 2층으로 운반되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죽어 가는 죄수를 안고 들어간 좁고 조그마한 방에는 침대가 네 개 놓여 있었다.
두 침대에는 긴 잠옷을 입은 두 명의 환자가 앉아 있었다. 하나는 붕대로 목을 감은, 입이
비뚤어진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폐병 환자였다. 나머지 두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때 반짝
이는 눈에 노상 눈썹을 움직거리는 작달막한 남자가 속옷과 양말 바람으로 총총걸음으로 죄
수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죄수를 바라보더니, 다음엔 네플류도프를 보며 큰
소리로 깔깔거리고 웃었다. 경찰서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정신병자였다.
"모두들 나를 위협하려는 거지?"하고 미찬 사람은 말했다. "안 돼. 그렇게는 안 될걸."
시체와 다름없는 죄수를 운반해 온 경관에 뒤이어 경찰서장과 병원의 조수가 들어왔다.
조수는 죄수 옆으로 가까이 가서, 아직 굳어 버리지는 않았지만 벌써 죽은 사람의 손과도
같은 창백한 얼룩투성이의 손을 잠시 잡고 있다가 놓았다. 손은 힘 없이 죄수의 배 위로 떨
어졌다.
"틀렸습니다." 조수는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으나, 다만 규정대로 후줄근한 땀에 젖
은 죽은 사람의 너절한 셔츠를 헤치고 귀언저리의 곱슬머리를 걷어올리면서 옴짝달싹도 하
지 않는, 싯누레진 가슴에다 귀를 갖다 댔다. 모두들 말 없이 서 있었다. 조수는 몸을 일으
키고 다시 머리를 흔들면서, 떠 있는 채 움직이지 않는 파란 눈꺼풀 하나를 손가락으로 만
져 보고 다시 눈꺼풀도 만져 보았다.
"위협하려고 해보았자 소용 없어." 미친 사람은 쉴 새 없이 조수에게 침을 뱉으면서 말하
고 있었다.
"어떻소?"하고 경찰서장이 물었아.
"어떠냐고요?" 조수가 되뇌었다. "시체실로 치워야 합니다."
"잘 봐요. 틀림없소?"하고 경찰서장이 물었다.
"너무 늦었습니다."하고 조수는 무엇 때문인지 열어젖뜨린 죄수의 가슴을 여미면서 말했
다. "그러나 일단 마트베이 이바노비치를 불러다가 보이도록 합시다. 페트로프, 갔다와요."
조수는 이렇게 말하고 시체에서 물러섰다.
"시체실로 운반해!"하고 경찰서장은 말했다. "자네는 사무실에 가서 인수증에 서명을 하
게." 시종 죽어 버린 죄수의 곁을 떠나지 않는 호송병에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알겠습니다."하고 호송병은 대답했다.
순경들은 시체를 들어서 다시 층계 밑으로 운반했다. 네플류도프도 뒤따라 가려고 했으나
미친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다.
"당신은 악당패들하고 한패가 아닐 테지. 그럼 담배를 한 대 줘."하고 그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담배를 꺼내 주었다. 미친 사람은 눈썹을 움직거리면서, 모두들 최면술을 써
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는 이야기를 빠른 말씨로 말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죄다 나의 적이기 때문에, 신들리게 해서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있단 말이오!"
"실례합니다."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시체를 어디로 가져
가는지 알고 싶어서 마당으로 나갔다.
시체를 둘러멘 경관들은 벌써 마당을 지나 지하실 입구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네플류도프
도 그리로 가려고 하자 경찰서장이 불러세웠다.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아니오, 별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볼일이 없으시면 돌아가 주십시오."
네플류도프도 그의 말대로 순순히 자기 마차 있는 데로 되돌아갔다. 마부는 끄덕끄덕 졸
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를 흔들어 깨우고 다시 역을 향해서 마차를 돌렸다.
그가 백 보도 채 가기 전에, 또다시 총을 든 호송병이 호위한, 이미 죽은 것 같은 죄수가
또 한 명 누워 있는 짐마차와 만났다. 죄수는 마차 안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핫케이크 같은
모자가 긴 턱수염을 기른 얼굴을 코언저리까지 덮고 있었는데, 박박 깎은 머리는 마차가 흔
들릴 때마다 건들건들 흔들리며 마차에 부딪치고 있었다. 두꺼운 장화를 신은 마부는 짐마
차와 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네플류도픈 자기 마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게 무슨 짓이람!" 말을 세우면서 마부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마차에서 내려서 짐마차를 따라 다시 소방서 옆을 지나 경찰서 마당으로 들
어갔다. 마침 마당에서는 소방수가 마차를 씻고 있었고, 그 옆에 키가 크고 수척한 소방서장
이 퍼런 줄을 두른 모자를 쓰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서서, 엄격한 태도로 소방수가
끌어내오는, 목에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밤색 수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앞다리 하나를
절었다. 소방서장은 앞에 서 있는 수위에게 화가 잔뜩 나서 뭐라고 말했다. 경찰서장도 거기
에 서 있었다. 또 다른 시체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그는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주워 왔어?" 그는 못마땅한 듯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스타라야 고르바코프스카야 거리에서입니다." 경관이 대답했다.
