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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門歌辭次李太白鳴皐歌韻 (1) |
李白의 「鳴皐歌」를 次韻하여 鹿門을 노래한 辭이다. 鹿門은 저자가 노년에 精舍를 짓고 제자를 가르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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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歸去來辭 (1) |
陶淵明의 「歸去來辭」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지은 辭이다. 자신의 뜻이 시류와 맞지 않아 전원으로 돌아와 天道를 따른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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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木賦 (2) |
楚王이 匠石에게 들보에 적합한 재목을 고르게 하였는데, 장석이 海山에 있는 나무를 가져다 10년의 공력을 들여야 최적의 들보를 만들 수 있다고 하자 楚王이 난색을 표명하였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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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筮賦 (6) |
꿈에서 ‘朱鳥之休’라는 점괘를 얻은 후 주저없이 세상에 나아가 보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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彈鋏賦 (7) |
‘驩’이 칼을 튕기며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했다는 고사를 모티브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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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復志賦 (8) |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전원으로 돌아가 初心을 지키며 훗날을 기약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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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9) |
擬古(九首), 江上女子歌, 薌娘謠, 禹篆歌, 文山契飮詩(四言, 幷序), 北風行贈黃龍瑞, 臘月校朱子大全奏箚有感用先生感事韻仰呈蒼雪齋權公-斗經-案下, 石泉雪夜同權晦彦-東著-步候蒼雪齋歸路有吟謹呈軒下, 丁酉元日晨起讀周官司徒篇有感, 孫上舍長文-景郁-輓, 長安行, 拘犢洞謠, 輓人(代作), 輓劉諮議-後章(代人), 次金遠澄-庚植-和柳州贈吳武陵古詩投惠韻, 鄭進士洛瑞-游蓮-輓, 先立小齋北柱戱題, 次陶集有會而作, 碓樂(三章 八句, 四言, 幷小序), 己亥元日, 李士淳壁上有二畵鷹, 酒泉郵軒醉呈主人詞案, 石泉次權一甫-萬-韻, 昔有蘇不韋行(四十章), 鹿門雜詠(二十首), 荷塘先生權公-斗寅-輓, 荷塘先生權公輓(代人), 題小窩, 次陶集飮酒(二十首), 邊君元伯-尙勳-治園作亭要余作名堂記已而又索銘詩余嘉其意爲賦詩(八章 章八句, 四言), 吳護軍-永基-慶席詩, 九玉詠(梅, 竹, 松, 菊, 蓮, 梧, 柳, 月, 方寸), 黃護軍輓, 鳳城金丈-麟聖-輓(幷序), 贈扶安金上舍金仲習-敏學, 晴沙權公-斗基-輓(九章 章四句, 四言), 西歸巖梅始開用晦翁梅花韻, 巖齋初夏步金學澄-金景海-韻還寄, 病臥巖齋次晦翁韻(二首), 夏夜聞雨, 讀朱先生十二辰詩就次其韻, 海估詞(二首), 題權子剛-正忱-稿後, 甲辰仲春讀武夷櫂歌有感敬次, 敬次卜居韻, 病中次老杜懷東柯三首示金德興兼呈金靈徵-瑞一-蓋余上洛移棲之計久而未就因以致意, 洪濟庵, 靑玉洞, 黃池穿石, 靈隱寺次宋考工之問韻, 鬱陵島, 聖留窟, 蒼雪齋權公輓, 李察訪輓, 李上舍-㻋輓, 金章遠-漢緯-寄長牋盛言山居景味又贈一絶就次其韻推廣書意爲三絶以資山間一噱(看花, 釣魚, 自詠), 和顔延之五君詠(阮步兵, 稽中散, 阮始平, 向常侍, 劉參君), 和陶靖節形影神(幷小序, 形贈影, 影答形, 神釋), 丙午暮春旣望陰寒倍苦獨對梅花無聊敬次晦翁先生和東坡韻, 送春行, 任國老-命耈-矛亭敬次蒼雪齋韻, 曹處士仁伯-善長-輓, 敬次李龜厓文丈-琓-纖溪契飮後寄惠韻(三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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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河同年應世輓, 己酉元月旣望琓月耕巖亭分韻得到字, 次權晦彦月字, 琴表兄季良-最-輓歌(2首, 幷小序), 荷塘先生夫人成氏輓(十三章, 章八句 四言), 茅山李公-棟完-輓, 浿上歌送柳允卿-升鉉-之任龍岡, 寄呈朴述齋-夢徵-檀香枕, 道淵書院六詠(景賢祠, 愼獨齋, 誠正堂, 日新齋, 時習齋, 春風樓), 三月晦將向道院仍欲經營鹿野有拘未果輒次晦翁遊石馬出字韻以見意, 巖梅暮春始開偶記退陶先生爲陶山梅解嘲爲賦古詩用朱夫子次張彦輔賞梅韻, 病餘讀朱夫子詩端居倦時暑竟日掩柴門牕風遠飊至竹樹淸陰繁靜有圖史樂寂無馬車喧玆焉愜所尙難與世人論正會得病翁齋居心事也諷誦之餘仍分韻得四十絶, 桃麓八景(重眉過雨, 巫峽歸雲, 東臺巖花, 南沜晴楓, 中山落照, 翼浦漁火, 淥潭秋月, 孤山松雪), 丁未仲夏浣重到鹿門占視精舍基址仍成古詩用朱先生行視武夷精舍作韻, 溪齋喜李濟仲-仁溥-柳君實-春榮-二兄至敬次朱夫子歲晩燕集韻同賦, 三溪上元夜琓月呼韻共賦, 醉時雪月歌寄呈松坡詞案, 琴君伯春送盆梅喜次晦庵和東坡梅花三疊韻, 蓬萊歌送姜淸甫-再淑-之關東, 溪齋感事十九絶示諸君, 又成五絶, 巖社碧梅今年憔悴無生意至春末略開, 飛津巖臺, 淸凉北洞, 敬次晦翁先生和尤延之廬山十四詠-幷序(白鹿洞書院, 折桂院黃雲觀, 楞伽院李氏山房, 棲賢院三峽橋, 西澗淸淨退菴, 臥龍菴武侯祠, 萬杉寺, 開先嗽玉亭, 簡寂觀, 歸宗寺, 陶公醉石歸去來館, 溫湯, 康王谷水簾, 落星寺, 敬次南嶽唱酬詩韻(四十九首, 幷序), 玉山, 懸流壁, 雙淸河, 淸凉山月歌, 喚仙庵, 溪齋同濟仲老兄讀忠庵集集中以志事惜日短愁人知夜長爲韻賦古詩十首三復慨然仍次其韻, 密庵李公-栽-晩, 首比贈李子建, 新院別吳達夫-三達, 夜下鹿門贈金樞伯-光斗, 鹿門精舍新詠十五首, 鄭塤叟-萬陽-輓, 四斤嶺待一甫, 一甫馬上詠陶山六谷, 答一甫問周禮, 晩嶺次一甫, 玉龍潭, 松雲吟, 鹿門精舍勸牓, 代書謝寄東厓李公-浹, 吳同知-永基-輓, 秋懷次韓詩韻十一首, 草堂金處士-鏞-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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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龜厓李公輓, 文山文會唱酬四首, 泉聲岳色引八首(幷小序), 江齋書懷二首, 蘿蔔歎, 耳目歎, 乙卯二月五日在鹿門讀朱子詩用靖節斜川故事遊石馬以陶公卒章分韻赴試跪讀三歎不覺千歲之遠孤坐忘磯石上敬次先生韻及陶公詩, 山中八恨解十六絶, 金參奉光甫-景溫-輓, 權直夫-正臣-輓, 送李徵君平仲-重光-赴顯陵三絶, 精舍爲回祿所焚歎, 濟仲老兄用武夷唱和韻漫此和浼, 厚園直舍偶閱先生案見聽松花潭二老皆除陵官不起餘風有足愧人感吟一絶, 北壁謠, 贈一師, 顧齋李公輓, 李士直-栐-輓, 送金祥翁-瑞節-入覲耽羅, 漢拏山歌奉呈瀛洲仙閣, 李伯仁-仁培-輓, 次柳君實石溪堂詠, 鹿門精舍重修勸牓, 遊仙雜詠十五首, 齋居雪夜同權孟稱-大中-夜話有懷寺中讀書諸友用退陶韻二首, 至月之望金鶴皐仲綏-履萬-來訪寢齋書示馬上所占三絶拼和, 次鶴皐名山記十韻, 金濟州士達-攸-輓, 和鄭公述-弘祚-二首, 金天集-汝鏜-輓歌十五章, 次孟稱遊仙洞十三韻(幷小序), 莊園直廬感吟二首, 越中懷古八首, 朱右-寏-輓, 金北壁翁-弘濟-輓歌三首, 送權一甫入洛三首, 鵲噪二首, 李汝行-仁積-輓, 雙鳥吟酬柳君實, 過龜潭望丁徵君-時翰-宅有感, 瀟湘八景-題雙碧堂(小屛), 李桃村舊宅(二首), 李懶隱-東標-贈職詩(幷序), 權玄升-灝-輓歌, 柳君七-錫斗-輓(三首), 病中偶見蘇君-凝天-白馬懷古律詩有感仍次右亭聯句覽物懷舊之作知友和酬當用此意而率皆致意於不侫要非不侫所敢奉留者忘拙呈二律, 申進士國叟-命耈-輓, 李聖能-仁濟-輓, 送洪旌義-楀-之任詩(幷序), 金顯甫-良鉉-輓, 權一甫輓(五首), 金稚和-光協-輓, 南上舍拳石歌, 贈別辛君而秀-德鍾(幷序), 題權士兢-正雄-家木枕, 溪齋聯句, 溪齋納凉聯句次韓詩韻, 二樂樓聯句, 東泮秋夜聯句, 東歸聯句, 石泉亭同一甫聯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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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改冶隱諡號疏 (1) |
冶隱 吉再의 諡號를 개정하고 籠巖 金澍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한 소이다. 길재의 절의를 추모하여 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그가 조선의 성리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더욱 크다고 평가하고, 이에 걸맞게 시호를 개정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고려 공양왕 때 명나라에 갔다가 조선의 개국 소식을 듣고 귀국하지 않은 金澍의 충절을 소개하고, 시호를 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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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嶺南士林請勿毁院祠疏 (5) |
영남의 사림이 서원과 사우를 훼철하지 말 것을 청한 소이다. 서원의 남설로 1714년 이후에 설립한 서원과 사우를 모두 훼철하라는 왕명이 있었는데, 영남에서는 서원을 신설하지 않고 追享을 하고 있고, 서원에 冒屬한 良丁의 수도 많지 않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탁할 곳은 學舍 뿐이라고 주장하며 훼철에 반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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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松月齋李公論王道表 (10) |
松月齋 李時善(1625~1715)이 「王道表」를 논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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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進士士行 (17) |
일가인 李廷揚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宗族의 쇠락함을 우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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呈巡相論洪氏旌閭文 (18) |
관찰사에게 열녀 홍씨의 정려를 청한 글이다. 홍씨는 洪爾遠의 딸로, 鎭川에 사는 李命寅과 결혼하였는데, 남편이 한 달여 만에 사망하였다. 뒤에 간음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누명을 쓰게 된 홍씨는 가슴과 배를 드러내 보이며 무고를 증명하였으나 이를 치욕이라고 여겨 결국 자결하였다. 죽던 날 推官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을 모함한 시아버지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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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少章 (21) |
權斗絃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경 출사하는 권두현에게 自守와 독서를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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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少章 (22) |
권두현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경하는 권두현에게 自守를 당부하고, 「心經續後論」을 찬술한 崔景重과 교유하도록 권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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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濟仲 (25) |
李仁溥(1665~1737)에게 보낸 편지이다. 鄕約의 조목에 대하여 의견을 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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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濟仲 (25) |
李仁溥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신이 厚陵參奉에 제수되어 상경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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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章遠 (25) |
金漢緯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한위가 부친의 뜻을 잇지 못하고 유랑하며 자포자기하는 것을 안타까와하며 독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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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士能 (26) |
金光國에게 답한 편지이다. 자신의 부친이 50세 이후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였고, 자신도 지난 번 과거를 치르고 돌아오면서 다시는 과장에 출입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하며,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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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與金士能 (27) |
김광국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이다. 서원의 재정이 부족하다고 년초의 齊會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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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士達 (30) |
金攸가 제주목사로 떠날 때 보낸 위로의 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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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振伯 (32) |
1735.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문과 합격을 축하하고, 자신은 이주할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근황을 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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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振伯 (33) |
金聖鐸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성탁이 어떤 직임에 제수된 후 時論 때문에 체직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상경하여 상황을 보아가며 사직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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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振伯 (33) |
1738. 김성탁이 李玄逸의 신원소를 올렸다가 정의현에 유배된 후에 보낸 위로 편지이다. 經書를 읽으면서 古人의 事業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자신은 새로 거처를 마련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이전의 거처로 돌아와 있다고 근황을 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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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振伯 (34) |
유배 중인 김성탁에게 보낸 위로 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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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振伯 (35) |
유배 중인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신은 酉谷에 와서 侍病을 하고 있는데 虛名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곤혹스러우며, 春陽 등지에서 거처할 곳을 찾고 있다며 근황을 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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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一甫 (1) |
權萬(1688~?)에게 보낸 편지이다. 鹿門이 좁고 경작할 만한 땅이 적어서 사람들과 함께 태백산 중의 黃池로 이주하여 漢의 屯田法과 같이 하여 토지를 병작하고 鄕約을 시행하여 교화를 펼쳐보려 한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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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一甫 (3) |
權萬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黃池로 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하였다. 權萬이 이주를 만류하며 하필 屯田法을 따르느냐고 힐문하자 둔전처럼 개간을 한 후에 10여년이 지나면 井田과 均田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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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一甫 (6) |
權萬에게 보낸 편지이다. 절차탁마하여 小人으로 전락하는 우를 범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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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一甫 (7) |
권만에게 보낸 편지이다. 4~5명의 젊은이들과 《小學》, 《大學或問》, 《中庸》, 《朱書》를 읽고 있는데, 흔연히 깨닫는 바가 있어서 수 십년 동안 이런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며, 朱書와 독서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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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一甫 (9) |
권만에게 보낸 편지이다. 《易經》을 읽으면서 주의해야할 것들을 당부하고, 卦爻의 大傳에 힘쓰면서 그 뜻을 궁구하라고 조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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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幼澄 (10) |
