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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列國誌] 836
■ 3부 일통 천하 (159)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18장 장평(長平) 전투 (1)
모든 은원(恩怨) 관계를 청산한 범수(范睢)는 본격적으로 천하 통일을 위한 정책을 펴나갔다.
일찍이 진소양왕과의 첫 대면에서 아뢴 바 있는, 소위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 멀리 떨어진 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
범수(范睢)는 먼저 원교(遠交) 정책을 추진했다.첫번째 대상은 동방의 대국이라 불리는
제(齊)나라였다.그러나 무턱대고 제나라에 친교를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제(齊)나라의 힘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범수(范睢)는 관중에 버금가는 천하 기재
(天下奇才)로 평가받는 사람이다.다소 재미난 방법으로 제나라의 힘을 측정했다.
- 제나라 태후에게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보내라.
그 무렵, 제(齊)나라는 제양왕이 이렇다 할 공적을 남기지 못하고 재위 19년 만에 죽고 그 아들
건(建)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결과부터 말하면 그는 시호(諡號)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대(代)에
제나라는 멸망했으므로, 다시 말해 건(建)은 제(齊)나라의 마지막 왕이 되는 것이다.
건이 왕위에 오른 해는 BC 264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43년 전의 일이다.
제왕(齊王) 건(建)의 어머니는 태사씨(太史氏)다.앞서 얘기했듯이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침공했을 때 당시의 세자인 법장(法章)은 '태사(太史) 교'의 집에 숨어지냈다.
그때 법장(法章)은 태사 교의 딸과 연애하여 결국 그녀를 왕후로까지 맞이했다.
그 왕후가 바로 태사씨인 것이다.아버지가 태사 벼슬을 했다 하여 태사씨(太史氏)라 불린다.
제왕 건(建)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나이가 스물이 채 안되었다.
자연스럽게 태후인 태사씨가 섭정을 맡았다.그런데 태후 태사씨(太史氏)는 연애 시절에
먼저 법장에게 다가갔듯이 성격이 적극적이고 대범하고 지혜로왔다.
이 소문을 진나라 승상 범수(范睢)가 들은 것이었다.
- 제(齊)나라 태후에게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보내라.
라고 명한 것은 바로 제나라 섭정인 태사씨(太史氏)의 지혜와 담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진(秦)나라 사신이 임치에 당도하여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태후 태사씨(太史氏)에게 바쳤다.
그런데 그 목걸이의 줄이 이상했다.이음새가 없는 것이다.풀고 싶어도 풀 수가 없었다.
바로 그것이 범수(范睢)가 낸 수수께끼였다.진나라 사신은 옥 목걸이를 바치며 말했다.
"이 목걸이의 줄을 푸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진(秦)나라는 제(齊)나라를 공경하겠습니다."
좌우 신하들이 기를 쓰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풀지 못했다.
그러자 태후 태사씨(太史氏)가 나서며 외쳤다."내가 능히 그 줄을 풀리라!"
그러고는 시종에게 명하였다."망치를 가져오너라."시종이 망치를 가져오자 태후 태사씨(太史氏)는
그것을 받아들고 귀한 옥 목걸이의 줄을 내리쳤다. 목걸이 줄은 단번에 끊어졌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라리며 진(秦)나라 사신에게 외쳤다.
"그대는 함양으로 돌아가 진왕에게 아뢰어라. 내가 이미 그 줄을 끊었다고!"
기가 질린 진(秦)나라 사신은 머리를 싸매고 함양으로 돌아와 진소양왕과 범수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
범수(范睢)가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다."제나라 섭정 태후는 과연 여걸(女傑)중의 여걸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齊)나라와는 친밀하게 지내야 합니다. 예정대로 성대한 사절단을 임치로
보내십시오."이렇게 해서 진나라와 제나라 사이에는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음은 초(楚)나라입니다."범수(范睢)는 진소양왕의 재가를 얻자마자 친선 사절을 초나라로 보냈다.
국력이 약화된 초나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초경양왕은 즉각 주영(朱英)이라는 신하를
함양으로 보내 친선 조약을 맺는 한편, 진소양왕에게 호소했다.
- 과인은 나이가 들어 병상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바라건대 함양성에 머물러 있는
우리 나라의 세자를 돌려주시기 바랍니다.그랬다.
당시 진나라 함양에는 초나라의 세자 웅완(雄完)이 인질로 머물고 있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이 한창 무력 정책을 펼 때 초경양왕은 그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수도를 진현
(陳縣, 지금의 회양)으로 옮기는 한편 세자 웅완과 태부 황헐(黃歇)을 진나라에 볼모로 바친 적이
있었다.그 뒤 14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웅완(雄完)과 황헐(黃歇)은 함양성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에 대해 진소양왕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주었다.