"죄수요?" 소방서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벌써 두 사람째로군." 경찰서장이 말했다.
"암, 그러게 마련이지. 이렇게 덥고 보면." 소방서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절룩거리는 누런
말을 끌어온 소방수에게 고함쳤다. "구석 마구간에 넣어 둬! 말을 병신으로 만들다니. 말은
너보다도 훨씬 비싸단 말이야."
시체는 먼저와 같이 경관이 마차에서 안아내려 병실로 운반했다. 네플류도프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경관 하나가 물었다.
그는 대꾸도 않고 시체가 운반된 방으로 갔다.
미친 사람은 나무 침대에 걸터앉아서 네플류도프가 준 담배를 맛있게 빨고 있었다.
"아, 돌아오셨구려!"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깔깔거리고 웃어 댔다. 그러나 시체를 보더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또야?"하고 그는 말했다. "진저리가 났어. 난 어린애가 아니란 말야,
그렇잖아?" 그는 질문이라도 하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네플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네플류도프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에는 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앞서의 죄수는 잘생기
지 않았으나, 이번 죄수는 얼굴이나 몸집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이미 새파래진 입술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고, 많지 않은 턱수염은 얼굴 아래쪽을 둘러싸고, 깎인 머리 쪽으로 조그맣
고 귀여운 귀가 보였다. 얼굴 표정은 조용하고 단아하고 선량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정신
생활의 어떤 가능성이 이 청년에게서 분명히 빼앗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차치
하고서라도, 손과 쇠고랑을 채운 발의 골격과, 균형이 잡힌 사지의 기운찬 근육으로 보아서
그가 얼마나 아름답고 강하며 민첩한 인간이었나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령 동물로 견주
어 보더라도, 아까 병신을 만들었다고 그토록 소방서장이 화를 낸 밤색 말보다는 훨씬 완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를 죽여 버렸으면서도 누구 한
사람 인간으로서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쓸모없이 죽어 버린 노동용 동물만큼도
애석해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들의 가슴속에 일어난 유일한 감정
은, 썩을 우려가 있는 시체를 치워야 할 수고에 대한 성가심뿐이었다.
조수를 데리고 의사와 경찰서장이 들어왔다. 의사는 어깨가 떡 벌어진 튼튼해 보이는 사
내로 비단 양복을 입고 있었다. 좁은 바지는 그의 굵은 넙적다리에 꼭 끼었다. 서장은 땅딸
막하고 공처럼 둥글고 붉은 얼굴에다가 양볼을 불룩하게 해서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는 버릇 때문에, 그 얼굴이 한층 둥글게 보였다.
의사는 시체가 놓여 있는 나무 침대 옆
에 앉아서, 아까 조수가 하던 것처럼 손을 만져 보기도 하고 심장에 귀를 갖다 대보기도 했
다. 그리고 일어서서 바지를 잡아당겼다.
"완전히 시체가 되어 버렸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서장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더니 다시 내뿜었다.
"어느 감옥에서 왔지?" 그는 호송병에게 물었다.
호송병은 뭐라고 대답하면서 시체의 발목에 채운 쇠고랑을 가리켰다.
"풀어 주도록 하지. 마침 대장장이가 있으니까."하고 서장이 말했다. 그는 다시금 볼을 불
룩하게 하더니 문 쪽으로 가서 천천히 숨을 내뿜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네플류도프는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 왜 이렇게 됐느냐고요? 일사병으로 죽은 것 아닙니까? 겨울 동안 운동도 하지 않고 햇
빛을 못 보다가 오늘 같은 날에 떼를 지어 행진을 하니, 게다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그래
서 일사병에 걸린 겁니다."
"그럼 왜 이런 날에 호송하는 겁니까?"
"그건 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구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오?"
"관계는 없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실례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기더니 병자들의 침대로 갔다.
"좀 어떤가?"하고 그는 목에 붕대를 감고 입이 비뚤어진 창백한 사나이에게 물었다.
한편 미친 사람은 자기 침대에 앉아서 담배를 끄더니, 연방 의사를 향해서 침을 뱉어 댔
다. 네플류도프는 마당으로 내려가서 소방서의 말들과, 닭들과, 놋쇠로 만든 헬멧을 쓴 보초
옆을 지나 문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끄덕끄덕 졸고 있는 마부를 깨워 마차를 타고 다시 역
으로 달렸다.
