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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을 사모하라
벧후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8-13 /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한가지만은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주께는 ㄱ)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ㄱ. 시90:4) 9) 비록 때로는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너무도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주께서 공연히 날짜를 연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는 단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죄인들이 모두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10) 주님의 날은 마치 도둑이 오는 것같이 생각지 않은 때에 옵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불에 타서 없어지고 땅과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타 버릴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녹아 버릴 것인데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만하지 않겠습니까! 12) 여러분은 그날이 하루 빨리 오도록 손꼽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고 천체는 녹아 없어지겠지만 13) 우리 앞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ㄴ)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만이 들어가 사는 곳입니다. (ㄴ. 사65:17(66:22,참조))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시간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지만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은 언제 재림이 있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심판을 유보하고 계신 것이라고 합니다.
더디 오시는 이유(8-9)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조급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에 대하여 혼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주안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닙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할 시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앞에서 거짓 선생들이 일부러 재림을 잊게 하려는 것과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을 초월해 계시며 일을 서두르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심판의 재림이 반드시 일어나며, 이후에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 이르는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면서 진리를 알 때 회개하게 됩니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방식입니다.
드러나는 것(10-13) 더딘 것 같이 느끼지만 재림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입니다. 생각하지 못한 날 주님이 도적같이 오시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 있다면 도적같이 오시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싸우고 미워했던 일, 죽였던 일도 드러납니다. 사랑도 희생도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드러날 뿐만 아니라 풀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이 사실을 배웠기에, 더욱 크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행실은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모든 삶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고, 형제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한 행실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에 경건한 자들에게 약속된 것을 구약성경으로 설명합니다(사 65:17-25; 66:22-23). 약속은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대홍수로 불경건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죄악된 세상을 새롭게 하셨듯이 재림하시는 날에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은 죄악된 세상과 피조물에게는 멸망과 재앙의 날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회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기억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사모한다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는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불안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비록 그 삶이 어렵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설 교 >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벧후 3:8-13 / 박종순 목사
우린 흔히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백번까지는 참는다는 뜻으로 百忍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백번까지는 참지만 백한번째 부터는 참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본래 인내라는 말은 휘포메노입니다. 그 뜻은 "밑에 머무르다. 견디다"라는 것입니다.
짓눌려 힘들고 괴롭고 어려워도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사람들은 참고 또 참아 백번까지는 참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만 하나님의 인내는 한이 없으십니다.
로마서 2:4을 보면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다"고 했고 로마서 9: 22를 보면 "오래 참으신다"고 했고 베드로 후서 3:9과 3:15를 보면 "오래 참으신다"고 했습니다. 오래라는 말의 뜻은 하나 둘 셋 넷 그 수를 셀 수 없도록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 사방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로마 정권이 기독교를 박해하자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로 흩어졌습니다. 터키 갑바도기아 지방에 가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 15층 땅굴을 파고 그 안에 교회를 만들고 신학교를 만들고 산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사도는 인내하라. 시험을 참으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박해 받는 성도들이 제기한 의문점은 왜 주님은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왜 주님은 빨리 다시 오시지 않으시는가? 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의문이 있습니다.
왜 악과 선이 공존하는가?
왜 하나님은 의와 불의가 공존하도록 방치하시는가?
왜 주님은 빨리 오시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 해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 씀 속에는 천년을 하루처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람의 기다림이나 인내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창세기 29장을 보면 야곱이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외삼촌 라반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둘째 딸인 라헬에게 첫눈에 끌렸습니다.
어느 날 외삼촌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라헬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고이 키운 라헬을 아무 댓가도 없이 줄 수 없다며 7년을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날부터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7년을 수일처럼 열심히 일했습니다. 창세기 29:20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언제 7년이 지났는지, 몇 일 지난 것 같은데 7년이 지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라헬을 향한 사랑, 기대,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7년 세월이 수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각이여 삼추」라는 말도 있습니다. 찰칵찰칵 지나가는 몇초시간이 길고 긴 가를 세 번을 합한 것처럼 길고 지루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하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천년이 하루처럼 짧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예배시간 길이는 1시간에서 2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예배를 피하는 여러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벌써 끝났군요 너무 예배시간이 짧습니다. 아니 어떻게 목사님 설교는 시작하자마자 끝이 납니까? 은혜속에 푹 빠지는가했더니 끝내시는 군요, 너무 아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신바람나고 일할 맛이 나고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끝나요?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요? 설교는 몇분하는 거예요? 왜 만날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해요? 밑천 떨어졌어요?"라며 몸을 꼬고 하품을 해대는 사람을 대하면 온몸의 힘이 빠지고 두다리가 후들거립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시간이 길든 짧든, 설교가 길든 짧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유는 끝날 때까지 내내 졸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인이 좋은 교인입니까? 예배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아깝고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7년 14년 21년도 하루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처럼 기다리시고 하루를 천년처럼 귀히 여기고 인내하십니다. 우리들의 약점은 너무 서두르고 급하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참는 것이 약합니다. 이태리 로마에 가면 120년 넘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습니다. 그 집은 오직 대를 물려 아이스크림만 만들어 팝니다. 영국에 가면 100년 넘게 소고기 스테이크만 파는 식당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양식당인데 예약이 외엔 손님도 받지 않습니다. 일본 도쿄에 가면 4대째 붕어빵만 만들어 파는 집이 있습니다. 붕어빵하나로 100년을 버텨 나왔다면 알아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고 기다리고 버티고 유지하고 지속하는 힘이 약합니다. 인간관계도 쉽게 친하고 쉽게 멀어집니다. 쉽게 가까워지고 쉽게 멀어집니다. 쉽게 친구가 되고 쉽게 원수가 됩니다. 7년을 수일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참고 기다립니다.
2.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9절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천년을 참으시고 이천년을 기다리십니까? 그것은 단 한 명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주님이 재림하셨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성격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된 후에도 그 성격대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도 자기 성격대로 제자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고 사랑을 만난 이후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화병에 꽂은 꽃을 오랫동안 싱싱하게 유지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 화병에 차가운 물대신 미지근한 물을 담을 것. 미지근한 물에는 줄기가 물을 흡수하는데 방해되는 기포가 적기 때문이고 미지근한 물은 봉오리가 개화되는 것을 촉진한다는 것입니다.
