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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수필집담회(隨筆集談會) 토론 모임
1. 일시 : 2019.4.9(화) 15:00 ~ 17:00
2. 장소 : 대구수필문예대학 강의실(성안오피스텔 16층)
3. 초청 패널 : 이동민 작가
4. 발표주제 : 수필에서 자아는 어떻게 표현될까?
* 토론 작품 : 기억 흔적/이동민
5. 걸음 하실 분 : 수필집담회 회원
* 회원이 아니시더라도 관심있으신 분 참석하셔도 됩니다. 환영합니다.
《발표 주제》― 수필에서 자아는 어떻게 표현될까?
(‘자아 정체성’ 문제)
차주환은 수필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수필은 산문문학의 한 유형으로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사물을 소재로 하며, 자아(ego)의 표출을 기본으로 한다. ------.’라고 했다. 자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현대예술에서 ‘나는 누구(자아)인가?’ 라는 정체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우리는 종종 개성이 있는 한 개인으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해서 작품에 담아보려고 시도한다. 수필의 정의에서 ‘자아의 표출’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자아’를 천착하는 것이 수필의 본성이 되어 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자아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즉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자아’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대답을 찾아보아야 한다.
자아(ego)는 외부와 접촉하였을 때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을 가지고 행동하는 '나 자신'을 말한다. 일상을 살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가 나타내는 생각이나 행동 반응이 바로 ‘자아’에서 나온다고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부딪쳤을 때 나타내는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다름, 즉 나만의 개성적인 생각이나 행동 반응을 보이는 내가 바로 자아이다. 자아 정체성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라고 말할 때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아를 다룬다. 우리는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주변과 마주치면서 경험을 쌓아가고, 경험이 쌓이는 만큼 ‘나 자신’이라는 존재도 형성되어 간다. 그러면서 우리의 심신은 성장하고 변화한다. 성장과 변신을 겪으면서, 나는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개성을 가진 ‘나’ 라는 인간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이때 ‘나’라는 인간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자아’이기도 하다. 개성을 가졌다고 의식한 자기를 자아라고 한다.
그렇지만 자아는 의식(머리로 생각하는)함으로 찾아지는 ‘나’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심리적으로 정해진 ‘나’이다. 자아(에고)는 의식과는 다른 것으로, 어디까지나 마음의 기능이나 구조로부터 정의된 개념이다. 한국어에서 일반적으로는 자아는 「나」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일상어의 범위에서 사용하는 경우에만 들어맞는다. 심층심리에서 말하는 나, ‘진짜 나’라는 개념에서는 아닌 수가 많다.
수필쓰기에서 ‘자아’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나’가 아니고, 심리적으로 말하는 ‘나’를 뜻한다. 이때의 자아는 자신의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덧붙여서 「의식하는 나」라는 개념은, 정신분석학에서는 「자기 혹은 자기 이미지」이다. ‘자아’와는 명확하게 구별되고 있다. 한국어에서 자아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나」와 동의어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일상어의 범위에서 사용하는 경우에만 들어맞는다. 것을 다시 강조하겠다.
그렇다면 자아를 찾아가기 전에,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수필공부를 위해서 언젠가는 공부를 해야할 것이다.
‘나’라는 존재, 정체성을 가진 ‘나’라는 존재 즉 자아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알아보자. 우리가 갓 태어났을 때는 내 멋대로 해도 괜찮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이 즉 욕구와 욕망이 시키는데로 행동한다. 배가 고프면 엄마(타자)야 바쁘든, 아프든 울고불고 야단을 하여 나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 성장하면서 본능대로 생활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공동체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공동체 정체성이 생긴다. 어릴 때처럼 본능이 시키는데로 행동하면 공동체의 다른 사람이 즉 타인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행동하려고 한다. 왜냐면 그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되면 내가 살아가는데 많은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을 꾸리면서 ‘타자 즉 타자의 시선이나 위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라는 딜타이의 말은 이런 뜻이다.
