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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경기도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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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스크랩 도산과 안중근 그리고 이강과 최재형 이야기
겨울남자 추천 0 조회 113 17.11.20 09: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재-3] 도산과 사람들 이야기

 

도산과 사람들 이야기, 세 번째는 연해주지역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이야기다. 최재형을 소개하려면 연해주로 특파된 공립협회 이강과 안중근의 연해주 망명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1907년 공화국 건설과 전쟁준비론을 품고 국내로 귀국한 도산은 애국연설을 하면서 비밀리에 신민회운동과 사업을 추진했다. 마침 을사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면서 의병대를 찾아다니던 안중근은 항일전쟁준비론을 설파한 도산의 삼선평 연설(1907.5.12)에 깊이 공감하고 도산과 친해졌다. 1907년 8월 고종의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 안중근은 황해도 의병대표로 항일전을 지휘했다. 도산은 외과의사 김필순을 도와 부상병들을 구호했다. 도산은 안중근이 신민회로 결합하기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해서 이강과 결합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를 바랐다.

 

연해주의 이강과 안중근

도산의 생애 동지인 이강은 1907년 8월에 국내에 잠입하여 1908년 1월 신민회 창립을 지켜보고 연해주로 떠났다. 이강은 국내에서 숙청단을 조직하여 이등박문과 을사오적 처단계획을 수립했고 이재명의사가 이 계획에 동참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개척리에 도착한 이강은 미주 공립협회에서 파견된 김성무와 이교담을 만나 공립협회 지방회 조직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 공립협회 회원 전명운과 합성협회의 장인환이 일제 통감부 외교고문관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은 『공립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져 러시아 한인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무시켰다. 이강은 여세를 몰아 연해주 재력가인 최봉준의 투자금으로 『해조신문』을 창간(1908.2.26)하고 편집과 논설 주필로 활동했다. 『해조신문』은 일제 통감부의 압력으로 75호를 끝으로 폐간 처분되었다. 그러나 이강은 굴하지 않고 최재형과 결합하여 『대동공보』를 창간(1908.11.18)하여 편집장을 맡았다. 그리고 1909년 1월 7일,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를 조직했다.

 

안중근은 1907년 8월 의병전쟁을 치르고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두만강 접경지대인 연해주에는 군대해산을 계기로 군인과 의병들이 대거 망명해 있었다. 간도 의병장 이범윤도 러일전쟁 때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여 항일전을 펼치다가 크라스키노(연추)로 망명하여 최재형의 도움을 받고 군자금과 군량을 모으고 있었다. 안중근도 최재형의 도움을 받으며 그의 조카 엄인섭과 의형제를 맺고 항일단체 동의회를 결성하였다. 1908년 3월, 헤이그 밀사였던 이위종이 부친 이범진이 러시아 상주 공사관을 지내면서 의병 자금으로 마련해 놓았던 1만 루블의 군자금을 지원 받아 연해주로 와서 삼촌 이범윤과 최재형을 만났다. 이들은 본격적인 의병부대 창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범윤 계와 최재형 계가 힘을 합해 초기 규모 600여명의 의병부대가 형성되었다. 이 규모가 점점 커져서 3,4천명으로 늘어났다. 이범윤이 총독이고 김두성이 총대장, 전제덕, 김영선 등이 대장이었다. 안중근은 전제덕 휘하 우영장이었고 엄인섭이 좌영장이었다. 의병들은 사포대에서 사용했던 무기와 러시아정부에서 마적방어용으로 주민들에게 제공한 엽총 등으로 무장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싸게 사들인 최신식 총기류 등으로 의병들을 무장시켰다. 마침내 안중근이 이끄는 정예부대 300명은 1908년 7월부터 두만강 산악지대에서 수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신아산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계속되는 항일전에서 패퇴하면서 지휘관으로서의 안중근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1909년 1월, 안중근은 도산이 소개했던 이강과 교류하면서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에 가입하고 심기일전하였다. 그리고 최재형이 이끄는 새로 편성된 동의회 산하에 동지 11인과 동의단지회를 결성(1909.3.5)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고자 하였다.