- 그대의 병세가 더 악화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이런 말이 오간 것을 인질생활 중인 초나라 태부 황헐이 알게 되었다.
황헐(黃歇)은 지혜롭기가 범수 못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함양을 떠나지 못하면 세자와 나는 영영 초(楚)나라로 돌아갈 길이 막히고 만다.'
이렇게 직감한 황헐(黃歇)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여 승상 범수를 찾아가 부탁했다.
다행히 범수(范睢)는 세자 웅완을 매우 좋게 보고 있었다.
"듣자하니 승상께서는 우리 세자와 친교가 두텁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요?"
범수(范睢)가 대답했다."그렇소. 나는 웅완 세자를 존경하오.""그렇다면 승상께 부탁이 있습니다.
승상(丞相)도 아시다시피 우리 왕께서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계시오. 만일 지금 세자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초(楚)나라 조정은 다른 공자를 초나라 왕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우리 세자는 불행에 빠질 뿐 아니라 초(楚)나라 또한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진(秦)나라를 위해서도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승상께서는 우리 세자가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써주십시오."범수(范睢)는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병이란 일시적일 수도 있소. 정히 세자 일이 염려된다면 우선 그대가 먼저 초(楚)나라로 가
초왕의 병세를 확인해 보시오. 정말로 병이 위독하면 그때 가서 세자를 데려가면 될 것 아니겠소?"
황헐(黃歇)은 범수가 자신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자 다음 계책을 꾸몄다.
세자 웅완(雄完)을 찾아가 속삭였다."세자께서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초(楚)나라 땅을 밟을 수 없습니다. 마침 우호 조약을 맺은 직후라 세자에 대한 감시가 소홀하니,
이 틈을 타 초나라에서 온 사신 주영(朱英)의 마부로 변장하여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여기에 남아 뒷일을 감당하겠습니다."이를테면 탈출이었다.
황헐의 계책을 들은 세자 웅완(雄完)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무사히 돌아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그대와 함께 초(楚)나라를 다스리겠소."
그 날부터 세자 웅완(雄完)의 숙소는 은밀한 가운데 분주히 움직였다.
초나라에 온 사신 주영(朱英)과도 부리나케 연락을 취했다.
837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37
■ 3부 일통 천하 (160)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18장 장평(長平) 전투 (2)
이윽고 초(楚)나라에서 온 사신 주영(朱英) 일행이 돌아가는 날, 세자 웅완(雄完)은 마부로 변장하여
수레에 올라탔다.진(秦)나라 사람은 물론 초(楚)나라 사신 일행 중에서도 주영 외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 날부터 황헐(黃歇)은 병을 핑계삼아 일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매일 방 안에 틀어박혀 세자의 여정을 계산하던 황헐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함곡관을 벗어나 초(楚)나라 땅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궁으로 들어간 황헐(黃歇)은 진소양왕을 알현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대는 어찌하여 죄수복을 입고 들어왔는가?"
황헐(黃歇)이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외신(外臣) 황헐을 죽여주십시오."".................?"
"저는 대왕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사실을 아룁니다. 초나라 세자 웅완(雄完)은 이미 함곡관을 벗어나
멀리 달아났습니다.""이 모든 것은 신이 꾸민 일입니다. 이에 신은 대왕 앞에 나와 탕확(湯鑊)의
형벌을 청하는 것입니다."진소양왕(秦昭襄王)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인질의 탈출은 곧 동맹 파기요, 배신인 것이다.진소양왕(秦昭襄王)은 이마에 힘줄을 돋우어가며
소리쳤다."여봐라, 저자를 당장 끓는 물 속에 처넣어라!"
좌우 무사들이 황헐에게로 달려드는데 승상 범수가 황급하게 뛰어들어왔다.
"대왕께서는 잠시 신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왕께서는 어찌하여 충성된 신하를 죽이시려 하십니까? 황헐(黃歇)의 주군은 초나라 세자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 섬기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범수의 외침에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주춤하며 물었다."승상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게요?"
범수는 황헐을 흘깃 돌아다본 후 진소양왕 가까이 다가가 빠르게 속삭였다.
"어차피 웅완(雄完)은 달아난 몸입니다. 그는 돌아가면 얼마후 초나라 왕위에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황헐(黃歇)은 웅완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입니다.""그를 살려 보내면
웅완(雄完)은 황헐을 영윤으로 삼아 국정을 맡길 것입니다. 대왕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이 두 사람이 머지않아 초(楚)나라 국정을 장악하게 되는데, 왕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방해하려
하십니까? 대왕은 원교근공책을 잊으셨습니까?"
순간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머리속으로 섬광 같은 빛줄기가 스쳐감을 느꼈다.거짓말처럼
노여움이 풀어지고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승상의 말이 옳소. 황헐(黃歇)은 천고의 충신이오.
