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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
2. 백제의 국가 체제 정비와 정복사업
1) 고이왕과 국가 체제 정비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년∼166년)의 둘째아들인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년∼286년)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년∼234년)이 죽은 뒤 맏아들 사반왕(沙伴王, 재위 234년∼234년)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므로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년∼214년)의 아우 고이(古尓, 古爾)가 왕위에 올랐다.
고이왕 13년(246년) 가을 8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과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이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공격해 낙랑군 주민을 잡아 왔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했다. 고이왕은 그들로부터 침공을 당할까 염려하여 낙랑 주민들을 돌려보냈다.
22년(255년) 가을 9월, 고이왕은 군사를 출동하여 괴곡(槐谷) 서쪽에서 신라 군사들과 싸워 쳐부수고 장수 익종(翊宗)을 죽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쳤다. 신라 군사를 이기지 못했다.
27년(260년) 봄 정월,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어 임금의 명령을 내어 주는 일과 받아들이는 일을 맡게 하고, 내두좌평(內頭佐平)을 두어 창고와 재정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을 두어 예법과 의례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을 두어 숙위(宿衛)와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을 두어 형벌과 감옥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한 달솔(達率)⋅은솔(恩率)⋅덕솔(德率)⋅한솔(扞率)⋅나솔(奈率)⋅장덕(將德)⋅시덕(施德)⋅고덕(固德)⋅계덕(季德)⋅대덕(對德)⋅문독(文督)⋅무독(武督)⋅좌군(佐軍)⋅진무(振武)⋅극우(剋虞)를 두었다. 6좌평(六佐平)은 모두 1품(一品), 달솔은 2품(二品),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에 고이왕은 영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줏빛 옷을 입고 은제 꽃으로 관(冠)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도록 했다.
28년(261년) 봄 정월, 왕이 자주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 정사를 처리하였다. 진가(眞可)를 내두좌평(內頭佐平)으로, 우두(優豆)를 내법좌평(內法佐平)으로, 고수(高壽)를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곤노(昆奴)를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유기(惟己)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임명하였다.
29년(262년) 봄 정월, 왕이 명령을 내려 무릇 관인(官人)으로서 재물(財物)을 받은 자와 도둑질 한 자는 장물(贓物)[범죄 행위로 얻은 재물]의 3배를 징수하며, 종신(終身)토록 금고형(禁錮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53년(286년) 봄 정월,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겨울 11월, 고이왕이 죽었다.
백제는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 후 내부적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의 강화에 주력해 마한을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42년 봄, 고이왕은 나라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국토의 남쪽 평야 지대에 논을 개간하게 하였다. 중앙에는 6개의 좌평제도와 16등급의 관리가 있어 나라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리고 관리의 복색(服色)을 제정하고, 법령(法令)을 반포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유력한 세력들을 중앙의 통치 체제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종래의 연맹체 성격을 벗어나, 3세기 중엽 고이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의 진전을 보았고. 광대한 정복국가를 이루었다. 262년 봄, 고이왕이 명령을 내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나 도적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며,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하게 하여 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율령 반포가 고이왕대에 이루어졋는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있다.
고이왕대에 율령이 반포되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무릇 관인으로서 수재(受財)한 자와 도둑질한 자는 3배로 변상케 하고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라는 『삼국사기』 고이왕 29년의 기사를 인정하고 이 때에 율령의 반포가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하는 입장(이종욱, 「백제의 좌평」, 『진단학보』 45, 1978, pp.30∼32)과 이를 부정하고 근초고왕 내지 근구수왕대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입장(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pp.266∼267)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율령의 반포가 불교의 전래 및 공인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불교와 율령은 종교와 법제라는 형식의 차이는 있으나 고대국가 성장과정에서 중층적인 지배구조를 극복하고 일원적인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데에 동일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을 고려할 때 백제도 역시 불교 전래와 공인의 시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그럴 경우 4세기 후반 이전으로 소급시키기는 곤란할 것 같다.
―권오영, 「백제의 성립과 발전」,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6· 삼국의 정치와 사회 2 백제』, 탐구당(번각 발행), 2013, p.33.