 

최재형은 누구인가 ?

최재형(1858~1920)은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6년, 8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두만강 너머 러시아 땅 지신허로 갔다. 배고픔 때문에 갯가를 방황하던 어린 최재형은 항구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선장의 아내는 학식이 뛰어나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가르쳤고, 그가 해외에서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최재형은 풍부한 학식과 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던 한인들을 고용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지도력은 마침내 연추의 도헌(군수 급)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 지위가 높아졌다. 최재형은 연해주로 건너 온 의병들을 성능이 뛰어난 러시아 현대식 모신소총으로 무장시키는 등 그의 모든 재산을 항일운동을 위해 대부분 소진하였다. 의병들이 러시아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하면서 의병활동을 방해했다.

 

최재형은 1909년 10월, 이강, 정재관, 안중근 등과 함께 이토처단 계획을 대동공보사에서 수립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가 북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첩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최재형은 거사비용 일체를 마련하고 안중근을 권총으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거사 장소를 하얼빈으로 결정한다. 그 이유는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기 위함이었다. 『대동공보』주필 러시아인 미하일로프가 안중근의 변호를 맡도록 사전 준비를 마쳤다. 또한 이강에게는 안중근과 대동공보사와의 연락 책무를 맡기고, 거사 이후에는 일본 법정 재판에 대비하여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도록 이강을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여순의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다.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을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에 안의사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 동포들은 일본의 압력에 굴한 러시아 당국의 감시까지 받게 된다. 러시아 당국은 1911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800여 호 7천여 가구를 구개척리에서 철수할 것을 명했다. 최재형은 한인의 권익옹호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를 창설하고 회장이 되어 부회장 홍범도와 함께 수습에 나섰다. 이상설, 신채호, 이종호 등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이 조직에 참여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권업회는 실질적인 한인 최고 통합기구로 공식적인 결사단체로 러시아 당국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권업회는 함북파 세력이 주도하고 기호파와 의병계가 주도권을 가졌다.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 국민회 회원들도 처음에는 권업회로 편입하였다가, 1911년 9월 이후로 등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시베리아 자바이칼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갔다. 러시아는 이들의 활동을 미국의 공화주의자라는 이유로 공인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권업회가 안정되자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추풍)로 이주했다. 일제는 밀정들을 앞세워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최재형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기도 하였다. 최재형은 무혐의로 곧 석방되었으나, 러시아당국이 더 이상 그와 상거래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의 초라한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20년 ‘4월 참변’ 때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최재형의 나이 63세였다.

 

도산의 망명과 연해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는 동의회와 공립협회 극동지방회가 조직적으로 결합되어 이루어 낸 결정체였다. 안중근 거사의 배후 혐의로 국내에서는 도산을 비롯하여 이갑, 이종호, 유동열, 조성환, 양기탁, 김구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도산은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 사형집행 이후 국내를 탈출하여 연해주로 와서 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위로하고 이들을 친동생처럼 살폈다.

 

1910년 5월 연해주에서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13도 의군을 구축하려 했을 때만 해도 지역계파를 초월한 범국민적 결사체로 결집되었다. 도총재 유인석, 창의총재 이범윤, 장의총재 이남기, 도총소참모 우병렬, 도총소의원에 홍범도, 이진룡, 국내에서 신민회를 이끈 안창호와 이갑이 선임되었었다. 13도 의군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한일강제병합이 되고, 일제가 항일운동 확대를 우려하여 러시아에 단속을 강력히 요청함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1910년 8월 24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도산은 최재형, 이상설, 신채호, 유인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교류하고, 분파주의 척결을 다짐하는 한편 자선공제회를 운영하고, 신문발행과 한인귀화 문제 등을 놓고 러시아 당국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도산은 1911년 2월에 밀산현 기지개척지를 둘러보고 5월에 치타에서 국민회시베리아총회를 설치하고, 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하여 9월 2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끝)

 

흥사단 기러기 7~8월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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