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 과 소현세자[昭顯世子]
(광해군 4)∼1645(인조 23). 조선 후기의 왕자. 이름은 왕(0x9C2C).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 (仁烈王后)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에 참의(參議)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 : 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자의 덕을 닦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그를 막으려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644년 9월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J.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하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과 함께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듯하다.
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과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지웠다. 또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위로 인조에게 친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게다가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 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 : 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 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자는 9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 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그는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 같은 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 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 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인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다.
사후 소현(昭顯)으로 증시(贈諡)되었으며, 이식(李植)이 그의 묘지(墓誌)를 썼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했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
▶ 소현세자의 볼모 생활
인조 15년(1637) 정월 30일 조선 국왕 이종이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한 후, 소현세자는 그대로 청 진영에 들어갔다가 2월 5일 돌아왔다. 돌아온 지 3일 후인 2월 8일 예친왕 도르곤에게 인도되어 회군하는 청군을 따라 북행하게 되었다. 일행은 세자와 세자빈 강씨(姜氏),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남이웅(南以雄) 이하 관원 180명이었다.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 10일이었고, 인조 23년(1645) 2월 영구 귀국하기까지 거의 8년을 심양에 머물렀다. 그는 약 1개월씩 2번(1640. 3~4, 1643. 1~2)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중요한 시기를 인질로서 생활했다.
세자는 심양에 도착해서는 한때 조선사신 접대관인 동관(東館)에 거주하다가 5월 7일 준공된 심양관소로 옮겼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출입의 제한은 받았으나 그 이외 큰 불편은 없었다. 세자는 청과 조선간의 현안을 중재해 갔으나 양측으로부터 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초기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청 태종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청은 친선도모를 위해 각종 제사, 몽고부족들의 조공, 명나라 장군의 투항으로 인한 회합에 세자와 봉림대군을 반드시 참석시키고, 또한 매월 5일․15일․20일의 왕이나 장군의 황제에 대한 조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시켰다. 이러한 의례적인 행사에는 청 조정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이는 기회였으므로 세자를 청이 매우 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예친왕 도르곤을 비롯한 청의 왕족은 세자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푸는 등 인간적인 친숙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청과 조선 사이의 현안은 주로 명 공격을 위한 조선의 원병, 식량지원, 그리고 여진족으로 조선인과 결혼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자들의 송환문제였다(인구가 적은 청은 인구 확보에 애를 썼다). 이런 문제에 대해 세자는 자신이 조선의 국정에 간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회피하였다. 세자와 비교적 친숙하였던 영친왕 아지거는 “황제가 무슨 일을 분부할 때마다 세자는 무릇 임의로 혼자 결정할 수 없고 다만 본국에 전보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나, 이후 만약 황제의 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알고 좋게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세자의 독자적 결정이 어려웠던 이유는 부왕과의 관계였다. 이종은 청 조정과 친숙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청이 요구할까 두려워했다. 세자의 미지근한 태도는 부왕의 심정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자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세자가 주로 접촉하였던 인물은 영친왕(英親王) 아지거(阿濟格 ; 누르하치의 12子),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 ; 누르하치의 2子),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 누르하치의 14子),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 누르하치의 15子)와 용골대였다. 특히 당시 누구보다 실권자였고 청 태종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은 도르곤과의 친교로 세자의 심양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세자의 권한이 늘고 또 청에 우호적으로 되어가자 이종의 경계는 심해졌다. 세자는 청이 중국을 차지할만한 자격이 있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자는 명을 정벌하는 원정에 2번 참여하였다. 1회는 1641년 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금주와 송산 정벌에 출정한 것이었고 1644년에는 예친왕 도르곤이 지휘하는 명 정벌군을 따라 5월 2일 북경에 입성하였다. 세자는 20여 일만에 심양으로 귀환했다가 9월에 다시 북경에 가서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1644. 9. 19~ 11. 26).
