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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申叔舟, 1417(태종 17) ~ 1475(성종 6)]
조선 초기 문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間齋). 본관은 고령(高靈).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 41년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42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섬[對馬島]에 들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했다. 그 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明)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얻어 훈민정음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47년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53년(단종 1) 부승지가 되어 계유정란에 참여해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다음해에 병조판서·대사성 등을 지냈다. 57년 우의정에 오르고 5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60년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로서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정벌, 62년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곧 원상(院相)이 되었고, 68년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이 되었으며, 71년(성종 2)에 좌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72년에는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국조보감》 《영모록(永慕錄)》 등을 찬수했으며, 《보한재집》 《북정록(北征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의 저서를 지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전하는 것으로는 《몽유도원도》의 찬문(贊文)과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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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申崇謙, ?(?) ~ 927(태조 10)]
고려시대 무장. 광해주(光海州;현재 春川) 출생. 초명은 능산(能山). 본관은 평산(平山). 그는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 개국일등공신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7∼8년동안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긴장관계는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927년에 견훤(甄萱)이 신라에 공세를 펴자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같은 해 대구(大邱)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과 싸웠으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자 신숭겸은 이에 맞서 싸워 태조를 구하고 전사했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1120년 예종은 그와 김낙(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시호는 장절(壯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