金景瀗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경헌이 유배를 떠나자 풍토가 다른 지역에서 飮食과 기거를 조심하며 희노로 氣를 해치지 말고 독서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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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齋儒 (11) |
居齋 儒生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관찰사 趙顯命이 齋儒들을 선발하여 서원에서 講學하게 하였는데, 저자 이광정이 都訓長의 직임을 맡게 되었다. 이 편지는 직임을 수락한 후 居齋節目을 마련하면서 그간의 경과와 자신의 포부를 밝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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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趙方伯 (12) |
경상도 관찰사 趙顯命(1690~1752)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현명이 마련한 권학절목에서 미비한 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도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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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靈徵 (14) |
金瑞一에게 보낸 편지이다. 참봉으로 재직 중에 많은 빈객을 접대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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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靈徵 (16) |
김서일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김서일이 편지에 函丈과 小子로 칭한 것이 師弟의 의리에 비추어 적절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서로 朋友로 대하자고 제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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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靈徵 (17) |
김서일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서일이 堂記를 부탁하였는데, 齋는 戰兢, 軒은 水月로 이름지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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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士兢 (18) |
權正雄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정웅이 《孟子》를 읽고 「浩然章」을 未發과 已發로 설명한 데 대하여 조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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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士兢 (19) |
권정웅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정웅이 文章에 뜻을 두자 韓愈와 柳宗元의 문장을 공부할 때의 유의할 점을 지적해주고, 문장보다는 성리학의 法門에 뜻을 두는 것이 낫다고 조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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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子剛 (19) |
權正忱에게 보낸 편지이다. 朱書의 공부를 추천하고 주자의 독서법에 따르면서 자신의 역량을 참작하여 공부를 계속하면 성취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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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景文․休文昆仲 (21) |
大山 李象靖(1710~1781), 小山 李光靖(1714 ~1789) 형제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象靖과 權萬 사이에 있었던 논쟁에 대하여 李象靖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지만 權萬이 朱書를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六經에 뜻을 둔 것이라고 평하였다. 李滉이 《朱子書節要》를 편찬한 것은 朱書를 통해 경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는데, 근래에 朱書를 읽는 자들은 헛된 명예만 탐하고 六經에 뜻을 두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朱書 중심으로 공부하는 이상정에게는 六經과 四子를 더욱 궁구한 후에 訓詁와 朱書를 함께 공부하도록 하였고, 經書 중심으로 공부한 權萬에게는 朱書도 같이 공부하도록 조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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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辛與則問目 (24) |
辛師錫이 보낸 喪禮의 問目에 대한 답변이다. 古禮라도 시속에 맞지 않는 것은 행할 수 없다고 하며, 衰服․方笠․廬幕․墓祭․禰祭 등의 변례에 대해 설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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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蔚珍士林 (25) |
蔚珍의 사림들에게 보낸 답서이다. 鄕賢祠의 祭文을 지은 후 位次問題로 힐난을 받게 되자 鄕賢祠의 位次는 主配를 구분하지 않고 列享하는 것이 관례라고 해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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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退甫 (26) |
金樂行에게 보낸 답서이다. 한당의 문장은 몇몇 대가를 제외하고는 식견이 비루하여 유의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六經과 四書에 매진하여 근본을 두터이 한 후에 漢唐의 문장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였다. 이어 李象靖과 權萬의 논쟁을 평하면서 古人之學에 더욱 매진하도록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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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永年 (27) |
鄭壽延에게 보낸 답서이다. 정수연이 西岡에 가서 편지를 보내오자 遊山이 讀書와 같은 공부라고 격려하고, 자신은 經書을 읽고 있다며 근황을 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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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仲協 (29) |
金載應에게 보낸 답서이다. 李滉이 공부하던 淸凉山 白雲庵의 유지에 초가 5-6간을 지어 朱書와 퇴계문집을 강론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자신도 이 일이 성사되면 좋겠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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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張道應 (30) |
張緯邦에게 보낸 답서이다. 白雲庵의 匠役이 거의 끝났고 봄에 날씨가 풀리면 담장과 지붕을 마무리할 예정인데, 僧舍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완공 후에 백운암에 모여 운영의 방도를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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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士安 (31) |
權正宅에게 보낸 편지이다. 어떤 이의 문집을 교정을 본 후에 權正忱(字 子剛)과 다시 논의하라고 권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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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人 (31) |
어떤 이가 보낸 疑義에 대한 답서이다. ‘朞三百’, ‘洪範’ 등의 질문에 대해 李德弘의 懸吐를 참고하거나 諺解本을 따라 읽어보라는 등의 조언을 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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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人 (33) |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가 지은 글을 보고 문장이 李東洲(미상)와 비슷하다고 평하고, 韓愈의 文과 司馬遷의 《史記》는 字句가 六經에서 나와 俗文과 달리 古文에 가까우므로 이를 통해 古文의 正法을 익히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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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人 (34) |
어떤 이에게 보낸 답서이다. 《大學》과 《中庸》을 읽고 있는 이에게 선배들의 독서법은 먼저 正文을 읽은 후 章句를 읽고 그 다음에 小註를 읽었는데, 지금은 正文과 章句를 함께 읽어 經意를 스스로 깨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顔子처럼 겸손한 자세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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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人 (34) |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가 문장이 뛰어나지만 문장은 유자들이 소중히 하는 바가 아니고, 經世에 뜻을 두어 算數와 天官, 握奇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小藝는 經書에 매진하여 根本이 서면 저절로 따르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우선 經論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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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伯兒持 (35) |
아들 持에게 보낸 편지이다. 집을 떠나 공부를 하는 아들에게 독서를 게을리한다고 질책하고 司馬遷의 《史記》를 읽도록 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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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持 (36) |
아들 持에게 보낸 답서이다. 科擧의 시행 방식이 士子들을 욕되게 한다고 비판하고 자신과 아들의 응시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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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三兒拄 (36) |
셋째 아들 拄에게 보낸 편지이다. 山房에서 독서 중인 아들을 訓戒하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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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拄 (37) |
절에서 독서 중인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필요없이 출입하지 말고 靜居하도록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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梓材 (1) |
《尙書》의 「梓材」篇에 대한 논설이다. 梓材篇은 爛簡으로 분류되어 글이 불완전하여 文義를 통달할 수 없다고 인식되는데, 이 글은 周 武王의 동생인 康叔의 말로, 완전하게 남아 있다면 伊傳 周召의 글과 다름없을 것이나 爛簡으로 분류되어 武王과 康叔의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고 애석해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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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無衣 (2) |
《詩經》 秦風의 無衣篇에 대한 논설이다. 平王이 문무왕의 유업을 잇지 못하고 구읍을 秦에게 넘겨 준 것을 개탄하고 무의편의 王을 襄公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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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魏公子無忌請救邯鄲奏 (3) |
魏의 공자 無忌가 邯鄲을 구하기를 청한 奏文의 擬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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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霍光遣任立政等招李能書 (6) |
霍光이 任立政等을 보내 李能을 부른 書의 擬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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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讐說 (8) |
영남의 어떤 선비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일에 대한 논설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갔다가 원수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처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편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자신이 남편을 대신하여 죽을테니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결국 아내는 죽고, 남편은 장인을 고발하여 원수를 갚았고, 장인은 딸 때문에 관의 용서를 받았다. 이 일이 알려진 후 자신이 살기 위하여 원수를 용서한 것이 효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저자는 관가에 알려 처벌한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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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玉巖居說 (10) |
九玉巖에 대한 논설이다. 평소에 玉을 좋아하여 서재를 짓고 九玉巖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九玉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를 문답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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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可遠字說 (11) |
權思近의 字 可遠에 대한 논설이다. 近思를 통해 먼 곳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에서 字를 可遠으로 지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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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檄 (12) |
호랑이에게 보낸 격문이다. 나라 안에 생장하는 호랑이도 왕의 신하이므로 陵寢을 침범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고, 호랑이도 생명을 가진 자라 갑자기 소탕할 수 없어서 개 한 마리를 주며 미리 고하니, 격문이 도착하는 즉시 먼 곳으로 떠나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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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白雲庵堂室圖 (12) |
청량산 백운암의 당실도에 대한 題文이다. 도산서당의 제도를 따라 齋와 軒을 배치하고, 이름을 淸凉精舍로 지었으며, 朱書와 이황의 문집을 비치하여 학자들이 講讀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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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漁隱堂室圖 (13) |
漁隱의 당실도에 대한 題이다. 漁隱은 蘿溪의 하류에 있는데 낚시하는 즐거움에 늙어 가는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漁隱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漁隱은 저자가 노년에 은거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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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溪書院居齋勸諭文 (13) |
1746. 《近思錄》의 강독을 알리는 글이다. 앞서 국왕이 권벌이 소장했던 《近思錄》을 열람하고 新秩을 하사하여 삼계서원에서 강독한 적이 있는데, 다시 각 里와 面에서 유사를 정하여 강독하고, 사맹삭에 삼계서원에 모여 通讀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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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齋節目 (14) |
삼계서원의 居齋에 대한 절목이다. 유생은 15세에서 30세까지를 원칙으로 하며, 매월 朔望에 모여서 背講을 하고, 六經과 四子 性理書를 우선으로 하되 틈틈이 史書, 諸子書를 읽는다는 조항 등을 수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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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經問答學子 (16) |