▶소경원 (紹慶園 )
소경원 (紹慶園): 인조의 자 소현세자의 묘
사적 제 200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무덤인 희릉과 인종의 부인 인성왕후 박씨의 무덤인 효릉이 들어서면서 왕실묘지가 된곳이며 이후 주변에 후궁이나 대군 공주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철종과 그의 부인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들어 오면서 서삼릉이 되었으며 서삼릉의 경내에는 3원과 46묘 태실 54기가 있는데 3원중 가장 처음으로 들어선 소경원은 소현세자의 무덤이고 의녕원은 의소세손의 무덤이며 효창원은 문효세자의 무덤이고 묘는 46기가 있는데 이중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묘인 회묘와 경선군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 있다
왕릉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무덤을 만들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을 집중관리 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 놓은것으로 서삼릉의 영역에 후궁 왕자 태실을 모아놓은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 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 존엄과 뭄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것이었다
소현세자(1612~1645) 의 휘는 왕 시호는 소현紹顯이며 인조대왕의 맏아들 이며 인열왕후人烈王后 한씨 소생이며 빈은 우의정 강석기 姜碩期 의 딸 민회빈 愍懷嬪 1625년 인조3년 에 세자로 책봉 16276년 인조 5년 정묘호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소현세자는 봉림대군 鳳林大君 孝宗 과 함께 청나라의 심양으로 볼모가 되어가서 몽고말도 배우고 서역원장 西域遠征에 출전도 하였다
부왕 인조의 노력으로 귀국할때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 친밀하여 천문 과학에 관한 서양의 문물과 성교정도 聖敎正道 에 관한 많은 번역서적. 지구의 地球儀.천주상 天主像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으나 귀국후 2개월만에 병사하였고 서적들도 불살라져서 모처럼 천주교 전래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으며 소현세자가 8년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돌아올때 청 태종에게 하직인사를 하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소현세자는 청 태종 어전에 있는 벼루 용연 龍硯을 달라 하고 봉림대군은 포로로 잡혀가있는 조선 본국인을 달라 하였다 이에 청태종이 두왕자의 소원을 들어 주었는데 귀국후 인조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세자를 불러 대노하여 용연을 세자에게 던져 그것에 맞아 병이들어 소현세자가 별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1645년 (인조 23년)에 세자와 세자빈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조소용 趙昭容과 반목이 생겨 싸우던중 세자가 죽자 이것을 기회로 조소용은 세자를 강빈이 죽였다고 무고하고 왕실을 저주한다고 하여 강빈은 후원에 유치 幽置되었다가 1646년(인조24년) 3월에 사사되었으며 1647년(인조 25년)5월에 강빈사건 姜嬪事件이 다시 문제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전부 제주도로 귀양 보내졌고 그때 장자 석철 石鐵은 12세 차남 석림 石麟은 8세 3남 석견石堅은 4세로 정언황 丁彦璜등이 상소하여 부당함을 말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이 세아들이 바로 경선군 慶善君 백栢1636~1654.경완군 慶完君석린 石麟1644~1654.경안군 慶安君 회檜1644~1665 이며 경선군과 경안군은 아명을 나중에 고쳤고 경선군은 혼인도 하지 못하고 19세에 별세하여 아우 경안군의 차남 임성군 臨君황1665~1690을 계자로 맞이했으나 26세나 살았지만 무사하여 형 임창군 臨昌君 흔 1663~1729 의 차남 밀남군 密南君 감堪1689~1750 을 계자로 삼아 장손파가 이어 내려왔다
소현세자의 차남 경완군 석린은 귀양시 제주도에서 11세로 죽어 후사가 없고 셋째 경안군 회는 소현세자가 인질로 붙들려가 있던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나 1647년 인조25년 5월에 8세의 어린나이로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효종때 석방되어 돌아와 복작되어 승헌대부 承憲大夫에 이르렀고 경안군이 아들을 둘을 낳아 큰집으로 양자로 보냈으니 소현세자파는 실제적으로 경안군의 혈손들이이어서 경안군의 장손 밀풍군 密豊君 탄 坦1698~1729 이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죽음을 당하게 된것이다
소현세자파에서는 문과급제자로 재영 載英1830~1870 과 필용 弼鎔1848~?이 있고 기타 무과출신과 참봉 약간이 있을정도로 밀풍군 사건으로 후손들이 몰살되다시피 되어 약세의 파종으로 남아 있다
<참고>조선왕조실록
1645년(인조23년)6월27일 기록에 이렇게 적혀잇는데 소현세자의 졸곡제 卒哭祭를 행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지 얼마안되 병을 얻었고 병이난지 수일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얼굴 반쪽만 덮어놓아 곁에있는 사람도 그얼굴빛을 분별할수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는데 그 사실을 외인 外人들은 아는자가 없었고 임금도 알지못했으며 당시 종친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는 곧 인렬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 庶弟였기 때문에 이세완이 내척 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이상한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것이다
9년여의 볼모생활을 한뒤 귀국한세자가 두달후인 4월23일 몸이 아프다고 하여 어의박군이 진찰한결과 학질로 진단하였는데 내의원의 의원도 아닌 이형익이라는 의원을 불러 학질을 치료한다고 침을 놓도록 하였고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침을 맞고 26일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것이다
