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재러한인 민족운동의 태동과 해됴신문의 간행 |
1908년 국내에서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統監政治가 실시되고 있을 무렵 러시아 沿海州 블라지보스또크(ܒܻܴܸܾ݂ܾܰܲ݁ܺ 해삼위)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 의하여 해조신문이 간행되었다. 이 신문은 러시아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만든 최초의 신문으로, 1908년 2월 26일부터 동년 5월 26일까지 3개월 동안 총 75호가 간행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발행된 신문이기는 하지만 해조신문은 재러한인의 민족운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전달되어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는 皇城新聞 1908년 4월 9일자 논설 ゛讀海朝新聞ゝ에,
今에 該報를 讀폑이 二十四號에 至폅지라. 嗚呼라 海朝新聞이여. 從何而生者며 緣何而來者오. 其遞傳을 計폁면 海港에서 發送폁야 城津과 元港을 經폁야 漢城에 到着폅者이나, 其原因을 究폁건韡 海外居留폁신鏅 同包有志의 愛國熱心으로 發生폁야 內地同胞의 自由思想과 獨立精神을 喚起폁기 爲폁야 辛勤來訪폁鏅 者로다.(중략) 此一幅 新聞紙鏅 卽 我海外同胞의 愛國熱血이오 自由警鍾이니 孰不愛之寶之며 誦之傳之哉아
라고 하여, 국내동포들에게 해조신문을 읽을 것을 권유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해조신문은 이처럼 국내동포들에게도 자유사상과 독립정신을 환기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국내에서 발매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黃玹의 セ梅泉野錄ソ 隆熙 3년 4월조에,
時新聞十有數種 而皆암아迎媚 惟每日申報 往往有激昻悲憤之辭 及布와寓民所刊新韓報 海蔘威寓民所刊海朝新聞 特其隔遠 亦時有排外之論 倭人첨위以治安妨害 禁其發賣 故有志人士 相偶語曰 治安妨害四字 實是亡國之符
이라 있듯이, 치안방해라는 명목으로 번번히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해조신문이 이처럼 구한말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운동 발전에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신문에 관하여 주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해조신문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로부터 이 신문과 관련된 자료들이 속속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러시아공화국 뻬쩨르부르크(ܟ݂ܱܵܵ݀݃݀ܳ) 공공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해조신문을 모두 입수하여 학계에 제공하였다. 다음으로 필자는 러시아 여행을 통하여 러시아 馱스크(ܢܾܼ݁ܺ) 극동문서보관소로부터 해조신문과 관련된 러시아 문헌들을 입수하였다. 한편 해조신문과 관련된 자료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해조신문에 대한 일본측의 첩보기록이 수록되어 있는 セ주한일본공사관기록ソ 33권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하여 영인 간행되었던 것이다.
본고는 이와 같이 새롭게 입수된 신문과 자료들을 첨가하여 기존에 필자가 발표한 바 있는 해조신문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신문의 간행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몇 사람의 사원이 있었으며 그들이 누구였던가 등에 대해서, 다음으로는 신문의 내용 및 폐간 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1900년대 후반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 나아가 러시아지역의 한인민족운동의 일면을 밝혀보고자 한다.
1. 해조신문의 간행
해조신문이 태동을 준비하던 1900년대는 러시아에 있어서 큰 격변기였다. 1905년 1월 뻬쩨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러시아 제 1차 혁명이 발생한 이후 러시아 전지역에는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다. 시베리아 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고 더⧚어 그 중심도시의 하나인 블라지보스또크 지역도 1905년부터 1907년에 걸쳐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갔다.
