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중원을 장악한 칭기즈칸은 원나라를 세우고 계속적인 영토 확장정책을 펼쳐 전무후무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고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270년 개경 환도 이후로 시작된 몽고의 지배는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당시 고려에 주둔하는 원나라 군대에 과부와 처녀를 바치기 위해 결혼도감(結婚都監)이라는 관청을 두어 공녀 확보에 나서는가 하면, 금혼령을 내려 양가의 처녀가 신고 없이 시집을 가면 벌을 주었다. 충렬왕 18년 문하성 정2품인 찬성사(贊成事)로 있던 송분은 몰래 딸을 결혼시켰다가 관직을 뺏기고 섬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원에 끌려간 고려 처녀의 수는 약 1만 여명에 달하지만 비공식적 숫자를 합하면 훨씬 많았다.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조혼 풍습이 생겨나고, 지배층 사이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되었다.
원(元)은 고려를 간접통치 방식으로 지배하였다. 이는 고려 왕실을 인정해주되 문제가 생기면 자초지종을 따지거나 왕을 교체하는 방식이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은 모두 한 차례씩 폐위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전왕파와 신왕파로 분열되는가 하면, 원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무리들이 들끓었다. 원의 후원에 힘입어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룬 고려왕실인지라 그 위력 앞에 꼼작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국가의 존립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30여년에 걸친 고려 민중의 피어린 항쟁 덕분이었다. 원의 간접통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정책 중의 하나는 바로 원나라 공주와 고려왕의 결혼이다. 충렬왕이 원 세조의 딸을 왕비로 맞은 이래 역대 고려왕은 원 왕실의 공주를 왕비로 삼았으며 그 아들은 원나라에서 살다가 고려에 돌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그리고 왕의 시호에는 ‘충(忠)’자를 붙여 원에 충성한다는 뜻을 나타내게 했다.
2. 공민왕의 정책
(1) 대외정책 : 배원정책
영화 <쌍화점>은 고려 말 제31대 왕인 공민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려는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14세기 중엽 홍건적의 봉기를 계기로 14세기 후반에 각처에서 일어난 한족(漢族)의 반란으로 인해 원나라는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이때를 이용하여 친원세력이던 기철을 중심으로 한 기씨(奇氏) 일가를 모두 숙청하였다. 기씨는 그의 딸이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것에 힘입어 횡포를 부리던 인물이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략하여 원이 지배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고, 인당 등으로 하여금 요동지방을 공략하게 하였다. 원의 간섭으로 바뀌어졌던 관제를 복구하는 한편 원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등 반원 자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원은 공민왕을 몰아내기 위해 고려로 침입해 왔으나 최영이 이를 격파하였고, 또 원의 장수 나하추가 동북에서 침입해오자 이성계가 이를 격퇴하였다. 공민왕은 요동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지용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양면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점령하고, 이 땅이 원래 우리나라 땅임을 선포하였으나 훗날 명의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2) 대내정책 : 개혁정책
1351년 12월 원으로부터 고려로 돌아온 공민왕은 이듬해 2월부터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당시 국내에서는 권문세족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권문세족은 고려 후기의 집권세력으로서 고관요직을 장악하고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였다. 그리고 과거보다는 주로 음서(蔭敍)에 의하여 관인으로서의 신분을 세습시켜 나갔다. 또 그들은 가문을 기초로 삼아 종적인 가족관계와 횡적인 혼인관계를 통하여 세력범위를 넓혀 나갔다. 이러한 권문세족들은 주로 원의 세력과 결탁하여 등장한 경우가 많았다.
권문세족들은 국정의 최고 합의 기관인 도평의사사를 독점하여 정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경에 살고 있으면서 전국 각처에 소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장은 주인이 보낸 가신이나 노비에 의해 관리되었고, 농장의 경작은 전호나 노비가 담당하였다. 하지만 토지겸병이 성행함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가 몇 명의 소유주에게 세금을 물어야 하는 수탈을 함부로 하여 차라리 노비가 되어 농장주에게 보호받기를 원할 정도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을 추진하던 신진사대부 세력은 너무 미약하여 권문세족과 대결할만한 힘의 구도가 자리 잡지 못했다.