이런 이유로 정체성을 가진 나 즉 ‘자아’가 형성된다. 그러고 보니 자아란, 정체성을 가진 나라고 하는, 그 정체성은 본능(요구와 욕망)과 공동체 가치에 순응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긴장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왜냐면 틈만 나면 욕구대로 행동하려고 눈치를 보면서, 겉으로는 정체성의 이미지로 가장하고 욕구대로 하지 않는 사람인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 나라고 하였다. 두 가치 사이에 줄다리기를 하면서 공동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진짜 ‘나’인 ‘자아’라고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진정한 자아’란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개인 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라고 물은 때 나의 상사, 나와 가까운 사람, 내가 소속된 집단의 눈치를 보고 말한다면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왜냐면 자유로운 존재로서 결정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아란 ‘내적 자아’라는 믿음을 가졌을 때이다. 내적 자아란 나의 밖에서 나에게 눈치를 보도록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남아있는 나의 내면에서 판단을 내린다.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자유로운 나 자신이라고 말했다. 내가 속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한에서는 사실은 그런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우리는 수필을 읽으면서 흔히 인간답다 라는 평을 한다. 다시 이것을 우리가 말하는 ‘인간답다’라는 말의 뜻으로 풀어 보자, 우리는 언제 ‘인간답다’라는 말을 사용할까? 내가 무척 가지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도 가지고 싶어 한다. 나는 본심을 숨기고(가지고 싶다는) 그것을 양보했을 때와, 내가 가지고 싶다는 욕구를 숨기지 않고 그것을 가지려고 할 때를 비교해 보자. 양보는 미덕이지만 인간답다고 하지는 않는다. 마음씨 좋은, 점잖은, 또는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한다. 욕구대로 가지려고 할 때를 ‘인간답다’ 라고 말한다. ‘인간답다’ 라는 말에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도덕적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욕심이 많은 인간, 또는 개성이 강한 인간이라고 한다. 자아는 ‘인간답다’ 속에 담겨 있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인간답다’에는 공동체 정체성과는 대립이 되는 수가 많다. 타인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또 집단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존재한다. 시간의 밖에서, 공동체의 밖에서는 우리의 존재를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답다’만으로 자기의 존재를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집단 자아도 있다. 나의 자아에는 공동체와 공유하는 정체성도 있기 마련이므로, 즉 집단자아도 있기 때문에 자아 정체성만으로는 자신을 수필에서 표현하기 어렵다. 자아가 공동체 정체성과 결합되어 있는 자아는 수필에서 표현이 가능하다. 이 말은 나를 표현하되 집단의 가치와 공통분모를 가진 나를 표현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1980-90년 대에는 개인 정체성이 아닌 ‘집단 자아’, ‘집단 정체성’이 유행했다. ‘집단에 소속된 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여 집단 속에 ‘개인의 자아’를 묻어 버린다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가를 좀 더 쉽게 알아보자. 이제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1. 세계가 당신을 어떻게 보느냐?
2. 당신이 다른 이들을 어떻게 보느냐?
3. 당신이 당신을 어떻게 보느냐?
이 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먼저 ‘세계(나를 둘러 싼 사회와 문화 환경을 말하며, 공동체 가치이다.)가 당신을 어떻게 보느냐’에서 답을 찾다보면 개인적인 차원은 물론이고 보다 넓은 문화적 차원에서 정체성의 특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현재에 한국에 살고 있다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관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나도 모르게 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더 냉정한 눈으로 보면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개개인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개인 간의 ‘차이’라고 한다. 나를 둘러싼 사회와 문화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 속에서도 나만이 갖고 있는 개성을 찾아보아야 한다. 나는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의 속성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속성 뿐 아니라 한국인이면서도 나만의 특질을 찾아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글쓰기에서 결어는 세계(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문화 환경)와 조화를 함으로 해결을 추구한다. 세계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적 공간이다.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다양성이 자아의 특질인데 조화와, 타자와 해결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개성이 있는 한 개인을 표현한다는 것과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결국 나는 공동체에 소속되어서도 다양성과 차이 속에서 존재하는 개인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지금까지 써온 우리의 수필은 타자와 조화 또는 해결을 한다는 이유로 개성 있는 자아를 세계의 가치 속에 묻어버리는 것으로 결어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수필을 교시성이 강한 문학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수필쓰기는 세계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아를 채굴하여 타인과 개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학생이 쓴 동시 ‘엄마’를 읽어보면서 공동체 자아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화장품 냄새 솔솔 풍기는
향기로운 엄마
무엇이든지 척척 도와주셔서
고마운 엄마
바른 길을 가라고 회초리로 찰싹 때리는
사랑하는 엄마
엄마라는 말을 부르면
목이 메입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은
떨려서 못합니다.
우리 사회는 어머니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알게 모르게, 이것은 공동체 자아가 되어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자아는 어디에 있을까? 공동체 자아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공동체의 가치를 던져버리고 아이가 자신의 속 마음으로 생각하는 엄마를 그렸다면 이렇게 쓸까? 쓸 수도 있겠지만, 우리도 수필을 이런 형식으로 쓰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머니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는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어머니는 효의 대상이다. 이것은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공동체 자아이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는 공동체 정체성을 지닌다고 하더라고,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개성이 된다. 왜냐면 사람이란 자기 나름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서로 간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수필쓰기는 세계의 가치에 나를 맞추는 것보다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더 중요하다.
‘당신이 당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자기 성찰이다.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는 내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수필쓰기는 나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자기 성찰이 된다. 앞에서 말한 ‘인간답다’는 자신의 욕망이 표현되는 개성이다. 수필에서 개성이 있는 표현을 요구하지만 욕망이 개입되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세 개의 시선은 서로 충돌할 소지가 많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면 답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답을 찾으려는 것이 수필쓰기이다. 세 개의 시선이 조화를 이루어서 긍정적인 자아가 형성되면 건전한 자아가 된다. 그래서 수필쓰기는 인내와 고통이 따른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쓴 동시처럼 글을 쓴다면 공동체 가치에는 충실하지만, 나 즉 자아는 공동체 자아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진정한 자아라면서 나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공동체 사회로부터 박수보다는 비난을 받는다. 어디까지가 나인가,를 찾기 위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세 개 의 시선이 충돌하기보다는 조화하는 지점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토론 작품〉
기억 흔적/ 이동민
‘모자를 쓰면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으니 기본이 좋았다. 그 때문인지 백수가 된 후로는 정장보다는 간편복에 앞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닌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적은 숱의 머리는 모자에 가리어지고 얼굴만 드러난다. 훨씬 젊어 보인다. 그래서 곧잘 모자는 젊게 살려는 나의 표현이다. 나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라는 말로 이유를 댄다.