이러한 혁명운동은 비록 짜르정부에서 파견한 정벌군에 의하여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러시아의 한인들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초기의 이주민 시대와는 달리 다소의 생활 근거도 생기고, 일정한 세력도 형성되어 있던 그들에게 자신들을 지켜야겠다는 의지와 사상이 자연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혁명은 군주제에 반대하는 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기에 沿黑龍州 총독 운떼르베르게르(ܟ. ܤ. ܣ݂ܱܽܵ݀ܵ݀ܳܵ݀, 1842-1918)는 한인 탄압을 강화하였다. 1905년 연흑룡주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한국인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즉 그는 1900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セ연해주, 1856-1898ソ에서 한민족은 30년 이상 노령에 거주하였으나 그들은 신앙, 풍속, 습관, 세계관, 경제상태 등 모든 면에서 러시아인과 전혀 다르고 쉽게 러시아에 동화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한국인을 태평양 해안의 육군과 해군 병사로도 부적당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청과 전쟁을 할 경우 첩보활동을 할 위험이 크므로 연해주 시민으로 부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총독이 된 이후 한민족에게 더이상 러시아국적을 허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귀화한 한민족에게도 관유지를 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장과 금광에서 한민족 노동자를 고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는 1908년 러시아가 일본이나 청과 전쟁할 경우 한민족이 광범위한 간첩망을 조직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한국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하여 식민지화 과정을 밟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한층 격화되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高宗은 李相卨, 李儁, 李瑋鍾 등 3인에게 신임장을 주어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계기로 고종에게 왕위를 강제로 양위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7년 7월에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統監이 한국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정식으로 가지게 되었다. 또한 1907년 8월에는 드디어 얼마남지 않은 한국의 군대를 완전히 해산시켜 버렸다.
이처럼 조국이 일제에 의하여 식민지가 될 운명에 처하게 되자 재러동포들은 크게 격분하여 각처에서 의병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특히 1907년 헤이그에서 이준이 순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러한인들은 흥분하였다. 이준은 헤이그로 떠나기전 블라지보스또크에 와서 이상설, 이종호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의논한 일이 있었으므로 재러동포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국내에서 鄭淳萬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러시아지역으로 망명하였고, 그들은 재러동포들에게 조국의 위기를 설명하고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재러동포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국권회복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재러동포들의 이러한 관심은 자신들의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이따라서 재러동포들의 반일운동은 곧 러시아 정부의 대조선인에 대한 정책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재러동포들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일본의 간첩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던 운떼르베르게르 총독 치하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시기에(1907년) 한러국경지대인 노보끼예브스크(ܝܾܾܸܲܺܵܲ݁ܺ 현재의 ܚܸܾ݀ܰ݁ܺܽ, 연추), 빠르띠잔스크(ܟ݂ܸܷܰ݀ܰܽ݁ܺ 수청, 소성) 등과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수이푼(ܡܸ݃ܤ݃ܽ 추풍) 등 한국과 가까운 국경부근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李範允, 崔才亨, 嚴仁燮, 安重根 등에 의하여 의병운동을 위한 준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극동의 주요 도시인 블라지보스또끄을 중심으로 하여서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신문, 잡지 등을 간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블라지보스또크 한인촌에서 車錫甫, 이종익 등을 중심으로 晨鍾이라는 잡지가 간행되었으나 러시아 관청에 의해 금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러동포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신문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본토와 하와이에는 한인 신문과 잡지가 있음에 반하여 러시아 지역에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이 간행되고 있지 못하다는 자성에 의한 것이었다. 가령 前駐露韓國公使였던 李範晋은,
현금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재류하는 자가 북미에 약 3만인, 하와이에 약 1만인이 있고, 북미 재류자는 공립신보를 가지고 있고 하와이에도 역시 한 잡지가 있어 동포를 지도한다. 그러나 浦港(블라지보스또크--필자주)에는 이미 4만 5천의 한인이 있으면서도 아직도 하나의 신문도 없다. 표면으로 노국인이 경영하는 하나의 신문을 세우고 국권회복에 공고한 사상을 가진 張志淵을 초빙하여 일본의 통감 정치를 공격하고 한편 지방 폭도를 선동해서 일본인의 구축에 힘써야 한다.