따라서 공민왕이 추진한 개혁정책의 최대 과제는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개혁추진을 위해 신돈(辛旽)이란 인물을 기용했다. 신돈에 대한 기록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본관이 영산인 것으로 보아서 아버지가 영산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과 어머니가 계성현 옥천사의 노비였으므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절에서 양육되어 이것이 출가로 이어지고, 편조라는 법명을 얻었다는 사실뿐이다. 유학자 중심의 관료 체제에 강한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공민왕은 불교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런 공민왕에게 신돈을 소개시킨 사람은 왕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인 김원명이었다.
1366년 신돈의 제의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토지와 백성의 소속을 바로잡는 기관으로서 농장주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본래의 신분으로 되돌려 주었다. 이를 두고 백성들은 “성인(聖人)이 나타났다”고 찬양한 반면에 노비와 토지를 잃은 권문세족들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이 반원개혁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는 원의 세력과 싸워야 하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원의 압력으로 왕권이 강화될 수 없었고, 또 원을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들이 왕권을 견제하여 개혁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3. 건륭위 홍림: 자제위(子弟衛) 김흥경(金興慶)
영화 <쌍화점>에 나오는 건륭위의 총관 홍림은 고려 후기 공민왕 때 국왕의 신변에 대한 호위 겸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뜻에서 설치한 관청인 자제위(子弟衛)의 김흥경(金興慶)으로 판단된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회복하게 했던 고려 후기 최대의 명군이자 개혁군주였다. 그는 재위 20년의 대부분을 원의 간섭과 홍건적 · 왜구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부원파 세력과 권문세족의 반발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개혁정치를 폈다. 그러나 왕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죽고, 신돈을 내세운 개혁정치가 좌절된 이후에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날로 변태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372년 10월 공민왕은 공신 및 고위 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자제위에 배속시키고, 대언(代言) 김흥경으로 하여금 이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곳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는 한편 미소년을 뽑아 유희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자제위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홍륜(洪倫) · 한안(韓安) · 권진(權瑨) · 홍관(洪寬) · 노선(盧瑄)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던 인물은 김흥경이었다. 공민왕은 그에게 한 번도 휴가를 주지 않고 항상 침전에서 데리고 잤다. 그 결과 김흥경의 벼슬은 몇 달 만에 좌우위 상호군이란 고위직으로 껑충 뛰었고, 머지않아 자제위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들과 공민왕의 행각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후사를 얻기 위해 여러 비빈(妃嬪)들을 강제로 통간시켰다. 이에 혜비 이씨, 정비 안씨, 신비 염씨는 죽음으로 항거하고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익비의 궁에 행차해서는 김흥경, 홍륜, 한안 등을 시켜 익비와 성행위를 하도록 했다. 익비가 거절하자 공민왕은 칼로 위협해 관계를 가지도록 했다. 그 뒤로는 홍륜 등은 아예 재미 붙여 왕의 명을 사칭하고 수시로 익비와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정작 공민왕 자신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력이 없는 관계로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때도 동침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에는 여러 비를 두었지만 모두 별궁에 두고 동침하는 일이 없었다. 밤낮으로 노국공주 생각만 하여 마음에 병(心病)이 들었다. 공민왕은 이런 마음의 병 때문에 변태적인 성적 행동을 보였다. 젊은 궁녀를 방안에 들여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게 하고 홍륜 등을 시켜 성행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공민왕은 옆방에서 창에 구멍을 뚫고 이를 훔쳐보았다. 이때 공민왕은 짙은 화장을 하여 여자처럼 꾸미고는 마음이 동하면 관계를 하던 홍륜 등을 침실로 끌어들여 성행위를 했다고 한다.
