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굉장이 크고도 넓은 나라임에 비해 여행하기에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이 마음에 드는 것은 태국도 그렇지만 대부분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이용하였고 길이며, 집이며 건물이며 건축들이 자연의 일부처럼 건축되어졌고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제는 일선에서 은퇴하신 목사님을 찾아뵙고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미국에 와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 중심이고 가족 이외에는 교제권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은퇴하신 목사님은 오랜만에 말할 대상을 찾았음인지 수년간 가슴에 쌓아놓았던 말들을 하면서 오랜 시간여 동안 이어지지 못했던 연보의 간격을 단 하루만에 메워주었습니다.
목사님의 안내를 따라 LA의 헐리웃의 인근에 위치한 Froest Lawn Glendle이라는 추모공원에 도착했다. 이곳 FLG는 단순한 추모공원은 아니고 커다란 산 속에 예수님의 생애를 상징하는 구역을 만들고 구역마다 나누어 특징있게 몇 개의 유명한 박물관, 기념 건물, 기념 조각, 그리고 몇개의 아담한 교회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기념동산이었다. 이 추모공원 전체를 조망하고 있노라면 예수님의 생애를 탄생부터 부할 승천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되었다. 더우기 이곳에는 이태리 밀라노의 성프란시스 성당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원작과 같은 실제 크기의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탄생에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그린 “십자가의 죽음”과 재림시의 모습을 그린 “부활” 등의 대작을 설명과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의 설명서에 의하면 닥터 이톤은 유명한 폴란드의 음악가인데 어느 날 그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다고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승리하신 예수님의 이미지인데 최후의 만찬과 부활과 함께 세트로 보여주셨다고 한다. 음악가인 이톤은 당시 유명한 화가인 쟌 스티카(Jan Styka)가 러시아로부터 폴란드의 해방을 기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대작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에 이톤은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환상을 전부다 이야기하여 주었고 후에 대통령이 된 Ignace Paderewski도 스티카에게 이톤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에 쟌 스티카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보고 난후 폴란드로 다시 돌아와 십자가의 대속을 그렸다고 한다. 그는 1904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열린 루이지에냐의 경매 박람회에 그것을 가지고 왔으나 사이즈(길이 195피트, 높이 45피트)가 너무 커서 전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박람회가 끝나고도 스티카는 그림을 미국에 남겨두고 혼자 돌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거대한 그림을 가지고 가는데 드는 세금이며 기타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다시는 자신이 그린 그 그림을 보지 못하고 1925년에 죽었다. 그 그림은 이톤 박사와 그의 동료들이 1943년 시카고의 한 오페라 회사에 보관하기까지는 여러 창고들을 전전하여야 했다. Frost Lawn은 십자가의 대속을 구입하였고 이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그 걸작품을 전시할 빌딩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1951년 어느 금요일에 걸작품을 위한 빌딩은 완성되어 봉헌되었다.
25년 동안 이톤 박사는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거룩한 삼부작이라는 서사 회화를 완성하기 수많은 서사회화를 찻고 있었다. 비록 그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많은 걸작품들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그런 이미지를 형상화한 걸작품을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하였다. 이톤은 자신이 받은 이미지를 완성시켜줄 좋은 화가를 발굴하기 위하여 콘서트를 열어 수많은 화가들이 구상하고 그린 부활에 관한 그림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과 승천에 관한 그림을 응시하였는데 위원회에서는 콘서트에 제출된 그림들 중에서 무작위로 미완성의 성화를 추천 받은 결과 당시 미국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로버트 클락이 제출한 작품을 미완성의 작품 초고를 선정하였다. 그가 그린 부활은 1965년에 완성되었으며 쟌 스타이카의 십자가의 대속과 함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전당에 안치되었다. 이로서 그가 구상하던 세 작품중 두개의 작품이 선정되어 박물관 안에 있는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전당에 전시되었으며 그 이후로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1924년 프로스트 론의 창립자이자 미술수집가인 허버트 이톤 박사(켈리포니아 지역에서 많은 금광을 개발하여 돈을 번 그는 많은 재정을 기독교 고미술을 수집하고 전시하는데 사용하였으며 많은 땅을 사서 추모공원을 많이 만들었다.)는 이태리,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성당안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것이 뛰어난 걸작품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최후의 만찬을 잘 보존할 수 있도록 다시 하나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코의 성당안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고난 후 이톤 박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을 보존하기 위하여 스테인드 글라스가 이상적인 매개체라고 생각하고 로사와 세실리라 케실리아-모레티(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수리하여 그 과정을 알고 있는 모레티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와 접촉하여 그로 하여금 최후의 만찬을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도록 하였다. 그들이 이태리에서 그 일을 하는 동안 이톤 박사는 Frost Lawn에 그 작품을 소장하기 위하여 기념 건물을 건축하였다. 로사와 모레티는 “최후의 만찬”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6년만에 완성하였다. 1931년 4월 28일에 frost lawn에 이 작품은 전시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세가지 순간(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대속, 부활)을 묘사한 걸작품 가운데서 Frost Lawn에 전시된 첫번째 작품이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세가지 서사회화로서 그는 최후의 만찬(스테인드 글라스)과 십자가의 대속(이 그림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한 그림 안에 그의 삶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전의 영광의 모습을 하고 있다.)과 부활이 그것이다. (사진을 첨부할 예정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다시한번 주님이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