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09](월) [동녘이야기]
[허균 얼 톺아보기] 성소부부고 살피기 026#
✦권5 문부2 서(序) /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 서(序)
https://youtu.be/B_rzwxdg9V0
오늘은 새로운 권인 권5로 들어가 문부1이 아닌 문부2를 읽을 차례입니다. 전체를 크게 권으로 나누고 또 부분도 나눈 셈입니다. 그 문부2의 서(序)로 덧붙인 글을 읽을 참입니다. 좀 길어 두 번으로 나누어 끊어서 읽도록 하겠읍니다. 더욱 이 글은 교산 허균이 우리나라를 또한 우리나라 국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귀한 글입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 우리나라는 산과 바다 사이 후미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데다 땅덩이도 또한 좁다. 동남으로는 왜놈들과 이웃해 있고, 북으로는 말갈과 경계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삼위(三衛) 여진(女眞)인 해서여직(海西女直, 송화강 유역의 여진)과 건주여직(建州女直, 훈강 유역의 여진), 야인여직(野人女直, 흑룡강 유역의 여진)이 압롱강 가까이에 있다. 이런 두려운 판국에 얼마 되지도 않는 피곤한 병졸들을 가지고 성벽도 제대로 고치지 않은 채 오랑캐를 막으려 하고 있으니 그 힘이 모자란다는 것쯤이야 쉽게 알 수 있다.
북쪽은 태조 임금께서 왕업을 일으킨 곳이다. 이곳은 조종(朝宗) 이래로 오랑캐에게 정해 준 경계를 견고히 하고, 성벽의 연못을 깊게 해자를 파는 등 온갖 힘을 기울여 지켜 왔다. 또한 착실하게 훈련된 병사와 말들을 모아다가 이곳을 지켰기에 내침이 있어도 쉽게 막았다. 북쪽 오랑캐들은 구탈(甌脫, 척후병들이 머무는, 임시 흙집인 토실土室)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서 어쩌다 좀도둑은 있었지만 큰 세력은 아니었다. 겨우 조그만 땅덩이를 다투는 정도여서 이백년 동안 침입해 왔다지만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끼치지는 못하였다.
남쪽에 있는 왜놈들로 말할 것 같으면 큰 바다로 경계를 삼고 그 뱃길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본국에서는 먼 조선을 침략할 뜻이 없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대마도의 왜놈들이 재물을 탐내 노략질하는 것이 위험이 될 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풍신수길로 일본 장수이자 정치인으로 일본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켰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이름은 천황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가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고 길을 내어달라고 꾀를 낸 것도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유천조신으로 일본에서 갑자기 돌아간 휴정의 주검을 모시고자 사명대사와 손문욱이 일본으로 왔을 때 안내를 맡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일인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게 주선한 인물)로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입조(入朝)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자신이 사신이 되어 부산포로 들어온 것도 다 이 시노게부의 꾀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백만 대병으로 조선을 침략한 것이지만 이는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어찌 감히 해마다 이런 일이 일어날까 보냐, 이는 다만 대마도 왜놈들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하여 쌀을 구하려는 짓이기에 남쪽은 크게 걱정거리는 아니다.
오늘날 가장 크고 심각한 근심거리는 서쪽에 있다. 서쪽의 요새지는 다만 압록강 일대와 연평령(延平嶺)만이 있을 뿐이다. 압록강이 얼면 평평한 땅처럼 되고, 연평령 또한 험하지 않아 쉽게 넘어올 수 있다. 이곳만 지나면 수레를 나란히 하여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으니 대정강(박천강)에서 사현(沙峴)까지는 그들을 막아낼 만한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적이 압록강을 건넌지 열흘도 채 못되어 평양성 아래까지 이를 수가 있다.
더욱이 오랫동안 평화스러웠기에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고을들은 오직 누각이나 꾸미고 술잔치를 사치스럽게 벌여 사신을 즐겁게 하는 것만 일삼고 있을 뿐, 견고한 방비가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다. 문관과 무관들도 시절이나 즐기며 임기가 차기만을 기다려 옮겨갈 생각만 할 뿐, 척적(尺籍, 군대의 기록 장부로 사방 한 자의 널빤지)은 반이나 비었으며 군사들의 조련 또한 하지 않았다. 성채는 이지러졌으며 호구(쌀을 저장했던, 파 놓은 구덩이)는 무너졌고, 무기는 녹슬었으며 군량미는 다 떨어졌다.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관리들의 착취와 세금 때문에 어려워져 강변 여섯 고을의 백성 중 십중팔구는 안쪽 내지(內地)로 들어왔다.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흙담이 무너질 듯할 것이다. 그때에는 중국의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구차스럽게 바란다. 그러나 중국도 오랑캐들의 사나운 반항이 벌써 근심거리가 되었다. 근래에는 만주의 여러 부족들이 날이 갈수록 청성하여 가고, 날이 갈수록 주위를 정복해 가고 있다.
몇 해가 지나면 요(遼)의 왼쪽이 또한 달걀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해 질 것이다. 우리 서방이 탄환(폭약)같은 땅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짓밟히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할 것이며 또한 중국이 와서 구원해 줄 것이라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니 요(遼)가 세번, 합단이 한번 쳐들어왔으며 몽고가 여섯번, 홍건적이 두번 쳐들어 왔는데, 이들 모두가 서쪽 국경을 통해서 들어왔었다. 고려의 장수는 잘 훈련되고, 병사는 강하여서 오는대로 곧 물리쳤었다. 이는 모신(謀臣, 전략가를 뜻함)들이 계책을 내고, 용감한 자를 천거하여 힘을 모았으며 유능한 자들을 써 외적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빈틈없이 계획을 미리 세워 함락되지 않을 만한 형세를 먼저 이루고, 기다리며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는 오백년 동안 외적의 침입으로 그 사직이 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과연 고려 때처럼 미리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이런 오늘도 고마움으로 교산의 국방에 대한 생각들을 만나 보았읍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오늘은 월요일이라
'교산 허균의 얼 톺아보기'로 성소부부고를 읽었읍니다.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 서(序)'입니다.
서변(西邊)은 서쪽을 뜻합니다.
또한 비(備)는 준비를 뜻하고, 로(虜)는 사로잡는 뜻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짧은 덧붙이는 글이 서(序)입니다.
이것은 교산 허균의 '나라의 국방'에 대한 생각의 한자락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 쯤에
'민중의 선구자, 허균의 반역'이란 조금 긴 글을 썼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직접 읽지를 못했었읍니다.
다른 님이 읽고 남긴 글을 읽고, 옮겼을 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 서(序)'는
우리나라의 국방에 대한 교산 허균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