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천 전곡리유적(漣川 全谷里遺蹟)
문화재 지정 사적 제268호
건립시기 구석기시대(전기)
성격 생활유적
유형 유적
면적 77만 8,296㎢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1510 외
요약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석기시대 구석기의 주먹도끼·긁개·석핵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사적.
개설
사적 제268호. 지정면적 778,296㎢. 1978년에 당시 동두천 주둔 미군인 보웬(Bowen, G.)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1978년에서 1983년까지 6차례, 1986년에 한 차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중부 충적세 후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은 현재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전곡읍에서 한탄강 유원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북서쪽에 제1지구, 남쪽으로 서편이 제2지구, 동편이 제3지구이다. 제4지구는 제1지구의 강 건너편 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03′, 북위 38°01′에 해당된다. 현재까지의 발굴은 모두 제2지구에서 실시되었다.
내용
1) 지질 및 연대
전곡리 일대는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경기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지질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전곡리의 동북편으로 연천과 철원 사이의 지역에는 중생대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응회암·현무암·역암 등이 형성되어 있다. 동남편으로는 대보거정화강암류가 중생대 쥐라기에 분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 연안지역에는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 한탄강·임진강을 따라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해 있다. 용암류층은 상류에서 6매, 하류인 문산에서 1매가 보이며, 유적이 있는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고 있다.
전곡리의 2매는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결과, 하부의 것은 대략 60만년 전후, 상부의 것은 30만년 전후에 분류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 현무암층들을 전곡 현무암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브루네스 정지자기기(正地磁氣期)에 해당되고 있다.
전곡 현무암 분출 전의 고기 한탄강의 퇴적은 현재의 한탄강을 따라서 현무암 아래에 미고결의 사력층으로 나타나 백의리층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의 한탄강은 원래 현무암 분출 후 넓게 형성된 하상 위를 한동안 흐르면서 하상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현무암을 침식해 결국 오늘날의 한탄강으로 안정하게 되었다.
전곡 현무암은 냉각시 수축의 차이로 인해 발달하게 된 주상절리 등의 구조로 균열이 있어서, 서리작용과 집중호우의 기후현상이 특징인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짧은 기간동안 침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대지 위에 존재하는 구석기 포함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대지 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간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빠른 속도의 현무암침식과 현무암이 30만년 전경에 분출된 것으로 본다면, 대지 위의 구석기 포함층의 형성연대는 적어도 20만년 전후 이하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곡리 유적의 적색점토가 18∼21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국 뤄촨(洛川) 뢰스층의 적색토대와 연결될 수 있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연대관과는 별도로 퇴적층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es-cence dating method)에 의해 얻어진 약 4만 5000B.P.를 유적의 연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퇴적층
퇴적층은 지점에 따라 1m 미만의 깊이에서 6∼8m 내외의 깊이까지 드러나고 있다. 제2지구의 발굴에서는, 동편 언덕에서 점토층으로만 이루어진 퇴적층이 있고, 서편의 강쪽 능선에서는 두터운 굵은 모래층이 점토층 아래에 드러나고 있다. 이 모래층은 다시 미세사층을 덮고 있다.
이 회색 또는 황색의 미세사층은 제2지구 서편에 버려진 유로(流路)에 형성된 우각형호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래퇴적은 당시 이 지역의 유로가 활동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사질층에서는 유물집중층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유수에 의해 재퇴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퇴적물은 유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범람원 퇴적으로 보이는데 유물의 집중이 산발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에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인류가 출현해 사냥과 채집을 하는 구석기 유적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시에 지표수 그리고 지중에서 벌레와 식물뿌리 등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현재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파악이 가능한 생활면은 보이지 않고 있다.
