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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807.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묵상글( 04:42, 05:10, 05:20.)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호명환 신부님.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차 공유할 묵상글: * 정회원 어느 분께서나 이 곳에 오시는 분을 위하여 다른 분들의 오늘 묵상글을 이 곳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 묵상글 등 나누기 뜨락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 이 묵상글 뜨락을 '8월 15일 이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에 대한 의견을 전체 공지 H. 260707을 참고하셔서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간 (3 곳을 다니고 참가하며: 2-3. 52번 참조) 이곳 뜨락에서 한 분의 묵상글이라도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나눔의 장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 제1독서<불행하여라, 피의 성읍!>(나훔2,1.3; 3,1-3.6-7) 1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3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2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3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6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7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복음<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 260807.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6,24-28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 주님의 이 말씀은 자기 학대가 아닙니다. ‘거짓 나’를 버려 ‘참 나’를 찾으라는 부르심입니다. 내가 움켜쥔 헛된 자아를 놓을 때, 비로소 하느님 안의 참된 내가 살아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길을 누구보다 절절히 살아 낸 사람입니다. 그는 명예와 쾌락이라는 ‘온 세상’을 좇았지만, 그 모든 것을 얻고도 마음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당신 안에 쉴 때까지 저희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 이 말씀은 곧 아우구스티노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사랑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서야, 곧 하느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서야 쉼을 얻었습니다. 오늘 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복음을 마지막에 가장 깊이 살아 냈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 가운데 하나였지만, 생애 끝에 깊은 신비를 체험한 뒤 자신의 방대한 저술을 ‘지푸라기’라 불렀습니다. 평생 쌓은 ‘지적 생명’마저 하느님 앞에 기꺼이 내려놓은 것입니다. 바로 ‘자기 목숨을 잃어 목숨을 얻는’ 그 길입니다. 그가 ‘이성과 신앙’을 그토록 깊이 화해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성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끝내 신비 앞에 겸손히 무릎 꿇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열매의 관점에서 보면 아퀴나스는 평생의 연구로 ‘성실’을 살았고, ‘말 없는 황소’라 불릴 만큼 ‘온유’하고 겸손했으며, 자신을 비워 ‘절제’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가장 큰 지성이 가장 깊이 자신을 버린 것 ― 그것이 오늘 복음의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거짓 나’를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온 세상’을 좇느라 참된 목숨을 잃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가 가장 자랑하는 것마저 그분께 내려놓을 수 있는가? 나의 이성과 재능은 신비 앞에 겸손한가? 주님, 거짓 나를 버려 참된 나를 찾게 하소서. ‘온 세상’보다 당신을 택하게 하시고, 제가 가장 자랑하는 것마저 당신 앞에 내려놓게 하소서. 아멘. ---------------------------------------------------- 260807.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부당한 고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욥기 안에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고통을 비추어 보는 거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욥과 고통의 신비 부당한 고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2026년 8월 6일 목요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추모의 날 중앙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욥기를 공부하면서, 신학자 제이슨 카터(Jason Carter)는 그들이 욥기 말씀과 깊은 연대를 이루고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이 발췌문에서 적도 기니의 토착 종족인 팡 공동체에 속한 한 신학도는 욥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겪은 고통의 체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욥 형제에게, 욥기를 읽고 당신의 고난과, 친구들이 당신에게 던진 원망과 비난을 묵상할 때마다, 저는 제 안에 당신이 다시 태어나 계신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세상에 불의가 가득하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당신처럼 저도 삼 년 동안 참혹한 시기를 지나며 두 자녀를 잃었습니다. 한 아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외부 사람들, 심지어 제 친척들까지도 제 아내 집안의 주술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의 갈라설 뻔했습니다. 또 다른 아이(여섯 살)는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집 안의 그 어떤 물건도 꺼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불을 아내의 책임으로 돌렸고, 어떤 이들은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하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이죠…. 제 마음은 저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가 섬기는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어떻게 하느님께서 네가 이 모든 일을 겪도록 허락하셨단 말인가?" 저의 나라 각종 전염병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 그리고 참혹한 죽음으로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러한 고통을 겪을 때마다, 사람들은 언제나 피해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세 친구들의 논리가 제 문화에서는 흔한 모습입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고통이 주술과 연결되거나, 하느님께서 개인이나 온 가족을 죄로 심판하신 결과로 여겨집니다…. 저는 사람들이 탄식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허락하셨단 말인가? 