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카페 <원불교 역사의 광장>에 대종사님의 맏아드님 숭산님- 겸타원님 부부의 일생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대종사님 대하소설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맛보기를 보여 주니 왕림하시어 초기교단의 법정을 흠뻑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가기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cafe.daum.net/_c21_/home?grpid=1Ry5g
겸타원 취재기 3/
종사님의 며느리 자랑, 마누라 칭찬
부산교화의 효시인 이타원 장적조는 처음에 박창기의 중신을 서다가 종사님의 맏며느리로 점찍어 적극 추진하였다. 결혼을 성사시키고 나서 박광전-임영전 신혼부부에세 전무출신을 권유하였다. 그때부터 이타원은 세대전무출신을 구상한 것 같다.
부부 공동 전무출신서원서 받고 내 병 다 낳았다
박광전과 임영전의 결혼생활이 갓 시작된 어느 날, 장적조가 신혼부부에게 <전무출신 서원서>를 내라고 자꾸 부추겼다. 그래서 신혼부부는 직접 붓으로 전무출신 서원서를 두 장 작성해 조실을 찾아갔다.
그때, 종사님은 몸이 편찮아서 끙끙 앓고 있을 때였다. 문을 들어서니 종사님이 “어떻게 왔냐”고 물어, 서원서 두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냐”며 서원서를 열어본 종사님은
“응, 하나도 아니고 둘이가 다 한다고?”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허, 이런 경사가 어딨냐. 나 이제 하나도 안 아프다. 이부자리 다 치워라”
얼마 뒤 영전의 전무출신 서원서는 반려됐다.
십타원양하운과 청타원 박길선 모녀. 현 영빈관(교정원장 숙소)과 기념관 화장실 자리에 시집과 시누이 집이 있었다. 박길선은 과수원 운영을 잘하여 해방 뒤에 총부구내 사가중의 가장 잘지은 박해원옥의 집(현 재무부 자리)으로 이사하게 된다.
며느리 자랑, 마누라 칭찬
정기훈련에 입선한 사람이면 빠짐없이 의무적으로 강연 발표를 해야 했다.
종사주는 백발 꼬부랑 노인도, 어린아이도, 당신의 부인 하운씨까지 다 시켰다.
강연 발표가 코밑에 다가오면 대사모는 옆에 영감이 있고 제자들이 있는 것도 불고하고 며느리 같은 권동화를 따라다니며 졸랐다.
“동화, 강연 좀 가르쳐 주소. 어이.”
대사모는 강단에 나가서 강연을 하다가 염치가 없는지 그때마다 잇새에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참, 어무이는 고춧가루 잡수셨는가. 왜 ‘쉬,쉬’ 한대요?”
강연 지도를 하였던 동화의 이 말에 종사주를 비롯하여 대중이 한바탕 웃었다.
대사모가 듬적듬적 한 마디씩 말을 이어 끝까지 강연을 하고 나자
“아따, 하운이 제법 하네”
종사님은 당신의 부인을 두고 거듭 칭찬하였다.
“아따, 하운이도 진작 가르쳐 교무 보내면 할뻔 봤다이. 제법 한다.”
영전은 동선중에 결혼하였다.
결혼하고 새색시는 바로 동선에 참례하였다.
묵산이 학원생을 가르칠 때였다.
영전에게 계문 새겨보라고 하였다.
정산이 죽비 들고 진행했다.
영전은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마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정산 강평
“다 잘했는데 산육이 아니라 사육이라 했으면 더 좋았겠다.”
이성각이 칭찬하였다.
“우리가 처음 강연할 땐 달달 떨었는데 새 각시가 잘도 하네.”
임영전이 조실 문안 인사를 갔더니 시아버지가 물었다.
“니가 계문을 새겼다문서?”
“예.”
“어디 해 봐라.”
그래서 영전이 시아버지 앞에서 도랑물 흐르듯이 졸졸 계문 뜻을 새겼다.
“아따, 잘한다.”
하고 대종사께서 며느리를 칭찬하였다.
종사주, 조실 작은방에 계셨다. 이명훈에게 “아나. 거 다락에 들어 있는 거 내오너라.”
