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유세 유감
유기섭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최근 유행가락에 각종 공약사항을 곁들인 선거운동차량이 마을골목을 누빈다. 선거 유세라면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으나 최근 들어 바뀐 세태다. 자동차를 개조하여 기사와 출마자 단 두 사람이 골목을 누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행가 가사에 자신의 정견을 개사하여 호소력 있게 주민들에게 다가가서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한다.
오래전 선거유세장의 한 모습이지만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던 출마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청중들은 환호했다. 순간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을 유권자들. 짧지만 호소력 있는 구호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유세일은 대개 시골의 오일장과 겹쳐서 잠시 바쁜 농사일을 접어두고 읍내로 구름같이 모여든다. 그날은 출마자의 연설을 듣기 위함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지도 만나고 보고 싶던 얼굴도 가까이서 대하며 한바탕 만남의 장소로 변한다. 출마자의 이력사항이나 정견내용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날 목청을 돋우던 그는 여러 번의 낙선 끝에 간신히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으나 60년대 초 정치적 격변기에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 그는 고향을 떠났고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선거에 한번 입후보하였다 낙선하면 빚더미에 앉게 되고 가까운 일가친척들도 같은 어려움에 처해진다고 했다.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관리하기위해서는 기본적인 경비가 소요된다. 당선자나 낙선자나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지금이라면 훨씬 적은 자금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자금력의 차이에 의하여 당. 락의 명암이 가려지는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 자신을 알리고 정견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대형집회 뿐이었으니까. 몇 번의 출마와 낙선으로 한사람의 인생행로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 다반사였던 시대. 그때에 비하면 오늘날은 정보매체를 잘 활용하고 사이버세계에서 유권자와 잘 소통하면 자신의 정견을 소상히 전달할 수 있다. 꼭 대형집회에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읍내에서 선거유세가 있는 날이면 연단에서 열변을 토하는 연사의 말을 경청하는가하면, 한편에선 서로간의 세상사 이야기에 빠져든다. 연사는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판은 무르익고 어느새 그들의 세상사 한탄과 울분을 토하는 장소로 바뀌곤 한다. 한 표를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지만 사람들은 연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때의 선거철 모습을 풍자하여 막걸리 선거니, 고무신 선거니 하는 말들로 유행어가 되어서 번져나갔다. 합동유세가 있는 날 다른 가게들은 한산하지만 고무신 가게와 막걸리 주막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팍팍한 일상이지만 그날만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주고받으며 모처럼 마음을 비운다. 어느 편에서 제공한 음식인지도 알아보지 않고 거나하게 취하여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걸치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각자의 손에는 고무신 한 켤레씩이 쥐어지고 누구에게서 받은 선심인지도 따지지 않은 채 몽롱한 하루의 해가 지곤 하던 때와 비교하면 세월의 흐름이 다시 느껴진다.
고교 시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름 있는 인사들이 토요일 오후에 선거유세를 한다는 가두방송이 거리에 가득했다. 유세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청중들이 끝없이 몰려들고 나도 어느새 그들을 따라 유세장으로 향했다. 유세장은 청중들의 억눌려 있던 마음을 대변하는 열변에 환호하며 거대한 축제의 장이 되었다.
지금은 대규모 유세현장을 볼 수 없고 인터넷이나 선거공고물을 통하여 출마자의 면면을 알게 된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하던 연사의 웅변은 볼 수 없어도 차분하지만 조용한 운동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속된다. 함부로 공약을 제시할 수 없을 만큼 유권자들의 의식과 감시의 눈이 매섭다. 허투루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제시할 수 없다. 즉시 유권자들에 의하여 검증이 시작되고 자칫 선거자체를 그르칠 수 있다. 유권자의 눈이 매서운 매의 냉철함을 지녔다.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가 어려워서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채택하기에 이르는데, 자칫하면 판단의 오류를 초래하게 한다. 오늘날은 고무신이나 막걸리에 마음을 주지 않으니 선거에 무관심한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이끌기 위하여 오락적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벼운 행사나 감성적인 행사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떤 출마자는 선거철이 되면 평소에는 찾지 않던 고향이나 인연을 찾아 나서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지역관리를 등한히 한다. 꾸준히 지역을 다지고 신경을 쓰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지는 요즈음 사람들의 냉철한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다.
선거가 끝난 며칠 뒤 같은 장소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가 바람에 퍼져간다. 선거후 한 낙선자의 감사인사가 뒤따른다. 선거전의 외침과 다른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출마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런 마음이라면 하고 바래본다.
-수필문학 2024년 5월호 게재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