나는 이런 일을 겪을 이유가 없는데, 너무나 부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무고한 어린이들의 죽음, 공부를 했음에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가난 속에 사는 이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수많은 범죄자들이 점점 더 성공을 거두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이여, 저는 당신의 아내에게 응답하실 때 보여주신 용기와 성숙한 태도, 그리고 당신의 온전한 신의를 깊이 존경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도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으셨습니다(욥 2:9–10). 또한 저는 당신이 하느님께 겸손히 응답하신 모습에 감탄합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지혜를 드러내는 길은,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침묵을 지키며 어리석은 말을 내뱉거나 억울한 이들을 잘못 고발하지 않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참으로 저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무고하고 의로운 이라 할지라도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저는 모든 이가 당신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진심을 담아, 당신의 형제, 그레고리오 은솜보로(Gregorio Nsomboro) 우리 공동체 이야기 어려운 어린 시절을 지나며, 저는 오랫동안 결핍되어 있던 것을 채우기 위해 술과 약물에 의지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제 상처를 덮어주는 약처럼 느껴졌지만, 결국 그것은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저는 하느님의 빛이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매번 예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저는 그 모든 경험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빛은 제 발에 등불이 되고, 제 길에 빛이 되어 주십니다. 만일 제 어둠이 없었다면, 저는 이 빛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Amy K. References Jason A. Carter, Inside the Whirlwind: The Book of Job Through African Eyes (Pickwick Publications, 2017), 166–16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relio Marcelino, untitled (detail), 2022, photo, Surabaya, Indones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홀로 머물도록 부름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는 우리 곁에 모여, 함께 침묵 속에서 자리를 지켜 주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을 함께 증언합니다. 그저 곁에 머물러 주는 그 사랑의 현존이 곧 위로가 됩니다. ---------------------------------------------------- 260807.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07 04:55 - 버리는 것의 끝까지 17장의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은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바로 앞의 장인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맞췄고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반석 삼아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고, 그러나 수난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주님 말씀에 베드로가 반박하자 주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호통치시며 내게서 물러가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서 물러가라’는 우리말 번역이 영어 번역으로는 “Get behind me”인데 내 뒤로 물러나라는 뜻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17장인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따르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렇습니다. 우린 주님 앞에서 설쳐대다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주님 뒤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주님 뒤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흐름 안에서 주님은 오늘 당신을 따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당신 추종에 대한 가르침은 이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하셨는데 주님 추종의 이 첫 번째 방식이 오늘 말씀하신 것보다는 조금 쉬운 방식입니다. 사실 자기 소유물 포기는 자기 포기보다 쉽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는 쉽지요. 정말이지 자기를 포기하는 것과 십자가 지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고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느냐 그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려운 것을 왜 굳이 해야 하나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 주님을 따라야 하고, 왜 자기를 버려야 하고, 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인간은 알게 모르게 행복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행복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삶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삶과 행복의 관계라는 묵직한 주제, 삶도 중요하고 행복도 중요한 묵직한 주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반대로 행복하면 그 행복이 영원히 이어지는 그런 삶을 바라지요. 그래서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과 건강을 하나도 잃지 않고 누리면서 가족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법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것이 없으니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그것들도 버리고 이 세상도 떠나 당신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소유물뿐 아니라 바로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소유물을 버리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인데 갈수록 태산인 셈입니다. 버리는 것의 끝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고, 자기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의 끝은 자기 소유물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고 자기의 목숨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버릴 때 목숨이 곧 하느님의 생명이 주어지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영원히 살고 싶으냐, 이 세상 사는 동안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냐, 결국 이 문제이고, 우리는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 260807.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참된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2026.08.07. 05:13 오늘 복음은 세상과 정면으로 맞섭니다. 그 접근은 철저하고 근본적이며, 어떤 절충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스스로 혹은 타인으로 인해 겪는 고통 앞에서 흔히 듣는 말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등등. 