공민왕 23년 9월 익비 한씨가 임신한 지 5개월이 되었을 때, 공민왕은 그 아이가 홍륜의 씨앗임을 환관인 최만생으로부터 보고받는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익비를 자제위 사람들과 억지로 관계시킨 것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최만생은 자신도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홍륜, 권진, 한안, 노윤 등에게 공민왕의 계획을 누설하였다. 이에 홍륜의 무리들이 도리어 술에 만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죽이는 시역(弑逆)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은 적이 밖에서 들어와 공민왕을 시해하였다고 부르짖었으나 재상을 비롯한 그 어떤 신하들도 이 변고를 듣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날 왕의 명령이라 하여 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해 사태 수습을 논의했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그를 심문하자 사태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홍륜의 무리들은 사지가 찢겨지는 차열형과 삼족(三族)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고려사절요>나 <고려사>는 고려시대 때 쓰여진 것이 아니라 1451년 문종 때에 김종서, 정인지 등에 의해 완성된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시대의 제위를 물려받았다고 정통성을 내세우지만 사실 조선이 진정한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전 왕조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과 현재 왕조가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 왕조의 잘못된 만행들을 과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시킬 때에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처럼 공민왕을 동성애자로 묘사한 것은 조선시대의 과장된 표현일 것이라는 추측 가능성이 높다. 마치 신라가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에 대해서 3000천 궁녀를 거느리고 여러 폭정을 일삼은 결과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처럼 말이다.
4.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인덕왕후
공민왕은 노국 대장공주를 비롯하여 혜비 이씨, 정비 안씨, 신비 염씨, 반야 등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 중 반야가 우왕을 낳았다. 영화 <쌍화점>에 나오는 왕비는 이중에서 노국대장공주 인덕왕후이다. 노국공주 인덕왕후는 원나라 종실 위안의 딸이며 본명은 보탑실리공주(寶塔實里公主)라고도 한다. 중국 원(元)나라의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여 1351년 12월 공민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 후 공민왕은 그녀를 숙옹공주에 봉하고 숙옹부를 설치하였다.
그녀는 결혼한 지 8년이 될 때까지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1359년에 후궁을 선택할 것을 건의하였고, 공주도 이에 동의하여 이제현의 딸을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공주는 혜비 이씨에 대하여 심한 질투를 느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이 때문에 궁녀들과 내관들이 그녀를 심하게 비방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어렵사리 임신하여 1365년 2월(공민왕 14)에 만삭의 몸이 되었고, 공민왕은 이를 기뻐하여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사를 내렸다. 그러나 난산(難産)으로 인해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공민왕은 그녀를 매우 사랑하였으므로 그녀의 영(靈)을 위로해 주기 위해 혼제(魂祭)를 지냈으며, 그 진영을 모시기 위해 장려한 영전(影殿)을 지었다. 공민왕에게 있어 그녀의 죽음은 엄청나게 괴로움을 안겨다 주었다. 공민왕은 슬픔에 잠겨 거의 정사(政事)를 뒷전으로 미룬 채, 3년 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 또한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울었다고 전해진다.
1365년 4월 대신들은 그녀에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라는 칭호를 올렸고, 이듬해 원나라에서 노국휘익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이 시호는 곧 공민왕의 명에 따라 노국휘의대장공주로 고쳤다. 묘는 운암사 동쪽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이처럼 실제 역사에서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너무나도 사랑하였고 흠모하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건륭위 총관인 홍림과 사랑에 빠져 뜨거운 정사를 여러 차례 벌리는 왕비로 묘사된다. 이는 아마도 영화 제작 당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든지 아님 이야기 진행에 흥미를 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픽션을 설정한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보다 충실하자면 왕비를 노국공주보다는 차라리 익비 한씨로 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겠으나 영화라는 것이 반드시 사실에 입각한 필요는 없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생각은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5. 고려시대의 경기체가와 고려가요
고려 전기의 문학은 전시대로부터 내려오던 향가와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광종 때 균여는 대표적인 향가 작가로서 현재 보현십원가 11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불교찬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광종이후 문치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한문학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문학은 귀족사회의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유교 경전의 문구가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는 크게 경기체가와 고려가요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불리는 경기체가는 노래 말미에 반드시 “경(景) 긔 엇더니잇고” 또는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 구(句)를 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고려 중기 이후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주로 한학자들에 의하여 읊어졌는데,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고종 때 제유(諸儒)의 작으로 알려진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고려 말의 안축(安軸)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이 있다. 