38
네플류도프가 역에 닿았을 때는 죄수들은 벌써 전원이 유리창에 창살이 달린 열차에 올라
타고 있었다. 열차 가까이로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탓인지 플랫폼에는 몇 명의 전송객이
서 있었다. 오늘이 호송병들에게는 유난히 성가신 날이었다. 감옥에서 역으로 가는 도중에
네플류도프가 본 두 사람 이외에도 세 사람이나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었다.
그 중 한 사람
은 처음의 두 사람처럼 가까운 경찰서에 수용되었고, 딴 두 사람은 역에까지 와서 죽었다
(1880년대 초에 부트이르스키 감옥에서 니제고르드 역으로 죄수들을 이송하는 도중, 하루
사이에 일사병으로 인하여 다섯 명의 죄수가 죽은 일이 있었음). 그러나 호송병들의 걱정거
리는 호송 중에 더 살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죄수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일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이런 경우에 법규대로 완전히 수속을 다 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
다. 이를테면 시체를 적당한 장소로 보내는 일, 니즈니로 가지고 가야 할 명부에서 그 이름
ㅇㄹ 삭제해야 할 일, 이런 일들은 차으로 귀찮은 일인데다가, 이런 무더위 속에서는 더욱
자증나는 일이었다.
호송병들은 이런 일로 무척 분주햇다. 그래서 이것이 다 끝날 때까지는, 네플류도프를 비
롯해서 다른 전송객들을 죄수들이 탄 열차 옆으로 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렇지만 네플류
도프만은 호송 하사관에게 슬쩍 돈을 쥐어준 탓으로 허가가 되었다. 그 하사관은 네플류도
프에게 들어가게는 했지만 얘기를 되도록 빨리 끝내고 지휘관의 눈에 뜨지 않도록 떠나 달
라고 당부했다.
객차는 모두 여덟 차량이었다. 지휘관의 찻간을 빼놓고는 딴 차량들은 모두
죄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열차 옆을 지나가면서 차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는 찻간에서도 쩔그렁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지껄이는 소리, 쓸데없이 욕지
거리를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네플류도프가 기대했던, 도중에서 죽어간 동료에 관한 얘
기는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배낭과 음료수와 자리를 잡는 얘기들뿐이었다. 한 찻간
을 들여다보았을 때, 네플류도프는 통로 한가운데서 죄수의 수갑을 풀어 주고 있는 호송병
을 보았다. 죄수들이 손을 내밀면 한 호송병이 열쇠를 수갑을 끌러 주고, 또 하나의 호송병
이 수갑을 모으고 있었다.
남자 죄수들의 찻간을 지나서 여죄수들의 찻간으로 가까이 다가
갔다. 둘째 찻간에서는 "오, 하느님, 오! 하느님!"하는 신음 소리가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네플류도프는 그 옆을 지나 호송병이 가르쳐 준 대로 세 번째 찻간의 창가로 다가갔다.
차창에다 얼굴을 가까이 대자 땀냄새에 가득 찬 열기가 풍겨왔고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 대
는 여자들의 이야기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죄수복과 재킷을 입은, 땀에 젖고 벌겋게 탄
여자들이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앉아서 지껄여 대고 있었다. 창살에 바싹 갖다 댄 네플류도
프의 얼굴은 여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가까이 있던 여죄수들이 얘길 멈추고 다가왔다.
마슬
로바는 재킷만을 입고 스카프도 쓰지 않은 채 반대편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이쪽 가까이에는
얼굴이 흰 페도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고 마슬로바를
쿡 찌르며 한 손으로 창을 가리켰다. 마슬로바는 얼른 일어나서, 까만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땀에 잦은 발그스름한 얼굴에 미소를 활짝 지으면서 창가로 다가와 창살을 붙들었다.
"참 덥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기쁜 듯 방글방글 웃었다.
"물건은 받았소?"
"받았어요. 고맙습니다."
"뭐 더 필요한 게 없소?" 네플류도프는 찌는 듯한 찻간에서 흡사 한증탕에서의 증기와도
같은 열기가 흘러나옴을 느끼면서 이렇게 물었다.
"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뭐 좀 마실 거라도 있으면." 페도샤가 말했다.
"그래요, 뭐 좀 마셨으면." 마슬로바가 되뇌었다.
"아니, 거긴 물도 없소?"
"있었지만 벌써 다 마셔 버렸어요."
"곧 가져다 주겠소."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호송병에게 부탁해 두겠소. 니즈니까지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그럼 정말 당신도 가시나요?"하고 마슬로바는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말하고 네플류도프
를 기쁨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열차로 가겠소."
