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글은 뚜렸한 증거는없읍니다. 흥미를 자아내서 올립니다.
글자만 보다가 요즈음 그림/사진 자료 찾는 재미가 붙었읍니다.아래사진(세번째)도 아주 흥미로운 그림인데 눈을 의심할 지경입니다.
도대체 무었이 진실일까요?
크레믈린 궁
크레믈린은 원래 성벽(성채)을 의미하는 러시아 어이다. 모스크바 크레믈린의 기원은 유리 돌고루끼 시대인 12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크레믈린은 작은 모스크바 군주의 목재 성채에 지나지 않았다. 13세기 타타르인의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되지만 군사주요 경로로부터 많이 떨어져있어 모스크바강의 운하와 함께 상업도시로 번창하게 된다. 15세기에 접어들어 성벽과 교회가 건축되었고, 우스펜스키 사원이 이 시기에 건축된 것이다. 17세기 그라노비타의 궁전이 군림하며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수도가 뻬떼르부르크로 옮겨지면서 크레믈린의 몰락이 시작된다. 1821년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의 방패였던 크레믈린에 입성한 것이다. 이 때 크레믈린은 화재로 많이 소실되지만 그 후 대 크레믈린 궁전이 건축되고,크레믈린이 부활된다. 20여개의 종루탑을 가진 길이 2,235m,두께3.5 ∼ 6.5m,높이 15 ∼19m를 가진 강대한 성벽에 둘러쌓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른 도시에도 크레믈린이 있지만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만큼은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모스크바 강 위에 나란히 있는 스카이라인이나, 성당, 궁전 등의 뾰족한 탑들은 공포스럽기도 하면서 또 뭔가를 애타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환상의 방사형 체계를 가진 도심의 한 가운데 모스크바 강변에 일그러진 삼각형모양의 성채를 이루고 있는데 붉은 크레믈린의 성벽에는 20개의 각기 그 모양과 기능을 달리하는 탑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탑이 크레믈린의 정문인 스빠스까야 그리고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는 뜨로이쯔까야 탑이다. 예전에 이 탑들은 군사적인 목적을 겸하였다.
---------------------------------------------------------------------
모스크바의 화재
모스크바의 대 화재는 과거 2번 있었는데 나폴레옹군은 2번째 입니다.
이때는 1812년 경이며 크레믈린 점령후에 내부에서 일어난 화재입니다.
<1812년 나폴레옹전쟁시 화재>
------------------------------------------------------------------------------------------
나선정벌(羅禪征伐)이란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이 러시아군을 1654년(효종 5년)과 1658년에 걸쳐 2차례 정벌한 사건이다.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조직된 조총 부대의 시험을 위해서, 효종의 북벌의 준비를 위해서 조선이 파병했다는 설이 있다
<아래 :인용>
1680년대에 러시아 제국은 로마노프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또한 청나라 강희제가 러시아와의 갈등이 있던 당시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최전성기를 이루어낸 표트르 1세의 초기 시대였다. 이미 이전부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로 내려왔다.
러시아는 근대식으로 바뀐 군대로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하여 심지어는 근처에 살던 부족을 보드카로 유혹하여 그 부족의 거의 모든 장정들을 죽이고 아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본인주, 마치 몽고의 정벌 코작병의 정벌 방식과 흡사합).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게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1] 통상 자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계속 송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의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하였다. 아르바진을 점령하였으나 러시아군은 물러나지 않고 뺏긴 아르바진 요새를 수복하려 하였다. 러시아와의 국지적인 전쟁으로 청나라는 조선에게 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고, 조선은 군사를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
제1차 정벌 때인 1654년(효종 5년) 변급(邊岌)이 호통(好通)에서 러시아군을 무찔렀다.
제2차로 신유(申瀏)가 256명의 조총 부대를 이끌고 출병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흑룡강( 본인주, 흑수: 그당시의 지명은 흑수이며 이곳은 대륙의 서북으로 추정됨, 조선의 경성지방이 북해에 접하고 있고 이곳에는 멀지않은곳에 흑수가 흐른다고 조선의 문인들이 기록하고 있읍니다.)
에서 러시아 함대 10여 척을 불태웠고, 러시아의 부싯돌로 점화하는 수석식 소총을 노획하여 귀국하였다(아직도 러시아는 후진국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당시 시베리아를 정복한다고?? ).