그러면서 우리는 마치 커피숍이나 미용실 등에서 적립 스탬프를 모으듯, 희생을 차곡차곡 쌓아두며, 훗날 하늘나라의 심판대에서 그것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고통 그 자체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무감각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목마르셨고, 배고프셨으며, 피곤하셨고, 버림받는 것을 괴로워하셨습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는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同情)을 지니시고 그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덜어주시고 치유와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일이 본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오늘 예수님 말씀의 본질일까요? 우리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서를 통해 죄인들과 병자들, 약자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사랑을 몸소 보여주시고 그 사랑(하느님) 때문에 당신 자신을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에 내맡기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새기며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먼저 고통을 겪고 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으로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안에서 희생과 자기 부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희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희생을 낳지만, 모든 희생이 사랑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저 고통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고통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고통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진정한 사랑은 고통과 희생을 수반합니다. 여기에는 자기 내어줌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내어줌에는 반드시 사랑의 하느님이 현존하시기에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나' 때문에"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나'는 분명히 '사랑'을 위해 '사랑' 자체가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참된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십자가 앞에 머물며 기도하던 중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현실을 깊이 슬퍼하며 "사랑이 사랑받지 못합니다!"(Amor non amatur!)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장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의 일상 안에서 자주 그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서 묵상할 때와 미사나 전례에 참석할 때도 그래야 하겠지만,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고 또 새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우리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십자가를 응시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거고요.... 어쩌면 우리가 참된 신앙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이 근본적인 측면, 즉 사랑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와의 참된 인격적 만남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 260807.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08.06 08:28 예수님의 변모와 우리의 변화 예수님의 변모는 예수님께서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으로 바뀌신 사건이 아니라, 그분 안에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영광이 잠시 제자들의 눈앞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늘 보아 오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 먼지 나는 길을 걸으시고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끼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머무시던 그분 안에 하느님의 빛이 충만히 머물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볼산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님께 새로운 영광이 더해진 사건이라기보다,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변화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적 변화란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거나, 지금의 나를 부정하여 낯선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내 안에 심어 놓으신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죄와 두려움과 상처와 욕망에 가려져 있던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더 많이 가져야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리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을 때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빛을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세상의 성공이나 권력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아들의 순종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고,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려는 분의 내적 진실에서 나오는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를 피하여 얻으신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사랑 안에서 드러난 영광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변화도 고통이 사라지고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는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을 선택하고, 상처를 입고도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으며, 억울함 속에서도 복수하지 않고, 실패 속에서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삶의 외적인 조건이 바뀌지 않아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이 달라질 때, 우리는 이미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빛나는 순간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고통도 갈등도 없는 산 위에 머물고 싶었고, 초막을 지어 그 영광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우리 역시 은총의 순간을 붙잡고 싶어 합니다. 기도 중에 느낀 평화, 피정에서 받은 감동, 공동체 안에서 경험한 친교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초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의 변화는 좋은 체험을 많이 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감동은 순간이지만 말씀은 우리를 길 위에 세웁니다. 