○ 물이 흡수하는 단면적이 넓어지도록 칼이나 가위로 줄기를 엇비슷하게 자를 것
○ 수면 아래 잎사귀는 모두 떼어낼 것
○ 탈수를 막기 위해 직사광선, 대형 가전제품 등으로부터 먼 곳에 화병을 놓을 것
○ 익은 과일이나 시든 꽃 가까이 화병을 두지 말 것, 시든 꽃 가까이 두면 그것들이 방출하는 에틸렌가스 때문에 꽃이 일찍 시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 장미의 가시를 제거하면 장미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든 꽃을 가까이 하면 싱싱한 꽃이 빨리 시든다" 깊이 음미할 교훈입니다. 신앙도 시들고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조급한 사람 곁에 있거나 그들과 교제하면 함께 빨리 시들어 버립니다. 어려워도 참고 힘들어도 투정부리지 않고 괴로워도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사람과 교제하고 가까이 하면 신앙이 발전하고 향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십니까?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이 말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어느 특정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까지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난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더나 향락의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는 몸만 더 난게 아니고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다 챙겨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극구 말렸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는 너 없이 못산다 사업이 정하고 싶으면 이 도시에서 해라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꺽지 않고 떠났고 얼마 못가 아버지가 염려했던 대로 주색잡기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 아들에게 부칠 대명사들이 있습니다. 폐륜아 불효자, 탕아, 철부지 나쁜놈, 아버지 가슴에 못 박은 놈" 등등.
그런 자식이라면 기다릴 가치도 없고 다시 받아줄 명분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낮이면 동구밖에 나와 기다립니다. 밤이면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립니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는 날 까지 기다립니다. 이 사건을 노래로 만든 찬송이 317장입니다. 전영택 선생이 가사를 만들고 박재호 목사님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집을 떠난 이유, 아버지를 떠난 이유는 상관이 없습니다. 집 떠나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했느냐도 상관이 없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집과 아버지를 떠났던 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실수 과오 과거를 다 용서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리고 거창한 환영식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하나님 떠나 죄짓고 고생하기 때문에 그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벼락을 때리고 호통을 치고 감옥에 가두고 청문회를 열어야 할 그런 나입니다만 사랑 때문에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아버지가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멍청이 녀석에게 똑같은 말을 스무번이나 되풀이 할 수 있소 인내심이 대단하구려"라고 말썽꾸러기, 말 안 듣는 아들을 계속 같은 말로 타이르는 자기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수산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 아이에게 열 아홉번만 말하고 그만둔다면 열아홉번 해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하나님의 인내는 거기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믿습니다.
우리도 참고 기다립시다.
인내로 우리의 구원을 이룹시다.
서론)
1. 대강절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강절이란 단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대강절은
대강절(待降節, Advent)은 대림절(待臨節) 혹은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하며, '왔음', 혹은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말로, 이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뜻합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전의 4주간을 가리키며, 세상에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앞서 그의 오심을 기념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2. 성경에는 끊임없는 두 가지의 기다림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약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라면, 신약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3.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는 작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서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퇴근 시간에 맞춰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기다림이 있고,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밤잠 설쳐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마음에도 성공을 향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4. 그런데 이런 기다림에도 기쁨과 행복으로 기다리는 사람과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곧 종말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피하고 싶은 끔찍한 기다림일 수 있습니다.
불행한 기다림은 이러 것들이죠. 갚을 길 없는 가난한 자가 빚 청산의 마감 날짜가되어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을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심한 통증을 견디며 초조하게 수술 시간을 맞이하는 그 기다림은 그 자체도 두려움입니 다. 사형 집행 시간을 맞이하는 사형수의 그 기다림도 그 자체가 절망입니다. 우리
본론)
가) 신앙은 곧 기다림이다
1.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면 참 많은 기다림의 이야기 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실 때, 처음으로 택하신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나이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살던 땅과 아비 친척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오랜 시간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100세가 되어서야 부르심을 입고 25년이 지나서야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리라는 약속의 씨앗 ‘이삭’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삭을 얻고 난 후에 400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큰 민족을 이루고 출애굽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홍해를 건넜지만, 광야에서 40년을 더 기다리며 훈련의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일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3. 어느 날 다윗은 양을 치다 말고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미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죠. 그런데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무명의 목동으로 자신의 양을 쳤고, 그가 장군이 된 후에는 시기하 는 왕 사울을 피해, 광야를 숨박꼭질하듯 도망치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윗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드디어 왕이 됩니다.
4. 문제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무척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세요.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쓸 때의 상황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당시는 박해시대입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 악인들이 흥하고, 죄가 판을 치는데도 심판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악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시간이 더욱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본문 9절을 보세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맞이한 대강절은 단순한 기다림의 의미도 있지만,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모두 서두름을 좋아하지만, 기다림은 많은 유익이 있을 뿐 아니라 깊은 뜻이 있기도 합니다. 서두름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나) 기다림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자.
1.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기다릴 대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상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바라보는 시간이기 때문이죠. 거기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의 말씀이 그런 의미일 것 같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라는 말은 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hope in the L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림이 새 힘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볼 때 희망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했어요. 그럼 기다림의 시간을 우리가 못 견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으로 날 수를 계산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온 우주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시간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주적 관점’곧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의 기다림이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시간만 보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기다림의 시간을 축복되게 하려면?
본문 10~13절입니다.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어요.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이들에게 이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A. D. 64년경에는 그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시기에 성도들은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언제 붙잡혀 화형을 당할지 사자 밥이 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로마의 카타콤에 가보면, 그 좁은 미로와 같은 지하 무덤에서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을 신앙을 지키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시간에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만, AD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크리스챤 들에게 해방과 감격이 찾아왔었습니다. 기다림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 날을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부족하지 않기 위해선 다음과 같이 준비하라 했습니다. 어떻게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그 날이 기다려지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대강절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경건’이라 하겠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성경의 원어 ‘유세베이아’에 대한 번역입니다.
‘유세베이아’에서 ‘유’는 영어의 ‘well'이라는 뜻이고, ‘세베이아’는 ‘섬긴다, 봉사한다’(serve)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건이란 “잘 섬긴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경건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고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입니다. 상당히 율법적인 사고입니다. 이러한 경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금욕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율법적 규범이 ‘경건’으로 이해되면서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금기를 만들었습니다.
왕년에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럼이나 기타 같은 것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교회에서는 뛰어다니거나 장난쳐서는 안 된다!”