마슬로바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나리, 열두 명의 죄수가 죽었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사내 같은 거친 목소리로 늙
은 여죄수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것은 코라블료바였다.
"열두 명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 내가 본 것은 두 명이었소."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열두 명이라던데요. 대체 그런 못된 짓을 하고도 그놈들은 마음이 편안할까요? 악마 같
은 놈들!"
"여자들 중에는 병든 사람이 없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여자들은 더 강해요." 키가 작은 한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한 사람, 별안간 산
기가 있어서요. 저렇게 진통하고 있죠." 그녀는 아까부터 끊임없이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옆
의 찻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은 필요한 게 없느냐고 하셨죠?" 마슬로바는 기쁨에 넘치는 미소를 간신히 참으면서
말했다. "저 여자를 남아 있게 해줄 수 없으실까요?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으니까요. 지휘관
에게 말씀 좀 해주었으면."
"좋아, 말해 보겠소."
"그리고 또 한가지, 저 여자를 그의 남편 타라스하고 만나게 해주실 수 없으세요?"하고
마슬로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페도샤를 눈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분
도 당신과 함께 가게 될 거예요."
"여보시오, 얘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하는 하사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플류도프를 들
여 보낸 하사관이 아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곳을 떠나, 산기가 있는 여자와 타라스의 일을 부탁하기 위해 지휘관을
찾았으나 오랫동안 찾을 수가 없었다. 호송병에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들
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이다. 죄수들을 어디로인지 데려가는 자들도 있고, 식료품을
사려고 뛰어다니는 자들도 있고, 여기저기 자기 짐을 찻간에 싣는 자들도 있고, 호송 지휘관
과 같이 가는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자도 있어서, 네플류도프의 질문에는 그저 마지못해
한두 마디 대답할 뿐이었다.
두 번째 벨이 울렸을 때에야 간신히 호송 지휘관을 찾았다. 지휘 장교는 짤막한 손으로
입가에 뒤덮인 수염을 매만지면서 어깨를 치켜들고 하사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용건입니까?"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물었다.
"저 열차에 아기를 곧 분만할 여자 죄수가 있어서, 어떻게 좀..."
"아니, 낳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어떻게 되겠지요." 이렇게 말하더니, 그는 짤막한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자기의 찻간 쪽으로 걸어갔다.
이 때 호각을 손에 든 차장이 지나갔다. 마지막 벨소리와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플랫폼에
서 있는 전송객들과 찻간에 있는 여죄수들의 울음소리와 통곡이 터져나왔다. 네플류도픈 타
라스와 나란히 플랫폼에 서서 창살 차창 안에 머리를 박박 깎인 남자 죄수들의 모습이 보이
는 차량들이 한 칸 또 한칸 차례차례로 그의 옆을 지나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다음 여
죄수의 첫째 차량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머리와 수건을 쓴 머리들이 창문을 통해
서 보였다. 그 뒤를 이어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둘째 차량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 마슬
로바가 탄 셋째 차량이 지나갔다.
마슬로바는 딴 여자들과 같이 창가에 서서 네플류도프를 바라보고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
였다.
39
네플류도프가 타고 갈 열차가 발차하기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네플류도
프는 이 사이에 다시 누님을 찾아볼까 생각했으나 아침부터 심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흥
분하고 지쳐 있었으므로 일등 대합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동안 몰려오는 졸을 견디다
못해 드러눕자마자 손을 뺨에 괜 채 곧 곯아떨어져 버렸다.
연미복 가슴에 배지를 달고 냅킨을 손에 든 급사가 네플류도프를 깨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플류도프 공작님이 아니십니까? 어떤 부인이 찾고 계십니다."
네플류도프는 눈을 비비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오늘 아
침부터 무슨 일을 겪었던가 하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죄수들의 행렬이며 시체며 쇠창살이 있는 열차며 거기에 감금된 여죄수들이며, 그 중 한
여가가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 없이 진통으로 괴로워하던 일이며, 또 한 여자가 쇠창살 속
에서 서글프게 미소를 띠고 자기를 바라보던 일들이 주마둥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술병과 꽃병과 촛대와 식기가 놓여 있는
식탁이 있고, 그 주위를 민첩한 웨이터들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홀 안쪽의 찬장 앞에는
과 일을 잔뜩 담은 바구니와 술병들의 진열대 앞에 바텐더가 서 있었고, 그 스텐드 앞에는
이쪽으로 등을 돌린 많은 여행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내풀류도프는 누운 몸을 일으켜 고쳐 앉고 좀 정신이 들게 되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기심에 찬 눈으로 무엇인가 문간에서 일어난 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네플류도프는 그쪽을 보았다. 거기에는 얼굴에 투명한 베일을 드리운 귀부인을 가마에
태워서 데려가는 일행이 있었다.