체험은 우리를 위로하지만 순종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빛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산 아래에는 병든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고, 고통받는 아버지가 있었으며, 믿지 못하고 다투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 끝에는 예루살렘과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산 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빛은 산 아래의 고통 속으로 내려갔으며, 마침내 십자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변화가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변화는 기도실 안에서 시작되지만 관계 안에서 확인됩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는 평화로울 수 있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형제 앞에서 비로소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 있지만,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할 때 비로소 내 안의 참된 겸손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수 있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품어 줄 때 사랑은 비로소 몸을 얻습니다. 변화는 거창한 사건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을 줄이고 한 번 더 들어 주는 것, 잘못을 변명하기보다 인정하는 것, 화가 날 때 즉시 반응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 형제의 약점을 판단하기보다 그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 내가 옳다는 사실보다 관계를 살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바로 이러한 작은 선택들 안에서 우리의 얼굴은 조금씩 그리스도의 얼굴로 변화됩니다. 참된 변화는 내가 다른 사람을 바꾸려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배우자와 형제와 공동체와 세상을 내 뜻대로 변화시키려 할 때 관계는 통제와 갈등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의 완고함과 두려움과 자기중심성을 바라볼 때 변화의 문이 열립니다. 변화는 타인에게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은총에 내어 맡겨지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흔히 변화란 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복음적 변화는 오히려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더 강하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빛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빛날 자리를 마련합니다. 자기가 인정받는 것보다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이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변화는 자기완성이 아니라 자기 비움이며, 자기 확대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자기 내어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산에서 빛나셨지만 그 빛을 자신을 과시하는 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가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변화의 표지입니다. 참으로 변화된 사람은 자신의 영적 체험을 자랑하지 않고,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려 하지 않고, 조용히 상처 입은 이의 곁에 머뭅니다. 그의 변화는 화려한 말보다 따뜻한 태도에서 드러나며, 높은 이상보다 매일의 작은 섬김 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의 변화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고, 선택과 행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마음속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용서와 기다림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이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 소외된 형제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내 고집과 명예욕과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구체적인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변화는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 조금씩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긴 여정입니다. 때로는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내 안에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빛나는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듯이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덮으시고, 우리가 다시 아들의 말씀을 듣도록 이끄십니다. 변화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업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창조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변화는 얼굴의 변화입니다. 굳어 있던 얼굴이 부드러워지고, 판단하던 눈이 자비롭게 되며, 불평하던 입술이 감사와 축복을 말하게 됩니다. 타인을 경쟁자로 바라보던 눈이 형제로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고, 피조물을 소유와 이용의 대상으로 보던 시선이 하느님의 선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의 변모가 그분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건이라면, 우리의 변화는 우리 안에 심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이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그 변화는 산 위의 눈부신 순간보다 산 아래의 충실한 일상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품어 주는 마음, 용서의 손길, 가난한 이를 향한 연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선택 안에서 우리의 얼굴은 조금씩 주님의 얼굴을 닮아 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단지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날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도록 초대받았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산 위에 초막을 짓고 머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빛을 가슴에 품은 채 고통받는 세상 속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이 아니라 삶으로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며, 사랑은 아직 살아 있고, 인간은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가장 어두운 얼굴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빛은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자비로 변화되고, 우리의 두려움이 신뢰로 변화되며, 우리의 완고함이 온유함으로 변화되고, 우리의 고독이 형제성으로 변화되며, 우리의 일상이 사랑의 자리로 변화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길은 언제나 같은 한마디에서 시작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260807.