이 전투로 조선의 병사 9명이 전사하였으며, 25명의 부상당하였다
서양은 이미 동양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잇따라 표류하고, 러시아는 흑룡강까지 진출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다른 세상에 조선도 어느덧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 정벌군을 파견해야 했다. 조선과 서양의 첫 조우는 원하지 않는 충돌로 시작되었다. 효종은 이를 북벌 테스트로 생각했다. 북정일기(57Χ90㎝) : 1658년 제2차 나선 정벌에 참전한 신류 장군의 조총부대는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러 국경 지대인 흑룡강을 넘지 못했다. 출병 84일 만에 개선한 신류 장군은 나선 정벌을 일기 형식인 『북정록』으로 남겼다
효종 5년(1654) 2월 청나라에서 온 차관(差官) 한거원(韓巨源)이 나선(羅禪:러시아) 정벌에 조선군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조창수(鳥槍手:조총수) 100인의 파견을 요청한 것인데 효종이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라고 묻자 한거원은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사는 별종(別種)입니다”고 대답했다. 나선은 ‘Russian’의 한역(漢譯)인데 효종은 이때까지도 이들이 서양인인 줄 알지 못했다.
러시아는 17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면서 유럽 동북쪽과 시베리아 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러시아의 하바로프(E Khavarov)는 원정대를 이끌고 흑룡강까지 진출해 강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城)을 쌓고 군사기지로(본인주, 모스크바 강 옆에 크렘린성이 있읍니다) 삼았다.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획득을 위해서였는데 17세기 모피 자원은 러시아 국고 수입의 10%를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만주를 선조의 발상지로 중시하던 청조는 효종 3년(1652) 군사를 보내 영고탑 부근에서 맞붙었으나 거듭 패배했다. 청은 효종 4년(1653) 사이호달(沙爾虎達)을 영고탑 지방 앙방장경(昻邦章京:장군의 명칭)으로 삼고 다음 해 명안달례(明安達禮)에게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격퇴하라고 명하면서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조창수를 요구했다는 것은 조선 조총수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조 14년(1636) 청에 항복한 후 맺은 강화조약 때문에 청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효종은 함경북우후(北虞侯) 변급(邊<5C8C>)을 영장(領將)으로 삼아 군사를 파견했다. 제1차 나선 정벌군이었다. 변급은 100명의 조총수와 20명의 화병(火兵:취사병: 오역이 아닌가 함) 등 도합 150여 명을 이끌고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넜다. 27일 후통강(厚通江:송화강)에 도착한 변급과 조선군은 28∼29일 러시아군과 접전했다. 변급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300석(石) 크기의 대선 13척, 소선 26척에 병력은 400명 미만이었다.
조청연합군은 대선 20척, 소선 140척에 1000여 명이었다. 조청군이 숫자는 많았지만 대선은 17명이 승선하는 작은 배에 불과했다. 화력이 열세라고 생각한 변급은 수상전(水上戰) 대신 육지에 ‘유붕(柳棚:통버드나무로 만든 방패)’을 세우고, 이를 방패 삼아 러시아 함선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새로운 전법에 러시아군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5월 5일 흑룡강을 거슬러 도망갔다.
조선군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5월 16일 철군해 6월 21일 두만강을 건너 84일간의 원정을 마무리지었다. 『청사고(淸史稿)』 ‘명안달례 열전’은 명안달례가 “순치 11년(1654) 군사를 이끌고 악라사(鄂羅斯:러시아)를 정벌했는데, 흑룡강에서 적을 물리쳤다”고 적고 있다. 이 1차 나선 정벌 이후 러시아군은 ‘머리 큰 사람(大頭人)이 두렵다!”며 벙거지(戰笠:전립)를 쓴 조선 군사를 두려워했다.(이 전립은 어떤모습일까?)
청조는 이듬해(1655) 명안달례에게 호마이(呼瑪爾) 하구에 있는 러시아의 근거지를 공격하게 하고 효종 8년(1657)에는 사이호달을 보내 상견오흑(尙堅烏黑)에서 러시아와 싸웠으나 다시 패배했다. 그러자 효종 9년(1658) 재차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일단 거부했으나 재차 회계(回啓)가 내려오자 함북병마우후 신류(申瀏:1619∼1680)를 총병관으로 삼아 정벌군을 구성하게 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기회에 청군의 허실을 엿볼 생각이었다.