六經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정리한 글이다. 세속에서 《易》, 《詩》, 《書》, 《春秋》, 《禮記》, 《周禮》를 六經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周禮》를 제외한 五經만을 주로 하였으나 성인의 글인 六經에서 하나를 폐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평하고, 이어 《禮記》는 儀禮에 대한 傳이므로 《儀禮》가 육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易》은 周敦頤의 《太極圖通書》, 程頤의 《易傳》, 朱熹의 《本義啓蒙》가 나온 이후에야 명확한 이해가 가능해 졌는데, 현재에는 古文과 程頤의 《易傳》을 주로 하면서 한 두 행을 암송할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詩經》은 古樂이 전하지 않아 音響과 節奏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性情은 비슷하므로 차분하게 반복하여 읊으면 자연스럽게 聲과 氣가 和할 것이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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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慕堂詩序 (19) |
永慕堂詩의 서문이다. 외숙이 외조부가 지은 茅堂을 이건 증축하였는데, 노년에 이르러서도 부모를 더욱 그리워하여 永慕堂이라고 편액하고, 자신에게 題詠을 부탁하였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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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蒼雪齋往高山序 (20) |
1721(?). 蒼雪齋 權斗經(1654~1724)이 高山察訪으로 떠날 때 지은 서문이다. 금강산은 천하제일의 명승으로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는데, 권두경은 68세로 고산찰방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남여를 타고서라도 풍악의 만이천봉을 밟아 평생의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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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金幼澄責陽德序 (21) |
평안도 陽德으로 유배가는 金景瀗을 송별하면서 쓴 서문이다. 김경헌은 안동에 세우려던 김상헌의 서원을 허문 일로 양덕에 유배되었는데, 曺好益(1545~1609)이 향대부의 미움을 사 江東에 유배되었다가 임란 중에 敵愾의 공을 세웠던 고사를 들어 김경헌을 격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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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別金成仲序 (23) |
金鎔과 헤어지면서 써 준 서문이다. 김용은 선산 사람으로 冶隱 吉再의 諡號 개정을 청하는 상소를 부탁하러 왔다가 주왕산의 비경을 본 경험을 들려 주었다. 저자는 자신도 가보고 싶지만 노년에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김용의 이야기를 담아 이 글을 써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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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山文會錄序 (23) |
문산에서 제자들과 가진 講說 모임을 기념한 《文會錄》에 붙인 序이다. 古書와 義理에 대해 토론하면서 세운 뜻을 배양하면 옛날의 군자와 다름없을 것이라고 격려하고, 근래의 학문이 선배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쉽게 논단하고 억설을 주장하면서 실천 궁행에 힘쓰지 않는다고 경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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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權士安直章陵序 (24) |
章陵 참봉으로 출사하는 權正宅을 송별하면서 쓴 序文이다. 풍속이 능소의 재직을 벼슬길에 나아가는 지름길로 여긴다고 비판하고, 날마다 성현의 책을 읽고 익히며 교유를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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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金生序 (25) |
金生을 보내면서 쓴 서문이다. 김생이 부친의 상을 당하고 자신에게 의탁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김생의 뜻이 굳지 못함을 지긋이 나무라며 돌아가서도 스승을 찾아 성취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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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上人詩卷序 (26) |
주왕산의 승려 敏行의 詩卷에 대한 서문이다. 민행의 시가 주왕산의 절경을 그림처럼 묘사하였다고 찬탄하고, 민행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며 그가 주왕산의 정기를 이은 인물일지 모른다고 칭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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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州李氏族譜序 (27) |
1740. 《원주이씨족보》의 서문이다. 족보의 편찬 경위와 가계의 내력을 기록하였는데, 내외 자손이 한 氣를 받아 體를 이루었다고 보고 본종을 상세히 기록하고 외파를 생략하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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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山宋氏世系錄序 (29) |
《덕산송씨세계록》의 서문이다. 《세계록》은 宋啓가 15세기 전반에 德山에서 榮州 龜臺로 복거한 이후 6-7대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송계 부자의 행적을 소개하고 송계의 風流와 節槪를 칭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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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寧余氏族譜序 (30) |
《의령여씨족보》의 서문이다. 여씨의 내력과 족보의 편찬 경위를 소개하였는데, 족보를 중수한 정섭의 위업을 칭찬하면서, 收族은 귀천과 원근과 내외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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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儀常變序 (31) |
湖岩 柳春榮이 편찬한 《禮儀常變》의 서문이다. 《朱子家禮》가 미완성인 채로 남은데다 습속이 변함에 따라 선유들의 예설이 서로 모순되어 예설에 밝은 자들도 득실을 두루 살피기 어려운데, 유춘영이 이 때문에 禮의 常과 變을 나누고 주자의 《가례》를 經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선유의 설을 채록하여 《예의상변》을 편찬하였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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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說類編序 (33) |
四勿齋 金時泰가 편찬한 《諸先生禮說類編》의 서문이다. 이 책은 《주자가례》의 절목에 따라 14家의 예설들을 분류하여 편찬하였는데, 종증손인 金弘業이 5책 10권으로 간행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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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別洞先生遺卷後叙 (34) |
別洞 尹祥(1373~1455)의 遺集에 대한 발문이다. 윤상의 행력과 학덕, 문집의 간행 경위를 소개하였다. 윤상은 經學에 밝아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經述과 文章이 일대의 최고였다고 평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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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氏二世遺稿叙 (35) |
유성룡의 후손인 上舍公과 柳蘭皐 부자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두 사람은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유성룡의 가르침을 이어 덕행이 있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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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川處士文集序 (36) |
金尙鼎의 문집인 《谷川集》의 서문이다. 김상정은 맹자가 말한 豪傑之士같은 인물로 글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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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巖遺集序 (1) |
李民寏(1573~1649)의 문집인 《자암유집》의 서문이다. 이민환이 姜弘立과 함께 후금에 항복한 일로 절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세평을 받은 것에 대하여 이민환을 변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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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峯文集序 (3) |
申之悌(1562~1624)의 문집인 《梧峯文集》의 서문이다. 신지제는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蒼石 李埈, 敬亭 李敏宬과 함께 文望이 있었으나 광해군대를 당하여 요직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며, 詩가 性情에서 우러나 가식이 없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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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遺稿序 (4) |
金光粹(1468~1563)의 문집인 《松隱遺稿》의 서문이다. 김광수의 安貧樂道를 예찬하고, 장현광이 김광수의 시를 “흉중에 물을 뿌린 듯 한 점 티끌도 없다”고 평하였다고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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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松集序 (6) |
申弘望(1600∼1673)의 문집인 《孤松集》의 서문이다. 신홍망은 부친인 申之悌(1562∼1624)의 유업을 이은 能子라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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澤隱集序 (7) |
辛時望의 문집인 《澤隱集》의 서문이다. 글은 性情에서 발하였고, 뜻은 꾸밈없이 질박하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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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巖遺稿序 (8) |
金宇宏(1524~1590)의 문집인 《開巖遺稿》의 서문이다. 16세기 후반에 문명의 교화가 극에 달하였고, 그 氣가 모여 영남에서 大賢들이 잇달아 배출되었는데, 김우굉이 그 중 한사람이라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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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菴遺集序 (9) |
柳雲龍(1539~1601)의 문집인 《謙菴集》의 서문이다. 유운룡의 6세손 泳의 청으로 문집을 교정하고 간행한 경위를 약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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黔澗遺集序 (11) |
趙靖(1555~1636)의 문집인 《黔澗遺集》의 서문이다. 조정은 才, 智, 忠, 剛을 겸비하였으나 세상에 널리 쓰이지 못하여 鄭蘊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하였고, 許穆이 서문과 행장을 쓰기 위해 조정의 유집을 가져갔다가 화재로 소실한 사연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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睡隱集序 (13) |
李弘祚(1595~1660)의 문집인 《睡隱集》의 서문이다. 李穡의 후예 중에 문장이 뛰어난 자가 많았는데 이홍조를 그 중 한사람으로 꼽았다. 言이 簡淡하고 氣는 和平하며 辭는 溫正하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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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遺集序 (14) |
李德弘(1541~1596)의 문집인 《艮齋遺集》의 서문이다. 이덕홍은 어려서부터 이황의 제자가 되었는데, 독서에 돈독한 뜻을 두어 이황이 임종에 임박하여 그에게 서적 관리를 맡겼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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荷塘集序 (16) |
權斗寅(1643~1719)의 문집인 《荷塘集》의 서문이다. 권두인은 許穆을 從遊하였고, 학문에 침잠하여 博學하였으며, 문장은 중국의 대가들과 견줄만했고 뜻은 程朱의 유지를 이었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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畏齋遺卷序 (18) |
李厚慶(1558~1630)의 문집인 《畏齋遺卷》의 서문이다. 이후경은 鄭逑의 제자로 특히 《小學》에 매진하였으며, 정구의 言行錄과 年譜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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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陽集序 (19) |
1745. 權益昌(1562~1645)의 문집인 《湖陽集》의 서문이다. 권익창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궁한 가운데서도 李滉을 私淑하여 종신토록 독서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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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松集序 (20) |
趙任道(1585~1664)의 문집인 《澗松集》의 서문이다. 조임도는 金中淸, 張顯光에게 수업하여 立志가 확고하고 義理에 밝았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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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集序 (22) |
金中淸(1567~1629)의 문집인 《苟全集》의 서문이다. 김중청은 이황을 私淑하였으며, 趙穆, 朴承任(1517~1586), 鄭逑의 문인으로 조목의 經學과 박승임의 文章, 정구의 禮學을 승계한 것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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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村世稿序 (24) |
奉化 琴氏 3인의 문집인 《文村世稿》의 서문이다. 《문촌세고》는 文村에 사는 奉化 琴氏 3인(聾叟, 署令府君, 南溪)의 유고를 모은 것으로, 세 사람의 행적과 문집 간행 경위를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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荷華編序 (25) |
1748. 松月齋 李時善(1625~1715)의 문집인 《荷華編》(일명 《松月齋集》)의 서문이다. 이시선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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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村遺集序 (27) |
金宇泰(1647~1708)의 문집인 《道村遺集》의 서문이다. 저자는 木齋 洪汝河의 제자이며, 權萬이 시문 약간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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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笑軒逸稿序 (28) |
1748. 趙宗道(1537~1597)의 문집인 《大笑軒逸稿》의 서문이다. 조종도를 맹자가 말한 대장부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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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城世稿序 (29) |
金弼衡이 선조의 유고를 모은 문집인 《平城世稿》의 서문이다. 김필형은 본관이 순천이며, 문집에는 金湘, 金慶言, 金慶云, 金德南 등의 유고가 수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각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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冲齋先生文集重編序 (31) |
1752. 權橃(1478~1548)의 문집인 《冲齋集》 중간본의 서문이다. 《충재집》은 처음에 2권으로 간행한 이후 후손들이 여러 차례 증보 重刊하였는데, 이때 다시 새로 9권을 편집하였다고 한다. 문집 간행 경위와 권벌의 행적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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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庵遺稿序 (33) |
1753. 盧景任(1569~1620)의 문집인 《敬庵集》의 서문이다. 노경임은 어려서부터 柳成龍의 총애를 입어 그의 조카 사위가 되었고, 그 아들인 修巖 柳袗의 스승이기도 하다. 노경임이 張顯光의 문인으로 文, 學, 德, 才를 두루 갖추었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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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山世稿序 (34) |
1755. 光山 金氏 3대의 문집인 《龍山世稿》의 서문이다. 《용산세고》는 용산에 거주한 惟一齋 金彦璣(1520~1588), 葛峯 金得硏(1555~1637), 晩醉軒 金得䃤(1561~1588), 石塘 金光源(1607 ~1677)의 유고를 모은 것으로, 金彦璣 등의 행적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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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飮酒詩卷序 (35) |
