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question is I understand we practice every day. For whatever reason, if I miss one or two days, how do we reconnect orc ome back? What’s your advice on that?
(기도를 매일 하지만 한두 번 빼먹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어떻게 다시 수행으로 돌아오나요?)
My question is the wish to let go of desires and do not suffer any more and to find freedom, isn’t it desire by itself?
(욕구를 버리고 고통받지 않고 싶다거나 자유를 찾겠다는 것도 욕구 아닌가요?)
그중 한 명은 까르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이해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면 되나요?
“I’m a little bit confused. I understood letting go of habits and Karma, and letting go of attachment, but what exactly is the practice? What am I doing?”
(저는 조금 헷갈립니다. 습관이나 까르마에서 벗어나고, 집착을 놓으라는 말씀은 이해했는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구체적으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하는지 자기가 지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이구나’라고 생각이 든다면, 그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과제가 됩니다. 과제를 인지하는 즉시 탁 내려놓아진다면 그냥 인지만 하면 됩니다. 수행을 따로 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인지를 하는데도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간섭하는 행동이 반복된다면,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 연습이 바로 수행입니다.
▲ \
한마디로 수행이라는 것은 연습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면 꾸준히 연습해야 하잖아요. 운전을 하려고 해도, 피아노를 치려고 해도, 모든 일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처럼 나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도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부터 수행을 시작한 여러분들에게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욕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욕망을 따랐을 때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 욕망은 까르마(karma)로부터 일어납니다. 까르마는 무의식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내가 내 까르마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생각할 때 그 까르마로부터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쾌하다거나 불쾌하다고 하는 어떤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느낌입니다. 우리가 그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 즉시 바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쳤다면 좋거나 싫다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합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초기에만 바로 알아차려도 내려놓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려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명상이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선정’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좀 커져 버리면 그 감정대로 하려는 힘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감정에 따라 행동하면 손실이 생긴다는 것 또한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지혜로운 자라면 행동을 멈춰야 합니다. 그것이 ‘계율’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것 또한 수행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너무 강하면 계율을 어기게 됩니다. 즉 화를 내버리고 짜증을 내버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잘못된 줄을 알아서 반성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둑이 무너졌다면 빨리 둑을 보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108배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수행, 혹은 수행자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회는 계율을 어겼을 때 그것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치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아는 통찰력이 ‘지혜’입니다.
계율, 선정, 지혜 이렇게 세 가지가 우리가 행해야 할 수행입니다. 정토회에서 매일 아침마다 하는 천일결사 수행 프로그램에는 이 세 가지가 골고루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 그중 한 가지를 좀 더 깊이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프로그램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명상만 일주일 동안 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지혜를 얻기 위해 6개월간 공부하는 불교대학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다음 질문자는 욕구가 일어나는 것과 반대로 무관심해지는 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어떤 일에도 무관심해지는 것은 어떻게 막아야 하나요?
“I was listening to what you were saying and just thinking about the other side of it. Just try to release yourself from desires and not caring. How do you avoid other extreme and being apathetic? So not caring but anything, so nothing really bothers you. How do you take that account?”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구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은 이해했는데, 반대 극단으로 무관심해지는 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나요?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어떤 것도 신경이 안 쓰이는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무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 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이죠. 두 번째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피해도 안 주지만 특별히 이익도 안 주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아쉬워합니다. 수행자라면 적어도 첫 번째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하고, 최소한 두 번째 사람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세 번째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욕심을 내면 이것 또한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내가 나서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욕망이 되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고 할 경우에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나서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욕심으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괴로워한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세상을 위해서 일해도 그것이 곧 자신을 위한 것이지 희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그런 데 별로 구애받지 않습니다. 필요한 일이라면 비난을 받아도 능히 행할 줄 알고, 필요 없는 일이라면 칭찬을 들어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질의응답을 한 후 사회자가 질문자들에게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질문하신 분들은 소감을 나눠주시겠어요? 질문한 순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마지막에 무관심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질문한 분도 소감을 말했습니다.
