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하루에 세끼 식사를 합니다.
물론 사람들 특성에 따라 한끼 아니면 그 이상 네 끼나 다섯 끼를 먹어야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집 큰 놈이 중2인데 식사할 때마다 식사량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먹을 만큼만 먹으면 더 이상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중학생이기 때문에 한창 먹어야 될 시기이고 보면 엄마는 더 먹으라고 야단입니다.
없는 반찬이지만 반찬도 골고루 먹으라고 성화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입이 짧아서 그런지 반찬도 골고루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입에 맞는 반찬이 있으면 그것만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는 녀석인데도 학교 갔다오면 배고프다고 먹을 것이 없느냐고 먹거리를 찾습니다.
어떤 때는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을 때도 있지만 먹거리가 없을 때도 있지요.
그럴 때는 막 역정을 냅니다.
또 학원에 갔다가 밤 11시 반쯤 되어서 돌아오는데 그 때도 먹거리를 찾습니다.
쉬는 시간에 틈틈이 친구들끼리 간식을 사먹는다고도 하는데
꼭 집에 돌아와서는 먹거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녀석이 돌아올 때쯤이면 간식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주로 식빵을 준비했다가 주는데 식빵을 굽는 토스트기계가 없기 때문에
후라이판에 구워서 설탕을 얹어주기도 하고, 계란 후라이를 해서 얹어주기도 하고,
벌꿀을 발라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녀석이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녀석이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저렇게 맛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왕성한 식욕을 지닌 청년이나 소화기능이 많이 약해지신 연노하신 분들까지도
인간에게는 입을 통해 위장으로 들어간 음식은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음식물을 소화하는데 도와주는 소화액은 소화샘에서 분비되어집니다.
각각의 소화액은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소화효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 종류로는
침샘에서 분비되는 침이 있는데 침 속에는 아밀라아제,
위샘에서 분비되는 위액 속에는 펩신,
간에서 분비되는 쓸개즙에는 소화요소가 없지만,
이자에서 분비되는 이자액에는 트립신, 키모트립신, 카르복시펩티다아제, 아미노펩티다아제,
말타아제, 리파아제, 아밀라아제,
소장에는 카르복시펩티다아제, 아미노펩티다아제, 락타아제, 수크라아제 등이 들어 있어서
자동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설혹 상하거나 좋지 않은 음식이 들어가게 되면 토하거나 설사를 통하여 자동으로 처리됩니다.
정상적인 음식은 정상적으로 소화되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영양분을 공급해줍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이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게는 이렇게 자동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이 땅에 태어나도록 했습니다.
본래부터 소화제라는 약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라는 약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먹어서 소화시키라고 주신 분량만큼 먹지 않고
더 많은 욕심으로 먹었기 때문에 위장에서 탈이 생겨 억지로, 강제로 소화시켜달라고
만들어진 약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소화제를 인위적으로 먹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먹을 수 있는 위장의 분량만큼 먹으면
아무 탈 없이 자동으로 소화되어져 나옵니다.
간혹 식사에 초대되어가거나 외식을 할라치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식사량보다
더 먹고서는 소화제를 덩달아 먹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면 안 먹으면 됩니다.
필요한 분량만 먹으면 자동으로 처리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구태여 소화제를 먹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위장속에 들어간 음식은 자동으로 처리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마음과 영혼 속에 들어간 죄악과 잡다한 상처로 생겨난 쓴뿌리는 자동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처리해 주어야만 됩니다.
마음에 받은 상처는 계속 쌓여져 갑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계속 받아온 상처, 아픔, 비난, 조롱 같은 것들은
계속 쌓여져 가면서 시커먼 마음으로, 돌같이 단단히 굳어버린 마음으로 만들어갈 뿐입니다.
마치 꾸정물을 가만히 놔두면 시간이 흘러 밑에는 찌꺼기들이 가라앉고
위에는 맑은 물이 고여서 마치 맑은 물처럼 보여지지만
휘저으면 다시 더러운 꾸정물이 되어 올라오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쓴뿌리와 상처는 가라앉고 엉키어서 마치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서 휘젓게 되면 다시 본래의 혼탁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어떤 행위 곧 종교적인 행위, 선한 행위, 자선, 다짐이나 결단 같은 것들로는
자신의 마음 속에, 내면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상처, 더러움, 아픔이나 쓴 뿌리는
치유되거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뽑아주거나 씻어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벼농사할 때 벼와 함께 자라는 피가 있는데 벼가 필요한 것이지 피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벼에게 있어서 피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롭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 스스로 뽑혀지지 않습니다.
농부가 대신 피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더러운 옷을 빨래할 때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빨래비누나 세재에 담가서 손으로 빨건, 세탁기에 돌려서 빨건
처음에는 더러운 물이 하염없이 빠져나옵니다.
계속 맑은 물을 가지고 빨고 행구다 보면 어느새 맑은 물로 바뀌고
옷도 깨끗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계속 행구다 보면 마셔도 될 것 같은 밝고 맑은 물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마시지는 않지만 그 물로 세면도 할 수 있고, 화분에 주어도 됩니다.
그렇듯이 누군가가 우리들 마음 속에, 영혼 속에 계속 쌓여져 온 삶의
찌꺼기를 뽑아주거나 맑은 물로 계속 씻어주어야 합니다.
이 일은 인간스스로에게는 아무에게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악하고 더럽고 추하고 상처와 쓴뿌리 투성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대신에 씻어주거나 뽑아주는 일을 해 주실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흘리신 피와 물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정결하고 순결하게 모든 아픔이나 상처나 쓴 뿌리를 씻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하고 더럽고 추하고 병들도 쓰러지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흘려주시고
쏟아주신 피와 물이 나의 모든 것을 대신 씻어주시기 위한 것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우리들은 비로소 정결함과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물로 대신 씻어주시는 의식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서
믿음으로 고백되어질 때, 그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되찾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맑은 물을 넘치도록 부어주셔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모든 상처나 쓴뿌리들로 주어진 아픔들이 말끔히 씻김 받기를 소망합니다.
첫댓글 목사님 말씀중에 전문용어라 알지못할것도 있네요. 그러나 죄를 씻을때 깨끗이 씻어 야지요.
주님께 영광!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에 은혜받고 갑니다.
주님께 영광! 글 감사합니다.
감동글 감사합니다.
주님께 영광!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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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동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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