『삼국사기』에 고이왕 27년∼28년에 완비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6좌평·16관등제’에 대해 『주서(周書)』와 『구당서(舊唐書)』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고이왕 때 완성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동명(東明)의 자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매우 어질고 신실했으며, 처음으로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라는 기사에 백제 시조로 기록되어 있는 ‘仇台(구이)’가 바로 이 ‘古爾(고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이왕대에 백제의 시조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2) 근초고왕과 중앙집권 국가 체제 완성
어느 정도 국가의 기초를 다진 고이왕(재위 234년∼286년)의 뒤를 이어 책계왕(責稽王, 재위 286년∼298년)이 왕위에 올랐다. 책계왕은 298년 낙랑의 군대와 ‘맥인(貊人)’이라고 불리던 동예(東濊)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적군의 병사에게 살해되었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년∼304년)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당했다. 이러한 백제의 위기 속에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년∼344년)이 왕위에 올라 나라의 안정을 꾀했다. 이 무렵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해 백제는 북방으로부터 오는 압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비류왕은 312년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임명해 군사 관계의 일을 전담하게 하고, 321년 이복동생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임명하는 등 대외 팽창 정책을 폈으나, 327년에 우복이 옛 수도인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비류왕은 군대를 보내 우복의 반란을 평정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별다른 나라의 발전은 이룩하지 못했다. 그러나 계왕의 뒤를 이어 346년에 왕위에 오른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375년) 때 백제는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은 진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진씨는 백제 8대 씨족 중의 하나로 고이왕 때부터 대대로 좌평직(佐平職)에 있어온 씨족이다.
근초고왕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그는 남쪽으로 뻗쳐 내리는 고구려와 북쪽으로 뻗쳐 오르는 신라를 견제하면서 끊임없이 영토를 넓혀갈 꿈을 키우고 있었다. 백제가 자리잡은 지역은 산맥과 하천에 의한 천연적인 방어선이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와 신라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고구려나 신라의 공격을 받게 되면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남쪽으로 마한을 통합하고 동쪽으로 가야 소국들에게 영향력을 뻗치게 된 근초고왕은 이제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24년(369년) 가을 9월,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년~371년) 사유(斯由)가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稚壤)[지금의황해도 백천]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백제의 민가(民家)를 침범하고 약탈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近仇首)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태자는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군(高句麗軍)을 급히 쳐서 깨트리고 5천여 명의 목을 얻었으며, 노획한 물건들은 장수와 병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6년(371년), 고구려 군사들이 쳐들어 왔다. 백제 군사들은 패하(浿河)[지금의 예성강] 강변에 숨어 있다가 고구려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렸가 갑자기 공격했다. 고구려 군사들이 패배하였다. 겨울에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近仇首)와 함께 정에병(精銳兵)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해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 고국원왕 사유가 힘껏 싸워 백제군사들을 막다가 유시(流矢)[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근초고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근초고왕은 마한의 남은 땅을 점령하여 백제의 영역이 남해안에 이르게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재위 331년∼371년)을 전사시켰다. 근초고왕은 가야의 일부 소국에도 지배권을 행사했고, 경기, 충청, 전라,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와 황해도 일부 지역 등 백제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확보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9, 「신공기(神功紀)」‘49년 3월’조 기사를, 백제가 369년 가라7국(加羅七國)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행한 사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百濟)가 탁순(卓淳)의 협력을 얻어서 369년 비자발(比自㶱),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 가라7국(加羅七國)을 평정(平定)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백제(百濟)와 가야제국(加耶諸國)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평정이라는 말은 백제측(百濟側) 표현으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표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백제(百濟)가 가라7국(加羅七國)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행한 만큼 그에 상응한 관계가 백제(百濟)와 가라7국(加羅七國) 사이에 이루었을 것임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연구-한반도남부경영론비판-』, 일조각, 1993, p.149.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3월’ 조의 기사를 왜(倭)가 아닌 백제를 주체로 하는 기록이라고 보고 왜의 군사들이 수행한 것처럼 되어 있는 ‘가라 7국 평정 작전’은 근초고왕과 왕자인 귀수(貴須)[근구수]의 작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때 백제가 신라를 깨트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우나 ‘가라 7국(加羅七國) ’을 평정했다는 기사는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이 때의 ‘가야 정벌’은 군사적인 무력침공이라기보다는 백제를 정점으로 비자발(比自㶱) 등 7국이 동맹을 맺거나 통교하게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p.333.> 그것은 뒷날 성왕이 “옛날 나의 선조 속고왕(速古王)[근초고왕], 귀수왕(貴首王)[근구수왕]의 치세에 안라(安羅)·가라(加羅)·탁순(卓淳) 한기(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게 되어 우호관계를 두터이 맺게 되었다. 그래서 자제(子弟)로 삼아 항상 도탑게 잘 지내기를 바랐었다”<『일본서기』권18, 흠명천황 2년 4월>고 한 회고담을 통하여 짐작된다. 실제로 4세기 중반부터 백제가 가야지역을 직접 지배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가야유적에서 종종 발견되는 백제계의 유물들은 대개가 5세기 후반, 즉 웅진기 이후에 해당된다<최종규, 「제라야의 문물교류」 『백제연구』23, 1992>.