앞쪽에서 가마를 들고 가는 하인은 네플류도프도 낯이 익
었다. 뒤쪽의 하인은 금줄이 달리 모자를 쓴 문지기였는데 그 역시 낯이 있었다. 가마 뒤에
는 곱슬머리에 에이프런을 두른 점잖은 하녀가 보따리와 가죽 가방에 든 뭔지 둥그런 물건
과 큰 양산을 받치고 따라갔다. 그리고 그 뒤에는 두툼한 입술과 중풍 환자 같은 목을 한
여행복 차림의 코르차긴 공작이 가슴을 내밀고 뒤따르고, 그 뒤에는 미시와 그 사촌 미사,
그리고 네플류도프도 안면이 있는 목이 길고 후골이 튀어나온 외교관 오스텐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명랑한 표정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미소짓고 있는 미시에게 설득조로, 그러
나 분명히 농담 섞인 태도로 뭐라고 말하면서 걷고 있었다. 맨 뒤로 의사가 화가 난 듯이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따랐다.
코르차긴 일가는 교외 영지에서 니제로드 철도 연변에 있는 공작 부인의 누이동생 영지로
이사가는 길이었다.
가마를 멘 하인들과 하녀와 의사들의 일행은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과 존경을 받
으면서 숙녀 대합실로 들어갔다. 늙은 공작은 식탁에 앉아 웨이터를 불러서 무엇인가 주문
하기 시작했다. 미시와 오스텐도 식당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무엇을 좀 먹으려다가, 그 때
입구에서 아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여인은 나탈리아 이바노브나였다. 나
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그라케나 페트로브나를 데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식당으로 들
어왔다. 그녀는 미시와 동생을 거의 동시에 찾아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미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미시하고 키스를 나누고 곧장 동생 네플류도프의 곁으
로 왔다.
"간신히 찾아냈구나." 그녀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일어서서, 미시와 미샤, 또 오스텐하고 인사를 하고 선 채로 이야기를 했다.
미시는 시골 별장이 타 벼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모댁으로 이사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스텐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화재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누님이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벌써 와 있었단다." 누님은 대꾸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와 둘이서말이야."라고 말하
며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를 가리켰다. 아그라페나는 먼지 방지용 외투에 보닛을 쓰고 있었
는데,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서 머뭇거리며 목례를 보냈다. "여기저기
찾아나녔어."
"난 여기서 그만 깜박 잠이 들어 버렸어요. 정말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네플류도프는 거듭 고맙다는 말을 했다. "누님께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정말?" 누님은 놀라면서 대답했다. "무슨 일로?"
미시는 남매간에 내밀한 얘기가 시작되는 것을 눈치채고 사람들을 데고 자리를 떴다. 네
플류도프는 누구의 것인지 점과 체크 무늬의 모포와 궤짝이 놓여 있는 창가의 비로드 소파
에 누님과 함께 앉았다.
"어제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찾아가 사과할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매형이 어떻게 생
각하실까 해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매형에게 그런 언짢은 말을 해서 몹시 괴로웠습니
다."
"나도 알고있었어. 그리고 또 믿고 있었어." 누님이 말했다. "네 본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
을. 그렇지만 너도 알잖니..."
누님의 눈에는 눈물을 괴었다. 그녀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누이의 말은 똑똑치 않았지만,
그는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동했다. 그 말에는, 그녀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사랑 이외에 동생에 대한 사랑이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과, 그리고 동생과
남편 사이의 사소한 불화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그런 뜻이 깃
들여 있었다.
"고맙습니다. 누님. 그런데 누님, 나는 오늘 굉장한 것을 봐습니다." 네플류도프는 갑자기
죽은 두 죄수를 생각하고 이렇게 마랬다. "죄수가 두 명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데?"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이런 더위 속을 끌려다녔으니까요. 일사병으로 둘 다 쓰러졌어
요."
"그럴 수가! 어떻게? 오늘?"
"네, 방금 그 시체를 보고 왔어요."
"왜 죽였을까? 누가 죽였니?"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했다.
"강제로 죄수들을 끌어낸 자들이죠." 네플류도프는 누이가 이런 일에 있어서 자기 남편과
같은 눈을 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화가 나서 말했다.
"어머나 저런!"하고 말하면서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그런 불행한 죄수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털끝만큼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합니다." 네플류도프는 늙은 공작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때 공작은 냅킨을 펴고 술잔을 앞에 놓고 식탁에 앉아 있다가 네플류도프를
뒤돌아보았다.
"네플류도프!" 그는 콘 소리로 불렀다. "더위를 잊을 겸 한잔 안하겠나? 여행 전에 그 이
상 좋은 게 없어."
