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드물었던 프랑스의 승리
프랑스 군함(軍艦)들이 독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은 북(北)아프리카 알제리(Algeria)의 메르스 엘 케비르(al-Marsā al-Kab īr, lit)에 정박(碇泊) 중인 프랑스 함대(艦隊)를 공격(攻擊)했습니다.
직전(直前)까지 물밑 접촉(接觸)을 벌여 투항(投降)을 종용(慫慂)했으나 프랑스가 미적(微積)거리면서 결국 불상사(不祥事)가 벌어졌습니다.
사전 경고(事前警告)에도 불구(不具)하고 어쨌든 엄청난 피해(被害)를 입은 프랑스는 격앙(激昂)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식민지(植民地)의 태도(態度)가 영국에 의탁(依託)한 자유(自由)프랑스 대신 비시(Vichy)정부(政府) 쪽으로 급격(急擊)히 선회(旋回)했습니다.
↑메르스 엘 케비르에서 공격당하는 프랑스 함대, 메르스엘케비르 해전은 국가 간의 역학관계가 급속히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독일을 지지(支持)한 것은 아니었으나 배신감(背信感) 때문에 영국에 대한 신뢰(信賴)가 사라진 결과(決科)였습니다.
사실 100년 전쟁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친하게 지낸 적이 거의 없었던 전통(傳統)의 적대국(敵對國)이었습니다. 이처럼 견원지간(犬猿之間)이던 양국(兩國)이 20세기 들어 생각지도 못한 동맹(同盟)을 맺어 세계(世界)를 놀라게 했는데, 없던 애정(愛情)이 갑자기 솟아나서가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급격(急擊)히 성장(成長)한 독일의 위협(威脅)이 너무 컸기에 어쩔 수 없이 한배에 탄 것이었습니다.
↑견원지간 사이의 영불협상은 독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어쨌든 그런 동맹국(同盟國)이 적대적(敵對的)으로 바뀐 상황(狀況)이 자유(自由)프랑스를 이끌고 있던 드골에게는 곤혹(困惑)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영국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드골을 내세워 식민지(植民地)들을 설득(說得)하되 필요(必要)하다면 적극적(積極的)인 군사 행동(軍事行動)까지 실시(實施)해서 후환(後患)을 철저(徹底)히 제거(除去)하기로 방침(方枕)을 정했습니다.
어차피 메르스 엘 케비르에서 한번 피(血)를 보았기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칼을 뽑은 이상 확실(確實)하게 뿌리를 잘라내기로 한 것입니다.
↑대독 항전 방송 중인 드골
이때 눈에 들어온 곳은 프랑스령(領) 서(西)아프리카의 요충지(要衝地)인 다카르(Dakar)였습니다.
현재 세네갈(Senegal)의 수도(首都)인 이 도시(都市)는 아프리카 최서단(最西端)에 위치(位置)한 중요 항구 도시(重要港口都市)로 희망봉(喜望峰, Cape of Good Hope)을 돌아서 인도양(印度洋, Indian Ocean)과 연결(連結)되는 항로(航路)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에즈(Suez) 운하(運河)가 개통(開通)된 이후(以後)부터 예전보다 위상(位相)이 줄기는 했어도 유럽에서 남(南)아프리카나 남미(南美)로 가는 해상로(海上路)의 중간(中間)이기도 해서 현재(現在)도 여전히 중요(重要)한 곳입니다.
↑연합군 상륙 저지에 공헌한 다카르 항구 요새의 280mm 해안포
요충지인 다카르를 독일이 대서양(大西洋)에서 통상파괴전(Commerce raiding, 通商破壞戰)을 펼칠 잠수함대(潛水艦隊)의 전진 기지(前進基地)로 사용(使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은 먼저 점령(占領)하기로 결심(決心)했습니다.
상륙(上陸)에 나설 자유(自由)프랑스군 2개 대대를 태운 6척의 수송선(輸送船)이 항공모함(航空母艦) 아크로열이 이끄는 10척의 영국 함대(艦隊)의 호위 하(護衛下)에 다카르로 출발(出發)했습니다.
정보(情報)를 입수(入手)한 비시정부는 경순양함(輕巡洋艦), 구축함(驅逐艦) 6척을 급파(急派)했고 이들은 현지(現地)에서 전함(戰艦) 리슐리외(Richelieu)와 합류(合流)했습니다.
↑Fairey Swordfish 비행편이 있는 HMS Ark Royal
↑1940년 다카르에서 어뢰망 뒤에 있는 리슐리외
↑프랑스 항복 직전에 다카르로 피신했으나 식민지 정부 편에 서서 영국과 싸운 전함 리슐리외
그렇게 9월 23일, 다카르(Dakar) 해협(海峽)에 도착(倒着)한 연합군(聯合軍)은 상륙(上陸)을 실시(實施)하기 전에 현지(現地)까지 동행(同行)한 드골을 내세워 비시정부를 지지(支持)하는 식민지군(植民地軍)에게 투항(投降)을 권고(勸告)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안(提案)을 단호(斷乎)히 거부(拒否)했고 곧바로 해전(海戰)이 시작(始作)되었습니다.
전력(戰力)에서는 해군 강국(海軍强國)인 영국 함대(艦隊)가 주축(主軸)인 연합군이 우세(優勢)했지만,
요새화(要塞化)된 육상 거점(陸上據點)을 기반(基盤)으로 방어(防禦)에 나선 프랑스 식민지군의 저항(抵抗)은 대단히 거셌습니다.
↑다카르로 향하는 수송선에 탑승한 샤를 드골(右)
예상(豫想)치 못한 상황(狀況)에 연합군 함대는 전투 공역(戰鬪共域, codomain, target set, 육상 또는 해면을 포함하는 지구 표면상의 구역과 고도로 정해진 공중 영역에)서 물러난 후 전력을 정비(整備)해 재공략(再攻略)을 시도(時到)했으나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결국 9월 25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2척의 전함, 2척의 순양함이 피해(被害)를 입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전함 1척, 구축함 1척이 손상(損傷)되었고 잠수함 2척을 상실(喪失)했기에 얼추 해전 자체(自體)만 놓고 본다면 무승부(無勝負)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2차 대전 발발(勃發) 이후 직전(直前)까지 한심한 모습만 보여준 프랑스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프랑스 식민지군의 저항에 막혀 다카르 점령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더욱 격화(激化)되면 형식적(形式的)으로 중립(中立)인 비시정부가 완전히 추축국(樞軸國)에 가담(加擔)할 수도 있다고 판단(判斷)한 드골이 상륙(上陸)을 포기(抛棄)하면서 식민지군의 승리로 상황이 끝났고 종전(終戰)이 될 때까지 프랑스령 서(西)아프리카는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다카르 해전의 의의(義意)를 찾자면 제2차 대전 당시에 무능(無能)의 대명사(代名詞)였던 프랑스가 흥미(興味)롭게도 가장 잘 싸웠던 드문 사례(事例)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