이처럼 경기체가는 대체로 작자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경기체가를 처음으로 읊던 사람들은 무신정권에 의하여 초야로 쫓겨난 신흥사대부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한문 위주의 관념적인 시어들이 자주 등장하며 그 내용면에서도 좋은 풍경에 대한 묘사나 그 감회를 서술하는 음풍영월식(吟風詠月式) 노래가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조선 건국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기도 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한글을 약간 섞어짓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일반대중과는 유리된 일종의 기형적인 문학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반면 고려가요는 주로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노래로 줄여서 속요(俗謠)라고도 부른다. 고려가요는 대상이 주로 평민들이었으므로 체면을 중시하던 상류층의 한계를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인간적이고 진솔한 감정들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허식 없는 소박하고 진솔한 내용들만 다루었기에 강인한 생명력으로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가요의 내용은 <가시리>에서처럼 다분히 체념적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서정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면, <청산별곡>에서처럼 세속을 초탈한 인생관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음수율은 주로 3 · 3조(서경별곡), 3 · 3 · 2조(청산별곡), 3 · 4∼4 · 4조(만전춘)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조나 가사에서와 같은 엄격한 율조상(律調上)의 제약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불렸다. 이는 우리의 정서(情緖)에 알맞은 율(律)로 훗날 아리랑과 같은 민요를 거쳐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한림별곡》(翰林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과 같은 경기체가는《청산별곡》(靑山別曲),《가시리》 등과 같은 고려가요와 대조를 이룬다. 고려가요는 일반대중 사이에서 발달하여 구전되었기 때문에 보통 그 작자를 알 수 없으나 경기체가는 한학자라는 특수층이 한자만으로 지었기 때문에 대개 작자가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경기체가는 사물이나 경치를 나열 ·서술하는 것이 특징인데, 속요는 사랑의 노래가 흔하며 사랑도 육감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경기체가와 속요는 형태상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하여, 고려시대의 시가를 전체적으로 포괄한 ‘고려별곡’(高麗別曲)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다. 형식면에서 《한림별곡》이나 《청산별곡》 등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형태상의 특징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첫째, 음수율(音數律)은 주로 3음절이 우세하고, 둘째, 음보율(音步律)은 일반적으로 3음보이며, 셋째, 구수율(句數律)은 6구를 기준으로 하여 다소의 가감(加減)을 보이고, 넷째, 대체로 전후 양절로 구분되는데 《청산별곡》 등에서는 후렴구(後斂句)가 후절(後節)이 된다. 다섯째, 일률적으로 수련(數聯)이 중첩되어 한 가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형은 점차 붕괴되어 변격형(變格型)을 이룬다는 점이 그것이다.
영화 <쌍화점>에서는 야외로 놀러 나갔다가 왕이 기습을 당하기 전에 노국공주가 <가시리>를 부르는 대목과 후사를 기원하는 연회집회 도중에 노국공주와 건륭위 총관인 홍림이 몰래 정사(情事)를 나누는 장면에서 공민왕이 <쌍화점>을 노래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 개인적 견해로는 삽입곡으로 고려가요가 아닌 경기체가를 집어넣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 이유는 노국공주나 공민왕은 모두 집권층에 속하는 인물이기에 민중을 대변하던 노래인 고려가요보다는 집권층을 대변하는 경기체가가 더 어울릴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여하튼 <가시리>와 <쌍화점> 이 두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고려 사회가 남녀의 성(性)에 대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가 남녀평등의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사실 그 당시는 호주제를 폐지하여 자녀의 성(姓)을 부모의 누구에 의해서나 바꿀 수 있는 법을 개정하였고, 아들 · 딸 구분 없이 공평한 재산 상속이 이루어진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불교 대신에 채택한 유교 이념은 가부장중심의 사회제도를 고착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애의 사고방식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남존여비(男尊女卑), 정절(貞節), 일부종사(一夫終事), 수절(守節) 등과 같은 가치관으로 대체되고 청춘남녀의 사랑을 주로 노래한 고려가요는 대부분 소실되었다. 특히 고려가요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다가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문자화 되었으므로 더욱 전해지는 바가 줄게 된 것이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고려시대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이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남겨진 문헌들이 적어 상당수 추측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많이 아쉽다. 그나마 현존하는 <가시리>와 <쌍화점>의 내용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시리(고려가요) : 작자미상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리고 가시리잇고 나 : 나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대평셩(大平盛代) : 위 증즐가 대평성대
날러는 엇디 살라 고 : 나더러 어찌 살라 하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 나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대평셩(大平盛代) : 위 증즐가 대평성대
잡와 두어리마 : 붙잡아 둘 일이지마는
선면 아니 올셰라 : 서운하면 아니 오실까 두렵습니다.