1751. 鄕飮酒禮를 행한 후 엮은 詩卷의 서문이다. 1751년 尹光紹가 수령으로 부임하여 鄕飮酒禮를 행하였는데, 鄕老 한 사람이 誠字로 4字詩를 선창하자 윤광소가 먼저 화답하고 참석자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고, 시권을 만들어 이광정에게 서문을 쓰게 하였다고 한다. 향음주례의 시행 경위와 의의를 약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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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猶齋記 (1) |
琴鳳輝의 서재인 無猶齋에 대한 記이다. 금봉휘는 형제들이 고향에서 떠나지 않고 同居하기로 하고 “형제만한 이가 없다”는 뜻에서 서재를 ‘無猶’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소개하고, 금봉휘의 효우를 칭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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述齋記 (2) |
朴夢徵(1658~1739)의 서재인 述齋에 대한 記이다. ‘述齋’는 조부인 菊潭 朴壽春(1572~ 1652)의 뒤를 이어 修身에 전념하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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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山書齋記 (3) |
固城 李氏의 家塾인 龍山書齋에 대한 記이다. 李士淳이 부친을 일찍 여의고 부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자제들을 위하여 용산서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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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書齋記 (4) |
金萬恒과 蔣元復이 건립한 松隱書齋에 대한 記이다. 김만항과 장원복이 늘 붙어다니며 학업에 몰두하다가 같이 淸道 西山 松林에 서재를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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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江同舟錄 (5) |
李光庭, 金汝錂 등 17인이 빗속에서 達川에서 龍山에 이른 여정을 기록한 글이다. 장대비가 내리는 날 어렵게 배를 구해 출발하였는데, 쏟아지는 빗소리가 방울 소리같아 별세계를 이루었고, 강안의 절벽은 폭포를 이루어 은하수가 길게 뻗친 것 같았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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枕山齋記 (8) |
曹善長이 永川 芝山에 건립한 서재에 대한 記이다. 조선장은 지산 曺好益의 從孫으로 자신을 위하여 정자를 짓고 곁에 자제들을 위하여 枕山齋를 지었다고 한다. 주로 주변의 절경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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稼皐書齋記 (8) |
成君(미상)이 樊稼에 건립한 稼皐書齋의 記이다. 成君이 서재를 신축하고 塾師를 초빙하여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이광정이 자식의 교육이 농사와 같고, 동네의 이름이 樊稼인데 착안하여 稼皐書齋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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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槎記 (10) |
서재의 정원인 桂槎에 대한 記이다. 저자는 정원의 石臺가 종횡으로 펼쳐진 곳을 醉石이라고 하였고, 그 북쪽의 작은 뜰에 바위가 굽이굽이 펼쳐진 곳은 계수나무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하여 桂槎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정원의 풍광과 가꾸는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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耕巖亭記 (11) |
權東著의 耕巖亭에 대한 記이다. 권동저는 경작지에 있던 돌을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그 곁에 정자를 지었는데, 몸소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농사에 힘쓰도록 주변을 독려한다는 의미에서 경암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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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門山水小記 (12) |
안동 小川에 있는 鹿門의 산수를 읊은 記이다. 七里灘․揮手臺․魚樂臺․考槃阿․倚杖巖․石門橋․翠寒臺․仁義石․少微洞․隱見石 등 10경을 노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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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雲庵記 (16) |
1736. 영월 水雲庵에 대한 記이다. 영월 수령 李明坤이 三仙嵒에 있는 절터에 庵子를 건립하였는데, 이광정이 장릉에 부임하여 그 절경을 보고 朱子의 遊山詩에서 글자를 따서 水雲庵이라고 명명할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주변의 절경을 묘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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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浯亭記 (19) |
申泓仲의 杜浯亭에 대한 記이다. 신홍중은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두 아들은 杜溪에 같이 살았으나 양자로 간 아들이 300리나 떨어진 浯溪에 살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杜浯亭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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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臯書齋記 (20) |
朴季雲 형제가 건립한 東臯書齋의 記이다. 世敎가 쇠퇴하고 의리를 강학하지 않아 뜻이 있어도 俗學에 물들게 된다고 우려하고 道學에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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括囊軒記 (21) |
琴德鄰의 括囊軒에 대한 記이다. 금덕린은 아들을 잃은 후에 括囊軒에 칩거하였는데, 우연히 이광정을 만나 記를 부탁하였다. 이광정은 括囊에는 재물을 하찮게 여긴다는 의미와 더러운 물건을 숨겨두고 향기가 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있는데, 두 가지를 다 구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고 하고, 자신은 글과 말을 단속하는 것을 자신의 括囊하는 길로 삼겠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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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西旌閭記 (22) |
李庭獻에게 旌閭가 내리게 된 경위를 적은 記이다. 李庭獻은 榮川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에서 전사하였으나 客將으로 문서에 등재되지 않아 정려를 받지 못하였다. 1741년 현손인 會一과 挺一이 궤에서 편지 등을 발견하였고, 사림들이 수령에게 글을 올려 정려와 추증을 받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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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臺夜遊記 (23) |
1742. 7월 16일 밤 權萬 등과 榮川 龜臺에서 가진 뱃놀이에 대한 記이다. 권만이 소동파의 고사를 이어 葛川 小潭에 배를 띄우자고 청하였는데, 저자가 마침 榮川 龜城에 가게 되어 그 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龜臺 아래의 赤壁이라 불리는 곳에서 30여인이 모여 야경을 완상하며 즐거움을 다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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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思齋記 (25) |
1736. 權萬이 近思齋를 세운 내력을 적은 記이다. 1736년 국왕이 沖齋 權橃이 소장했던 《寒泉遺編》을 빌려보고 후손인 權萬에게 돌려주며 특지로 大帙을 하사하였는데, 권만이 정자의 북벽에 작은 시렁을 만들어 두 책을 같이 보관하며 特旨를 새겨 걸고 이름을 近思齋라고 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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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松亭記 (26) |
1747. 奉化 琴氏의 정자인 雙松亭에 대한 記이다. 奉化 琴氏의 세거지에 雙松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竹牕 琴梧의 6세손인 堉 등이 重修하였다고 한다. 琴氏의 가계와 쌍송정의 내력을 적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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伴鷗亭重修記 (28) |
1740. 고성 이씨의 정자인 伴鷗亭의 중수기이다. 근방에서 李汯(1440~1516)의 歸來亭과 李洺의 臨淸閣이 제일로 빼어나다고 칭하는데, 李肱이 부친의 유지를 이어 귀래정 가까운 곳에 반구정을 지었고, 1740년 李時沆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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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碧堂書畵屛跋 (29) |
雙碧堂(미상)이 소장한 서화병풍에 대한 발문이다. 쌍벽당이 소장품을 정리하다가 서화를 얻어 4첩으로 된 병풍을 만들었는데, 병풍은 洪思濟의 堂額, 梅鶴堂人의 識가 있는 草書, 生綃畵, 䟽庵學士雙碧堂의 序가 있는 서화를 모은 것으로, 당액의 양쪽에 蒼雪學士雙碧堂 12詠이 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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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詩帖跋 (30) |
이광정이 필사한 이황의 《溪山詩帖》에 대한 발문이다. 朴孟瞻이 이황의 《溪山詩集》 草本을 소장하여 이광정이 빌려 보았는데, 10여장에 좀이 먹어 자신이 《溪堂帖》과 《陶山帖》 2책으로 나누어 분철하고 빠진 글씨를 보충한 후 그 내력을 기록하였다. 박맹첨에 부탁하여 《陶山帖》은 자신이 두고 보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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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約集跋 (31) |
1635. 李民寏이 편찬한 《博約集》의 발문이다. 이민환이 《易》, 《中庸》, 《孟子》, 《禮記》, 《家語》 등에서 顔子의 말을 발췌하여 《박약집》을 편찬하였는데, 양이 많지는 않으나 顔子의 평생이 대략 갖추어졌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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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先生文集跋 (31) |
1755. 錦溪 黃俊良의 문집인 《錦溪集》을 중간할 때 쓴 발문이다. 황준량의 문집은 이황이 4권으로 편집하여 간행한 후, 鄭逑가 다시 외집 8권을 편집하였으나 1755년에야 비로소 간행되었다. 문집 간행의 경위와 이황의 황준량에 대한 평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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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年譜跋 (33) |
鄭蘊(1569~1641)의 연보에 대한 발문이다. 정온의 증손 鄭重元이 관계 사적을 수집하였으나 정본을 만들지 못하고 사망하였는데, 재종제인 重復 등이 이광정에서 訂正을 부탁하여 완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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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權孟稱愚溪山水題品記後 (1) |
1723. 權大中의 「愚溪山水題品記」의 後識이다. 권대중이 순흥의 愚溪를 다녀와 기문을 썼는데, 평소에 自得한 바를 산수에 발하여 그 흥취가 세속의 구구한 것과는 다르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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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朴菊潭追先錄後 (1) |
朴壽春(1572~1652)의 《追先錄》에 붙인 後識이다. 박수춘은 임진왜란 중에 부모와 형제를 잃어 7喪을 지내고, 난 후에 밀양에 부모의 장사를 지내고 산아래인 南山村에 살았다. 저자 이광정은 여행 중에 이 책을 보았는데, 柳成龍의 《永慕錄》, 金應祖의 《追遠錄》과 백중을 이룬다고 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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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孝子昌葉行錄後識 (2) |
裵行儉이 쓴 효자 李昌葉(1658~1717)의 行錄에 붙인 後識이다. 이창엽은 효자로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牛黃을 구하였는데, 어떤 상인이 약을 주며 값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창협의 효행과 상인의 선행을 칭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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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權君畊所記先人樊川子行錄後 (3) |
權畦가 쓴 부친 樊川子의 행록에 붙인 後識이다. 樊川子(인명 미상)는 일향에서 학행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직접 교유하지는 못하였으나 1711년 權斗寅이 쓴 樊川子에 대한 제문을 읽고 그 인물됨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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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蓬萊車五山詩帖後識 (5) |
楊士彦(1517~1584)과 車天輅(1556~1615)의 시 2폭을 묶은 詩帖에 붙인 後識이다. 1579년 金誠一(1538~1593)이 순무어사로 함경도에 갔을 때 양사언이 送行詩 1폭을 주었고, 1589년 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갈 때 차천로가 唱酬詩 1폭을 주었는데, 김성일의 후손 金聖鉞이 2폭을 1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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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河丹溪先生遺券後 (6) |
1739. 丹溪 河緯地(1387~1456)의 遺券에 붙인 後識이다. 유권은 하위지가 체포되기 직전 어린 조카 河★〈石+國〉(아명 龜童)에게 잡물들을 상속하게 한 문서이다. 문서의 작성 경위와 조카 龜童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게 된 사연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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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李桃村舊宅 (7) |
외가의 고택에 대한 記이다. 순흥 도촌의 구택은 외가의 6대조가 1455년 경에 지은 것으로, 특이하게 堂을 북쪽에 내고 방을 남쪽에 두어 북쪽을 관망할 수 있게 하였는데, 저자는 6대조가 단종이 쫓겨난 후 스스로 임금을 위해 죽지 못한 신하로 자처하며 거처를 영월쪽을 향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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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次楚漢遺事編題後 (8) |
《楚漢遺事編》에 붙인 後識이다.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유방과 항우를 꼽는데, 관련 기록이 여기 저기 흩어져 전체를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史記》의 本記와 列傳에서 관련기록을 뽑아 《楚漢遺事編》을 엮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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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峯狀後逸事識 (9) |
申之悌(1562~1624)와 관련된 일화들을 적은 글이다. 어릴 때 權泰一, 朴毅長과 같이 書齋의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사망사건에 연루되었는데, 부사가 세 사람의 인물됨이 재상이 될 재목이라고 하며 석방하고 서재의 땔나무도 관에서 공급해 주었다는 일화 등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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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氏家藏大德紅牌識 (10) |
인동 장씨가에 소장된 大德 9년(1305, 충렬왕 31) 張桂의 進士 及第 紅牌에 대한 識이다. 홍패의 형식을 소개하고 고려와 조선의 홍패식과 인선 제도를 비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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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溫齋銘 (11) |
저자의 서재인 淸溫齋의 銘이다. 자연의 순리를 좇으면서 太極의 이치를 깨닫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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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復窩銘 (11) |
貞復窩의 銘이다. 元亨利貞 중 貞의 덕을 찬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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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春軒銘 (12) |
日春軒의 銘이다. 봄의 덕을 예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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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成軒銘 (12) |