소현세자는 선조와 인빈 김시 사이에 태어난 왕자 정원군(뒤에 원종으로 추존됨) 의 장남인 능양군(훗날의 인조)의 큰아들이었으며 광해군이 그대로 왕위를 보존했다면 소현세자는 평범한 왕족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처지였는데 인조반정이 성공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갑자기 임금이 되었고 자기도 얼떨결에 임금의 첫째 왕자로 신분이 바뀌어서 14세에는 제자가 됨으로서 다음왕위를 이어받을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조가 항복하고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9년동안 청나라의 강대함을 보았고 또 나중에는 북경에 가서 서양사람들도 만나보고 세상 돌아가는것을 배우며 심양에 있을때는 불같은 기질의 청나라 관리들을 달래고 그들과 친분을 유지하기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고국에 있는 관리들은 그때까지도 청나라에는 오랑케이고 망해가고는 있지만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세자가 오랑케인 청나라 사람들과 친하게 지매는것을 비난하고 있었고 또 인조대로 세자가 청나라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것을 보며 자기의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는등 여러 가지로 소현세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찌되었건 세자가 죽었는데 인조는 예법상 3년인 상복 착용 기간도 신하들이 1년으로 정하자 한술더떠 1개월 1일로 계산하여 12일 만에 마치려다가 아예 더 줄여 7일만에 상복을 벗도록하였으며 또 침을 놓은 의원을 처벌하기를 주장하는 관리들에게 의원은 최선을 다했는데 무슨 처벌을 하느냐며 처벌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세자의 묘이므로 원園이라해야 하는데도 묘墓라고 부르도록하니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생각한것도 무리는 아니며 소현세자는 평범한 왕족으로 살아갈 운명에서 갑자기 왕위를 이을 세자가 되어 다른나라에가서 많은 곤욕을 치르고 돌아와 의문의 죽음을 맞이 하였으니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소현세자가 죽자 그의 큰 아들이 12살이므로 이를 왕세손으로 해야한다고 신하들이 주장하였으나 인조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린것을 세자로 삼을수 없다며 이를 묵살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고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씨가 불만을 갖고 있다고 하여 감금시키고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씌워 죽였는데(인조는 4년후에 죽음을 맞이한다)소현세자의 아들 3명이 있었는데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2명은 그곳에서 병으로 죽고 1명만 살았는데 그책임을 물어 죄없는 나인 만 죽었고 청나라에서 이 아들을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니 안된다고 하는등 비상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인조는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했던것이다
■ 만주족과 중국
김훈의 베스트셀러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했던 남한산성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청나라 군대를 상대로 성 밖에서 싸우기보다 성 안에서 명분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말싸움이 더 치열했다고 합니다. 결국 인조 임금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어야 했고 그 뒤 조선사의 후반부는 반청 북벌의 움직임이 역사의 한 줄기를 이루게 됩니다.
“땅 위에 삶을 세울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저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인조 임금에 대한 청태종의 일갈이 기억에 남습니다. 조선과 청의 관계가 꼭 이렇게 흘러가야 했는지는 유감입니다. 청나라의 3현제 중 한명인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된 만주족의 역사서 '흠정만주원류고'는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발해(渤海)를 여진족의 자랑스러운 선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말갈족 -> 여진족 -> 만주족, 은 같은 민족을 가리킴)책의 중간쯤에서는 청나라의 전신인 금(金)나라의 뿌리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금나라의 시조는 원래 신라로부터 왔고,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으며, 다스리는 부를 완안부라고 하였다. 신라의 왕은 김(金)씨 성인 즉 금(金)나라는 신라의 먼 친척이다" (부족7 완안편 원서(元書))
만주족들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뿌리임을, 동이족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고구려의 영양왕은 별도의 고구려군 없이 말갈기병 1만기만을 이끌고 수나라를 선제공격한 적이 있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족 기병을 이끌고 왜구와 싸웠습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자 자신이 직접 2만명의 여진족 군대를 끌고 왜노(倭奴; 일본)와 싸우겠다고 두 번이나 조선 조정에 청했습니다. 우리 조정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여진족은 고려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오랑캐라 하여 누르하치의 도움을 거절했던 조선은 그의 아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침략을 받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맙니다. 결국 정묘호란의 결과 형제 관계를 맺게 되고, 병자호란의 결과 군신관계를 맺게 됩니다. 중국 한족보다 같은 동이족인 만주족이 조선에게는 더 나은 파트너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족과 만주족 사이에서 실용주의 외교노선를 추구했던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실각당하고 맙니다.이로 인해 결국 만주족(청)의 침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자 청은 오랑캐이며, 사대의 대상인 명과의 큰 의리 때문에 결코 굴복할 수 없다는 명분이 강력하게 등장합니다. 청에게는 절대 굴복할 수 없다 하고, 인조임금은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한 남한산성 안에서 명의 천자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설날 아침에 북경쪽을 향하여 추도록 되어 있는 춤을 춥니다.
