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통신 23> 서귀포와 서복
서귀포에 갈 때마다 서복(徐福)의 발자취를 찾아보자던 결심을 이제야 실행하였다.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곳이라는 전설에서 서귀포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말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하였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서복공원을 보고도 다음에 가지, 하고 차일피일 미룬 게으름을 탓하며 찾아간 서복전시관이다. 그것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도 큰 소득이다.
지금부터 2200여 년 전 일이니까 물증이 남아있을 턱은 없다. 그러나 그 전설이 여러 기록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은 놀라움이었다. 서복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새겼다는 서불과지(徐市過之) 탁본사진을 대한 것은 전설을 사실로 믿을 근거가 되었다. 비록 해독은 되지 않지만 서복(일명 徐市)이 중국(서쪽)으로 돌아가면서 남겼다는 글자가 지명의 유래라는 것을 반박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도 서복의 서귀포 족적을 인정하고 있다. 아침 해 뜰 때 제주도에 닿은 서복이 하늘에 감사제를 올렸다는 조천(朝天)마을 이름의 유래도 서복도래 설화와 닿아 있음을 말해준다. 일본 큐슈 사가(佐賀)시는 2010년 서복동도(東渡) 2220주년 행사를 하면서 “서복의 발자취가 제주도에 남아있고 큐슈 남쪽 쿠시키노(串木野)에도 남았다”고 밝혔다. 동도의 목적지는 땅이 넓고 물이 좋은 사가 땅이었다는 자랑이지만, 서귀포에 다녀간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진시황 시대 방사(점술가)였던 서복이 불로불사의 신약을 구해 시황에게 바치겠다고 대 선단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난 사실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목표지가 어디였으며 목적수행 여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김성한의 역사소설 <시황제>에는 서불이 삼신산으로 불로초를 캐러 간 이야기가 나온다. 시황제가 지금의 산둥성 지방을 순행할 때 수행한 재상 이사가 “바다 저 멀리 성스러운 산이 셋 있는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산(瀛洲山)이라 부릅니다. 거기에 불로불사의 약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을 먹고 사는 선인(仙人)들이 삽니다.”고 고하고, 방사 서복을 보내 구해오자고 권유한다. 욕심이 동한 시황제가 서복에게 대 선단을 꾸리게 하여 동남동녀 500쌍을 태워 보내는 데까지는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순행 중 시황제의 급서로 후일담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등 여러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사기 <진시황기>에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이름은 봉래 방장 영주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기 <봉선서>(封禪書)에는 “봉래, 방장, 영주산은 발해(渤海) 가운데 있는데, 그곳에는 물건과 짐승이 모두 희며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념관에는 이 기록들이 발췌 전시되어 있다.
한라산의 옛 이름이 영주산이고, 정방폭포에는 서복이 여기를 지나갔다는 뜻의 ‘서시과지’라는 암각문까지 있으니 서복이 서귀포에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고 서귀포 사람들은 말한다. 영주산이 한라산 옛 이름이라는 것은 여러 문서로 입증된다.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 열 곳을 이르는 ‘영주십경’이라는 말이 지금도 널리 쓰이는 게 그 하나다.
서불과지 암각문은 지금 식별되지 않으나 조선 말기에 탁본을 떴다는 사진은 전해져 온다. 정방폭포 왼쪽 상단에 새겨졌다는 글씨는 서시과지(徐市過之)라 읽히는데, 탁본사진으로 보아서는 식별이 안 된다. 1877년 제주목사 백낙연(白樂淵)이 그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암벽에 밧줄을 매고 탁본하게 했다는 원본의 글씨는 모두 12글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슨 글자인지는 아무도 식별할 수 없다. 서귀포 사람들은 고대 중국의 과두문자여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문자가 있었는지 여부도 권위 있게 말할 사람이 없다. 그나마 지금은 마모되어서 식별조차 불가능이다.
현지 안내원 말로는 그 위로 차량통행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인데, 암벽에 새긴 큰 글자가 자동차 통행으로 손상될 수는 없지 않을까.
어쨌거나 서복과 서귀포와의 인연이 기정사실화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서복이 일본에 왔다가 거기서 죽어 무덤까지 있다고 주장하는 일본이 서귀포와의 인연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럴 법하지 않은가.
더욱 신빙성을 주는 것은 서귀포가 서복의 일본행을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기념관에는 서복동도의 해상교통로가 지도로 그려져 있는데, 추정이지만 그럴듯하다. 기원 전 200년 무렵의 항해술로 보아 한바다를 바로 건너지는 못 하였을 것이고, 산둥반도 포구에서 중국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 압록강 하구, 우리나라 서해안을 거쳐 제주도에 왔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리라는 추정도 설득력 있지 않은가.
주말 정방폭포를 찾아온 그 많은 관광객들이 서복과 정방폭포의 인연이라도 알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2016,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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