玉成軒의 銘이다. 邊柔遠을 위해 지은 것으로, 옥을 다듬는 것처럼 자신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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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契同約箴 (12) |
社契同約을 위한 箴이다. 동약인들이 지켜야할 의례와 규범을 수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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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元日箴 (13) |
1727. 새해 첫날에 지은 箴이다. 54세에 자신을 되돌아보고 행동과 말을 신중히하고 분이 아닌 것을 바라지 말며, 가난을 병통으로 여기지 않고 안분자족할 것을 다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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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家十箴 (14) |
齊家를 위한 箴이다. 雙碧丈人의 병풍에 題한 것으로 모두 10수이다. 事父母․友兄弟․正家室․謹祭祀․接賓友․敎子孫․敦婣睦․和隣里․勤本業․謹租賦를 주제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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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日箴八章 (16) |
1747. 새해를 맞이하여 지은 箴이다. 섣달 그믐 고산서당에서 새해를 맞으면서 노년의 소회를 읊었다. 식구들을 신칙하여 게으름이 없게 하고 人道를 닦아 家政을 지키며 어린 손자들을 가르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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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安襄公畵像贊 (18) |
張末孫(1431~1486)의 畵像에 대한 贊이다. 張末孫은 세조대 이시애 난의 평정에 참가하여 2등공신으로 延福君에 봉해졌고, 畵像의 副本을 하사받았다. 張末孫의 행적과 金宗直, 洪貴達 등의 詩를 소개하였고, 畵像의 표정에 기쁜 기색이 없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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勿也里社上樑文 (19) |
勿也里 鄕社의 상량문이다. 鄕社는 湖齋(인명 미상)를 제향한 곳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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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峯里社上樑文 (20) |
杜谷 洪宇定(1593~1654)을 제향한 九峯里 鄕社의 상량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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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麓廟宇上樑文 (22) |
안동 栢麓廟宇의 상량문이다. 慵齋 李宗準(? ~1499), 訥齋 李弘準, 文峯 鄭惟一(1533~1576), 梅軒 洪俊亨을 제향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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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溪院祠上樑文 (24) |
河緯地를 제향한 丹溪院祠의 상량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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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門精舍上樑文 (25) |
저자의 서재인 鹿門精舍의 상량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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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山書堂上樑文 (26) |
川城 소재 孤山書堂의 상량문이다. 이곳은 지역 사족들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공동으로 건립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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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門重修上樑文 (27) |
저자의 서재인 鹿門精舍를 중수할 때의 상량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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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注書少章招魂辭 (28) |
權斗絃에 대한 哀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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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士行哀辭 (32) |
동성친인 李廷揚에 대한 애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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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君可遠哀辭 (39) |
權思近에 대한 애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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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察訪士達哀辭 (40) |
찰방 李濟兼에 대한 애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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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佐郞源仲哀辭 (42) |
좌랑 金景泌에 대한 애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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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巢權先生移安時告由文 (1) |
松巢 權宇(1552~1590)를 移安할 때의 고유문이다. 권우를 伊溪精舍에서 鏡光書院으로 移配할 때의 고유문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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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溪李署令奉安文 (1) |
저자의 외6대조인 道溪 李某(인명 미상)를 봉안할 때의 봉안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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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田公里社奉安文 (1) |
효자 田公을 鄕社에 봉안한 봉안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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藻溪精舍常享祝文 (2) |
봉화 藻溪精舍의 상향축문이다. 이곳에서는 竹牕 琴梧와 霧隱 朴世重을 제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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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化鄕賢祠奉安文 (2) |
봉화 향현사의 봉안문이다. 英烈公 琴儀(1153~1230)와 廉義公 鄭云敬(1305~1366)을 안할 때 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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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山書院移建奉安文 (3) |
寧海 仁山書院의 이건 봉안문이다. 인산서원은 存齋 李徽逸(1619~1672)을 제향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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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溪精舍奉安文 (4) |
玉溪精舍의 봉안문이다. 이때 桑村 金自粹, 惟一齋 金彦璣, 芝山 金八元(1524~1589), 芝軒 鄭士誠(1545~1607)을 봉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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勿溪書院追享奉安文 (5) |
안동 勿溪書院에 惕若齋 金九容(1338~1384)과 虛白堂 金楊震(1467~1535)을 追享할 때의 봉안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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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吏議杜谷洪先生焚黃祭文 (6) |
1755. 증이조참의 杜谷 洪宇定(1593~1654)의 焚黃祭 제문이다. 홍우정이 척화인으로 이조참의의 증직을 받은 후에 올린 분황제문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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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峯山禳蟲文 (7) |
九峯山의 蟲災를 제거하기 위해 지낸 제사의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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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朴士興文 (7) |
朴君(자 士興, 인명미상)에 대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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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舅琴公文 (8) |
장인 琴德華에 대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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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琴表兄覽世文 (9) |
琴鳳至에 대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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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姑全義李氏文 (10) |
장모 全義 李氏에 대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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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荷塘權先生文 (15) |
荷塘 權斗寅(1643~1719)에 대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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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琴丈文 (16) |
琴丈(인명미상)에 대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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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雪翁文 (17) |
雪翁에 대한 제문이다. 雪翁은 蒼雪齋 權斗經(1654~1724)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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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密翁文 (19) |
密菴 李栽(1659~1730)에 대한 祭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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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龜翁文 (20) |
龜厓 李琓(1650~1732)에 대한 祭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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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月浦李公文 (21) |
月浦 李仁溥(1665~1737)에 대한 祭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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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一甫文 (25) |
權萬(1688~?)에 대한 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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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長子文 (26) |
죽은 장남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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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6) |
죽은 장남의 小祥 때의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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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巖碑 (1) |
忘憂堂 郭再佑(1552~1617)를 기린 비문이다. 창암은 곽재우가 만년에 우거했던 곳으로 祠宇를 세우려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碑를 세웠다고 한다. 곽재우의 비범함과 충의를 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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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巖碑 (3) |
昌寧 聞巖에 辛礎(1568~1637)를 기려 세운 비의 비문이다. 신초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곽재우와 함께 활동한 인물이다. 祠宇를 세우려 하였으나 국법으로 금지되어 碑를 세웠다고 한다. 신초의 가계와 행적을 기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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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判三司致仕孫靖平公遺墟碑銘 (4) |
안동 일직에 세운 孫洪亮(1287~1379)의 유허비문이다. 손홍량은 고려시대 인물로 시호는 靖平이다. 판삼사사로 致仕하여 一直에 거주하였는데,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에 피신왔을 때 왕을 맞이하여 뒤에 궤장과 초상화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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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烈婦朴氏旌閭銘 (6) |
1749. 榮川 皐蘭村에 세운 열부 반남 박씨의 정려비문이다. 박씨는 朴景古의 딸로 聞韶 金弼濟와 혼인하였는데, 남편이 병으로 죽자 22세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1749년 정려가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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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持平三棄堂琴公旌閭銘 (8) |
三棄堂 琴是養(1598~1663)의 정려비문이다. 금시양은 예안현 온계 출신으로 광해군때 폐모논의가 일어나자 외숙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두문불출하였고, 호란 이후에는 奉化 遠遯村에 은둔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1742년 추증과 정려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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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坂碑銘 (8) |
이인좌의 난 때 孫命大(1675~1733)가 팔량치에서 정희량의 부대를 격파한 사건을 기념한 비문이다. 손명대는 운봉 영장으로 이인좌의 일당인 정희량이 거창을 함락시키고 전라도로 진군하려 하자, 인근 속읍의 군사들을 모아 良坂(팔량치)에서 반군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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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進士潭巖先生金公遺墟碑銘 (10) |
九潭에 세운 潭巖 金用石의 유허비문이다. 김용석은 서울 동대문밖에 살다가 처향인 구담으로 이주하였는데,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균관에서 朴演, 孫孝祖, 權柱 등과 鄕約月朔會를 갖고 《小學》을 강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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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凝溪遺墟碑銘 (11) |
軍威에 세운 凝溪 玉沽(1382~1436)의 유허비문이다. 옥고는 김해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대에 집현전 교리 등을 거쳐 청백리에 선임되었으며, 응계(구명 於良)에 이주하여, 그곳에 묘소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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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孝子旌閭碑銘 (12) |
尙州 丹密에 살던 효자 林盛茂(1673~1729)의 정려비문이다. 임성무는 인근에서 효자로 알려져 감사가 戶役을 면제시켜 주었고, 왕은 孝子米를 내렸으며, 李萬敷, 成爾弘, 河瑞龍이 효자전을 지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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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谷碑陰識 (16) |