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08.07 01:51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포르치운쿨라에서 태어난 것은 수도회라는 조직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난 것은 형제성이라는 새로운 인간관계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부하나 제자나 구성원이라 부르지 않고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형제라는 이름 안에서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누구도 지배할 수 없으며, 누구도 다른 이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형제는 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며, 내가 선택한 사람이기 전에 하느님께서 내 곁에 보내신 신비입니다. 형제성은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의 편안한 모임이 아닙니다. 형제성은 다름을 견디는 사랑이고, 타인의 약함을 품는 인내이며, 나의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공동선을 찾는 가난입니다. 형제성은 서로 완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서로 불완전함에도 떠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형제의 실수 앞에서 정죄하기보다 회복을 기다리고, 형제의 성공 앞에서 시기하기보다 함께 기뻐하며, 형제의 상처 앞에서 충고보다 먼저 침묵으로 곁을 지키는 것이 형제성입니다. 우리는 종종 형제성을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나의 왕국을 세웁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편안하고, 내 방식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안심하며, 내가 인정받지 못하면 공동체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낍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나의 기대에 맞을 때만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공동체를 이용합니다. 걱정이 지나치면 통제가 되고, 책임감이 지나치면 지배가 되며, 열정이 가난을 잃으면 자기 의지가 됩니다. 포르치운쿨라의 형제성은 우리에게 나의 왕국을 내려놓으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 나라와 나의 왕국은 같은 마음 안에서 함께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포장과 증명과 자랑과 비교와 경쟁이 힘을 잃습니다. 내가 더 나아 보여야 한다는 불안도, 내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갈망도, 다른 이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급함도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 자리에 다른 이가 빛나는 것을 기뻐하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 피어납니다. 포르치운쿨라의 작은 돌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하나의 돌은 다른 돌보다 더 빛나려고 하지 않고, 가장 아래에 놓인 돌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가장 위에 놓인 돌은 혼자 지붕을 받치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모든 돌은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전체를 세웁니다. 어떤 돌 하나가 빠지면 벽 전체가 약해지듯, 공동체 안에서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 적은 형제도, 몸이 아픈 형제도, 일을 잘하지 못하는 형제도,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형제도 모두 공동체를 이루는 귀한 돌입니다. 형제성은 다른 이를 변화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먼저 변화되는 은총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보며 내 안의 들보를 발견하고, 형제의 느림을 견디며 나의 조급함을 내려놓고, 형제의 다름 앞에서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님을 배우는 것이 형제성입니다. 형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을 통하여 나의 숨은 교만과 소유욕과 통제 욕구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나의 성화를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진실하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형제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갈등이 사라진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갈등 속에서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주고받았을 때 침묵과 거리로 관계를 끝내지 않고 다시 대화의 문을 여는 것이며, 잘못한 이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기보다 그가 다시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관계의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포르치운쿨라 대사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사람이 없고, 용서받기에는 너무 큰 죄인이 없으며,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깊이 무너진 인생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공로를 계산하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떠났는지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비는 돌아오는 발걸음을 향하여 먼저 달려가고, 잃어버린 존엄을 다시 입혀 주며, 우리를 종이 아니라 자녀로, 이방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포르치운쿨라 축일은 자비가 형제성을 다시 세우는 날입니다. 판단보다 이해를, 정죄보다 기다림을, 배제보다 포옹을 선택하는 날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서운함을 내려놓으며, 내가 옳다는 사실보다 우리가 다시 형제가 되는 일을 더 귀하게 여기는 날입니다. 다시 형제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입니다. 형제는 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성사입니다. 형제는 내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복음을 배워야 할 동반자입니다. 형제의 약함은 내가 판단할 근거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배워야 할 자리입니다. 형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느님께서 나에게 건네신 선물입니다. * 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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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댓글에 아래와 같이 복음에 대한 본인 생각과 다른 분들의 생각과 의견이라도 서로 공유하는 소통이면 어떨까요?
댓글 내용은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수정하면서 ---
++ (예시 1)+++++++++++++++++++++++++++++++++++
나의 십자가는?
나에게 주어진 책임,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내게 주어진 모든 것 (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2025. 08.08 김찬선 신부님 강론글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면 될 일이고 자유롭지 아니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면서 ---
(1차:06:06)
나의 공동체(재속회 단위형제회, 구역모임)에서 나는 변화하자는 소견을 어디까지 말하고 행동(활동)하는 것이 적절하며 주님의 뜻일까?
(2차 추가: 06:12)
++ (예시 2)+++++++++++++++++++++++++++++++++++
저도 오늘 하루, 더 생각을 해볼 시간이 있을 때 더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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