3) 유물
7차에 걸친 발굴에서 3,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이보다 많은 수가 지표에서 채집되었다.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과 규암을 이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이 외에 현무암·편마암·운모편암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거의 모두 당시의 하상에 존재하던 강자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m 정도 크기의 냇돌도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hand-axe)들로 양면가공된 것과 외면가공된 것이 있다. 평면이 타원형인 것과 첨두형인 것이 모두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공작과 지형적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와 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 석기가 존재하고 있다. 찍개(chopper)는 양면가공과 외면가공의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냇돌 또는 냇돌조각으로 만들었다. 다각면원구는 상당히 구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다면체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 있는데 대부분 한쪽 면에서 삼면까지 자연면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 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소량의 첨두기와 홈날석기 등이 채집되었다. 긁개는 직선날·볼록날·오목날 등의 형식이 보인다. 몸통이 두툼하고 급경사인 볼록날의 긁개가 보다 정형화한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소형 석기들은 집중가공된 것이 적어서 제작상의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석핵은 2, 3매의 박편을 떼어낸 변형된 냇돌 또는 즉시석핵(casual core)에서부터 보다 정형화한 반원추형 석핵에까지 다양하다. 즉시석핵류가 정형화한 형태의 것들보다도 훨씬 많다. 다량의 박편을 떼어낸 경우라 하더라도 일정 타격면을 반복 또는 규칙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불규칙하게 박편제작한 경우가 훨씬 많다. 박편제작이나 가공에는 직접타격법(돌망치를 사용한)이 주로 사용되었다. 주먹도끼 또는 가로날도끼 등의 대형 석기제작을 위한 대형 박편의 제작에는 대석법도 사용되었다.
박편은 대부분 천석의 자연면 평면이나 박리흔 평면을 이용해 떼어냈으며 소수의 다각모서리 타격면(facetted striking platform)이 보이나 조정타격법으로 볼 수는 없다. 많은 수의 박편이 배면(dorsal face)에 자연면이 남아 있고, 박리각이 100∼105°와 110∼115° 두 범위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한 타격면을 2차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 중 다듬은 석기는 대체로 5∼15% 내외이다. 약간의 석핵과 박편이 존재하고 대형 또는 소형의 석편과 부스러기가 많은 수(80% 내외)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량의 자연천석도 존재한다.
주먹도끼 등 양식적으로 발달한 석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기법으로는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석재의 제약성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온대환경의 적응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들은 1970년대 말까지 이러한 석기의 존재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문화를 2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이다. 이로써 세계 구석기학계의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공작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 구석기공작 이해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부 홍적세동안 고인류의 서식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전곡리 유적조사를 계기로 한탄강·임진강 유역에 대한 4기 지질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이 제고됨으로써 구석기연구의 방법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연천 전곡리 유적
(漣川 全谷里 遺蹟)
종목 사적 제268호(1979년 10월 2일 지정)
면적 778,296m2
시대 석기시대
소유 국유,사유
위치
연천 전곡리 유적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연천 전곡리 유적연천 전곡리 유적
주소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178-1
좌표 북위 38° 0′ 42.1″ 동경 127° 3′ 55.9″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연천 전곡리 유적(漣川全谷里遺蹟)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1979년 10월 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한탄강·임진강 줄기를 따라 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전곡리 유적이 규모가 가장 크고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전곡리 선사 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1978년 처음 발견되어 1979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발견하였다. 그 중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전곡리 선사 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초 발견
「全谷里 아슐리안 兩面核石器文化 豫報」(김원용, 정영화, 진단학보, 1979)에 의하면 동두천에서 미국 공군 기후예보대로 복무중인 그레그 보웬(Greg Bowen)이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원지에 놀러갔다가 그 부근에서 석기류를 발견하였다. 그는 발견된 석기류를 채집하고 이들 석기류를 보고 이것이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라고 추정하고, 해당 석기들을 김원용 교수에게 보내면서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발굴조사
1978년 처음 발견되어 1979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발견하였다.
1979년 예비조사
「全谷里 아슐리안 兩面核石器文化 豫報」(김원용, 정영화, 진단학보, 1979)에 의하면, Greg Bowen이 보내온 석기들을 보고 김원용 교수는 윤대인과 권학말과 함께 5월 14일에 현지를 답사하고 Bowen이 석기를 발견한 지점(제1지점) 이외에 새로운 지점(제2지점)을 확인하였고, 해당 지점에서 석기들을 발견하였다. 이어서 정영화 교수가 현지를 답사하고 종합적으로 조사하여 Bowen이 발견한 지점과 김원용 교수팀이 발견한 지점 이외에 새로운 지점(제3지점)을 확인하였다. 3개의 지점에서 발견된 석기는 31개이고, 박편은 15개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의 표와 같다.
