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공 ~판중추공~해산공파~수은공파의 이어지는 한산이씨 이야기에는 시집간 자랑스러운 따님이야기를 게시해 두고자한다.
오늘 삼가 글을 올리지 못하면 좀처럼 여유가 안생겨 자주 글을 못올릴것 같아서 한번에 게시하여 두고자한다.
수은공파의 우리 할머님은 시집가셔서 어떻게 삶을 살아가셨을까? 대산 휘 상정이 글을 지었다.
대산집 제47권 묘지명(墓誌銘)
최 유인 한산 이씨 묘지〔崔孺人韓山李氏墓誌〕
[최군 한우(崔君漢羽)가 어미의 상복을 입은 채 풀이 죽어서 글을 가지고 그 어미의 종조형(從祖兄)인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어머니의 묘에 명이 없으니 한마디 은혜를 베풀어 주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글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규문의 행실은 세상에 드러남이 없으니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끝내 어진 동생의 이름을 없애는 것이다. 감히 수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 이씨는 본래 한산인(韓山人)이다. 시조는 고려 시중 목은(牧隱) 선생이고, 고조는 회인 현감(懷仁縣監) 이홍조(李弘祚)이며, 증조는 통덕랑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는 이석망(李碩望)이고, 선고는 이지화(李志和)이다. 비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그 선고는 통덕랑 김사국(金師國)이고, 조는 홍문관 교리 김총(金璁)이다.
매씨는 홍릉(弘陵) 병오년(1726, 영조2)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단정하고 지혜로우면서도 정숙하였는데 4, 5세가 되자 문자와 작은 글씨를 잘 알아보니 종숙공이 쓰다듬어 주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였더라면 반드시 우리 집안을 크게 빛냈을 것이다.” 하였다. 6세에 아비를 잃고,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섬겼으며 동생들과도 우애가 있었다. 19세에 최군 사진(崔君思鎭)에게 시집갔다.
최군은 월성 최씨(月城崔氏) 집안으로 대군사부 최동집(崔東㠍)이 그 6대조이다.
시아버지는 휘가 최흥점(崔興漸)으로 백씨인 참봉공과 더불어 효성과 우애로 세상에 칭송되었다.
매씨가 집안에 들어가서 매우 조심스럽게 부도(婦道)를 행하여 봉양에는 효성을 다하고 병에는 근심을 다하니, 시부모가 편안히 여겨 말하기를 “우리 어진 며느리이다.”라고 하였으며, 시부모를 섬기는 도리로 시할머니를 섬기니, 시할머니가 “우리 효부이다.”라고 하였다.
과부가 된 동서와 아비를 잃은 조카들을 대하는 데 정성스럽게 은혜를 다하니, 과부인 동서가 말하기를 “내 동기와 다름이 없다.” 하였으며, 조카들은 말하기를 “우리 친어머니와 다름이 없다.” 하였다. 자제를 가르치는 데 사랑 때문에 친압하지 않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몸을 닦아서 입신양명해 부모를 현양(顯揚)하도록 아들을 면려하였고, 길쌈하고 부지런하고 삼가라는 것으로 딸을 경계하였다.
그 자녀들이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사람 노릇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정유년(1777, 정조1) 3월 17일에 뜻밖에 병에 걸려 죽었으니 52세였다. 남편은 말하기를 “내가 내조를 잃었으니 어떻게 어머니를 봉양하겠는가.” 하였으며, 자식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머니의 가르침을 잃었으니 어떻게 허물을 면하겠는가.” 하였다.
이웃의 부녀들은 집에서 탄식하였고 비복들은 길에서 눈물 흘렸으니, 비록 옛 도서에 실린 열녀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은 복생(福生)으로 총명함이 절륜하였으나 기이한 병에 걸려 죽었고, 차남은 한우(漢羽)이니 바로 명을 청한 자이다. 나머지 둘은 어려서 일찍 죽었다. 딸 셋은 모두 아직 시집가지 못하였다.
내 아우 광정(光靖)이 매씨의 친정 집안에 후사로 입계된 오라비인데 그 행실을 서술함이 매우 자세하다.