1748. 洪宇定(1593~1654)의 행적을 기린 비문이다. 홍우정은 병자호란이 나자 태백산 아래에 피난하였다가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산중에 들어가 玉溜庵을 짓고 은거하였다. 1746년 崇禎處士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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氷庫別檢玉公墓表 (17) |
玉璿(1554~1619)의 묘표이다. 옥선은 玉沽의 4세손으로 雲川 金涌이 청백리의 자손으로 천거하여 氷庫別檢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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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白堂金先生墓碣銘 (18) |
寶白堂 金係行(1431~1521)의 묘갈명이다. 김계행은 본관이 安東으로, 50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고, 67세에 김종직(1431~1492)과 교유하여 무오사화에 연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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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晉州判官癡巖裵公墓碣銘 (22) |
癡巖 裵尙益(1581~1631)의 묘갈명이다. 배상익은 본관이 성주이며, 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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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童子墓碣銘 (23) |
1736(?). 李德溥(1680~1695)의 묘갈명이다. 이덕부는 16세에 요절하였는데, 형 李仁溥의 청으로 묘갈명을 썼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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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承訓郎工曹佐郞澤隱處士辛公墓碣銘 (24) |
辛時望(1606~1676)의 묘갈명이다. 신시망은 곽재우의 외손으로 어려서 郭再佑, 郭再棋, 朴純世에게 수학하였고, 趙任道와 교유하였다. 1706년 효자 정려가 내리고 공조좌랑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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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行兵曹佐郞鳩巢權公墓碣銘 (26) |
鳩巢 權聖矩(1642~1709)의 묘갈명이다. 권성구는 안동 출신으로 본관이 안동이며, 어려서 百拙 柳㮨에게 수학하였고, 1678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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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成均館司藝琴公墓碣銘 (28) |
琴聖奎(1636~1700)의 묘갈명이다. 금성규는 禮安 출신으로, 어려서 숙부인 三棄堂 琴是養에게 수업하였고, 1677년 진사시, 167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성균관 사예 등을 지냈다. 증조부 梅軒 琴輔의 뒤를 이어 서예가로 명성이 있었고, 懶隱 李東標, 荷塘 權斗寅 등과 교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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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吏曹參判行工曹參議海月黃公墓碣銘 (31) |
海月軒 黃汝一(1556~1622)의 묘갈명이다. 황여일은 평해 출신으로, 어려서 숙부인 大海 黃應淸에게 수업하였고, 1576년 진사,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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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兵曹參議行陰城縣監畏齋李公墓碣銘 (33) |
畏齋 李厚慶(1558~1630)의 묘갈명이다. 이후경은 창녕 출신으로, 본관이 성주이며,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行義로 李時發과 金宇顒의 천거를 받았고, 내섬시 주부, 음성 현감 등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原從功臣이 되어 병조 참의를 추증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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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齋李公墓碣銘 (36) |
復齋 李道孜(1559~1642)의 묘갈명이다. 이도자는 숙부인 李厚慶과 함께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으로 명망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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挹鶴軒朴公墓碣銘 (38) |
挹鶴軒 朴成範(1568~1654)의 묘갈명이다. 박성범은 본관이 고령이며, 서울 출신으로 榮川에 이거하였다. 1616년 생원이 되고 노직으로 부호군의 증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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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葛溪權君墓碣銘 (40) |
葛溪 權道仁(1661~1735)의 묘갈명이다. 권도인은 효자로 이름이 나 암행어사 박문수의 보고로 정려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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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松趙先生墓碣銘 (1) |
澗松 趙任道(1585~1664)의 묘갈명이다. 조임도는 함안 출신으로 본관은 靈山이다. 金中淸, 張顯光에게 수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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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徵君梧陰成公墓碣銘 (3) |
梧陰 成文夏(1638~1727)의 묘갈명이다. 성문하는 본관이 창녕이며, 167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92년 英陵參奉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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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松庵田公墓碣銘 (5) |
田爾錫(1599~1652)의 묘갈명이다. 전이석은 효자로 이름이 있었으며, 近北精舍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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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徵君墓碣銘 (6) |
道村 金宇泰(1647~1708)의 묘갈명이다. 김우태는 상주 출신으로 본관은 청도이며, 木齋 洪汝河에게 수업하였고, 葛菴 李玄逸의 천거로 光陵參奉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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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左承旨行宗親府典籤金公墓碣銘 (8) |
金念祖(1589~1652)의 묘갈명이다. 김염조는 본관이 풍산이며, 44세에 靖憲公 金壽賢의 양자가 되어 음보로 사산감역이 된 후 진사가 되어 사헌부 감찰, 종친부 전첨 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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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伯仁墓碣銘 (10) |
李仁培(1664~1735)의 묘갈명이다. 이인배의 본관은 載寧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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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窩處士權君墓碣銘 (12) |
謙窩 權蒲(1681~1715)의 묘갈명이다. 권포는 荷塘 權斗寅의 아들로 權斗經, 李琓, 李棟完과 교유하였고, 葛菴 李玄逸에게 수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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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烈婦李氏墓碣銘 (13) |
趙尙觀의 처인 열녀 이씨의 묘갈명이다. 이씨는 李仁培의 딸로 남편이 죽은 후 27세로 자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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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溪李公墓碣銘 (15) |
景退齋 李天相(1637~1708)의 묘갈명이다. 이천상은 영천 출신으로 楡嵒 裵幼悼에게 수학하였고, 「性理後說」, 「性理指南」 등을 저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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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朴子墓碣銘 (16) |
李址의 묘갈명(1668~1748?)이다. 이지는 안동 小川 출신으로, 李再炫의 庶子이다. 4세에 고아가 된 적자 李達時를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다가 성인이 된 후 가산을 모두 돌려 주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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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訓練院僉正權公墓碣銘 (18) |
權克常(1587~1637)의 묘갈명이다. 권극상은 1621년 무과 급제하여, 정축년에 전사하였고, 1737년에 旌閭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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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牕琴公墓碣銘 (20) |
竹牕 琴梧(1486~1573)의 묘갈명이다. 琴梧는 봉화 북지촌 출신으로, 부는 琴致湛, 모는 文節公 金淡의 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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耐軒趙公墓碣銘 (21) |
1751. 耐軒 趙淵(1489~1564)의 묘갈명이다. 조연은 22세에 진사가 되었고, 젊어서부터 詩와 글씨로 이름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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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安宋公墓碣銘 (22) |
宋樀(1602~?)의 묘갈명이다. 송적은 안동 풍산 출신으로, 婢夫를 장살한 동생을 대신하여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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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浦處士李公墓碣銘 (23) |
石浦 李頊(1641~1726)의 묘갈명이다. 이욱은 이광정의 叔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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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通訓大夫順天府使柳公墓碣銘 (24) |
柳英立(1623~1686)의 묘갈명이다. 유영립은 안동 출신으로, 본관이 전주이며, 1651년에 진사, 166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순천부사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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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通訓大夫司諫院司諫蘆洲金公墓碣銘 (26) |
蘆洲 金兌一(1637~1702)의 묘갈명이다. 김태일은 예천 출신으로, 본관이 예안이다. 외조부인 權克諧에게 수학하였고, 16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 사간 등을 지냈다. 갑술환국 때 대간으로 削黜당하였고 뒤에 職牒을 환수받았으나 한거하며 교육에 힘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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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堂鄭先生墓碣銘 (29) |
新堂 鄭鵬(1469~1512)의 묘갈명이다. 정붕은 金宏弼에게 수학하고 南孝溫과 교유하였으며, 20세에 진사,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청송부사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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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巖金先生墓碣銘 (32) |
溪巖 金坽(1577~1641)의 묘갈명이다. 김영은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시국을 개탄하여 낙향하였고, 숙종대 志操와 節槪로 都承旨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文貞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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琵山處士述齋朴公墓碣銘 (34) |
述齋 朴夢徵(1658~1739)의 묘갈명이다. 박몽징은 본관이 밀양으로, 효우와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1735년 李光庭, 李守淵, 金世烈과 함께 영남좌도의 인재로 추천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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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巖處士鄭公墓碣銘 (36) |
平巖 鄭榮振(1672~1708)의 묘갈명이다. 정영진은 거창 출신으로,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고, 「心經續錄」, 「心學傳訣」, 「聖學編」, 「禮說輯錄」 등을 저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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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司甕院參奉崔公墓碣銘 (38) |
崔國璿(1631~1682)의 묘갈명이다. 최국선은 1672년 충신자손으로 천거되어 사옹원 참봉에 제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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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山柳先生墓碣銘 (1) |
巴山 柳仲淹(1538~1570)의 묘갈명이다. 유중엄은 안동출신으로 본관은 풍산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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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士新圃孫公墓碣銘 (2) |
新圃 孫景郁(1665~1710)의 묘갈명이다. 손경욱은 상주출신으로 靑田 李泓逵, 新窩 李在寬에게 수학하였고, 1689년에 진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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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山李先生墓碣銘 (5) |
茅山 李棟完(1651~1726)의 묘갈명이다. 이동완은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1678년 진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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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迂叟金公墓碣銘 (8) |
金鋼(1609~1669)의 묘갈명이다. 김강은 榮川 출신으로 본관은 예안이며, 1635년 생원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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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桃村墓碣陰記 (9) |
李季亨(1435~1528)의 묘갈 음기이다. 이계형은 榮川 桃村 출신으로 文節公 金淡의 외손이다. 勳臣의 후손으로 한양에서 세거하다가 세조 초에 榮川으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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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少章墓誌銘 (11) |
西岩 權斗紘(초명 斗徽, 1668~1717)의 묘지명이다. 권두징은 안동출신으로 권벌의 후손인데, 14세에 고아가 되어 큰형인 蒼雪齋 權斗經에게 수학하여 1710년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71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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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運判官霽山洪公墓誌銘 (14) |
霽山 洪凭(1623~1706)의 묘지명이다. 홍빙은 영천 출신으로, 杜谷 洪宇定의 아들이다. 1676년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어 경기우도 수운판관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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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光山金氏墓誌銘 (16) |
金漢奎(1625~1701)의 묘지명이다. 김한규는 안동 川城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이며, 金念祖의 외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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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厓李公墓誌銘 (18) |
東厓 李浹(1663~1737)의 묘지명이다. 이협은 한성 출신으로 안동에 우거하였다. 許穆, 洪宇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89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1707년 대신의 천거로 정릉참봉에 제수된 후 東宮侍直, 사옹원 봉사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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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菴李公墓誌銘 (21) |