라고 하여, 블라지보스또크에서의 신문 간행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신문 간행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정순만이었던 것 같다. 정순만은 충남 청주 출신으로 일찌기 田愚 밑에서 공부한 한학자였다. ⧚는 1895년 을미사변 때에는 柳寅爀 등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러⧚전쟁시에는 李儁, 이현석 등과 함께 적십자사를 만들어 일제에 대항하다가 투옥되었고, 1904년 일제가 한국정부에 대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保安會를 조직, 이를 적극 저지하였다. 또한 남대문 상동 기독교 청년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일제가 우리 동포 1,300명을 멕시코에 팔아 넘길 때에 정부에 장서를 올려 이를 항의하였다. 또한 정순만은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행하자 전국에 있는 지사들과 단합하여 정부에 상소를 올리는 한편 종로에 나가 직접 일병들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내에서 의병, 또는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정순만은 1906년 6월 경 러시아 블라지보스또크로 망명, 그곳에서 먼저 망명한 이상설 등과 회합하고, 1906년 10월 北間島 龍井村에 가서 瑞甸書塾을 설립, 그곳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순만이 다시 러시아 지역을 찾은 것은 1907년 4월 3일경으로 이상설이 이준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될 때 이상설, 李東寧과 함께 연해주를 방문하였을 때이다.
다시 블라지보스또크로 망명한 정순만은 그곳의 주민들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던 것 같다. 특히 그의 항일경력은 그곳 토착 주민의 신뢰를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블라지보스또크 지역의 부호인 崔鳳俊의 장조카로서 그곳 주민들로 구성된 民會의 재무를 맡고 있던 崔禮簿와 민회의 회장인 揚成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민회에서 총무겸 서기로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민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최봉준의 장조카인 최예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정순만이 그 지역의 유지이며 실질적인 민회지도자인 최봉준과 접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에 정순만은 최봉준의 경제적인 부를 이용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신문의 간행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는 1900년 후반 그와 함께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金鉉九가 쓴 セ儉隱遺傳ソ에,
此際의 검은의 주선으로 해삼위에서 해조신문이라는 일보를 간행하게 되었고, 암암리에 장지연을 청하여 편집을 전담케 되었는데
라고 하고 있고, 블라지보스또크에서 간행된 한인신문 한인신보 1917년 10월 7일자 기사 중 강동꼥해에,
최봉준은 활자기계를 사서 노코 해죠신문을 창간하야 매일보를 발행하니 아령으로는 처음사업이라. 동포에게 조국사샹을 너어주며 이목을 새롭게 하니 이에 신문 저술은 졍꽅만, 장지연 등이 주쟝하다
라고 한 내용과 해조신문이 창간된 후 그가 신문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총무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점을 통하여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순만의 이러한 의도는 최봉준에 의하여 기꺼이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그 역시 항일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신문 간행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봉준은 해조신문 창간호에 기고한 ゛발간폁鏅말ゝ에서,
우리나라鏅 우리의 문명졔도를 본바다가던 일본의게 보호라폁鏅 더러운 칭호를 바드니 샹하차등의 관계가 과연 엇더폅고. 깁히 꿷각폁여 볼지어다. 우리동표여 이것이 다 우리鏅 교듀고슬로 고법만 딕히고 구습만 슝샹폅 닭이오. 뎌鏅 수시변통폁야 자긔의 의무를 폷폅연고니 그 의무를 완젼히 폷폁고 그 권리를 굿건이 보젼폑은 불필타구라. 오쟉 우리의 지식을 발달큁폁고 우리의 견문을 넒하ꏡ 잇鏅고로 본인이 분격폁고 통한폑을 이긔지 못폁야 본샤를 창셜폁고 춘츄의 딕필을 잡아 원근쇼식과 시비곡딕을 평론긔믡평꿡 우리벗 유지폅 졔군으로 협십동력폁야 오늘鏉 비로소 발간폑을 엇으니 실로 쳔믡의 한 됴흔 긔회라. 이 신보를 럡독폁시鏅 졔군믁鏅 이 긔회를 일치말으시고 꿡지식을 발달폁며 꿡견문을 넒히기에 힘을 쓰고 마음을 다폁야 남의 치쇼와 남의 수모를 면폁기로 힘쓸지어다.