별로 말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봅니다.차라리 싸워볼 생각이 있거든 임경업 장군의 작전 건의대로 역으로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을 치도록 했다면 전쟁의 양상이 또 달랐을 것입니다. 로마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국을 위협하니 한니발이 이태리 반도에서 철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청나라 군대는 필경 회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겁먹은 조정은 거리를 따져볼 때 남한산성까지 필요한 시간 내에 당도할 수 없음이 뻔한 임경업 장군의 부대에게 무조건적인 회군을 지시했고, 결국 임경업 장군이 이끌던 조선군의 주력부대는 싸움 한 번 못해보고 부대 이동에 시간만 허송하고 말았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결과 인조임금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볼모로 청의 수도 심양으로 가야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황실에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습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소현세자가 인조 임금의 뒤를 잇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순간 중의 하나입니다. 소현세자는 기개와 분별력, 열린 마음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볼모로 끌려간 몸임에도 불구하고 청의 장수 용골대가 모욕적으로 나오자,“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그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에 용골대는 사과했고 그 뒤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소현세자는 당시 북경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 깊은 교류를 나누면서 서양의 사상과 문물에 크게 눈을 떴었습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그 속에서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가 이국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덕일, ‘조선 왕 독살사건’에서 전재)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선 시기입니다.
서구의 문물과 사상에 눈을 떴던 소현세자가 인조임금의 뒤를 이어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면 역사의 흐름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오히려 권력을 좀 일찍 놓게 될까 봐 두려워하던 아비에 의해 독살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존재합니다).
조선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후방을 든든히 한 청나라는 결국 중국을 정복했습니다.중국을 정복했을 때 만주족의 인구는 5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당시 중국 한족의 인구는 1억 5천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만주족은 0.33 ~ 2% 정도의 인구로 중국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토록 사대(事大)라 하여 떠받들던 중국 한족의 명나라는 우리가 오랑캐라 멸시했던 같은 민족, 만주족에게 허무하게 정복당했습니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매우 흥미로운 국가입니다. 극소수로 다수인 한족을 지배했던 만주족의 청나라.중국 역사상 중국 민중들이 가장 살기 좋았던 시절이 바로 청이 통치하던 기간입니다.지식인들을 회유해야 했던 청나라는 학자들을 우대했고 그 덕에 학문도 융성했습니다.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왕조이고, 중국이 가장 강력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중국의 영토가 지금처럼 넓어진 건 순전히 청나라 덕분입니다. 만주가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고 중국 북방을 영유하던 몽골족이 제압되었습니다. 서역이 제압되고 중국의 영토에 편입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대라고 떠받드는 데 익숙하지만 사실 중국의 역사는 중국 한족이라는 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별 볼일이 없습니다.지난 북경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 자기네 역사에서 한(漢), 당(唐)을 내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 이후는 한족 입장에서 뭔가 내세우고 싶어도 내세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원나라, 청나라가 융성했지만 한족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한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민족의 역사 전체에서 반이 넘는 기간을 이민족에게 지배당했던 역사일 뿐입니다. 왜 만주족 치하의 중국이 민중들에게는 가장 살기좋은 시절이었을까요?극소수로 통치하려니 잘 통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소수인 만주족이 다수인 한족을 상대로 노골적인 수탈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
첫댓글 야~! 사진 볼만 한네요. 근데 이 릉이 누구 거래요? 저 동상에 있는 사람은 누구고? 자료까지 준비해서 올려주신 정성에 감사를 드리옵니다. 거리 곳곳에 보이는 빨간 색, 유난히 빨간색을 좋아하는 중국사람들, 붉은 수수밭, 귀로 등등에서도 보았듯이.
아~ 요 밑에 자료에 설명이 나와있네요. 만주족과 중국의 관계사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소설과 사료를 밑바탕으로 한 중국 내 다민족의 역학관계, 현재 중국의 위구르 문제도 그러한 역사적 근원과 뿌리가 닿아있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