위 증즐가 대평셩(大平盛代) : 위 증즐가 대평성대
셜온님 보내노니 나 : 서러운 임을 보내 드리오니
가시 도셔 오쇼셔 나 : 가자마자 곧 다시 오소서
위 증즐가 대평셩(大平盛代) : 위 증즐가 대평성대
(2) 쌍화점(雙花店)(고려가요) : 작자미상
쌍화점(雙花店)에 쌍화(雙花)를 사라 가고신 :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이 말미 이 점(店) 밧긔 나명들명 :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나며들며 하면
다로더거디러 죠고맛간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 조그만 새끼 광대 네 탓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티 거츠니 업다 : 그 잔 데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삼장사(三藏寺)에 브를 혀라 가고신 :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뎔 사주(社主)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 그 절 주지승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미 이 뎔 밧긔 나명들명 :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들며 하면
다로더거디러 죠고맛간 삿기 상좌(上座)ㅣ 네 마리라 호리라 : 조그만 새끼 상좌 네 탓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티 거츠니 업다 : 그 잔 데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드레 우므레 므를 길라 가고신 : 두레박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믓용(龍)이 내 손모글 주여이다 :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미 이 우믈 밧긔 나명들명 :만약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나며들며 하면
다로더거디러 죠고맛간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 조그만 두레박아 네 탓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티 거츠니 업다 : 그 잔 데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6. 영화 <쌍화점>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영화 <쌍화점>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는 동성애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 가면 왕은 왕비를 죽인척해서 홍림을 궁궐 안에 끌어들이려는 계략을 세운다. 홍림은 왕이 무자비하게 왕비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하기 위해 결국 궁궐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왕은 어린 시절부터 왕의 총애를 받으며, 왕만을 보고 살아왔던 홍민이 단지 왕비 하나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의 의리를 배신한 것에 대한 애증과 광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 대목은 즉 왕이 진정으로 홍림을 사랑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동성애에 대한 고려사회의 시각은 어떠하였을까? 사실 고려시대 동성애와 관련한 문헌은 없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다만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초기 목종 때 유행간이라는 사람이 목종의 남색(男色) 대상이었다는 기록과 공민왕이 자제위에 소속된 사람들과 남색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자와 남자 사이에 성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추측된다. 주의해야 할 것은 <고려사> 기록이 조선왕조 건국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한 측면이 많은 탓에 기록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다소 과장된 묘사가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성(性)을 매개로 한 문화상품은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유하 감독의 설명처럼 ‘조선시대 사극의 한국적 절제와 정적인 느낌보다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탐미주의적이고 역동적인 사극을 연출하기 위해’ 선택한 고려시대는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왕의 홍림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의 구도는 상업성과 다분히 결부되어 있는 부분이다. 덧붙여 건륭위 36인 역을 정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심혈을 기울인 것도 여성 상위시대를 자처하는 현대사회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였으리라.
역사적 배경을 소재로 한 영화는 역사성을 중요시하는 작품과 그와 반대로 현대적 과제를 추구하는 방편으로서 역사의 옷을 빌릴 뿐 역사묘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는 하지 않는 작품으로 구별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 사료가 많지 않아 많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서 영화 <쌍화점>은 후자인 역사성을 빌릴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영화의 방식을 취하였을 것이고, 그 공백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만 했을 것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첫 부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막시 무스를 그의 막사로 불러 대화하는 장면에서 뒷배경의 소재로 사용된 서재에 플라톤의 저서가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학파를 추종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고대 철학의 양대 산맥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계승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는 영화감독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장면이었다. 영화 <쌍화점>에서 이와 같이 역사성을 중요시한 결과 느껴지는 전율은 없었지만 역사적 문헌이 해결할 수 없었던 한계를 감독의 탁월한 상상력과 상업성이 잘 결부되어 완성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싶다. 아무쪼록 나의 노고가 이 글을 읽고 영화감상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가되는 기쁨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참고문헌>
1. 한겨레, <이코노닉21> 공민왕 말년 국정을 어지럽힌 간신: 김흥경, 아름다움, 2006.
2. 박영규 지음,『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 실록』, 들녘, 1997.
3. 박은봉 지음,『한권으로 보는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5.
4. 안정애 외1 지음,『한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5.
첫댓글 영화 쌍화점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