음식물에 곰팡이가 슬었다.
“썩기 전에 우리에게 주면 좋을 텐데……”
“이년아, 속없는 소리 마라. 있는 대로 주면 손님이 오면 뭔 대접을 해.”
명훈에게 칼 던져주며 “아나, 깎아봐라.”
“영전이가 과일 제법 깎더라. 거 다 배우라”
며느리 자랑했다.
영전이 떡을 올리면 물었다.
“니가 했냐?”
“아녀요.”
“영전이가 하면 잘 할 것이다.”
며느리를 격려했다.
큰며느리 임영전은 성격이 차분하고 내성적이며, 대사모의 성격은 활발하고 외향적이라서 자부와 성격 차이가 있었으나 며느리가 워낙 얌전하고 교양이 있어 마음에 흡족하고 귀엽기도 하여 고부간에 의견 충돌은 한번도 없었다.
더욱이 앞뒷집에 사는 시누이간에 남부러울 정도로 잘 지냈다. 대사모가 직접 앞집 큰딸을 챙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루는 권동화가 물었다.
“어머니는 어째서 길선이를 한번도 챙기지 않으세요? 아마도 큰딸을 미워하시는가 봐요”
“자네들이 모르는 소리! 저 애들이 저렇게 잘 지내는데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들어서 이것을 챙기고 저것을 살피면 오히려 저 애들 사이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니, 내사 모든 것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그 애들을 챙기는 것으로 아네”
“며느리가 얌전하다고 소문이 났던데 무엇이 얼마나 얌전하던가요?”
“이 세상에 그런 사람 흔치 않지. 키는 작고 얼굴은 예쁘지 않지만 시집 와서 지금까지 말대답 한번 해 본 적 없고, 빨래를 깨끗이 해서 다릴 것은 다리고, 손질할 것은 해서 내 것은 내 농속에, 애들 옷은 그 농속에 넣고, 그 애가 들어오면서부터는 농사일은 빼놓고 집안일을 손볼 것이 없었지. 더욱이 평소에 말수가 적고 말씨도 조용해서 사람 사는 것 같질 않아”
종사주 열반
계미년(1943) 5월, 임영전은 영등포 친정에 있다가 종사주 위독 소식 듣고 5월24일 밤 열차로 남편(박광전)과 같이 익산총부로 내려왔다. 박광전은 박문사에서 두달 남짓 조동종 의례 연구차 머물렀기 때문에 2부 정도로 삭발하고 있었다. 종사님은 광전의 삭발한 모습을 보고 칭찬하였다.
"광전이 두상이 보기 좋다".
갓 결혼한 장남이 당신을 닮아 반 정도 대머리인 것이 안쓰러웠는데 삭발한 것을 보니 한 시름이 덜었던 것이다.
종사님은 의자에 앉아있는데 상기가 되어 숨이 가빴다. 이리병원 내과 전문의 와카스기가 왕진 왔다.
“혼수상태가 아니냐” 물으니 아니라고 하였다.
종사님은 손발이 포동포동하고 큰 편은 아니었다.
5월27일 저녁에 이리병원 입원했을 때 임영전은 도시락 사들고 매일 시어머니께 드렸다. 대사모는 병원에 계시며 미음을 쑤었다.
열반 직후, 주산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종사님의 입에 수혈하였고 의산은 사지를 주물렀다. 그래도 전연 기식氣息이 없자 주산은 인공호흡을 한다고 코를 빨았다. 종사님의 코에서 약간의 피가 흘렀다.
나(겸타원)는 처음부터 위와 비교 안 하고 밑을 보고 사니 경쟁심이 안 생겼다. 사는데 불만이 없었다. 고생이라 생각 안하고 내 의무요 천직이고 사명으로 알고 살았다.
첫댓글 다음에서 정한 닉네임이라 어떻게 실명을 올릴지 알지 못합니다. 일러주소서.
제 법명은 박용덕이며 [원불교 역사의광장] 카페지기입니다.
닉네임 변경하시는 법 쪽지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하시고 변경부탁드립니다
@김아연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