라고 하여, 일본에게 보호라는 더러운 칭호를 받고 있다고 개탄하고,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우리의 지식을 발달시켜 우리의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신문을 발간함을 밝히고 있다. 또한 해조신문 1908년 2월 27일자 ゛복수초부 김학만 긔서ゝ에서도
최봉준군은 세상에 유지폅 신사라. 서로 마음이 갖고 이 합폁야 주소로 원원히 상종폁더니 하로는 씨가 강诡히 말폁야 가로韡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의식주 세가지(옷닙고 음식먹고 거쳐폁는 것)외에도 허다한 산업이 잇스나 오늘날 우리동포에 당한 형편을 살피건韡 국가이폁는 사상이 전무폁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듣고 보는 것이 업서서 그러폁나니 교육과 견문을 엇지 폁로나 잇틀에 사람마다 알게폁鏅 방법이 잇스리오. 이는 사실상에 도-져히 능치 못할 것이어니와 위선 신문이라폁鏅 것은 일반인민을 믁유폁鏅 기초에 뎨일이 되는 지라. 오늘날 힘쓸 것이 이에 더폑이 없다폁고 씨가 주비다소를 담당폁야 한보관을 창설할세 어시에 협찬폅는 유지제군이 씨의 지극폅 공심에 감동폁야
라 하고 있듯이, 최봉준은 국가를 이롭게 하는 사상 즉 국권 회복 사상을 기르기 위하여 신문을 간행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최봉준이 신문을 발간하게 된 데에는 당시 러시아정부의 반일적인 입장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정부는 내면적으로 반일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운떼르베르게르총독은 한국인들을 일본의 간첩으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봉준 등 재러동포들은 생존의 일환으로서도 반일을 표방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블라지보스또크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지지하에 정순만의 주선으로 최봉준 등 러시아 지역의 토착세력과 정순만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망명자들이 힘을 합하여 블라지보스또크의 민회를 중심으로 신문의 발간이 적극 추진되었다.
우선 최봉준, 정순만 등은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던 동시베리아 제13 보병연대의 중위 이반 페도또비치 듀꼬프(ܘܲܰܽܰ ܤܴܾ݂ܾܸܵܲ݇ܰ ܔݎܾܺܲܰ) 를 통하여 軍知事에게 1907년 9월 25일(러시아력)자로 신문의 간행을 청원하였다. 그 청원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청원서
각하께 블라지보스또크에서 한국어 신문 소위 해조신문 즉 블라지보스또크 한국소식의 발행을 청원합니다. 이 신문은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유럽국가들의 현안들에 관한 기사를 실을 것입니다. 그외에도 이 신문은 해외의 소식과 한국 및 인접국가들의 소식들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1년 구독료는 4루블이고, 1부 가격은 5까뻬이까입니다. 신문은 일요일과 한국인 고유명절을 제외한 거의 매일 발행됩니다. 신문은 崔의 개인 인쇄실에서 인쇄할 것입니다. 편집 발행인인 레드 뻬뜨로비치 최는 블라지보스또크의 마르헬롭그끼 골목 83호에 살며 책임 편집인 이반 페도또비치 듀꼬프 중위는 마뜨로스까야 2번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1907년 9월 25일 듀꼬프 중위
그리고 이어서 듀꼬프는 다음과 같은 신청서를 제시하고 있다.
아래 서명한 자인 저는 소위 블라지보스또크 한국 소식지라는 한국어신문 편집에 관한 전적인 책임 편집을 담당하였음을 증명합니다.