“주일엔 물건을 사서는 안 된다!”“교회에서는 청년들이 연애를 하면 안 된다!”
얼핏 보면 맞는 말입니다. 경건을 율법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약1장 26~27절을 보면 참된 경건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1)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2)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먼저 악에서 떠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과 악한 말에서 떠나야 합니다. 인자와 자비를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웃과 기쁨을 나누고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예수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놀라운 사랑의 마음에 품고 실천하며, 그분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 바로 대강절의 요청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벧후 3:8-13 / 로마한인교회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 날인 28일을 Black Friday라고 부르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shopping season이 시작됩니다. 어느 때보다 심한 불황을 맞이한지라 지갑을 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shopping mall마다 세일 품목을 사려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댑니다. 달력을 보면 30일 밑에 대강절이라 적혀 있습니다. 영어로는 advent라 하는데 출현한다, 도래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4주전 일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오늘 우리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따라서 대강절은 성탄절을 앞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다면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8년도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을 ‘오실 메시야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이미 오신 메시야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세기의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을 가져주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 샬롬을 가져다 줄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예수님이 오셨는데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국가적인 환영의 행사를 벌였습니까? 그들의 대표적인 반응이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나 예수님의 탄생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의 변화를 관측하고 하늘의 징조를 찾다가 어느 날 밤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왕의 탄생의 징조로 알고, 별의 임자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박사들이 던지는 질문 때문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을 벌입니다.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기에 그 장소가 어디인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미가 선지의 예언을 기억하며 메시야의 탄생 장소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도 알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지식은 있었지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사실을 인하여 흥분하거나 그 분을 만나러 베들레헴에 가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공허한 지식이요, 그들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입니다. 메시야를 만나겠다는 열망이 없습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찾아 수만리를 왔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아기 예수를 향하여 한발자국도 떼지 않습니다. 아이의 탄생장소를 알게 된 헤롯이 이번에는 가만히 박사들을 부릅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그 아이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면 자기도 그 아이에게 찾아가서 경배를 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의 무덤덤한 반응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매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셨으나 그들은 끝내 거부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마 23:37) 하시면서 예수님은 장차 망할 예루살렘 성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정말로 주님을 영접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나의 왕으로 모시기를 원하십니까? 유대인들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 후서를 쓰게 된 동기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들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욕하고 비방하기보다 은밀하게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또한 그들의 특징은 호색과 탐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판단할 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마 7:15~16)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3:4)고 거짓 선생들이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시 온다고 하였는데 몇 십 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없으니 그런 것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재림을 부인하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내세에 대한 소망도 없어서 방탕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유혹에 넘어간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있다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바로 잡으려면 예수님의 재림을 믿게 만들고 재림을 근거로 바른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논박하고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재림을 근거로 방탕한 삶을 씻어버리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가르쳐줍니다.
본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틀렸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1)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사람의 시간 개념과 다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3:8)
우리에게 천년이 하나님에게는 하루와 같을 수도 있고 우리에게 하루가 하나님께는 천년과 같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재림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의 좁은 안목에서 비롯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내가 생각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따라서 재림을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달리 일이 진행된다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2)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3:9)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신다는 표현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기를 기다리시지만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믿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멸망치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림의 시기를 늦추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재림이 없다고 하며 구원에서 떨어지는 한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무서운 심판과 함께 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끝이 납니다. 심판을 통하여 악에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악을 제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니다.
재림의 날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교통위반으로 인한 티켓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하여 앞으로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이 아직 없었다고 재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재림이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도둑 같이 임한다고 합니다. 도둑이 올 때 미리 알려주고 오지 않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어올 지 미리 안다면 준비하여 피해를 막을 수 있지만 알지 못하기에 방심하다가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도 예상치 못할 때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 13:32)고 하셨습니다. 재림의 시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지도 않지만 알려고 하는 것도 월권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때 예수님은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전쟁이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박해를 많이 받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재림의 날을 미리 알지 못하게 하십니까? 사람들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나쁜 데는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는지 모릅니다. 재림의 날을 미리 알면 사람들은 그 날이 가까워올 때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림의 날을 몰라야 늘 영적 긴장 속에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고 바른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등불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1945년 8월 6일 Enola Gay라고 불리는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로 날아갔습니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가공할 무기중의 하나인 원자폭탄이 역사상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되려는 참이었습니다. 히로시마 상공에 이르자 B29 폭격기는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기수를 돌려 전속력으로 히로시마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순간 뜨거운 불덩어리가 강한 바람과 함께 사방으로 퍼지며 반경 2.4km 내에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승조원들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커다란 버섯구름이 히로시마로부터 하늘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주의 날에 있을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B29에서 떨어뜨린 원자폭탄 하나로 히로시마 시가 재로 변하고 말았으나 마지막 날에는 온 하늘이 불에 휩싸여 큰 소리로 순식간에 떠나 버리고 하늘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땅에 그 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릴 것입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모든 크고 웅장한 건축물들도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악이 관영하던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땅을 심판하셨는데 노아 때보다 더 패역한 마지막 때에는 불로 하늘과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도 이런 장면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사 13:13);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사 34:4);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욜 2:10)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현상이 있습니까?
1)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갑니다.
큰 토네이도가 오면 지축이 흔들리고 지붕이 날아가고 큰 소리가 납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격변이 일어납니다. 하늘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중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떠나가는 것은 새로운 상태가 되기 위함입니다. 하늘이 떠나가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을 의미합니다. 큰 소리로 떠나가는 것은 그 심판이 무섭고 엄청난 것임을 보여줍니다.
2)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집니다.
물질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새 하늘과 대응되고 물질은 새 땅과 대응됩니다. 따라서 물질은 땅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구약에 의하면 주의 날은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이요(욜 3:14~18), 대적들에게는 어두움과 패배의 날로 묘사됩니다(사 13:9~11).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구원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빠집니다. 재림 때에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재림 때에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납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알려줍니다.
