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테이크 아웃 드로잉엘 들렀다.
선능의 철망 담장을 끼고 강남구청역 쪽으로 걷는 것만으로도 겨울 낙엽진 능 안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의 낭만도 좋지만 그 곳은 안과 밖이 차단된 그야말로 옛 돌담길의 안온함 만을 느낄 수 있다면
선능에서는 길을 걸으면서는 아름다운 능 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개방감을 맛볼 수 있다.
삼릉 사거리를 지나 삼성동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테이크 아웃 드로잉(Take Out Drawing)은 모리스 위트릴로의 그림 중에
나오는 카페 <라팽 아질>이 떠오른다. <라팽 아질>은 잽싼(민첩한) 토끼라는 뜻이다. 사크레 꾀르 뒤쪽의 생 발벵 거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유명한 카페인데 풍경화가인 앙드레 질이 그린 토끼 간판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전해진다.
부서진 창문, 깨어진 유리창, 얼룩 진 벽체의 도색 등에서 위트릴로 특유의 체취를 풍겨 주고 아름다운 나무숲에
둘러싸인 건물이 농회색 파리 하늘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위트릴로는 이 그림과 똑 같은 구도의 '눈 덮인 라팽 아질'을
그리기도 했다.
<라팽 아질>에는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등이 자주 얼굴을 나타내 한 때는 인상파들의 카페 게르브아와 함께 대조적인
존재로 흥청거렸으나 이 그림은 한적한 시골 풍경을 연상케 한다. 위트릴로라는 이름과 몽마르트를 찾는 사람들에게
명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위트릴로 <라팽 아질>
카페 테이크 아웃 드로잉은 단순히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공간의 차원을 뛰어 넘어 예술을 알리고자 하는 열정으로 선보인
다목적 문화공간이다. 카페 테이크 아웃 드로잉에서 <라팽 아질>이 연상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드로잉을 세상 밖으로 테이크 아웃 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곳 분위기는 사랑방 같은 편안함이다.
한 쪽 벽면은 전체를 전시공간으로 꾸몄고 다른 한 쪽은 방석이 준비된 계단 식 나무 판 마루에서 한적하게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플로어에는 심플한 판재의 탁자와 편안한 의자가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입구 카운터 위와 탁자에는 크고 작은 엽서와 메모지가 놓여있어서 누구나 차를 마시며 그림이나 메모를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카페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Take out Drawing News라는 카페 소식지가 비록 타블로이드보다 작은 정사각형
낱장이지만 한 달에 한번 꼴로 발간되어 이 카페에 오는 손님들이 읽어 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군데의 갤러리나
문화시설에 배포되기도 한다.
전시벽면
간행물, 엽서, 메모지
실내는 바닥과 천정이 블랙 톤으로 처리되어 있고 특히 천정은 닥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답답하지 않고
조명도 요란하지 않다. 전시공간인 벽면에는 독특한 주제의 신선한 전시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전문 큐레이터에 의한 틀에 박힌 전시가 아닌 어찌 보면 전위적인 설치미술 전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손님이자 관객들의 작품참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카페에는 시인이자 건축가 함성호의 이색 전시회 '불만카페'가 열리고 있었다.
"당신의 건축에 당신의 시에 불만 있습니다."라는 전시회 로고가 눈에 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입구 왼쪽 벽에서 시작한 검은 스트라이프 이미지가 스무 평 될까 싶은 벽면에 이어져 있다.
그 검은 줄을 경계로 시 원고와 설계 드로잉 수 십 점이 점점이 붙여져 있다.
완성된 작품보다는 시와 건축의 생산과정이라 할 시작메모와 설계 밑그림들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그런 창작 과정을 내 보여주고 관객 또는 독자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도록 했다.
말하자면 작가와의 대화를 필담으로 하는 셈이다.
문화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의 생각과 불만을 터놓는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메뉴판, 엔틱한 엠프, 방석이 있는 계단식 마루
일방적인 감상이나 사용만을 강요받아 온 예술작품의 세계에서 고객만족(Customer Satisfaction)개념을 도입한 시도라 할까?
이 카페는 작년 11월 오픈 이후 지금까지 3~4주에 한 번씩 드로잉 전문 작가의 작품 전시가 열렸으며 손님들이 차를 마시며
그려 낸 드로잉을 대상으로 공모행사가 벌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가끔은 전시행사와 함께 이벤트가 준비되기도 한다.
이 날도 건축가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의 건축주들의 담소모임이 마련되어 있었다.
시인이 설계한 건물 7채에 살고 있는 집 주인이 나와서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소비자 불만을 듣는 자리이다.
다음 날은 부산 INDIGO서원의 청소년들과 강정 성기완 심보선 등 시인들이 이 시대 문화에 대한 토론회를 열고
다음달 에는 콘서트와 시낭송회 등이 예정되어 있다. 카페라는 상업공간이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이런 류의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첫댓글 "카페 테이크 아웃 드로잉"이 인터넷신문 조선.com에 오늘의 블로그로 추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