블라지보스또크시 1907년 9월 25일 중위 이반 페도또비치 듀꼬프
위와 같이 최봉준은 효율적으로 연해주 군지사의 허가를 얻기 위하여 러시아인 듀꼬프를 통하여 청원하였고, 해조신문의 간행은 허가되었다. 이에 따라 드디어 블라지보스또크에서 신문이 간행되게 되었는데, 신문의 명칭을 で해삼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 만든 신문と이라는 뜻에서 で해조신문と(한자로는 海朝新聞)이라고 하였고, ⧚시아어로는 ぢ݅ܐܕ-ܢܕܨܘܝ-ܑܞっ라고 하였다.
곧이어 신문의 취지서를 발간하였다. 취지서에는 で융희 이년 이월 일と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어 구체적인 간행 날짜를 알기는 어렵지만 해조신문의 창간호가 1908년 2월 26일에 간행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취지서는 그 이전에 발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간행장소는 블라지보스또크 한인거류지(ܾܸܺ݀ܵ݁ܺܰݏ ܻܾܱܾܴ݁ܺܰ) 344호였다.
발간 취지서에는 해조신문을 간행하려는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우리 국문과 우리 방언으로 알기 쉽고 보기 쉽게폁야 우리나라 국민이 어鏁 디경된 것과 우리나라가 엇더폅 나라와 관계되鏅 것과 여러나라에 정치로 교섭폁鏅 일이며 교육폁鏅 일이며 교육폁鏅 리치와 농사폁鏅 리치와 쟝사폁鏅 리치와 나무와 즘꿷 기르鏅 법과 우리나라 츙신 렬꿁의 꿁륢과 서양 력꿁에 유명폅 사鿑의 폷폅 일을 모다 긔록폁야 믁미잇게 날마다 발간폁야 우리동포의 학문과 지식을 넓히고 실업이 늘어감을 권쟝폁야 국민의 졍신을 배양폁고 국권의 회복을 쥬장폁야 우리 이천만 일반 국민의 당당폅 하鏉이 주신 믁유권리를 세계렬강과 폑 태평복락을 누리기로 목镢폁오니
라고 하여 해조신문이 국권의 회복을 위해 간행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조신문의 창간호에 실린 정순만(이명:자오꿷) 의 논설<우리동포의게 경고폑>에서도,
국권회복폁기와 동포구졔폁기로 힘을 다폁며 마음을 갓히폁되 몬져 우리의 지식을 발달폁고 문견을 넓히鏅 것은 신문을 구람폁鏅 밧게 다른 방법이 업鏅지라
라고 하여, 국권회복과 동포를 구제하기 위하여 신문을 간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세부적인 편집방침을 정하기도 하였다.
1. 일반국민의 보통지식을 발달하며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완전케 하기로 목적
함
1. 본국과 열국의 소문을 널리 탐지하여 날마다 발간함
1. 정치와 법률과 학문과 상업과 공업과 농업의 새문자를 날마다 번역 게재함
1. 국문과 국어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알기 쉽도록 발간함
1. 실업상 진보와 기타 좋은 사업의 발달을 위하여 광고를 청하는 일이 있으면 상
의 게재함(맞춤법--필자)
이러한 간행취지서를 대한매일신보에서는 1908년 3월 10일과 12일자의 ゛긔서ゝ에, 황성신문에서는 동년 3월 3일의 ゛별보ゝ에 각각 그 전문을 싣고 있다. 또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공립신보에서도 동년 3월 13일자 ゛별보ゝ에 이를 게재하였다. 그리하여 해조신문의 간행취지는 국내 및 해외동포들에게 널리 홍보되었다.