1965년에 이민법이 개정된 이래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하여, 보다 나은 삶의 환경을 위하여 보다 나은 직장을 갖기 위하여 등등 저마다의 포부를 가지고 왔습니다. 미국이 보다 좋은 교육환경과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주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4.29 폭동생활에 회의를 갖기도 했고, 심한 지진이나 산불로 인하여 대피하기도 하였고,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이 아니요, 우리가 정착할 영원한 본향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언제까지 있는 것이 아니요 뒤집어질 때가 옵니다. 주님의 재림이 엄연한 사실로 다가오는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불로 인하여 다 없어질 텐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불에 넣어도 타지 않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뒤져 불 속에서도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왜 살아났는지 알면 우리도 살아나는 비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겠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왕의 앞에 불려와 심문을 당합니다. 왕이 마지막으로 제안합니다. 만약 이제라도 신상에 절을 한다면 살려 주겠다고 합니다. 비록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가운데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이 땅에서의 모든 영화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상에 절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절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쉬운 선택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 친구들에게는 목숨을 내건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다시 말하면 왕이 물어보나 마나 우리의 행동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입니다. 세 친구들은 더 감동적인 말을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겠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생각과 달리 혹시 풀무 불 가운데서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선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세 친구의 담대한 답변을 들은 왕은 자기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이들을 인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밉니다. 풀무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여 이들을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어찌나 그 불이 뜨거운지 곁에서 세 친구들을 붙잡고 가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세 친구들이 뜨거운 풀무 불 가운데 던짐을 받았는데도 그들이 살아났을 뿐 아니라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고 옷의 색깔도 변하지 않고 불탄 냄새조차 없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들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니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과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사 43:2).
비록 종말의 때에 심판이 일어나지만 파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회복은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1~13절)
베드로는 믿는 자들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표현합니다.(벧전 2:11) 그 이유는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더 좋은 세계, 즉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사모하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불 가운데 녹아져 버릴 것이기에 세상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에는 구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5에서도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헌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 기도, 말씀을 통하여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종말론 세미나도 좋고 종말론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지 생각하며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거룩한 삶과 경건한 삶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날이 속히 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개역개정판에는 ‘간절히 사모하라’로 번역되어 있으나 헬라어는 재촉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한 심령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재림이 더뎌지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성결의 삶을 힘쓸 때에 주님의 재림이 빨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에서 “나라이 임하옵시여”(마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종말에 관한 예언 중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성도들의 순종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으며,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 가운데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죄가 주장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만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 살게 될 성도들은 지금부터 그곳에 살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힘쓰면서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경건하게 살면 주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도록 힘을 쓰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어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평강으로 주님을 맞이하도록 의롭게 사는 것이 성도의 책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흠 없고 점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
1) 주 앞에 설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약속중의 하나입니다. 재림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고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확실한 것으로 믿는 자들은 심판에 대한 불안 때문이 아니라 회복에 대한 소망으로 주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세속적이며 불신앙적인 생활로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세는 거룩함과 경건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며 세상의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야 합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삶은 세상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있을 삶의 회계를 생각하면서 사명을 다합니다. 사업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가사를 돌보거나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지금이 구원의 때이므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2)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된다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문밖에 서서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원의 문을 열고 한 심령이라도 더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은혜의 기간을 연장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해야겠고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지 도리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의 꼬임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때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재림의 시기를 안다고 하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재림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재림에 대한 말씀에 거부반응을 보인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사단의 계략에 속아 사단의 도구가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재림을 무시 하는 것도 사단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겠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점차로 예수님을 본받게 되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오늘이나 내일이나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며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든지 평강 가운데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번 대강절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마음을 새롭게 하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베드로후서 3:8-13
설교내용 우리가 먼 나라를 비행기로 여행을 해 보면 도착지의 시간을 알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뉴욕을 가면 비행기 안에서 “현재 뉴욕은 기온이 몇 도, 습도가 몇 도, 현지 시간은 얼마입니다”라고 알려 줍니다. 그것은 여행자들이 목적지 시간에 맞추어 시계를 맞추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맞추고 여행을 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만약 시계를 맞추지 않고 현지에 도착을 하면 혼란이 일어납니다. 여행을 할 때는 그 목적지 시간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과거지향적입니다. 지난날의 실패, 고통, 손해본 일, 애석한 일에 집착을 많이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보는 사람, 오늘만 생각하는 이런 현실주의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우리 인생을 향하여 미래지향적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마지막을 늘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만, 과거만 되돌아보지 말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날을 늘 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끝을 보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이 영원히 머물 미래의 그 나라에 시간을 맞추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오늘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시간의 통치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24시간 살아야 합니다. 결코 이틀을 살 수 없고 내일을 미리 당겨서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다스립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다스리고, 천년을 하루처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천년을 걸려 이루어 놓은 일도 하나님은 하루만에 다 이루십니다. 우리가 해 놓은 하루의 일도 하나님은 천년동안 연기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고 시간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맞추어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시간을 그렇게 다루시는가? 그것은 전부 구원역사에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쓰시는가?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길이 길이 참으십니다. 왜 참습니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같이 참으신다고 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믿고 회개하는 것,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 복음의 구원역사,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다스리는 분입니다.
인간의 죄악을 보면 역사는 하루만에 끝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본다면 역사는 벌써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길이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을 시대를 탔고, 예수 믿을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면 우리 조상 적부터 벌써 멸망을 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구속사의 기다림
하나님의 기다림은 구원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참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이지만 언젠가 한번 이 땅에 도적같이 오십니다. 예고 없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하나님이 그 날에 오신다는 역사의 징조, 부름, 예언, 이 말씀을 새기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앞에 현실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도적같이 오기 때문에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날을 약속하고 그날을 예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징조로 보여 줍니다. 우리 가운데 계속 회개를 촉구합니다. 믿고 회개하라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구촌은 이상기후 때문에 큰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풍 매미를 만났지만 이것은 예년의 태풍하고 전혀 다른 형태였습니다. 예년의 태풍은 점점 세력이 약화되어 육지에 상륙하면 힘이 약해져서 빠져나가는 보통 태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태풍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육지에 상륙해서도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 힘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전문가들 이야기는 이상기후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 바닷물이 굉장히 기온이 높다고 합니다. 땅도 기온이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온이 높으면 태풍의 세력이 더 강해져서 비도 더 많이 옵니다.
지구촌에서 1년에 5도 이상의 지진이 1,400회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는 은총 받은 땅입니다. 5도 이상의 지진이 한번도 안 일어납니다. 만약 5도 이상의 지진이 우리 나라에 일어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5도 이상되는 지진이 일어나는 나라는 6도, 7도 지진도 납니다. 고도 지진이 6.5도에서 7.5도입니다. 6.5도만 되어도 교각이 무너지고 고속도로가 다 파괴되고 건물이 파괴됩니다. 만약 우리 나라에 6.5도 지진이 일어나면 고층아파트가 견디겠습니까? 지진을 대비해서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무너질 것입니다.