내가 그 행적과 칭찬 중 종족 간에 드러난 것들만 모아 지어 유택에 넣으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누이의 어진 점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에 명을 짓는다.
[주D-001]종조형(從祖兄) : 종조형제는 6촌 형제간이다. 대산과 최 유인(崔孺人)의 증조가 이효제(李孝濟)로 같기 때문에 종조형이라고 한 것이다. 대산의 아우인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바로 이지화(李志和)의 후사로 출계하여 최 유인과 오누이가 되었기 때문에 대산 또한 최 유인과 6촌 형제 이상의 정의가 있었다. [
주D-002]홍릉(弘陵) : 최 유인의 졸년과 나이로 보아 출생 연도는 영조 연간의 병오년(1726)을 말하므로 여기서 홍릉은 영조를 가리켜야 한다. 하지만 홍릉은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능이고, 영조의 능은 원릉(元陵)으로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의 능과 함께 있다. 여기서 원릉으로 써야 하는데 홍릉으로 쓴 것은 홍릉을 조성할 당시 영조가 유택의 오른쪽을 비워 두게 하여 묘를 함께할 뜻을 보였기 때문에 대산이 착각하여 쓴 듯하다.
[주D-003]백씨인 참봉공 : 최흥점(崔興漸)의 친형인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을 말한다. 자는 태초(太初), 호는 백불암(百弗菴)으로 대산과 교유한 유명한 남인 학자이다.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백불암집(百弗菴集)》이 있다. 최흥점이 백부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나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며, 대산ㆍ이광정 형제와도 교분이 깊었다.
[주D-004]내 …… 자세하다 : 한국문집총간 232집에 수록된 《소산집(小山集)》 권13 〈망매 십이랑 행장(亡妹十二娘行狀)〉에 누이 최 유인(崔孺人)의 행적에 대한 글이 자세히 실려 있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09
崔孺人韓山李氏墓誌
崔君漢羽傫然持母衰。以書屬其母之從祖兄象靖曰。吾母之墓無銘。幸惠以一言也。余執書泣曰。閨門之行。無以見於世。吾而不言。是終沒賢弟之名。敢不諾。吾李本韓山人。鼻祖曰高麗侍中牧隱先生。高祖曰懷仁縣監諱弘祚。曾祖曰通德郞諱孝濟。祖曰諱碩望。考曰諱志和。妣曰光山金氏。考曰通德郞師國。祖曰弘文館校理璁。妹氏以弘陵丙午正月十八日生。幼端慧靜淑。四五歲。能識文字細書。從叔公撫之曰。使爾而男子也。必能大吾門也。六歲而孤。事母孝。與姊友。十九而歸于崔君思鎭。崔君。月城之世。大君師傅曰諱東㠍。其六世祖也。舅曰諱興漸。與伯氏參奉公。以孝友稱於世。妹氏入門而執婦道甚謹。養致孝病致憂。舅姑安之曰。吾賢婦也。以事舅姑者事王姑。王姑曰。吾孝婦也。待孀娣孤姪。曲盡恩意。孀娣曰。無異吾同氣也。孤姪曰。無異吾親母也。敎子弟不以慈愛昵狎。以勤學修身立揚顯親勉其子。以紡績勤謹戒其女。其子女曰非吾母之敎。吾無以及於人也。以丁酉三月十七日。偶感疾卒。得年五十二。夫曰。吾失吾內助。何以養吾母。子曰。吾失吾慈敎。何以免於過差。隣里之婦女。咨嗟於家。僕婢涕泣於路。雖古圖書所載列女。亦何以過此。有子四人。長福生。聰穎絶倫。遇奇疾死。次漢羽。卽乞銘者。其二亦幼而夭。三女皆未笄。吾弟光靖爲妹氏所後兄。狀其行甚悉。吾獨最其行譽之著於宗䣊者而納諸幽。俾後之人知吾妹之賢也。是爲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최유인에게 시집간 수은공파 할머니를 기리며 수은공파 약와 이현정 후손 이대원 삼가 글로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