네플류도프는 사양하고 누이를 돌아다보았다.
"이제부터 무얼 할 작정이냐?"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겁니다. 나로서도 무엇인지는 알 수없지만 무엇인가 해야 한다
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힘껏 해보렵니다."
"그래 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은?" 누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크르차긴
을 가리키며 말했다.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도 미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 됐구나, 정말 난 그 사람이 좋았단다.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넌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속박하려 드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가는 거
지?"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싶다는 듯이 그는 진지한 표정
으로 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곧 누님에 대한 매정함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왜 나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을 죄다 말하려고 하지 않을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한테도 들려
주면 좋지 않은가?' 늙은 하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그라페
나 페트로브나의 존재가 누님에게 자신의 결심을 되풀이해 들려 주자는 용기를 복돋아 주었
다.
"누님은 카추샤하고 결혼하려는 내 계획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죠? 알고 계시겠지만, 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잔 단호히 거절했어요." 그는 말했다. 이 얘기를
할 때 언제나 그렇듯이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나의 희생을 원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처
지에 있는 여자로서는 참기 어려운 희생을 나를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비
록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그녀의 희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따
라,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생각입니다. 힘이 자라는 데까지 도와 주고, 그 여자
의 괴로움을 덜어 줄 생각입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 때 숙녀 대합실에서 공작 부인의 일
행이 나왔다. 미남 하인 필리프와 문지기가 공작 부인을 가마로 운반했다.
공작 부인은 가
마꾼들을 멈추게 하고 네플류도프를 손짓해 부르더니, 슬프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혹시 자
기 손을 힘껏 주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반지 낀 하얀 손을 내밀었다.
"지독하군요!" 그녀는 더위에 관해 프랑스 말로 말했다. "견딜 수 없군요. 이런 날씨엔 숨
이 끊어질 것만 같아요." 그녀는 러시아 기후의 대단함을 한바탕 늘어놓은 다음, 네플류도프
에게 놀러 오라고 하고는 가마를 든 사람들에게 가자고 신호를 했다.
"그럼 꼭 들러 주세요." 그녀는 가마 위에서 길쭉한 얼굴을 네플류도프에게 돌리며, 이렇
게 덧붙였다.
네플류도프도 플랫폼에 나갔다. 공작 부인 일행은 오른쪽 일등 찻간 쪽으로 갔다. 네플류
도프는 짐을 날라 주는 인부와 자기 짐을 어깨에 멘 타라스와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이 사람은 내 친굽니다." 네플류도프는 전에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타라스를 가리키면
서 누님에게 말했다.
"아니, 삼등차로 가니?" 네플류도프가 삼등차 앞에 서서 짐을 진 인부와 타라스와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가 물었다.
"네, 이쪽이 마음이 더 편합니다. 타라스하고 같이 가니까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아직 쿠즈민스코예 마을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으니,
내가 죽으면 누님 아이들이 상속받게 됩니다."
"드미트리, 그런 말은 그만둬라." 나탈리아 이바노브나가 말했다.
"그리고 토지를 나누어 준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토지 이외의 나머
지 재산은 모두 누님의 아이들 차지가 됩니다. 왜냐하면 난 아마도 결혼하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한다고 하더라도 아니는 안 생길 겁니다......그러므로......"
"드미트리, 제발 그런 소린 그만둬라."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하긴 했지만, 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네플류도프는 이내 알 수 있었다.
안쪽 일등차 앞에는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서서, 코르차긴 공작 부인의 찾
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딴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늦게 온 사람들은 허둥
지둥 플랫폼의 널빤지를 꽝꽝 울리며 달려오고, 차장은 문들 닥고 승객들을 좌석에 앉힌 다
음 전송객들을 차 밖으로 내보냈다.
네플류도프는 햇볕을 받아서 무더운 악취가 풍기는 찻간에 들어갔다가 곧 승강구로 내려
갔다.
한창 유행하는 모자를 쓰고 랩코트를 걸친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와 나란히 삼등차 앞에 서서, 열심히 무슨 화제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으나, 별로 할 이
야기가 없는 것 같았다. '편지를 해요.'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그
들남매는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주 되풀이되는 이런 판에 박은 부탁의 말을 비웃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재산 문제와 상속에 관한 짧은 대화가, 둘 사이에 깃들이기 시작한 부드러운
남매간의 저을 일시에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서로 남이 된 것 같은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
고 있었다.