密菴 李栽(1659~1730)의 묘지명이다. 李栽는 영양 출신으로 葛菴 李玄逸의 아들이다. 학문에 매진하여 「朱書講錄刊補」, 「顔曾全書」, 「朱全集覽」 등을 저술하였고, 大山 李象靖과 小山 李光靖이 그의 외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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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鳳城琴公墓誌銘 (24) |
琴弘達(1633~1704)의 묘갈명이다. 금홍달은 봉화 출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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拙修鄭公墓誌銘 (26) |
拙修 鄭泰徵(1656~1714)의 묘지명이다. 정태징은 안동출신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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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川鄭公墓誌銘 (29) |
愚川 鄭侙(1601~1663)의 묘지명이다. 정칙은 안동 출신으로 1627년 進士가 되었으며, 생전에 鶴沙 金應祖, 桑村 金自粹를 勿溪書院에 제향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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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巖金先生墓誌銘 (31) |
栢巖 金玏(1540~1616)의 묘지명이다. 김륵은 榮川 출신으로, 본관이 예안이며, 錦溪 黃俊良과 嘯皐 朴承任(1517~1586)의 문인이다. 1576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시호는 敏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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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運判官朴公墓誌銘 (35) |
朴欐(1531~1592)의 묘지명이다. 박려는 선산 출신으로 본관이 고령이며, 李滉의 孫壻이다. 23세에 사마시에 장원을 하였고, 수운판관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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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金公墓誌銘 (37) |
金榏(1661~1724)의 묘지명이다. 김익은 안동 龜潭 출신으로 본관이 광산이며, 저자 이광정과 막역한 사이였다. 같이 상경하던 중 여관에서 女色의 유혹을 받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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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川處士金君墓誌銘 (1) |
谷川 金尙鼎(1668~1728)의 묘지명이다. 김상정은 본관이 김해로, 葛菴 李玄逸의 문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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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宅三墓誌銘 (3) |
權相儁(1705~1734)의 묘지명이다. 권상휴는 저자 이광정의 문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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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岸處士鄭君墓誌銘 (4) |
松岸 鄭重祿(1678~1732)의 묘지명이다. 정중록은 본관이 동래로 涵溪 鄭碩達, 鄭塤, 鄭箎의 문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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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村鄭公墓誌銘 (6) |
魯村 鄭允良(?~?)의 묘지명이다. 정윤량은 영천 출신으로 본관은 延日이며, 李滉의 문인이다. 金應生과 함께 紫陽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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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雪權先生墓誌銘 (8) |
蒼雪齋 權斗經(1654~1726)의 묘지명이다. 권두경은 안동 내성 출신으로 沖齋 權橃의 후손이다. 167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등을 지냈다. 저서로 《退陶言行通錄》, 《陶山及門諸賢錄》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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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太宰忠毅公大笑軒趙先生墓誌銘 (10) |
大笑軒 趙宗道(1537~1597)의 묘지명이다. 조종도는 본관이 함안이며, 南溟 曺植의 문인이었다. 1596년 함양 군수로 재직 중 황산산성에서 전사하였고, 부인 이씨도 자결하였다. 시호는 忠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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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烈婦李恭人墓誌銘 (12) |
열부 진성 이씨(1678~1732)의 묘지명이다. 이씨는 朴夢祥의 처로 혼인한 지 3년 만에 남편을 잃은 후 홀로 시부모를 봉양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를 극진히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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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八吾軒金先生墓誌銘 (16) |
八吾軒 金聲久(1641~1707)의 묘지명이다. 김성구는 본관이 의성으로, 166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후 남인정권 하에서 대사성․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1694년 갑술환국 후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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惺軒白公墓誌銘 (19) |
惺軒 白見龍(1556~1622)의 묘지명이다. 백견룡은 영해 출신으로 어려서 金彦璣에게 수업하였고 장성하여 李滉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6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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豹隱處士金公墓誌銘 (21) |
豹隱 金懋(1637~1694)의 묘지명이다. 김무는 안동 川城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이며, 유복자로 태어나 외가인 안동 금계에서 樊谷 權昌業에게 수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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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芝村金公墓誌銘 (23) |
芝村 金邦杰(1623~1695)의 묘지명이다. 김방걸은 안동 大瓢里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이다. 16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후 동복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사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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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嘉善大夫兵曹參判行慶尙左道水軍節度孫公墓誌銘 (26) |
孫命大(1675~1733)의 묘지명이다. 손명대는 본관이 一直으로, 1697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인좌의 난 때에 팔량치에서 정희량의 전라도 진입을 차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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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文館修撰金公墓誌銘 (29) |
金汝鍵(1660~1697)의 묘지명이다. 김여건은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이며, 金聲久의 아들이다. 1687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수찬 등을 역임하였고, 1694년 갑술환국 후 明川에 유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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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左承旨英陵參奉權公墓誌銘 (32) |
權霂(1614~1671))의 묘지명이다. 권목은 어려서 苟全 金中淸에게 수업하고, 沖齋 權橃 가문의 宗孫으로 家法을 지키고 제사를 봉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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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副承旨贈吏曹參判梧峯申先生墓誌銘 (34) |
五峯 申之悌(1562~1624)의 묘지명이다. 신지제는 의성 출신으로 본관이 鵝州이며, 1589년 문과 급제하여 창원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 龜尾에 우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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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道翁金公墓誌銘 (37) |
望道翁 金汝鎔(1662~1735)의 묘지명이다. 김여용은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이며, 金聲久의 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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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敎郞成均館典籍鄭公行狀 (1) |
鄭鐸(1659~1718)의 행장이다. 정탁은 봉화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어려서 霧隱 任碻에게 수업하고, 1677년 진사, 169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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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厓李公行狀 (3) |
龜厓 李琓(1650~1732)의 행장이다. 李完은 본관이 전주로 평생 포의로 지냈으나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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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掌隸院判決事知製敎耆齋姜公行狀 (8) |
耆齋 姜汝㦿(1620~1683)의 행장이다. 강여호는 金山 출신으로 16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 판결사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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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承文院判校孤松申公行狀 (13) |
孤松 申弘望(1600~1673)의 행장이다. 신홍망은 의성 출신으로, 申之悌의 아들이다. 163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울산부사, 승문원 판교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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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先生金公行狀 (20) |
松隱 金光粹(1468~1563)의 행장이다. 김광수는 의성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시로 이름이 있었고, 의성 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柳成龍이 그의 외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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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通政大夫戶曹參議悔堂先生申公行狀 (23) |
悔堂 申元祿(1516~1576)의 행장이다. 신원록은 효자로 이름이나 旌閭와 증직을 받았으며, 의성 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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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處士三棄堂琴公行狀 (28) |
三棄堂 琴是養(1598~1663)의 행장이다. 금시양은 예안 溫溪 출신으로, 金光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봉화 遠遯으로 이주하였다. 1742년 숭정처사로 추증과 정려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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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澗處士申公行狀 (31) |
退澗處士 申濂(1657~1736)의 행장이다. 신렴은 의성 출신으로, 본관은 鵝州이며, 1699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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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尹朴公行狀 (1) |
朴敬祉(1610~1669)의 행장이다. 박경지는 선산 출신으로, 1635년 무과에 급제하여 삼도수군통제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수원부사, 한성부좌윤 등을 지냈으며 효종의 신임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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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江張先生行狀 (6) |
錦江 張璶(1629~1711)의 행장이다. 장신은 영천 출신으로 1679년 孝廉으로 참봉이 되었고, 1691년 學行으로 開寧縣監을 지냈다.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고, 영천 雲谷書院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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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高祖苟全金先生行狀 (14) |
苟全 金中淸(1567~1629)의 행장이다. 김중청은 봉화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월천 조목의 문인이다.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신안현감, 승지 등을 지냈고, 봉화의 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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黔澗趙先生行狀 (21) |
黔澗 趙靖(1555~1636)의 행장이다. 조정은 상주 출신으로, 鶴峯 金誠一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599년 천거로 참봉인 된 후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봉상시 정에 올랐다. 상주 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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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浦翁李公行狀 (32) |
月浦 李仁溥(1665~1737)의 행장이다. 이인부는 안동 三溪 출신으로, 본관은 全州. 아버지는 李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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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沙金先生行狀 (1) |
鶴沙 金應祖(1587~1667)의 행장이다. 김응조는 榮川 출신으로, 본관은 豊山이다. 南川 權斗文, 陶隱 權虎臣에게 수학하였고, 1623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한성부우윤 등을 지냈다. 甘泉 勿溪書院과 義山 櫟峯書院의 건립을 주도하였고, 사후에 追享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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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武功臣工曹判書花山君贈左贊成諡忠毅公權公行狀 (15) |
白雲齋 權應銖(1546~1608)의 행장이다. 권응수는 新寧 출신으로, 1584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여 전공을 세웠고, 뒤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방어사, 밀양 부사 등을 지냈다. 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花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忠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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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樂齋金公行狀 (29) |
靜樂齋 金履矩(1662~1722)의 행장이다. 김이구는 본관이 안동으로, 평생을 포의로 지냈으며, 학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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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工曹參議柳公行狀 (34) |
慵窩 柳升鉉(1680~1746)의 행장이다. 유승현은 안동 水谷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17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영해부사,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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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嘉善大夫禮曹參判行通政大夫咸平縣監不求堂金公行狀 (1) |