사회활동을 하였을 때는 화이트컬러 직업인이었으므로 정장 차림으로 생활하였다. 은퇴를 한 후에 ‘젊게 보인다’는 말 한 마디가 나의 익숙했던 차림을 하루아침에 벗어버리도록 하였다. 그토록 ‘젊음’에 집착하고 있었음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하기야 젊음을 갈망하는 것은 노인들의 하나같은 바람이라고 하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튕긴 고무줄이 제 자리로 돌아가듯 변신이 너무 쉽게 일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머리에 부스럼이 생겼다. 그 시절의 시골아이에게 머리에 나는 부스럼 쯤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진물이 나면서 살이 곪고, 머리털도 뭉텅, 뭉텅 뽑혀졌다. 촌아이가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대구의 동산병원을 찾아간 보람도 없이 머리에는 주먹만 한 흉터가 생겼다.
드문드문 남은 머리털은 아무런 역할도 해주지 못하므로 ‘달’이라는 별명을 하나 더 얻었다. 나는 머리의 흉터가 너무 부끄러웠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교모가 나의 수치를 감추어주는 방패였다. 등, 하교를 할 때, 심지어는 외출을 할 때도 반드시 교모를 쓰라는 학교의 방침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지금도 생생한 지난날의 기억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기차통학을 하였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는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내 모자를 벗겨서 들고 도망을 갔다. 나는 쫓아갔다. 내 손이 닿을 즈음이면 다른 친구에게 모자를 던졌다. 나는 다시 쫓아갔고---. 우리는 흔히 친구를 놀려주느라 그런 장난을 하였다. 신발을 벗겨서 이리저리 던지기 도 하였고, 모자를 벗겨서 던지기도 하였다. 곧잘 하였던 장난이었는데도 나는 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기차통학을 하면 역에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모여 함께 기차를 기다린다. 모자가 벗겨진 내 머리에는 흉터가 선명히 드러났을 것이다. 여학생 앞에서 흉터가 드러난다는 것이 사춘기를 보내던 나로서는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충격이 강할수록 더 깊이 각인이 되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다.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고등학교의 교모는 저절로 벗겨졌다. 다행히 머리숱이 많았던 탓에 길게 기른 머리는 흉터를 충분히 가려주었다. 모자의 역할을 머리털이 대신 해주었다. 나를 움츠려 들게 했고, 열등감의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않게 하였던 음울한 그림자도 서서히 사라졌다.
사회인이 되었을 때는 ‘'달’이라는 콤플렉스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고 믿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항상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들으면서 살았다. 수북하게 자란 머리털은 소나기구름처럼 달을 흔적도 없이 감추어 주었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나의 유년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머리의 부스럼, 그리고 달로 이어지는 기억들은 머리털에 가려져서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노년이 되면서 머리의 숱은 옅어지고 이마도 조금 넓어졌다. 그렇더라도 어릴 때처럼 신경을 곧추 세우지는 않았다. 나를 ‘달’이라며 놀려주던 친구들의 앞이마도 비행장만큼이나 넓어졌다. 아예 가발을 쓰고 다니는 친구도 한, 둘이나 된다. 그들에게 비하면 나의 머리숱은 그래도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도 나는 기를 쓰고 모자를 쓴다. ‘젊어 보인다’를 변명거리로 삼다보니 중절모가 아닌, 앞챙이 달린 젊은이들의 모자를 좋아한다. 얼마 전에는 지인이 앞챙이 달린 모자를 선물하였다. 사위도 미국을 다녀오면서 앞챙이 달린 모자를 사왔다. 할아버지가 쓰기에는 격에 어울리지 않을 듯 한데도 그들은 그 모자를 사왔다. 나도 싫지 않았다.
아무리 아팠던 삶의 조각이라도 시간에 오래 씻기다 보면 흐미해진다. 지우개로 지우듯이 기억들은 옅어지고, 마침내는 사라진다.
정말 그럴까?
아무리 지워도 펜에 눌려서 종이에 남아있는 흔적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모자는 무의식의 골짜기에 부끄러운 그림자로 남아있는 기억의 흔적이다. 흔적을 남긴 본래의 모습은 젊음도, 아름다움도, 멋있음도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버리고 싶었던 나의 모습일 뿐이다. 어울리고 싶어도 저만치 떨어져서 쉽게 다가가지 못 하였던 음울하고 슬펐던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다.
지금도 나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나의 모습을 사실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모자라는 흔적에서 ‘젊은 나’라는 허상의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