그래서 기차가 '덜컹'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오히려
기꺼운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쓸쓸하고 상냥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흔들면서 "잘 가, 드미트
리, 잘 가라!"하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막상 기차가 떠나 버리자, 그녀는 동생과의 대화
를 남편에게 전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지고 근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도 역시 누님에 대해서는 지극히 선량하고 따뜻한 감정 이외엔 아무것도 품지
않았으며 또 숨긴 일도 없었으나, 누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거북하고 답답해서 빨리
누님 앞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 그토록 가까웠던 그 나타샤의 모습은 사라지
고, 지금은 남이나 다름없는 불쾌하고 거무튀튀한 털복숭이 남편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그녀 남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문제, 이플테면 농민들에 대한 토지 분배와
상속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때만 누님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네플류도프는 똑똑히 보았
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몹시 슬프게 했다.
40
온종일 햇볕이 내리쬐는데다 사람이 가득 찬 삼등 찻간의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므
로, 네플류도프는 찻간에 들어가지 않는 승강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윽고 열차가 거리를 벗어나 바람이 불어 들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네플류
도프는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다. 죽인 것이다."하고 그는 아까 누님에게 한
말을 혼잣말로 되뇌었다. 오늘 받은 모든 인상 가운데서 둘째 번 죄수의 시체의 미소띤 입
언저리와 오늘 받은 모든 인상 가운데서 둘째 번 죄수의 시체의 미소띤 입언저리와 단아한
표정, 깎아서 퍼렇게 된 머리의 아래쪽에 삐져나온 조그맣고 도톰한 귀 등 아름다운 얼굴
이 이상스러울 만틈 생생하게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살해되었는데도 누가 죽였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러나 죽인 것은 사실이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를 끌어 낸 것은 마슬레니코프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마슬레니코프는 필시 관례대로 명령을 내려, 인쇄된 표제가 붙은 서류에 저 바
보같은 서명을 했음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물론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
을 것이다. 또 죄수들을 진찰한 감옥의 의사도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
이다. 그는 자기의 직책을 정확하게 수행해서 병약한 자들을 골라 냈을 뿐이지, 이 무더운
더위와 이렇게 오랜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데려가리라고는 도저히 짐작도 못했
을 것이다.
그럼 소장은? 소장은 다만 수행했을 뿐이다. 호송 지휘관도 어디서 몇 명의 죄
수를 인계받고, 어디서 몇 명을 인계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고 보면, 그에게도 죄가 있는 것
은 아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지시에 따라 죄수단을 인솔했으므로 네플류도프
가 목격한 두 죄수와 같은 튼튼한 죄수가 견뎌 내지 못하고 죽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에게도 죄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으니, 이 죽음에 대
해서 책임이 없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네플류도프는 혼자 중얼거렸다. '현지사라든가, 소장이
라든가, 경찰서장이라든가, 순경이라든가 하는 자들이 인간에 대해서 인간다운 태도로 대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마슬레니코프나
소장이나 호송 장교라는 작자들이 현지사나 소장이나 호송 장교가 아니었던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무더운 날에 이토록 많은 사림들을 한덩어리로 내보낼수가
있을까 하고 스무 번은 더 생각했을 것이고, 또 도중에서도 열에 빼내어 나무 그늘로 데려
가서 물을 먹이고 휴식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불행이 생기면 동정을 표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정을 표하기는 커녕 남이 동정하는 것조차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냐하면 그들은 자기앞의 인간을 보지 않고, 또 인간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보지 않고, 다만
자기의 직무와 그 요구만을 중시하고 그것을 인간 관계의 요구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
문인 것이다.
모든 문제는 이 한 가지에 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한 시간이라도, 또는 무슨 예외적인 특수한 경우일지라도 인간애보다도 더 중요한 것
은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사람에 대해서 죄를 지면서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뻔뻔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너무나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덧 날씨가 변한 것도 모르
고 있었다. 해는 낮게 뜬 조각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서쪽 지평선에서는 연한 잿빛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어딘지 멋 곳에서는 어느새 들과 숲 위에 한량 없이 고마운
빗줄기가 대각선을 그으며 쫙쫙 퍼붓고 있었다.
그 비구름은 습기찬 공기를 몰아왔다. 간혹
번개가 구름을 뚫고, 요란한 기적 소리가 우레 소리와 함께 뒤섞여들렸다. 비구름은 점점 가
까워지고 바람을 타고 비스듬히 떨어지는 빗방울은 승강구와 네플류도프의 코트에 드문드문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반대쪽으로 옮겨가서, 습기 차고 신선한 공기와 오랫동안 비
에 굶주린 대지의 곡식 냄새를 들이마시면서, 차창을 지나가는 들과 숲과 메귀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밭과, 아직도 푸릇푸릇한 귀리밭의 줄무늬와, 꽃이 피어 있는 검푸른 감자밭의 검
은 밭고랑 등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바니시칠을 한 듯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
색은 더욱 푸르고, 노란색은 더욱 노래지며, 검은색은 더욱 까맣게 윤기가 났다.