조총수 200명과 기고수(旗鼓手:군기와 북 관리 병사)·화정(火丁) 60여 명 등 도합 260여 명의 조선군은 3개월분의 군량을 휴대하고 5월 2일 두만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6월 10일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에 도착해 러시아 스테파노프(Stepanov) 함대와 격전을 벌였다.
신류는 『북정일기(北征日記)』에서 “적선 11척이 흑룡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아군은 즉각 적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병들이 숨 돌릴 겨를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니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 없어 모두 배 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초반 습격으로 승기를 잡은 신류는 적선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전투를 끝내려 했으나 청장(淸將) 사이호달이 전리품에 욕심을 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방화 금지령이 급하게 전해지는 사이 강가 풀숲에 숨어 있던 러시아군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신류는 “여세를 몰아 일시에 적선들을 불태웠다면 적병 중에 살아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인데, 대장이 재물을 탐내 불태우지 말라고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조선군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청군은 무려 12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
러시아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어 11척의 선단 중 10척이 불타고 1척만 겨우 도망갔다. 스테파노프의 부하 페트릴로프스키(Petrilovsky)는 “이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와 카자크 270명이 전사하고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08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軍旗),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聖像)을 실은 배 1척이 95명을 태우고 탈출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이호달은 러시아의 재침이 우려된다며 효종 10년(1659) 봄까지 주둔하라고 요구했으나 신류는 거부하고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 12월 12일 회령으로 귀국했다. 조선군은 이렇게 1, 2차 나선 정벌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불과 20여 년 전 삼전도 치욕을 겪었던 조선군으로선 청군이 연패한 러시아군을 꺾은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청군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더욱 강하게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인용/ 중앙선데이 : 이덕일의 事思史>
인용글은 이덕일씨의 글로 본인이 일부 주를 했읍니다. 신류가 쓴 북정일기는 아직 번역원에서는 번역되지 않았고 다른 경로로 국역되어 출판이 되었다고 합니다. 위의 내용은 그 내용을위주로 이덕일씨가 기사를 쓴것입니다.
러시아를 깨부순 조선군... 청나라보다 뛰어난 조총병이였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 나선정벌이 아래의 그림과는 관련성이 없읍니다만 흥미있는 그림입니다.
---------------------------------------------------------------------------------------------------
<코작의 시비리 예르마콤 정복>
위 그림은 코작병들이 시비르(Sibir 시베리아?) 의 예르마콤(Yermacom)을 공격하는 모습인데 상대방은 동양인 모습으로 정확히는 모르겠읍니다. 참고로 올립니다.
시베리아에 저런 규모의 동양인이 세운 성채는 없을 것입니다.
나선정별 "청조는 이듬해(1655) 명안달례에게 호마이(呼瑪爾) 하구에 있는 러시아의 " 에서,
예르마콤은 혹시 호마이(呼瑪爾) 는 아닐까? '콤'은 러시아의 도시/마을을 뜻하는 접미사...
그당시의 전투모습과 시비르의 저 큰 성과 병력은 어디일까 궁굼합니다.
나선정벌시에 수군의 전투도 있었읍니다.
--->(러시아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어 11척의 선단 중 10척이 불타고 1척만 겨우 도망갔다)
저멀리 보이는 시비르의 예르마콤 성의 규모도 대단해 보입니다.
강 언덕위에는 지원병들이 말을 달리고 있고,,,,,
예르마콤은 시시한 변방의 도시는 아닌듯 합니다.
1.크레믈린도 모스크바 강가에 있고.,
2. 17세기 러시아의 하바로프(E Khavarov)는 원정대를 이끌고 흑룡강(흑수)까지 진출해 강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城)을 쌓고 군사기지로... .---->나선정벌
3. 청조는 이듬해(1655) 명안달례에게 호마이(呼瑪爾) 하구에 있는 러시아의 근거지를 공격하게 하고 효종 8년(1657)에는 사이호달을 --->나선정벌
4. 코작(카작)의 예르마콤 공격사진도 강가에서 벌어지고 멀리 성채가 있읍니다.