“짧고 아주 명쾌한 답변이었습니다. 욕망과 무관심한 것 사이의 균형을 알게 됐어요. 부정적인 영향만 안 준다면 괜찮은 거구나 싶습니다. 수행자가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돼서 좋았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지, 좋은 영향을 주겠다는 마음을 자꾸 내면 그것도 자칫 욕망이 되기 쉽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거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세상에 큰 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힌 사례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입재식을 마치며 마무리 말씀까지 이어서 해주었습니다.
나의 무거운 짐부터 먼저 내려놓기
“우선 이렇게 마음을 내어 수행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세상이나 남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선 나부터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삶이 좀 가벼워야 합니다. 삶에 너무 많은 의무감이나 사명감을 갖게 되면 삶이 무거워지고 힘들어집니다. 내 삶이 괴롭지 않고 가벼우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내 짐이 무겁다고 합시다. 무거운 짐을 어깨에도 메고 있고, 머리에도 이고 있고, 두 손에도 들고 있습니다. 너무 무거우니까 다른 누군가가 내 짐을 좀 들어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줄 알 수 있으며, 설령 안다 해도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짐도 감당을 못하잖아요. 내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가면서 주위를 둘러볼 수도 있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다른 사람을 볼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하나라도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기의 무거운 짐부터 먼저 내려놓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길입니다. 나부터라도 좀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내 짐을 남에게 맡기고 가볍게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내 짐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를 괴롭히는 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을 자기가 감당 못해서 늘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에게 빌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저 산에 있는 다람쥐나 토끼도 자기 삶이 힘들다고 하느님에게 비는 일은 없습니다. 작은 벌레도 자기 삶은 자기가 삽니다.
더 이상 구걸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자기가 함께 살 사람인데 왜 결혼할 사람을 하느님에게 구해 달라고 해요? 가게는 자기가 열어놓고 왜 장사는 하느님더러 해달라고 그래요? 본인은 뭘 하겠다는 거예요? 이런 인생은 다람쥐보다도 못하고 작은 벌레보다도 못한 인생이에요. 그러니 자기를 괴롭히는 행동을 멈춰야 합니다. 적어도 토끼나 다람쥐 수준은 되어야 해요.
다른 사람의 짐을 하나라도 덜어주기
여기서 한 발 나아가서 토끼나 다람쥐보다는 좀 더 낫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조금 도움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만나면 작은 짐이라도 하나 들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토회 천일결사 수행의 첫 번째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입니다. 두 번째 목표는 ‘세상과 이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건 어떤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진실이고 진리입니다. 이것을 알면 삶이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신 겁니다. 여러분도 천일결사 수행을 통해 삶이 좀 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홍서원을 영어로 함께 읽고 영어 통역 입재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첫발을 내딛은 외국인 수행자들을 위해 양손을 흔들며 환영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전했습니다.
외국인 수행자들은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오늘 입재식에 참여한 소감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 \
이어서 10시부터는 결사행자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문경 수련원에 상주하고 있는 공동체 법사단도 스님이 계신 정정당으로 내려와 함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새해 상반기에 추진하기로 한 행복한 100일 법문의 시행 시기를 변경하는 건에 대해 만일 준비위원장으로부터 발표를 듣고, 이에 대한 스님의 의견도 함께 들었습니다. 결사행자들은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나서 각 지역마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결사행자들이 토론한 내용은 대의원회에 전달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는 정토대전 편찬을 위해 경전팀 법사님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법사님들은 그동안 스님의 이야기해준 방향을 토대로 부처님의 일생이 담긴 경전 속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왔습니다.
▲ \
덕생 법사님이 오늘 회의할 내용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 \
“스님께서 테라밧다 경전인 니까야에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더 찾아보라고 하셔서 이것저것 많이 찾아봤습니다. 특히 6년 고행과 성도, 전도를 개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의 경전과 니까야를 서로 비교하면서 확인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저희가 발표를 할 테니 스님께서 다시 점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준비한 내용을 발표하고, 스님은 각각에 대해 무엇을 더 보완하면 좋을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 경전마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서 비교 검증하고 확인하느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스님이 방향을 계속 잡아준 덕분에 조금씩 경전 모음집의 얼개가 완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전을 읽고, 스님에게 질문하고, 다시 경전을 읽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 6시가 되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 처리를 하였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공동체 법사단 회의를 한 후 하루 종일 정토대전 불교사상서와 사회사상서 관련하여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