이번 태풍이 한반도를 흔들고 갔는데 하나님은 한 번씩 이 땅을 흔듭니다. 지진으로, 태풍으로, 전쟁으로 흔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을 흔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인간들의 영혼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태풍정도로 심판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늘이 떠나가고 체질이 녹아진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보이는 모든 만상들이, 이 산들과 바다와 땅이 전부 녹아져 버린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지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태풍은 국가적인 재난이라고 봅니다. 비, 바람, 해일, 이 삼박자가 맞아서 엄청난 재난을 가져왔습니다. 아마 수 조원 피해가 될 것입니다. 바다의 피해가 많습니다. 남해안 양식장이 다 망가졌습니다. 크고 작은 배가 수 만척이 파손되었습니다. 공장의 피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중소기업 기계들이 물에 잠겼습니다. 공장 침수가 극심합니다. 해안에 있는 도시가 망가진 것은 상상을 불허합니다. 저는 이번에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만약 이번 태풍이 부산이 아니라 서울을 강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도시일수록 피해가 많습니다. 무너질 가로수, 전봇대, 가로등, 축대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무너뜨리면 속수무책입니다.
그 날을 사모하라
인간은 끊임없이 지상천국을 꿈꿉니다. 암이 정복되는 나라, 끝없는 기술개발, 문명개발을 하고 사람들은 온갖 예술을 창작하고 이 땅에 지상천국을 세우려고 몸부림치지만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하나님 심판 앞에 전부 녹아지고, 풀어지고, 모두가 불타 없어질 것인데 인간들은 여기에 지상천국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의 말세교훈에서 이런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재난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당장 이 역사를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심판은 오늘도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이 죄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멈추어 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다스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심판이 오늘도 연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를 줍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 내일이라도 돈벌이 할 설교를 해 주세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막연한 설교 말고 손에 잡히는 설교를 해 주세요. 내 현실 보기도 벅찬데 무슨 새 하늘과 새 땅을 봅니까?”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반항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말씀은 교회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영화 100편을 봐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라는 메시지는 한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막연한 이야기입니까?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생명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 이 말은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언젠가는 옵니다. 도적같이 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그 심판날인 것 처럼 깨어 살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서는 내 생애 마지막 날로 인식하고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추석에 고향 가는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그렇게 가지 않습니다. 차림도 하고, 선물이나 용돈을 준비해서 고향 가는 기쁨을 안고 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가 오늘 주님 앞에 서는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졸 수 없습니다. 무책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오늘 주님을 뵙는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믿을 때에 우리는 깰 수 있고 정신차릴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 새 하늘과 새 땅은 먼 나라가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미래의 나라만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 안에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갈 기업으로 받을 하늘 나라의 그 영광은 오늘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백성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시민이기 때문에 오늘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시간과 질서와 그 나라의 영광을 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추상화에서 구체화로
돼지는 마지막에 가야 주인 앞에 소득을 줍니다. 돼지사육을 하는 사람들은 돼지를 팔 때까지 전혀 수입이 없습니다. 계속 먹이고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젖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젖을 내어 주인에게 소득을 줍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돼지처럼 하면 안됩니다. “목사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왕창 벌어서 한번 결정적으로 충성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런 부질없는 결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매일매일 우리 주님께 돌릴 영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매일매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주님 앞에 마지막 날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 때 보니 우리 나라 자동차 문화가 굉장합니다. 고속도로, 국도마다 자동차가 다 깔려 있습니다. 어마 어마합니다. 우리가 지금 좋은 차를 타며 살고 있는데 좋은 차를 탔다고 행복감을 가지고 차를 탑니까? 요즘 차 타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질적이며 차 타면서 그 기분을 모릅니다. 차 탈 때마다 기뻐해야 합니다.
IT기술이 온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신용카드가 얼마나 편리합니까? 현금인출, 대출 등은 IT산업의 부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신용카드를 사용했습니까? 10년 전만 해도 카드없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카드 한 장 없는 사람이 전부 서너 장씩 다 가지고 삽니다. 북한은 300만명이 굶어 죽어가고, 남한은 330만명이 신용불량자가 되어 목이 졸려 죽어갑니다. 왜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까? 쌀 사고, 보리쌀을 사기 위해서 카드를 사용했습니까? 다 사치하고 과소비하고 남 앞에 과시하려고 사용했습니다.
IT산업은 순기능도 많지만 역기능도 많습니다. 우린 지금 카드를 다스릴 줄 모릅니다. 승용차를 탈 자격이 없습니다. 자동차 에티켓이 없습니다. 차를 타면서 불친절하고, 접촉사고 나면 모두 폭탄으로 변합니다.
이번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북한의 선수단, 기자단, 응원단이 왔는데 아무리 봐도 비만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북한 땅에는 먹고 살찔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북한은 인민대회를 했습니다. 그 인민대회당에 모인 수 천명의 대의원들이 일어선 모습을 보니 한 사람도 비만에 걸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국회의원들 한번 보십시오. 학생들 보십시오. 우린 지금 먹는 것마다 비만에 걸립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병폐가 있습니다. 신앙을 관념화 혹은 추상화합니다. 오늘 우리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 찬송의 가사 속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습니다. 믿음, 사랑, 거룩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노래하고, 예수님을 노래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는 말들이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설교도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그렇게 우리 입으로 영원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믿음을 노래하는데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사랑이 관념화되어 버리고, 믿음이 추상화 되어버리는 모습 아닙니까?