"더, 더 퍼부어라!" 네플류도프는 자비로운 비를 받아 생기를 되찾은 들판을 흐뭇한 마음
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억세게 퍼붓던 비도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않았다. 비구름의 일부는 비가 되어 쏟아져 내
리고 일부는 그대로 흘러가 버려, 축축한 대지에는 마지막 가는 빗줄기가 직선을 그으며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태양은 다시 얼굴을 갸웃이 내밀고 만물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동쪽 지평선 위에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한 끝이 끊어진 보랏빛이 유달리 눈에 띄는 선명
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대체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지?' 네플류도프는 이 모든 자연의 변화가 끝나고, 기
차가 경사가 심한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이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
다. 나는 소장이나 호송 장교나 그 밖의 실무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선
량하고 온화한 사람들이지만, 단지 공직에 매여 있다 보니,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
다.'
그는 자기가 감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이야기해 주었을 때의 마슬레니코프
의 냉담한 태도와, 소장의 싸늘한 태도, 그리고 허약한 죄수를 마차에 태워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차 속에서 여죄수 임신부가 진통에 괴로워하는 데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호송
장교의 잔인함을 상기했다.
' 그자들은 관직에 매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소박한 동정심마저도 받아 들이지 않는
냉혈한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관직에 있기 때문에 마치 돌로 다져 놓은 땅에 비가 스
며들지 않듯이 인간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빛깔의 돌로 다져놓은
비탈길을 빗물이 땅에 스며들지 못하고 개울이 되어 철철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네플류도
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긴 이런 철로 축대를 돌로 다질 필요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
나 식물의 생장력을 잃어버린 이 흙을 보기란 슬픈 일이다. 이 흙도 축대 위에 보이는 저
흙과 마찬가지로 곡식과 풀과 숲과 나무들을 돋아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도 이와
같은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아마도 지사니 소장이니 경찰이니 하는 사람들도 필
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 -상호간의 사랑과 동정을 상실한 인간을
보기란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율법이 아닌 것을 율법이라고 인정하고 신
이 스스로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 놓은 영구불멸의 율법을 율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내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괴로운 기분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하고 네플류
도프는 생각했다. '나는 까닭 없이 그들을 무서워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무서운 인간들이
다. 강도보다도 무섭다. 그러나 강도는 동정할 줄 알지만, 그들은 인간을 동정할 줄 모른다.
그들은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는 돌과 같이 동정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이것이 그
들의 무서운 점이다. 푸가초프나 스텐카 라진(둘 다 대규모의 난을 일으켜 황제를 위협한
러시아 사상 유명한 발란 지도자)이 무섭다고들 하지만, 그들은 천 배나 더 무서운 것이다.'
하고 그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가령 현대의 사람들, 이를테면 크리스트교도나 자선가나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식없이 가장 무서운 악행을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심리학상의 문제를 내
준다면, 단 하나의 해결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을 지사나, 소장이나, 장교나, 경찰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즉 첫째로 국가 공무
라는 것은 사람들에 대해서 모두 인간다운 형제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 말고, 그들이 물건
취급을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확신을 갖지 않으면 안 되고,
둘째로 이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행위의 결과가 각자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없이는 오늘 내가 목격한 것과 같은 무서운 사건
이 행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일은 모두 인간이 서로 사랑 없이도대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
기로 모든 문제가 있다. 물건이라면 애정 없이도 다룰 수가 있다. 나무를 베든지 벽돌을 굽
든지 쇠를 달구든지 하는 것은 애정이 없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
서는 애정없이 다룰 수는 절대로 없다. 마치 꿀벌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각별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꿀벌의 특성이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꿀벌을 다루
지 않으면, 꿀벌도 해를 입고 자신도 해를 입게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
지며, 그 이외의 길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인간 생활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인간은 억지로 일을 할 수는 있겠지만, 억지로 사람을 사랑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정 없이 사람들을 상대해도 좋다는 이유는 성립되지 않는
다.
특히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서 애정을 느끼지
못할 때는 차라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더 좋다.' 네플류도프는 자문자답하며 이렇게 생
각했다. '자기에게 몰두하는 것이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인
간만은 상대해서는 안 된다. 해를 입지 않고 유익하게 인간을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애정이
있을 때뿐이다.
어제 매형에게 대했던 것처럼 애정 없이 사람을 대하면, 오늘 목격한 것같
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 냉혹함과 잔인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도 한없이 생기
게 될 것이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이젠 됐다. 됐어!" 지독한
더위가 가신 시원함과 벌써 오래 전부터 머리에서 떠날 줄 모르던 문제가 이를 데 없이 명
확하게 해결되었다는 의식에서 두 가지의 기쁨을 느끼면서 그는 이렇게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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