不求堂 金迬(1606~1681)의 행장이다. 김왕은 예천 출신으로, 본관은 義城이다. 1633년 사마시, 1639년 문과에 급제하여 함평현감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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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浦李公行狀 (6) |
龍浦 李濰(1669~1742)의 행장이다. 이유는 醴泉 柳田 출신으로, 본관은 驪州이다. 어려서 나은 李東標에게 수업하였고, 1691년 생원, 1702년 문과에 급제하여 금릉도 찰방, 예조 정랑,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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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領議政觀察使鳳溪洪公行狀 (15) |
鳳溪 洪世恭(1541~1598)의 행장이다. 홍세공은 서울 출생으로, 1567년 생원, 1573년 문과에 합격하여 전주부윤, 우승지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평안도 조도사로 재직 중 순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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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甁山金先生行狀 (22) |
甁山 金鸞祥(1507~1570)의 행장이다. 김난상은 본관이 淸道로, 1528년 사마시, 1537년 문과 급제하여 정언 등을 지냈고,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남해에 유배되었다. 선조 초에 다시 등용되어 직제학, 응교, 대사성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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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溪李先生行狀 (28) |
溫溪 李瀣(1496~1550)의 행장이다. 이해는 예안 출신으로, 어려서 숙부 李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에 진사, 1528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退溪 李滉의 형이며, 시호는 貞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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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巖金先生行狀 (28) |
溪巖 金坽(1577~1641)의 행장이다. 김영은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光山, 아버지는 雪月堂 金富倫이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를 지냈다. 인조대에 장령, 보덕, 헌납, 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숙종대 志操와 節槪로 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文貞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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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東里金公行狀 (1) |
金璍(1644~1718)의 행장이다. 김화는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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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所處士金君行狀 (5) |
竹所處士 金良鉉(1679~1743)의 행장이다. 김양현은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이다. 甁窩 金燮의 양자가 되어 善山 省谷에 이거하였고, 중년에 상주에 贅居하였는데, 小山 李光靖이 그의 사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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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一齋金先生行狀 (9) |
惟一齋 金彦璣(1520~1588)의 행장이다. 김언기는 안동 구담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67년 생원이 되었으며, 학문으로 이름이 나 그의 문하에서 朴毅長, 南致利, 申之悌 등이 배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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洗馬一庵先生辛公行狀 (16) |
一庵 辛夢參(1648~1711)의 행장이다. 신몽삼은 靈山 道泉里 출생으로 외숙인 宋廷賢, 족부인 辛敏行에게 수학하여 1675년 생원이 되었고, 학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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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尼山縣監深谷金公行狀 (22) |
深谷 金慶祖(1583~1645)의 행장이다. 김경조는 본관이 풍산으로 金應祖의 동생이며, 의령, 이산 등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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憂庵尹公行狀 (25) |
憂庵 尹時衡(1602~1664)의 행장이다. 윤시형은 본관이 영덕이며, 蔚珍 출신이다. 1646년 생원이 되었고, 萬休 任有後, 李時明, 金是榲 등과 막역지교를 맺었고, 文名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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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原城邊君行狀 (28) |
邊克泰(1654~1717)의 행장이다. 변극태는 안동 乃城 출신인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구하려고 강도를 막다가 팔을 절단 당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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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奉烈大夫咸鏡道都事府君家狀 (31) |
晩聞 李時馣(1607~?)의 행장이다. 이시암은 저자 이광정의 조부로, 어려서 東溟 金世濂, 苟全 金中淸에게 수업하였고, 처향인 안동 내성으로 이주하였다. 1633년 진사. 1634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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禦侮將軍訓鍊院正奉化琴公家狀 (36) |
琴胤先(1544~1626)의 행장이다. 금윤선은 안동 내성 출신으로, 저자의 조부인 李時馣의 장인이다. 훈련원 정을 지냈고, 24세부터 60년간 일기를 썼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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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孝子行略 (40) |
龜巖 權用衡(1659~1738)의 行略이다. 권용형은 안동 출신으로 효자로 이름이 났는데, 저자 이광정이 이웃에 살며 직접 본 바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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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眠金公行記 (42) |
易眠 金柱宇(1598~1644)의 행장이다. 김주우는 봉화 출신으로 金中淸의 아들이다.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4년 27세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감찰, 정언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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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員申公行記 (45) |
退澗 申重模(1683~1724)의 행기이다. 신중모는 의성 출신으로, 본관은 鵝州이며, 1715년 생원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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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李公遺事 (1) |
李時復(1627~1711)의 유사이다. 이시복은 본관이 전주이며, 李瑄의 숙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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淑人朴氏遺事 (4) |
高靈 朴氏의 유사이다. 박씨는 金虎臣의 처로, 남편이 요절한 후 서울 성밖 道濟洞에서 다섯 아들을 키웠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남 振先에게 왕을 扈從하도록 시키고 네 아들과 며느리 둘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 진선은 호종의 공으로 武科 別試에 급제하여 甑山縣令이 되었는데, 박씨가 관서로 가다가 우연히 甑山에서 해후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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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表從叔母權氏遺事 (6) |
洪霖의 부인 안동 權氏(1648~1714)의 유사이다. 부인은 小川 楓厓村 출신으로 洪霖과 혼인하여 酉山에 거주하였는데, 혼인한 지 4-5년만에 시부모와 남편, 시동생들이 모두 사망하자 출가하지 않은 시누이 셋과 3세된 아들을 데리고 집안을 꾸려 나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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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孝子遺事 (8) |
효자 朱景顔(1536~?)의 유사이다. 주경안은 평해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스승인 海月 황여일이 효자전을 지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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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迂堂李公遺事 (10) |
善迂堂 李蒔(1569~1637)의 유사이다. 이시는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永川이며, 艮齋 李德弘의 아들이다. 아우 苙과 함께 한강 鄭逑에게 수업하였는데, 광해군때 아우 苙이 폐모론에 참여하자 극구 만류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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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祖通德郞府君遺事 (12) |
저자의 외조부인 春坡 李惟馨(1617~1692)의 유사이다. 이유형은 榮川 출신으로 본관은 공주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시병을 한 일 등을 소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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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烈婦薌娘傳 (16) |
열부 朴薌娘의 이야기이다. 박씨는 선산에서 농민의 딸로 태어나 17세에 14세된 林七逢과 혼인하였으나 온갖 구박을 당하다가 친정으로 쫓겨 났다. 친정 식구들이 재혼을 권유하였으나 박씨는 이를 거부하고 吉再의 사당 근처에서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1704년 정려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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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谷先生傳 (19) |
杜谷 洪宇定(1593~1654)에 대한 이야기이다. 홍우정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났는데, 최기가 그가 지은 시를 보고 딸과 정혼하였다. 광해군 때 해주옥사가 일어나자 최기는 국문 중에 사망하였고 홍우정도 연좌되어 8년동안 천안에 유배되었다. 인조 반정 후 방환되어 효종의 師傅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 병자호란때 어머니 許筬의 딸을 모시고 태백산 아래로 피난하였다가 그 곳에 정착하였다. 동생이 洪宇遠, 洪宇亮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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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公子傳 (22) |
牛山君 李踵과 그의 여섯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李踵 등은 종친으로 벼슬에 나갈 수 없었으나 文名이 있었는데, 갑자사화 때 모두 유배를 가서 賜死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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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淳夫傳 (24) |
金樸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박은 안동출신으로, 1738년 김상헌을 제향한 淸陰祠의 훼철을 주도하였는데, 뒤에 土豪로 무고되어 歙谷에 유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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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氏忠孝傳 (29) |
權用休, 權仲英 부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권용휴는 안동의 향리로 병자호란 때 雙嶺에서 전사하였는데, 아들인 권중영은 아버지가 전사한 날 자결하였다. 1737년 충효로 정려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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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勝傳 (30) |
노비 勝眞과 良女인 勝妹의 이야기이다. 승진은 노비로 裵時說의 妾이 되었는데, 남편이 죽은 후에도 개가하지 않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배시설의 조카를 계후로 삼아 사족 부녀와 다름없이 가정을 꾸려 나갔다. 양녀 승매는 酒川 출신으로 18세에 노비의 아내가 되었는데, 남편이 요절한 후 자색을 탐하는 자들이 있어서 몸을 지키기 위하여 자리 밑에 칼을 두고 잤으며, 친척 이외의 남자와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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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孝子傳 (32) |
효자 鄭道昌의 이야기이다. 정도창은 榮川 출신인데, 비 春介의 남편 怪金이 殺主를 모의하여 아버지 鄭三省을 살해하였다. 정도창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원수들이 밀양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 관에 고발하여 원수를 갚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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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羊錄 (1) |
비유와 고사를 인용하여 헛된 명성과 명예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시대마다 시대에 걸맞는 인재가 있다는 것 등을 기술하였다. 모두 21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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折翼論 (25) |
晋나라의 陶侃이 자다가 날개가 생겨 天門에 올랐다가 날개가 꺾여 내려오는 꿈을 꾼 후 반역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날 때마다 꿈을 떠올리며 그만두었다는 《晋史》의 기록을 비판하였다. 陶侃이 진왕실을 지키며 중원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무고로 惡名이 남게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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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卷後序 (28) |
1779. 大山 李象靖(1710~1781)이 쓴 문집의 발문이다. 이광정은 六經을 근본으로 삼고 三代의 가르침에 뜻을 두어 문장도 古文에 충실하였다고 평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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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 |
저자의 행장이다. 大山 李象靖(1710~1781)이 찬술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자는 젊어서 文章에 뜻을 두어 諸家雜書에 탐닉하여 經書에 밝지 못하다고 자탄하고, 노년에 六經에 침잠하였는데, 특히 《易經》을 즐겨 古本을 手寫하고 誦讀하였다. 말세의 학문이 實得에 힘쓰지 않고 文義를 변론하며 虛名을 구한다고 비판하고, 학문의 근원은 《小學》의 실천에 있다고 강조하였고, 治道를 말할 때는 《周禮》를 법도로 삼았다. 편찬이나 저술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經書와 義理는 선배들의 정론을 따랐으며, 일찍부터 문장에 능하여 원근의 家狀과 墓誌銘 등을 많이 찬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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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銘 (6) |
저자의 묘지명으로, 艮翁 李獻慶(1719~1791)이 찬술하였다. 내용은 李象靖이 쓴 행장과 대동소이하며, 秦漢 이전의 고문을 즐겨 읽어 賈誼와 司馬遷과 같은 격조가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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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文 (9) |
1808. 臥隱 金翰東(1740~1811)이 쓴 跋文이다. 저자의 장례 후 유문을 모아 兩大家의 교정을 거쳐 21권으로 편집하였다가 1808년에 비로소 印刊하였고 밝혔다. 널리 배포하지 못하지만 배우는 자들이 반복해서 읽고 저자의 뜻을 체화할 것을 당부하였다. (박현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