미술의 장르 중에 추상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추상화 그림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그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추상화에는 종이 밖에 없었습니다. 추상화 그림의 제목은 ‘빵과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빵도 없고 아이도 없는데 제목이 빵과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설명을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이 그림의 제목이 빵과 아이인데 빵이 어디 있습니까?” “예, 아이들이 먹어 버렸기 때문에 빵이 없습니다” “그럼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빵 먹고 밖에 나가 놀았지요. 그러니까 아이도 없지요.” 그 백지 그림을 보고, 밑의 제목만 가지고 ‘아, 빵은 먹었으니까 없고, 아이는 빵 먹고 밖에 나가 없구나’라고 감상하는 것이 추상화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 신앙생활도 이럴 수 있습니다. 주일날은 우리가 다 노래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과연 오늘 내가 고백했던 그 사랑이 보여졌는가? 그 거룩이 내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히브리서 11장 1-2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실상은 보이는 것입니다. 증거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백했던 이 신앙고백은 추상화되면 안됩니다. 관념화되면 안됩니다. 머리 속에 인식하고 가슴에 느끼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이면서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의 열매가 보여져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만 그 열매가 가능한 줄 믿습니다. 땅만 본다고, 사람만 본다고, 현실만 본다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보여지는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실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증거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후서 3:8-13
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 이창호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성경을 보면 말세가 점점 가까워 올 때에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 여러 가지 징조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천하에 전파된 후에 재림이 있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복음이 다 전파되었는지 우리가 확정하기 힘들지만,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전파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둘째, 유대인이 회복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유대국이 一九四八년에 정치적으로 회복되었으나, 여기에 대해서도 조금 의심 있는 것은 종교적으로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는 큰 배교와 환난이 있겠다고 하였는데, 공산주의 운동과 같은 것은 큰 배교로 볼 수 있고, 원자탄의 전쟁이야말로 아마 큰 환난일 것입니다. 넷째는 적그리스도가 사방에 많이 일어나겠다고 하였는데, 보는 이의 견해는 그들과 다를 것이나 대체로 그럴 시기라고 봅니다. 다섯째는 전쟁과 지진이 겸해서 많이 일어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도 맞는 편이 많습니다.
하여간 해석에 따라서 각각 학자간의 의견이 다른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징조를 볼 때 전보다 말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그렇다면 온 세상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가까웠다 하는 말입니다.“
이상은 고 한경직목사님의 1954년 8월 1일 주일 설교(베드로 후서 三장 六-十三절, 원자시대와 신앙생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고 한경직목사님은 자신의 세대를 말세의 시대, 재림의 시대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2021년 9월3일 오늘은 어떻습니까? 1954년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징조들이 더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불과 2년 전만에 해도 어느 누구도 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해 인류의 삶이 이처럼 피폐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국가 간의 분쟁, 민족 간의 분쟁, 종교 간의 분쟁의 규모 역시 과거에 비하면 더 커졌습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자연 환경도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초기 기독교 시대에도 사도들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주님의 재림을 증거했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징조가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고, 주님도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비신앙인들은 물론 일부 크리스천들조차도 말세와 재림을 믿지 않고, 심지어 조롱합니다.
이같이 말세와 재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세상을 향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님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시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은 무엇인가요? 고대에는 시간을 천문학적인 개념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즉 해와 달이 뜨고 지고, 계절이 반복되는 주기적인 천체의 운동을 관찰함으로 시간을 발견했습니다. 뉴턴과 같은 과학자는 시간을 움직이는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면서, 시간은 절대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를 통해 ‘시간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살이 곤충은 유충으로 1-2년 정도 지내다가, 성충으로 우화한 후에 짝짓기를 하고 1~2일 정도 생존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루 또는 이틀의 시간이 성충이 된 하루살이에게는 평생입니다. 개나 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12~13년이라고 가정하면, 초등학교 4-5학년에 해당되는 11-12살의 개나 고양이에게는 인간으로 치면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는 시편 기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70~80년을 사는 인간의 시간과 하루살이 또는 개나 고양이의 시간은 동일하지 않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영원의 시간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70~80년을 사는 인간의 시간과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시간과 같을 수 없습니다. 100이라는 길이에서 80이라는 길이는 긴 선으로 표시되지만, 1,000이라는 길이에서는 짧은 선으로 표시될 것이며, 10,000이라는 길이에서는 한 점으로 표시됩니다. 사람에게 천년, 이천년은 매우 긴 시간이지만, 시간을 초월한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에게는 초보다도 짧은 ‘찰나(刹那)’라고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루살이 인생보다 못한 인간이 시간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때가 언제인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보다 우리의 시간을 주장하곤 합니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있고, 죄악에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탄식하는 우리를 향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하지만, 요나는 이를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며, 앗수르는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위하여 요나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선포하였고(욘 3:4), 그 결과 니느웨 왕과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재앙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욘 3:10).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이같은 주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래 참으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를 미루시면서까지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백성들이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셔서 그때까지 오래 참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때는 언제가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10)고 합니다.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노아의 홍수를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37-39)
노아 때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이미 경고하신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3절 말씀의 ‘말세를 조롱하는 사람들’처럼 방주를 만들고 있는 노아 가족을 조롱하며 세상이 영원할 것같이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조롱하면서 일상을 즐기며 살던 그들은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가장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시는 사건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사전에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고 도적같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저는 새벽에 잠에서 깨면 마음속으로 ‘하나님, 오늘이라는 하루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제가 있었고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을 당연히 맞이한다고 생각하고, 내일도 당연히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 같은 시간에 각자 다른 장소에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오늘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습니까.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의 손자인 에노스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날은 마치 죽음과도 같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죽음과도 같이 갑자기 도래할 ‘주님의 날은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10, 12)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한 불의한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지닌 신앙인은 주님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날에는 심판과 함께 세상은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13)’ 만물이 새로워지는 새 창조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이야 말로 변혁의 새로운 날이자 구원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날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11b~12a)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첫째로 거룩한, 즉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네피림과 같은 용사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인물인 노아를 택하셨습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부패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경건함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채움에서 비롯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을 결단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경건한 삶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이웃을 생각하고 타자를 돌보는 삶입니다. 경건한 삶은 물질 중심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실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고, 주어진 매순간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사는 것 같이 살아야 하며, 천년을 하루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루, 하루는 단절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영원에 잇대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오늘이라는 하루를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삶의 자리를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오래 참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에노스에 불과한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 전에 주님의 택하신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시간임을 깨닫고 허투루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가 영원에 잇대어지는 귀한 시간임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시간들로 채워가게 해주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삶의 자리에서 구현되는 경건한 나날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침묵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롭게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말을 8절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2. 주님의 약속이 더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3. 종말론적 신앙은 무엇인가요?
4. 우리가 견지해야할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5. 주님의 날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의 날이 오리니
벧후 3:8-13 / 민경수 목사
우리에게 올해 뿐만 아니라 매년 마지막 달과 날들이 있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창 1:14; 시 81:3) 우리 모두 자신의 날을 계산하시어 지혜로운 마음을 얻으시길 축원합니다! (시 90:12)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본문 8절).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을 압니다 (마 24:36). 그러나 그럼에도 주의 날은 도적같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본문 9절, 10절 전반).
