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내 한 방울의 물을 어떻게 마르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된 주유소가 있고 그곳엔 물 펌프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나그네가 주유소의 물 펌프를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바가지의 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 펌프 밑에는 엄청나게 시원한 지하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이 펌프 물로 갈증을 해소하세요.
명심하세요.
펌프 앞에 놓인 바가지의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이것은 ‘마중물’. 잊지 마세요.
다음 분을 위해서 ‘마중물’을 꼭 채워놓고 가세요!”
우리 안에도 마중물 한 바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잃지 않으려면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기처럼 됩니다.
모기는 자기의 생명을 잃지 않으려 남의 생명을 취합니다.
그렇다고 죽지 않는 게 아닙니다.
생존의 불안함 속에서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갑니다.
고등 동물이 될수록 한 바가지의 물, 곧 생명, 혹은 피는 관계를 맺는데 투자됩니다.
모든 관계는 피로 이뤄집니다.
피는 나의 돈, 먹을 것, 명예, 권력 등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들이 사라지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어놓으면 가정이나 사회에 소속되게 됩니다.
그 관계가 나를 불안해서 해방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지려면 먼저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것을 제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마중물 법칙’이라 하겠습니다.
물을 부을 때는 마치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투자는 이익을 예상하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부은 물보다 더 많은 물이 나오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없다면 물을 붓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는 사랑도 투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이익이 없는 투자는 없습니다.
분명 그 투자는 남편이나 사회, 혹은 자녀가 자라서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등의 이익을 줍니다.
양심의 칭찬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투자가 천국을 만듭니다.
그런데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하나뿐인 목숨을 투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모든 게 목숨과 연계됩니다.
돈과 명예, 먹는 것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 시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그릇에서 투자하는 게 몇 배로 나오느냐가 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목숨도 투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삼사라’에서 어떻게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겠느냐는 화두를 던집니다.
그 방법은 바다에 자기를 던지는 것뿐입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저절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코디 리라는 청년은 자폐를 앓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메리카 갓 탈렌트에서 우승하여 100만 달러를 어머니에게 선물합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이고 빛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에게 그렇게 투자할 줄 압니다. 자기 생명이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 원천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하느님께 투자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 한 방울의 물을 지키려고 할까요?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
외국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다보면 다들 큰 호기심을 가지고 제게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십자가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저게 다 교회가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땅에는 정말 십자가가 많더군요.
여기 저기, 50미터 100미터도 못가서 나타나는 교회들, 그 교회의 꼭대기에는 다들 보란 듯이
십자가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恨)으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점철된 ‘십자가의 민족’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십자가는 왜?’ ‘고통은 왜?’ 라는 질문은 인간 역사 안에서 늘 되풀이 되어온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시편작가들도 고통의 연속인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 빠져나가듯이 평생토록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통 앞에 시편 작가는 차라리 체념하고 수용하는 게 더 낫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대답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 특히 원죄에 대한 경고이자 징벌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보약입니다.”
‘고통은 왜?’란 질문 앞에 지금까지 교회가 제시한 전형적인 답안이었습니다.
물론 고통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일취월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 십자가에 대한 도에 넘치는 수동적, 소극적인 자세는
최선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라는 당부는 힘에 겨우니 체념하라는 말, 어쩔 수 없으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을 더욱 크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난관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매일 와 닿는 고통과 악, 병고와 불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지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라.
그러나 퇴치할 수 있는 고통은 마땅히 퇴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거슬러 투쟁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이를 없애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으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멸시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에 겨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갖은 고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십자가는 미리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은 각고의 노력을 다해 극복해야만 합니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강론>
(2024. 2. 15. 목)(루카 9,22-25)
<십자가의 길 - 나 자신을 위한 길>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에 있는 ‘반드시’ 라는 표현과‘... 해야 한다.’ 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표현하신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 표현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섭리, 또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인데, 허무하게 죽음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부활로 마무리된 일이기 때문에, 부활에 초점을 맞춰서, 예수님 말씀을, “나는 많은 고난을 겪고 살해당하겠지만
‘반드시’ 되살아날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을 대할 때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고 부활은 생각하지 않거나 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큰 사건이고,
중요한 사건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훨씬 더 큰 사건이고, 훨씬 더 중요한 사건입니다.
신앙인은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서 ‘십자가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여정 자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 자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씀은, 십자가를 면제받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곧 십자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내적인 걸림돌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가장 먼저 치워야 할 걸림돌은 ‘지금 당장’ 편하게 지내고 싶은 욕구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고,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고 불편한 길로만 보이고,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지금은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 그런 욕구나 충동부터 버려야 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자신을 버리는 일에 포함됩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그 모든 ‘버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라는 말씀의 핵심은 ‘끝까지’입니다.
중간에 멈추는 것은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제 십자가’는 신앙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신앙생활의 모든 일, 즉 특별한 희생이나 봉사나 헌신이 아니라,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걸어가신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려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지만, 나는 나 자신이 살려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일은 희망과 기쁨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허무한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온 세상’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 같은 것만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인데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욕심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죽기 전에라도 깨닫는다면 다행인데,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그 경우에는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욕심 부렸던 그것들과 함께 그 자신도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허무한 것인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 그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고 허무한 것은 버리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머리가 좋다고 또 공부를 많이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생활하는 신앙인들에게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은사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