4곳 모두 강가에 있읍니다.
신류의 북정일기중
(전략)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와 카자크 270명이 전사하고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08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軍旗),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聖像)을 실은 배 1척이 95명을 태우고 탈출하였다 -............
---> 여기서 카자크병 270명이 전사...에서 카자크는 코자크와 같은 병사인 것을 알 수있읍니다.
성상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러시아동방 정교회의 예수상 마리아 상..그런것일까?
실제로 위그림에서 코작병의 배위에 있는 깃발에 그려진 인물이 그것을 상징하는 것도
같읍니다. 그들은 신의 도움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 입니다.
(중략) ..청은 효종 4년(1653) 사이호달(沙爾虎達)을 영고탑 지방 앙방장경(昻邦章京:장군의 명칭)으로 삼고 명안달례(明安達禮)에게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격퇴하라고 명하면서.. (후략)
---> 사이호달의 직급은 앙방장경으로 이 명칭은 한자뜻으로 장군의미가 아닌 음차로 보이며,
명안달례가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토벌 한다는게 이상합니다...
이경우는 러시아와 북경이 가까울 때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나선정별에 나선 청나라의 장수이름 '명안달례, 사이호달' 이는 음차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름들은 상당히 생소합니다. 연행기에 등장하는 청인의 이름도 보통은 3자
이며 가끔씩 2자도 있읍니다.
나선정벌에 나선 조청연합군은 저러한 코작(카작)용병과 맞닥트린 것으로 보입니다
나선은 야선(랴선?)과 음차의 차이로 혹시 같은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강희제가 러시아와 만난 네르친스크는 정말 어디일까? 그는 왜 라틴어를 배웠을까?
----------------------------------------------------------------------------------------------
<눈을 의심하는 그림 ...>
이사진의 제목은 <러시아 전투 -차이나 황제의 크레믈린 입성 - 모스크바의 화재>
상상화 일까? ...여지껏 중국이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함락했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읍니다.
그러나 상상이라도 이런 그림을 그렸다가는 삼족을 멸문당하는 액운을 맞지 않을까요?
(그림은 1900년에 출판된 책에 실린것으로 언제 그려진 것인지는 모릅니다.)
성벽은 크레믈린 궁이 맞는것 같으며 그 아래 군사들은 청나라 복장이 맞읍니다.
그림 제목을 아무리 살펴봐도 차이나 황제의 크렘린 입성이며 모스크바 입니다.
가운데 말을 탄자는 황제인듯 합니다.
이그림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러시아를 이긴것은 조선의 나선정벌이 있는데 ...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이 정복길에 동행했읍니다. 물론 승리을 하였읍니다.
반면 청나라는 러시아에 이긴 적이 없다고합니다. (나선정벌의 조청연합군 제외)
크레믈린이라는 뜻은 성 이라는 뜻이랍니다. 여담입니다만
和林 화림 "ㅎ' 발음은 'ㅋ' 과 서로 치환이 많이 되는 음입니다.
화림 ---> 콰림-->카리므 ===> 크렘 과 비슷한가?
和龍宮 화룡궁 콰룡 ??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이러한 방법은 좀 우습기는 합니다.
'린'은 성이나 벽등을 뜻하는 접미사??(러시아어에 무지하여 이렇게 용감하게 써 봅니다)
이 화림은 용성이라는 말로 더 알려져 있으며 평지송림 천리송림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흉노들의 회합장소였고 궁성이였답니다. ===<문무님의 글 참조>
이곳 화림(용성)은 대륙의 기록 조선의 기록에서 호인 달자 달단 몽고 등이 설치는 곳이고
명나라에서는 이곳근처에 삼위를 설치하기도 합니다.
이 삼위근처는조선의 광해군 일기에서 이른바 말하는 서융이 삼위를 침범하여 도요군이 멀지않은 곳에서 진을 치고 있읍니다.
모스크바가 수도가 된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원래는 상떼페테르부르크가 수도였답니다.
그림의 청나라 황제의 의상은 1667년에 그려진 청 황제의 복장과비슷합니다.
그림앞쪽의 조총을 든 병사가 혹시 조선의 지원병은 아닌지??