이처럼 불식간에 찾아올 주의 날을 맞게 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 원하시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우리들이 회개하여 멸망치 않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9절 후반 “...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다 구원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어느 누구도 심판에 이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딤전 2:4). 결국 모두 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회개는 사망으로 이르는 길목에서 돌이키게 해줍니다. 우리 인생들 중에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할까요 (롬 3:10).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모두 용서받습니다. 멸망치 않습니다 (요1서 1:9).
반대로 회개치 않으면 영원한 불형벌에 처해집니다. 이는 하늘이 사라지고, 모든 체질, 즉 원소elements들이 불에 풀어져 멸망되는 주의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 후반-11절 전반; 12절 후반).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은 불심판의 모형이었습니다 (창 19:24-25). 우리 모두 지체치 말고 속히 회개하여 그 날에 심판받아 불로 멸망 당하지 않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들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1절 후반-12절 전반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은 원문에 의하면 두 개의 분사로 구성되었습니다. “바라보며 재촉하라”란 말로 직역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단지 경건한 자세로 아무 활동 없이 사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라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전도에 힘써 비신자가 회개하여 성결한 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이 주의 재림을 재촉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종족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선한 자는 심판날에 주의 상급을 받게 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그 날에 구원받고 상받을 수 있는 방도입니다. 경건은 내세와 금세에 유익합니다 (딤전 4:8; 계 19:6-8).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 갑니다.
본문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사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바라보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사도들은 온갖 고초를 감내하며 환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밧모섬에 유배되어 고초를 당했던 요한은, 장차 이뤄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고 환난 중에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증거했습니다 (계 1:2, 9). 그는 죄로 오염된 이 피조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새 세상이 도래하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계 21:1-22:5).
우리 모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며 재촉하는 역동적인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영생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연말을 맞이하여 올 한해 동안, 나아가 지난 시절 행악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이 세상과 함께 불로 멸망치 않도록 하십시다.
다가 오는 새해에 새롭게 보다 거룩하고 경건히 살기를 다짐하고 하나님의 날을 사모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며 새예루살렘성에서 영원히 사시게 되길 축원합니다.
주의 날은 더딘 것이 아닙니다. 주의 날은 도적같이 옵니다. 우리 모두 올 연말이 이렇게 빨리 확실하게 올 줄 알았습니까? 그러나 연말은 어김없이 닥쳤습니다.
모세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90:4)라고 고백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시간에 자신을 맞추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면 80년에 이르는 인간의 생명을(시 90:10) 가리켜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간법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말을 정리해 보내며 새해를 맞이하는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을 바라보며, 또한 이후에 펼쳐질 영원한 복된 새 날을 재촉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8-13 / 전병금 목사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천당에서 살고 싶습니까? 분당에서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당”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천당에 가겠지만, 이땅에서 사는 동안은 분당처럼 살기에 쾌적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곳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건설교통부장관이 수도권 지역에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발표한 직후, 그 후보지로 꼽힌 인천 검단, 파주, 화성 동탄 지역은 미분양 아파트가 동이나고, 집값이 크게 뛰었다고 합니다. 집을 팔려고 계약했던 사람들도 계약을 취소하는 사태가 속출하여 큰 혼란을 빚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돈이 된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눈에 불을 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의 자기의 육체와 세상에서만 자기 것을 투자하지,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질, 명예, 권력 만을 추구하다가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최후의 순간에 비참한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용이 없게 되는 그때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날”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날”이란 예수 재림의 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의 날을 두려움으로 바라봅니다. 적어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맞이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이렇게 좋은 아파트와 고급승용차를 놓고 어떻게 예수의 재림을 맞이하란 말인가’하고 그날이 좀 늦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날”이 두려워하거나 피하고 싶은 날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세상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상 이 “하나님의 날”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그날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1. 주의 재림은 확실합니다(9절)
최후의 심판이니, 예수의 재림이니 하는 말을 교회에서 하면, ‘오늘날처럼 첨단과학의 시대에 어찌 이런 허황된 이야기가 가능하냐’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또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 지금까지 이 우주 만물이 변함없이 존속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나 예수의 재림은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종교적인 공상일 뿐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경험과 이성을 중요시하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바뀌는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는 것처럼, 노아시대에는 큰 홍수가 나서 모든 인류와 동식물이 멸망을 당하고, 살아남은 노아 가족과 동식물을 시작으로 다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엽적으로 보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불로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유하신 뜻 안에서 이 세상에 종말을 고하시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벧후 2:9).