1979년 예비조사에 의하여 발굴된 석기의 종류와 수량 및 발굴장소
번호 석기의 종류 제1지점 제2지점 제3지점 합계
1 주먹도끼 3개 2개 0개 5개
2 박편도끼 1개 1개 0개 2개
3 외날찍개(chopper) 0개 0개 2개 2개
4 안팎날찍개(chopping tool) 4개 1개 0개 5개
5 여러면석기 6개 4개 1개 11개
6 긁개 2개 2개 1개 5개
7 기타 0개 0개 1개 1개
8 박편 11개 3개 1개 15개
합계 27개 13개 6개 46개
※「全谷里 아슐리안 兩面核石器文化 豫報」(김원용, 정영화, 진단학보, 1979)에서 석기들의 명칭이 "양면핵석기, 박편도끼, 쵸퍼, 쵸핑-툴, 다각면원구, 긁개, 기타, 박편" 등으로 나오는데, 논문에서 양면핵석기의 경우는 주먹도끼라는 다른 명칭이 있다고 하였고, 다각면원구는 한자로 多角面圓球라고 하는데, 네이버 백과사전에 검색하면 고고학사전에서 여러면석기로 나오기 때문에 다각면원구는 여러면석기로 하였다. 그리고 쵸퍼와 쵸핑-툴을 영어로 하면 chopper, chopping tool이라고 하는데, 네이버 백과사전에 검색하면 두 용어모두 찍개로 해석이 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중에 e뮤지엄사전에서는 chopper는 외날찍개라고하고, chopping tool은 안팎날 찍개라고 하였기에 이 명칭을 한국어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연천 전곡리유적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는 최초의 인류가 살던 시기로 약 300만년전부터 1만년전까지로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대에 인류의 흔적 중에 가장 대표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석기로 이 시대 사람들은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고 식물의 뿌리, 열미를 먹거나 사냥을 하면서 삶을 영위했다.
구석기시대의 위대한 발견 '불'은 그들을 추위와 어둠으로부터 새로운 탈출구를 제공해주었다. 전곡리 유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으로 30만년 전부터의 인류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 전곡리의 아슐리안(ACHEULIAN)
약 15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에 의해서 처음 선보인 아슐리안 문화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계속된 석기제작 전통으로 유럽ㆍ아프리카 동아시아에서 모두 발견되는 석기문화임은 분명하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지난 1978년 아슐리인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유적이다.
연천 한탄강변의 용암대지 위에 퇴적되어 있는 두터운 점토층에서 다량의 구석기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현재까지 사적지 및 주변지역에 걸쳐서 총 17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출토된 유물이 약 8,500여점에 이른다.
전곡리유적을 시작으로 인근 한탄-임진강 유역의 여러 지점에서 중요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한탄-임진강의 구석기 유적은 동아시아 구석기문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전곡리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사적 제 268호 '전곡리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주먹도끼로 대표되는 아슐리안 석기공작의 유물들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슐리안 석기공작은 석기공작 속에 포함된 주먹도끼로 비롯된 것이다. 이슐리안 주먹도끼는 프랑스의 이른 시기 구석기유적인 생따슐(St.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석재의 양면을 정교하게 가공하여 날을 조성한 석기를 말한다.
전곡리유적을 필두로 동아시아지역의 아슐리안형 석기들이 발견되었으며, 이들이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아슐리안이 존재하지 않는 동아시아지역의 문화권과 정교한 석기공작이 발달한 유럽 및 아프리카 지역의 아슐리안 문화권으로 양분하는 이론(H.모비우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석기의 모습을 살펴보면 유럽 및 아프리카에서는 고운 석재를 가지고 석기의 전체 면을 정밀하게 가공, 날을 좌우 대칭으로 다듬었고, 전곡리의 아슐리안은 다소 거칠게 필요한 만큼만 다듬어서 석기를 제작하였다. 전곡리유적에서는 주먹도끼 이외에도 잘 다듬은 찍개와 여러면석기, 긁개 등의 석기들이 출토되었으며 그 정교함과 다듬은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석기 제작의 기법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 석기제작기술
가장 오래된 석기들을 대부분 석재를 땅에 던져서 그 조각을 이용하거나 또는 또 다른 큰 암석 위에 내리쳐서 그 조각난 석재들을 다듬거나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른 구석기시대의 석기제작의 보편적인 방법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망치돌을 사용하여 돌을 다듬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직접타격법이라고 부르는데 시간이 흘러서 기술이 점차 발전하게 되면 석제에 따라 뿔망치나 나무망치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면 아주 작은 박편을 만들어내는 눌러떼기 기법도 나타나 석기가 매우 정교해지게 된다.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위치도
연천군 관광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