/끝
첫댓글 격물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일으키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핵심적 의문사항은 <차이나 황제의 크레믈린 궁 입성>에 관한 그림이군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서 황당한 느낌이 듭니다만 무언가 숨겨진 비사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조선사를 해체하려는 열국들의 음모는 하루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조선군의 나선정벌도 전회에 설명한 적이 있으나, 이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것도 조선사의 이면을 벗겨보는 아주 좋은 방향이 될 것 같군요. 모스크바! 의혹의 눈초리가 번득입니다. 좋은 내용의 글 고맙게 보았습니다. 댁내 두루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모스크바는 1702년까지 러시아의 수도였다가 피터 대제가 페테르부르그로 옮겼고, 1919년 러시아혁명 중 백군이 페트로그라드(당시 이름) 로 육박해 오자, 레닌이 다급하여 모스크바로 수도를 다시 돌렸습니다.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수도였을 때 페테르부르그는 습지에 불과했습니다.
1571년, 당시 러시아를 호령하던 이반 뇌제가 크리미아 칸 (그 쪼깐한 크리미아의 칸인지 다른 칸인지는 잘 모르겠음) 에게 오만불손하게 대하자, 칸의 군대가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박살을 내놨고, 그 후 이반 뇌제는 미쳐버렸다 하더군요. 그 때의 그림인 듯합니다.
china=청 / 갑자기 쾌지나칭칭나네 가 문득 떠오릅니다.
청은 러시아에 패하고, 조선이 조총부대를 파견하여 이기고,, 청이 마치 대국처럼 보이지만, 중앙조정과 지방군의 상황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지방 오랑캐가 말썽을 부리니 중앙정예군을 보내서 이들을 격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류는 아마도 중앙군의 특수부대 사령관쯤 될 것 같습니다. 이왕에 나폴레옹이 나와서 말인데,, 이들은 아무리 봐도 현재의 프랑스에서 대대로 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영국=일본,러시아,이태리,독일 등등의 팔개국 연합국은 아라비아와 아프리카해서 해적으로 활동하다, 임란이후 세력을 넓혀서 북상하고, 순조때 이미 서유럽과 아라비아를 점령하고 동으로 19세기에 밀고 들어오는것 같습니다.
그 시기에 죽기 살기로 유럽에서 버틴 것이 러시아의 농민반란 및 유럽의 중세 농민반란이며, 서세에 저항한 것을 마치 오스만 투르크라는 어설픈 력사로 매꾼듯 보입니다. 양이가 서유럽과 동유럽,아랍을 접수하고 마침내 영국, 프랑스는 인도를 점령하고, 이들이 원 몽골을 접수하고 러시아라는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며 중앙아시아로 밀고 들어오니, 19세기신강과 아프칸에서는 이슬람혁명과, 운남에서는 태평천국, 조선이 망하고 의화단의 의병활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이 조선 독립군들 같읍니다. 이것을 반도에 심기위해 전봉준과 최제우 등의 가공인물이 탄생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제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현상태님의 분석에 동의합니다. 강희제는 숙종의 연호이고, 청은 카자흐스탄 정도에 있는 고려(朝鮮)의 함경도 변방정도였을 겁니다. 지방군으로 안되니, 정예를 파견해서 크레믈린까지 진격해 박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삿갓모양의 청군의 투구가 왠지 남방의 비가 많은 지역에 서식하는 왜놈들의 투구와 비슷하군요.
카자흐 스탄은 춥고 강수량이 드문 곳인데 말이죠. 청사(淸史)는 왠지 환타지일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변발은 왜구들의 습성이며, 왜란 이후 흑해를 통해 서왜가 그리 깊숙히 기어올라왔는지는 의문입니다.
여러 회원님들께서 다양한 시각으로 조선사를 바라보고 계시니, 글을 보는 것이 정말 즐겁습니다. 이런 다양하고, 열린 사고로 조선사를 바라보면 머지 않아 조선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우리 나름대로의 조선사 구성을 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나선정벌 관련 검색하다가 님께서 올리신 포스트 보고 글 남깁니다. 우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님 포스트 흥미있게 읽었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요.. 한 가지 지적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회원가입하고 글 남깁니다. 올려 주신 그림 중 '코작의 시비리 예르마콤 정복'이라고 제목을 소개해 주셨는데,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이라고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르마크는 코자크들의 지도자였는데 이반 4세 시절 시베리아 정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