한편 최봉준, 정순만 등은 신문 간행의 경험이 있던 국내 인사들의 영입을 추진하였다. 먼저 주필로는 장지연을 초빙하고자 하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사의 사장으로서 1905년 11월 17일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是日也放聲大哭ゝ을 기고한 인물이었다. 그를 초빙하고자 제안한 이는 이범진이었다. 이에 최봉준 등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李鍾浩에게 장지연과의 교섭을 부탁하였다. 부탁을 받은 이종호는 곧 朴殷植과 상의하여 장지연과 교섭하였다. 이종호와 박은식과의 교섭으로 장지연은 최봉준과 원산에서 직접 만나 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セ주한일본공사관기록ソ의 ゛明治四十一年在露韓人發行新聞幷排日行動ゝ 중에서 2월 20일부로 警視總監 丸山重俊이 統監代理 副統監 子爵 曾니?荒助에게 보고한 외국 신문발행 기타의 건ゝ에서 알 수 있듯이,
장지연은 그 후 원산에서 이 신문의 主宰 최봉준과 회견해서 발간에 관하여 상의하고 최는 매년 1만원을 내고 향후 10년간 이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하고 장지연의 봉급은 그의 희망에 따르기로 계약하고 장지연은 하루 저녁에 귀경, 본월(2월-필자주) 에 블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고 있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이 계약에서 최봉준은 매년 1만원씩 10년간 해조신문의 간행에 투자하기로 하고 장지연의 봉급은 그의 희망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에 서울로 돌아온 장지연은 1908년 2월 2일(음력 정월 1일) 서울을 떠나 원산과 성진을 거쳐 동년 2월 28일에 블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2일에 해조신문사에 입사하여 주필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의 공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이강도 국내를 거쳐 1908년 3월 24일 블라지보스또크로 와 해조신문사에서 집무하게 되었다.
또한 金河球도 기자로서 초빙되었다. 그것은 セ주한일본공사관기록ソ의 ゛倭政文書 甲九 在露韓人關係 明治四十三年 自一月至九月ゝ중에서 1월 13일부로 블라지보스또크 총영사 大鳥富士太郞이 외무대신 小村壽太郞에게 보고한 ゛배일적 한인명부 송부의 건ゝ에,
김하구는 함경도 인물로서 2· 3년전에 경성으로부터 블라지보스또크에 오고 해조신문의 기자를 한 일이 있고
라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김하구는 함경북도 明川郡 출신으로 구한말에 同鄕의 인물인 李容翊의 도움을 얻어 宮內府主事를 역임한 바 있었다. 아울러 1910년에는 이용익의 손자인 이종호의 후원으로 일본에 있는 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김하구는 이용익의 집안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김하구가 해조신문사에서 활약한 것도 이종호의 교섭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 한다.
文選工으로는 朴永鎭을 초빙하였다. 그가 해조신문사에서 일하게 된 경위는 일본측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명치사십일년 재로한인관계 신문병배일행동ゝ 중에서 7월 9일부로 경시총감 환산중준이 외무부장 鍋島桂次郞에게 보고한 ゛해조신문사원의 申供 박영진ゝ에 보면,
자신은 議政府 관보과, 一進會會報 발행소, 大韓日報(일찌기 諺文신문 발행 시대), 廣文社 등에서 植字文選의 직에 歷從하였다. 을사년(지금으로부터 4년전) 5월에 대한매일신보사에 들어가서 문선으로 종사하던 중 지난 융희원년 음력 12월 22일에 황성신문사의 문선 柳九用의 소개로 장지연과 면회했는데 장은 今回 러시아령 블라지보스또크에서 배일주의의 신문을 발간해서 국권회복에 공헌하려고 한다. 국가를 위해서 함께 이 사업에서 일할 것을 권유하므로 여기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블라지보스또크행을 결심하고 여권은 원산항에서 타인의 것을 사서 본년 1월 27일에 도항하였다.
라고 있듯이, 박영진은 해조신문사의 주필로 촉탁된 장지연의 권유로 문선공으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최봉준은 で한보관と이라는 신문사 건물을 신축하였다. 아울러 인쇄기와 활자는 원산에서 1906년 9월에 창간되었다가 1908년 1월에 폐간된 北韓實業新報의 것을 일본인인 吉田秀次郞으로부터 구입하였다.
