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대축일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복음: 마태오 10,17-22
죽을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어떤 자매님이 거의 년 전에 저에게 하신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저는 가족도 다 성당 열심히 다니고 돈도 부족하지 않고 어려운 일도 없는데
왠지 새벽에 일어나 혼자 우는 때가 있어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공허하고 행복한 것 같지 않아요.”
그 땐 저도 어찌 답을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열정과 순교를 생각하면서
이젠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바시 회 때 오지레이서 유지성씨가 나와 자신의 도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엔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고 싶다는 꿈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어떤 때는 까지 자급자족하며 마라톤으로 완주하는
‘사서 고생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처음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여행을 좋아해서 사막을 뛰어서 횡단해보겠다는 호기심에
시작한 것이 직장도 접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이 레이싱에 연계해주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래와 더위만 있는 사막을 횡단하거나
영하 이하의 남극을 목숨을 걸고 횡단하던 이야기를 할 때,
그러니까 뱀과 추위와 죽음의 위협이 있는 ‘오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눈이 빛나고 목소리가 힘이 있었지만,
오히려 직장생활 할 때의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경쟁과 시기, 질투 등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말하는 것이 힘들어보였습니다.
사실 그에게 참으로 행복한 천국은 우리가 볼 때 매우 힘들어 보이는 ‘오지’이고,
실제로 한국이 그에게는 불편한 ‘오지’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곳이 가장 행복한 곳’이라고 말하고,
이 경쟁사회 속 보다는 그 자연 안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달렸지만,
지금은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찾아주는 기쁨으로 달린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죽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데레사 효과(마더 데레사가 봉사하는 장면만 보여주어도
타액에 면역성분이 증가한다는 실험)에서도 나타나듯이
참 행복은 남을 위해서 죽어 줄 수 있을 때 찾아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이 넘는 몸무게를 지니고(이 일을 하기 전에 나갔던 몸무게)
직장에서 평범하게 일하며 세상에 휩쓸려 살았다면
지금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거스르는 열정, 이것이 자신을 태워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그에게 삶의 쾌감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의욕과 활기가 있을 때 행복합니까,
아니면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 행복합니까?
혹은 밖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합니까,
아니면 남이 던져주는 것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까?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내가 가장 살아있고 행복하다고 느꼈을 때는
누군가를 위해 죽어줄 수 있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좋아했던 여자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을 때 저절로 입에서 나왔던 말이,
“이젠 사는 것 같다!”였습니다.
지금까지 죽어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찾지 못했다가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는 것 같이 느낄 때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수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복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도 죽을 수 없는 때가 진정 죽은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나를 따라라”,
혹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혹은 이웃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죽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다고 해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열정(passion)’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passion)’이란 삶의 의욕과 활기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난(passion)’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열정’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소진’시키며 그 열정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열정은 그 마음 안에서 불처럼 타올라 자신을 태웁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이렇게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킬 때입니다.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출세도 다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나들며 배를 타기도 하고
모진 수난을 받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분에겐 자신의 목숨을 버릴만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열정이 수난이 되어 자신을 소진시킨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흘러가는 그런 삶이 아니라
세상과 맞서고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삶을 찾아야합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이런 의미에서 ‘열정’을 가지신 분이셨고, 물론 그래서 박해받고 죽으셨지만,
그래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의미에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을 이겼다는 열정의 상징이요, 살아있음의 상징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진정 이 세상에서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참 행복의 진리를 보여주는
영원한 상징입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생각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롯의 아내는 세상에 미련은 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거스르지 못했기에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거스르는
열정이 있어야합니다.
물론 그 열정이 세상에서 우리가 멸망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 열정이 없는 세상이 멸망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어가 물살을 거스르며 자신의 고향으로 갈 때 얼마나 많은 위험을 만나게 됩니까?
세상은 그저 편하게 자신의 물살에 몸을 맡기라고 하고 우리가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유혹합니다.
유지성씨와 함께 오지레이스를 하는 김경수씨는, 인도에서 서바이벌 레이스를 할 때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오토바이처럼 생긴 인도 택시 ‘오토릭샤’라고 말합니다.
지쳐있는 자신에게 자꾸 옆으로 와서 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보는 사람이 없어서 잠깐 타고 어느 정도 가서 내려서 걸으면 되지만
결코 그것을 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 완주했을 때의 행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우리의 열정을 꺾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에게도 서양 학문과 언어, 지도를 그리는 등의 여러 재능 때문에
호강시켜준다는 회유도 있었지만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실제로는 죽는 것임을 잘 아시고
계셨기에 그 회유에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스르지만 죽은 물고기는 그 물살에 떠다닐 뿐입니다.
무기력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야 그럴 수 있겠지만,
열정과 활력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저 떠다니는 것이 결코 행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열정은 불과 같습니다.
나를 불사르고 소진시키고 결국 나를 죽입니다.
이렇게 사는 방법이 있고, 또 열정을 버리고 그냥 세상 조류에 휩쓸려 살 수도 있습니다.
열정이 없음이 곧 무기력입니다.
남들 하는 대로 세상에 휩쓸려 무기력하게 살든가,
아니면 세상을 거슬러 내 자신을 소진시키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모든 순교자분들은 참다운 열정,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저는 강론을 쓰는 것이 가장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강론을 쓰려고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쓰지 않으면 몸은 편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합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는 고통 뒤에 아기를 보는 행복이 오는 것처럼,
강론을 쓰는 것이 훨씬 행복합니다.
강론이 제일 힘들지만, 강론을 빼면 사제생활의 보람을 거의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놓을 열정, 우리에겐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열정으로 우리 자신을 소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영생의 길인 것입니다.
첫댓글 열정을 위한 삶.. 참 어렵지만 보람있는 일 입니다.. 좋은 묵상 글 감동 받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깊이 묵상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7.03 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