예수께서도 최후의 심판에 관해 여러 차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이밖에도 그 날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초대교회때 약속한 말씀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9절에서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는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기 때문에,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시간이 매우 긴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을 뿐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에 매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에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의 생애 사상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2. 그날에 대비하기 위해서 경건하게 살아야합니다(11절)
그런데 그 날이 언제 올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예수님께서는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인자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관심은 ‘그날이 언제냐’가 아니라, ‘그날을 어떻게 기다리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마 24:44)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날이 “도적같이” 닥친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날을 예비하고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 곧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이 오는데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좇아 살다가 어찌 그날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집으로 돌려 보낼 때, 환자가 정말 퇴원할 만큼 좋아졌는지 테스트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수돗물이 나오는 방에 미리 수돗물이 조금씩 흐르도록 수도꼭지를 조금 틀어 놓습니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습니다. 그러면 의사는 환자에게 걸레를 들고 물을 닦으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수돗물이 열려 새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도꼭지를 잠그고 바닥의 물을 닦습니다. 이런 사람은 퇴원을 시켜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수도꼭지를 내버려두고 방바닥만 부지런히 닦습니다. 바쁘게 바닥을 닦지만 그는 아직 퇴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도 아직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문제의 근원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케플러(Thomas Kepler)의 명저 “성자와의 여행(A Journey with Saints)에서 성서의 위인과 역사상 위인을 연구하면서, 훌륭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단순히 시간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훌륭한 인물들은 결코 서두르거나 바빠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애는 여유있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일도 하나님과 연결시켜 생각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하나님 틈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처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다가 그 날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3. 그날을 사모해야 합니다.(13절)
본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만, 땅에 매이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땅엣 것에 집착합니다. 땅엣 것에 집착을 갖게 되면 욕심을 갖게 됩니다. 이 욕심이 죄를 낳고, 사망을 낳습니다.(약 1:15).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상 것만 탐하게 됩니다. 14세기 벨기에의 황제인 레이몬드 3세는 친동생의 구테타로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구테타로 정권을 빼앗은 동생은 차마 형을 죽이지는 못하고 감방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감방은 특별히 설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몸집이 큰 사람은 빠져나올 수 없도록 작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대신 날씬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욕이 왕성한 레이몬드 3세는 뚱뚱해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체중을 줄일수만 있다면 여유있게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동생도 형이 그 감옥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감옥에 갇힌 레이몬드 3세는 먹는 것을 절제하고 다이어트만 잘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형이 다이어트를 하지 못하도록 매일 그 감방에 온갖 맛있는 음식을 들여보냈습니다. 레이몬드 3세는 갈수록 더 뚱뚱해졌습니다. 맛있는 음식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레이몬드 3세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철창의 포로가 아니라 식욕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이 레이몬드 3세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스스로의 욕심에 끌려다니며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보다, 오늘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맛있는 음식이나 먹고 보자는 식으로, 자신의 유익과 세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그날을 기다리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이 없도록 그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약성경과 유대 묵시문학에 나타나며 신약성경에서도 받아들여져 나타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새롭게 창조되어 새로와지고 완전해짐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날'이 죄악된 세상과 피조물에 대해서는 멸망과 재앙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악과 세상의 고난을 도말하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임을 기억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에게 미혹되어 방종하는 삶을 지양하고,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답게 모든 것에 초월하여,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의 기준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빈손으로 떠나야 할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찾아오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무책임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가운데,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곧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일 것입니다.
약속의 날을 준비하는 성도
벧후 3:8-14
지난 5월 29일은 ‘예수 승천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이 땅에서 40일간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지 40일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9-11절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들려 올라 가십니다. 그리고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워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보기 위해서 하늘을 자세히 주시합니다. 그러던 중에,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셨습니다.
올 해 2월에 “Son of God” 라는 성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사도 요한의 시각에서 그린 영화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함께 단체관람을 했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I am coming soon”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인 22:20절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 “내가 진실로 속히 외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보는 이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곧 재림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믿는 자들은, 곧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으면, 사람들로서는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계획하셨고, 이러한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을 알고, 기대하며 그 날을 기다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고, 어떠한 모습으로 이날을 맞이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시는지, 한번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날이 가까이 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날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을 말씀하고 있고, 곧 그 날은 세상의 종말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땅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예수님의 재림과 이 땅의 종말이 더욱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과는 반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지금까지 종말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안주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에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격했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직접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이 되면서, 재림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그대로 있는데 언제 주의 재림이 있겠냐"며 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날이 지연되니까 그 약속자체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데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의 시간대와 하나님의 시간대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간대를 잊고 삽니다. 사람들은 시간 안에 갇혀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그 시간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의 시간속에서 파악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대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산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돈이 무척이나 필요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 사람은 너무 기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 달러가 백만달러 갔고, 백만달러가 일달러같으시겠네요? 그러니, 하나님 저에게 제발 일달러만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 알았다. 일 달러를 줄 테니 하루만 기다려라” 하시더랍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시간에 얽매이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시간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때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그 재림의 때를 지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재림에 무관심하며, 불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지만 반드시 주의 약속하신 재림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놓고서 그 시기에 관심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36절에, 이미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절에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시간대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는 계획하신 그 때에, 주님의 재림은 도적과 같이 이 땅에 임할 줄로 저와 여러분은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갈수록 주님의 날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신 이유
그것은 주의 날이 임할 때에 주님을 만날 것을 잘 준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재림의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야 할지에 대해서 관심하고 계신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주님 앞에 설 것인가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까?
먼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1) 주님은 우리가 거룩한 행실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행실은, 세상의 악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하나님께 헌신된 생활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그 행실에 있어서 당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죄된 생각을 버리고, 죄 된 말과 행동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세상의 죄악된 것으로부터 나를 구별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0:26절에,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의 특징은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세상으로부터 부르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행실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거룩한 행실은, 세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과 구별되어서 하나님을 닮아갈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경건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경건함이라고 한다면, 매 순간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위하여서 힘을 씁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중요하게 여기며 기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하며, 우리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경건한 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속에서 있다가, 주의 약속하신 날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를 무척이나 관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좀 더 거룩해져 가기를 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더 친밀하며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주 앞에서 정결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성도가 힘써야 할 것이 있는데, 14절에,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다이아몬드는 4C로 그 가치를 평가한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캐럿(Carat) 무게, 두번째는 칼라(Color)색깔, 세번째는 컷(Cut) 어떻게 자르냐이고, 네번째는 클래러티(Clarity) 투명도입니다. 다이아몬드 안에 티가 많고 투명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가 얼마나 점도 없고 흠이 없는지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많은 점과 흠이 있습니까? 더러운 죄의 파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속에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우리의 말속에 얼마나 악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모습들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러한 점과 흠이 해결함을 받기를 원합니다. 정결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점과 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끌이 아니라, 내 눈속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숨겨서는 안됩니다. 무감각해서도 안됩니다. 나를 하나님과 불화하게 만드는 그것을 주님 앞에 놓고, 통회하면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죄된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주님 앞에 온전하게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을 때에, 평강의 모습으로 그 앞에 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승천하실 때에,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재림할 것과 그 때에 세상의 끝을 경험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함께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어리석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지금까지 재림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방종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치 않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계시는 것인데 도리어 재림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참으시는 이 은혜의 기간에 더욱 더 구원의 사업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약속하신 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도적과 같이 오듯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주님의 오심도 도적과 같이 오는 것입니다.
실종된 말레이시아 항공기에 탔던 239명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오실지를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월호에 탔던 그 많은 학생들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주님을 만나러 가야할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그 여행을 마치고 가족을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앞으로의 인생의 스케쥴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갑자기 주님이 오셨고, 그분을 만나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고 불러가시면 하던 일 모두 멈추고 하나님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언제 죽을지는 모르고 도적과 같이 임할 주님과 만날 때를 살아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도적같이 임하실 주님과의 만남의 날을 사모하시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모습으로, 그리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우리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힘쓸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