내 어찌 그런 충신을 죽여 악명을 후세에 남기리오. 황헐은 들으라, 그대는 초(楚)나라로 돌아가
세자를 잘 섬기도록 하라."이리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다가 목숨을 구한 황헐(黃歇)은 오히려
진소양왕으로부터 많은 예물을 받은 후 함양성을 나와 초(楚)나라를 향해 떠나갔다.
이윽고 황헐(黃歇)은 초나라 도읍인 진현(陳縣)에 당도했다.BC 263년(진소양왕 44년)의 일이었다.
- 14년 만의 귀국.
감회가 새로웠다.물론 그보다 한 달 전에 세자 웅완(雄完)은 초나라에 돌아와 있었다.
황헐(黃歇)이 돌아온 지 석 달이 지났을 때 초경양왕이 세상을 떠났다.재위 36년.돌아보면
초(楚)나라가 패권 경쟁에서 진나라에 밀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초경양왕 때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반진파(反秦派)가 친진파(親秦派)에 밀려 굴원 등이 파직당하면서부터 초나라는 이미
초강대국의 면모를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초경양왕에 이어 넉 달 전 함양에서 탈출해온 세자
웅완(雄完)이 왕위에 올랐다.그가 초고열왕이다.
초고열왕(楚考烈王)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인 황헐(黃歇)을 영윤으로 발탁했다.
동시에 군호를 내려 춘신군(春申君)에 봉하고, 회수 이북 12개현을 봉토로 내주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춘신군(春申君)은,- 회수(澮水) 이북 지역은 제나라 국경과 인접해 있어
국방상 몹시 중요한 곳입니다.바라건대 그 곳은 왕께서 친히 통치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고는
회수 이북 12개현을 반납했다.이에 초고열왕(楚考烈王)은 옛 오나라 영토인 강동 오허를
춘신군에게 내려 봉읍으로 삼게 했다.오허(吳墟)는 곧 오나라 도읍인 오성(吳城)으로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 일대다.이때부터 춘신군(春申君)은 오(吳) 땅에 자신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전국시대에는 천하에 명망을 떨치며 군주에 필적하는 권세를 갖고 국내외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 네 명의 뛰어난 호걸(豪傑)이 있었다.이른바 전국사군(戰國四君)이다.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그리고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이 그들인데, 이 무렵 초나라 영윤으로 등용된 황헐(黃歇)이 바로 그 춘신군인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등은 모두 왕족으로서 막강한 기반을 닦은 반면,
춘신군(春申君)만은 왕족이 아닌 신하의 신분으로서 전국사군(戰國四君)의 반열에 끼였다는 점이다.
이 한가지로 봐도 그의 재능과 배짱과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춘신군 황헐(黃歇)은 영윤에 오르자마자,- 사람이 곧 힘이다.
라고 선언하고는 천하 각지의 선비들을 초빙해 극진히 대접하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대우가 어찌나 극진했던지 5년이 안 돼 춘신군의 저택에는 3천 명이 넘는 식객들이
머물며 그를 보좌했다.춘신군(春申君)은 문객들이 제안하는 정책들을 뽑고 뽑아 국정에 반영했다.
군사 부문에도 관심을 기울여 정예군을 수십만 명이나 양성했다.
이때부터 초(楚)나라는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제ㆍ초나라와 우호 협정을 다진 진소양왕과 범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근공(近攻)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가까운 나라부터 친다.바야흐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한(韓)나라를 공격했다.한나라는 진나라와 인접해 있을 뿐아니라 국력이 가장 약했다.
진소양왕의 한나라에 대한 공략은 집요했다.BC 263년에는 진나라 최고의 명장 백기(白起)를 보내
황하 이북의 남양 땅과 태항산 일대를 점거해 중원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그 이듬해인 BC 262년(진소양왕 45년)에는 좌서장 왕흘(王齕)을 보내 야왕을 점령했다.
야왕(野王)은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 일대로 교통의 요충지다.
이 때문에 한(韓)나라는 황하 이북의 상당지역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당하고 말았다.
상당(上黨)은 한나라 영토로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 일대다.한나라 영토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넓은 곳이었다.이때 상당 땅을 지키고 있던 수장은 풍정(馮亭)이라는 사람이었다.
풍정은 한나라 도읍인 남정(南鄭)과 연락이 두절되어 외따로이 고립되자 즉각 조(趙)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투항을 요청했다.- 상당(上黨) 땅을 조나라에 바치고자 합니다.
풍정(馮亭)이 이러한 결단을 내린 데에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조나라를 끌어들임으로써 진나라의 공세를 막아보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조(趙)나라는 조효성왕 재위 4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83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