―권오영, 「백제의 성립과 발전」,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6· 삼국의 정치와 사회 2 백제』,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39.
근초고왕은 정복 활동과 더불어 대외 활동도 활발히 펼쳐, 중국의 동진(東晉, 317년~420년)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왜와 교섭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4세기 후반 중국이 분열된 시기를 파고 들어, 수군(水軍)을 증강시켜 바다 건너 중국 랴오서(遼西요서) 지역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백제가 중국 대륙에 진출했다는 증거는 『송서(宋書)』와 『양서(梁書)』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高驪)[고구려]와 더불어 랴오둥(遼東)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려[고구려]가 랴오둥(遼東)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랴오서(遼西)를 공격하여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라 한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
― 『宋書(송서)』 권97, 「列傳(열전)」57 百濟傳(백제전)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驪)[고구려]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나라 때에 이르러 구려[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고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遼西)⋅진평(晉平) 두 군(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梁書(양서)』 권54, 「列傳(열전)」48 百濟傳(백제전)
백제가 랴오서(遼西요서)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고구려가 랴오둥(遼東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여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는 뜻도 있었고, 무역 기지를 확보하여 상업 세력권을 형성하는 뜻도 있었다. 백제의 랴오서(遼西) 진출은 5세기 무렵 중국 양쯔강(揚子江양자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송(宋)의 역사를 기록한 『송서(宋書)』뿐만 아니라 『양서(梁書)』, 『남사(南史)』, 『통전(通典)』 등 중국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학계에는 백제의 랴오서(遼西) 지방 통치를 인정하는 견해와 부정하는 견해가 있고, 백제가 랴오서(遼西) 지방을 통치는 하였으나 그 기간이 불과 5개월에 그쳤다는 견해도 있다.
칠지도 명문(七支刀 銘文)
(앞면)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병해(兵害)를 물리칠 수 있고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가 만든 것이다.
(뒷면)
선세(先世) 이래 아직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가 뜻하지 않게 성음(聖音)이 생긴 까닭에 왜왕(倭王)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할 것이다.
―김영심 해석,「칠지도 명문(七支刀 銘文)」,『한국고대금석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백제칠지도명(百濟七支刀銘), 허흥식 편저,『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古代』, 아세아문화사, 1984, p.3.
김영심은 칠지도의 제작 연월일이 신공 52년 9월 16일로 이 해가 바로 태화(泰和) 4년(372)이며 3년 전인 근초고왕 24년(369)이 원년에 해당되는데, 근초고왕 24년은 근초고왕 부자가 완전히 마한(馬韓)을 통합한 해로 이 해에 새로 연호를 세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
활발한 정복 사업과 부자 왕위 상속제 확정
근초고왕은 왜로 이미 진출해 있는 백제 계통의 세력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펴 해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칠지도((七支刀)는 지금 일본 나라현(奈良縣나라현) 덴리시(天理市천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석상신궁)에 간직되어 있는 금속제 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36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장(長) 74.9센티미터, 신장(身長) 65.5센티미터、경장(莖長) 9.4센티미터이다. 근초고왕의 아들인 근구수왕이 왕자로 있을 때 왜의 사신을 통하여 왜왕(倭王)에게 하사했다. 그것은 곧은 칼날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각 가지칼이 세 가지씩 뻗어 있어 도합 일곱 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七枝刀)라고 부른다. 그것에는 6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倭王)을 위하여 칼을 만들어 내리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칠지도는 일본의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입증하는데 증거의 하나로 제시하기도 하나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백제왕 하사설(百濟王下賜說)’이 유력한 견해이다.
근초고왕은 대외적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쳐 국토를 확장하고 대내적으로 형제 왕위 상속제에서 부자 왕위 상속제로 바꾸는 왕위계승 제도를 확정지었다.
한편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에게 백제의 국사책인 『서기(書記)』를 편찬케 하여 백제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고 하였다. 근초고왕이 백제를 다스리던 시기는 백제의 전성기였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