이러한 노력끝에 1908년 2월 26일에 해조신문의 창간호가 간행되기에 이르자, 재러동포들은 신문의 간행을 적극 환영하였다. 아울러 국내의 황성신문에서도 1908년 3월 14일자 논설 ゛축하해조신문ゝ에서,
以該地情形으로 言폁면 五六年以前에는 凡我韓人及淸人이 駐在該地者가 俄人의 制限을 被폁야 一般兒童이 但 俄語만 學폁고 漢文學習은 不能自由라폁더니 數年前부터 此制限을 開放폁야 我韓人同胞의 啓東學校가 創立되야 敎育上 自由를 得폁니 此는 該地文化開進의 萌芽가 發露폑이라. 吾人의 固有폅 希望이 深폁더니 乃者 有地人士의 通達識見과 公益義務로 一般同胞의 祖國精神을 培養폁며 文明事業을 開導폁기 위폁야 巨疑를 不惜폁고 器械와 活字를 準備폁야 一報館을 建設폁고 民智를 啓發폁며 事業을 增進폁며 國權을 回復평 目的으로 新聞紙를 發行폁야 普通敎育을 擴張폁니 其前塗希望이 一層幷進폁도다.
라고 하여 그 간행을 축하하였고, 일본에서도 역시 유학생들이 간행하는 大韓學會月報에서 文尙宇가 ゛聞海朝新聞發刊有感ゝ이라는 축사를 게재하였다. 또한 미국에서도 공립신보 1908년 3월 11일자 기사에서 ゛해삼위에 거류폁는 동포가 신문을 창간함ゝ이라 하여 그 간행을 축하하였다.
해조신문은 한글로 발행되었다. 그것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대부분 무지한 빈농 또는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과 부활절 다음날만을 제외하고는 매일 간행되는 일간 신문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러시아의 국교가 러시아정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해조신문의 체제는 논설· 잡보· 外報· 電報· 寄書· 소설· 漫筆· 本港情報· 광고· 別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논설에서는 주로 러시아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에 대한 계몽적인 글을 게재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의 정치 상황에 대한 평론도 싣고 있다. 잡보의 주요 내용은 조선 국내의 사정을 전하는 본국통신이다. 중앙의 정치 상황, 지방관의 활동, 그리고 일제의 만행과 의병의 활동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
외보와 전보는 외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해조신문에서는 직접 외국에 통신원을 두고 있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대부분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기사 내용, 미주에서 간행되는 공립신보, 일본에서 간행되는 신문, 러시아에서 간행되는 신문의 내용을 인용 보도하고 있다. 기서는 블라지보스또크나 북한지역에 살고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로 작성되었다. 주요 내용은 국권의 회복에 관한 것이며, 그 밖에 소설· 만필·광고 그리고 별보 등이 있었다.
그러면 해조신문사는 재정적으로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이는 구독료, 광고료, 기부금 등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먼저 해조신문의 창간호에 의하면 구독료는 한장에 러시아돈으로 5전(까뻬이까, ܚܾܹܿܵܺܰ)이다. 일개월 선금은 50전이고, 육개월에는 2원(루블, ܠܱ݃݀) 75전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일년에는 5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해조신문의 발행부수는 400-500부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구독료만으로써는 도저히 해조신문사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고료도 역시 운영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창간호의 본사 광고에서 광고료에 대해,
사호 활자 매월 일행에 오전이오 글자의 다소와 기한의 장단을 따라서 가감함(맞춤법-필자)
이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기부금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인물로 최봉준을 들 수 있다. 그는 북한에서 生牛를 사서 블라지보스또크의 군대와 시중에 판매하는 牛肉商이었다. 한편 최봉준은 800 톤급의 俊昌號라는 선박도 소유하고 있었다. 이 배는 블라지보스또크를 모항으로 하여 청진· 성진· 원산간을 왕복하였고, 때로는 일본의 長崎· 函館 및 중국 上海 등지까지도 운항하는 큰 배였다. 이처럼 생우상과 船主로서 활동하고 있던 최봉준의 재산은 30만 루블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가 매년 1만원씩 해조신문에 자금을 제공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조신문사의 운영은 대부분 최봉준의 기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