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산책
전라도의 명칭은 전주와 나주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만큼 나주는 남도의 중심지. 나주평야의 곡식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때 많은 상처를 입어 옛 영화를 찾기 힘들다. 금성관 앞은 목포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국도 1호선. 이 길을 통해 호남의 곡식이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넓은 길이지만 가슴 아픈 대로다.
금성관
현재 4대문을 복원해 놓은 읍성은 둘레가 3,679m로 타원형 행태다.
그 한가운데 자리한 것이 객사인 금성관이다. 객사는 조선시대 지방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 양쪽의 익사에서 유숙했다고 한다.
궁궐처럼 너른 월대가 있는 것이 특징. 그 아래쪽에 깔려 있는 박석은 옛 모습 그대로다. 박석은 빗물이 잘 스며들기도 하고 임금님 앞에서 조심스레 걸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햇빛 반사를 막아 피부 보호의 역할을 한다. 다양한 생김새만큼이나 무궁무진한 나주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원래 여순사건 때 퇴각하던 병사들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은행나무 뒤에서 숨은 관리가 즉시 객사에 불을 껐다고 한다. 금성관을 살린 은행나무라서 그런지 더욱 듬직하게 보인다.
금성관의 현판은 동국진체의 대가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 전라도를 유람하면서 수많은 글씨를 남겼다.
목사내아
금성관 옆은 나주 목사 내안인 금학헌. 나주 목사의 살림집으로 보면 된다. 지금 한창 나주 시장 선거운동으로 프래카드가 나부끼고 있다. 과연 2022년 나주 목사는 누가 될까 내심 궁금하다. 벚꽃 필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숙박도 가능하다.
벼락 맞은 팽나무가 골목을 사선으로 긋고 있다. 고통을 잊고 담 한 켠을 수놓은 의지의 나무다.
나주향교
나주향교는 서울의 성균관, 장수향교, 강릉향교와 더불어 향교건축물 중에서 가장 장중한 건물로 손꼽힌다. 조선 중기 건물로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균관처럼 전묘후묘의 형태를 띈다. 공맹을 모시는 건물이 뒤에 서야 하는데 이곳은 예외다. 대성전은 주춧돌이 연꽃무늬. 사찰의 돌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마중3917
나주향교와 담벼락을 같이 쓴 곳은 마중3917.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핫한 카페이다. 가을에는 아수라 은행나무가 볼 수 있는데 한쪽은 초록, 다른 한쪽은 노란색을 띄고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1939년의 풍경을 2017년에 만나다’ 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옛집이 지어진 때가 1939년, 그 방치됐던 곳을 2017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한옥와 일본근대건축을 짬뽕한 목서원은 숙박이 가능하다. 이불장이 나전칠기 문짝으로 한 것이 인상적이다. 1930년대 독특한 내부구조를 볼 수 있다. 1919년에 중건돼 정자로 쓰인 난파정은 유유자적 호젓함을 느낄 수 있다.
이집의 시그니처는 나주 배를 활용한 음료와 디저트다. 배알갱이가 사각사각 씹히는 그 맛이 일품이다. 금목서 아래 그늘에서 마시면 그만이다.
옛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가장 멋지게 변신시킨 박우진 대표에게 박수를 보낸다.
첫댓글 나주, 왕년에는 큰 곳이였네요..
전에 갔을 때 여름철 비가 많이 와 서둘러 이동했는데
다음 기회 차근차근 가보고 싶네요...
배씨도 많이 사는 고장입니다....
광주에서 목포가는 길, 한국전력이 옮겨서 갑자기 커 진 요즘이네요...
예전에 모놀 1박 답사 갔던 곳이네요.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던 늦가을로 기억해요.
그때도 참 좋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