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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0:1-23 언약관계
<본문>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내 백성아 들을찌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1-23)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시고 힘들 때 도와주고 지켜주는 그런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말이 현대 교인들에게는 진리로 굳어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자신이 아는 지식과 상식을 바탕으로 믿음과 도우심을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자신의 열심과 정성으로 오해하여 나름대로 바치는 것 등의 종교생활에 힘을 쏟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도우심, 즉 삶의 형통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현대 교회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신앙을 신앙이라고 고집하면서 인간이 원하는 것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버리지를 못하여 진리를 배척하고 대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여기면서 악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을 통해서 알아가며 자신의 상식과 지식에 의해 구축되어 있던 우상이 무너지고 대신 성경이 계시하는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멸망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과 언약한 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자를 성도로 일컫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인간의 정성과 열심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성도를 언약관계로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도에게서 찾고자 하시는 것도 언약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열매란 23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성도는 윤리나 종교적 열심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다움 역시 윤리나 종교적 열심이 기준이 아니라 언약의 열매가 있음으로 인해서 일컬음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55:8,9절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이러한 말씀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인간이 원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 곧 하나님이 가시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한 잘못된 신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길이며 이 길의 결국은 22절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선포하는 것처럼 멸망으로 끝나는 길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잠잠하시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길을 갈 때 즉각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잠잠하기만 하시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기 때문에 잠잠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2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잠잠하심을 내가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으로 여긴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잠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말씀 앞으로 인도하셔서 우리의 잘못됨과 불신앙을 책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잠잠히 계신 분으로 여기는 것은 말씀 앞에 서지 않았고, 말씀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부르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빛을 발하십니다(2절). 즉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만 나타난바 된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자 역시 하나님이 택한 성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빛, 즉 영광을 어디에서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을 2절 말씀에서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이라고 말합니다. 온전히 아름답다는 것은 시온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아름다움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어떤 아름다움도 시온의 아름다움에 견줄 바가 못 되는 것입니다.
시온의 아름다움은 경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산입니다. 그리고 이 시온에서 행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제사입니다. 즉 시온에는 거룩한 제물의 피가 있고, 그 피로 인한 용서의 은총이 있고, 용서로 인한 감사의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을 온전한 아름다움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온전한 아름다움이 곧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에게 나타내신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임하신 아름다운 시온에 불이 삼키고 사방에 광풍이 분다고 말합니다. 불이 삼키고 광풍이 부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뜻합니다. 용서의 은총이 있는 곳이 시온인데 진노는 또 웬말입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용서의 은총이 있는 시온으로 인도 받았다고 해서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범하는 자가 곧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진노의 자식으로 시온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이 진정으로 온전히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의 심령에 머물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불이 삼켜야 할 사람이 바로 나고, 광풍이 쓸어 버려야 할 사람도 바로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시온의 은총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삼킨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고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은총이며, 시온의 아름다움이 곧 십자가임을 알게 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대신 하나님의 진노에 삼킴을 받은 십자가로 인도 받은 성도가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헌금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설령 나의 전 재산을 바친다고 해도 예수님이 대신 흘리신 피 값에는 어림도 없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정성과 자신이 바친 재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될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取)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9-13절)
여러분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까? 인간의 잘못된 예배, 잘못된 신앙에 대한 책망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은 성도가 바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고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바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헌금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신자의 헌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았기에 세상의 것은 얼마든지 흩어 버릴 수 있다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헌금에 자유롭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여전히 세상의 것을 흩어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로 언약한 백성이기 때문에 언약의 삶을 제사에서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곧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14절). 이것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에게서 나타나야 할 언약의 열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언약의 열매는 인간의 정성과 열심, 또는 인간이 바치는 어떤 재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언약의 열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의 증거를 인간의 정성과 열심, 그리고 인간이 바치는 재물로 말한다면 그는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거짓 선지자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23절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감사가 제물이 된 제사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참된 제사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제물이라면 시온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가 언약의 열매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온전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그로 인한 깊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49:1-20 생명의 구속
<본문>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찌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1-20)
<설교>
요즘 기름 값이 비싸다보니 산유국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름이 온 땅을 덮을 정도로 많다고 해도 사람에게 기름은 생명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목이 마르다고 해도 기름을 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비싼 기름을 팔아서 싼 물을 사다 마시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약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물을 팔까요? 기름이 없어서 자동차를 굴리지 못하고, 전기를 생산하지 못하고, 공장을 가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실 물조차 부족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물을 팔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의 가치를 소홀히 합니다. 내 주변에서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물보다는 기름에 더 가치를 두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무엇이 내 몸을 유지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쉽게 부자를 부러워합니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은 마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돈이 곧 사람들의 인생에 큰 가치관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의 삶은 대개 돈을 따라 흘러가게 되며, 돈 때문에 여러 부도덕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 뇌물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돈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잘못된 가치관이 뇌물과 부정부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이 무궁무진합니다. 큰 정원이 달린 전원주택에다가, 고급 승용차에다가, 온갖 문화시설을 갖추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우아하게 살고 싶은 욕망들이 내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도무지 떨질 수 없는 욕망입니다. 저 역시 이러한 욕망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욕망으로 인해서 우리가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에만 모든 소망을 둔 나그네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의 현실이며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과 한계 속에서 신자가 신자로서의 삶의 길을 가기 위한 첩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지향적인 삶보다 더 나은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름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진실로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은 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돈이 생명일 수는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유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6-8절을 보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재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너무 귀해서 천하만국을 값으로 지불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한 영혼의 값도 치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찌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즉 생명의 구속은 너무 귀해서 세상 모든 재물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생명의 속전으로 바칠 수 없음을 아는 것이 곧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할 지혜고 명철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소홀히 여깁니다. 나의 생명의 속전을 위해서 하늘의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 가치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생명보다는 생존의 문제를 더 중요하고 급한 것으로 여기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믿음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생존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자녀들을 공부시키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생존 자체에 위협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에 대해서는 멀리 있는 나중의 문제로 생각하고, 생존의 문제는 지금 당장 급하고, 해결해야 하고, 필요한 문제로 여기기 때문에 항상 생명보다는 생존에 급급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돈은 분명 우리의 환경을 풍요롭게 해주고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행복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사 돈이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해도 그 기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돈으로도 지킬 수 없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목숨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내 수중에 있던 돈은 모두 타인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생존은 잠간 동안의 문제이지만 생명은 영원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14절을 보면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죽음 후에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음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자랑거리인 아름다움도 풍부함도 음부에서는 모두 소멸되고 사라질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사망에 이끌려 음부로 갈 것인데 그러한 인간에게 진심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도 여러분이 소유지향적인 삶을 가장 바람직하고 그래서 반드시 성취해야만 할 삶의 목표로 확신하고 있다면, 제가 아무리 생명의 귀함에 대해 말씀드린다고 해도 여러분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결국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인생을 돌아본다면 적어도 생존의 문제가 인생에서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생각에서 소유지향적 삶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삶의 근거를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결코 장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은총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며 존귀하게 대한다고 해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그 인생은 짧습니다. 멸망하는 짐승처럼 죽음은 같다는 것입니다.
16-1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 같습니까? 사람들이 세상의 것으로 자기 영광을 삼고 자랑거리로 삼으며 떵떵거린다고 해도 놀라지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영광과 자랑거리가 음부에서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음부에까지 따라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으로 축하를 받고 칭찬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조상이 가는 것으로 가게 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음부에서도 모두가 동일하게 영원한 고통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소유지향적 삶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복된 삶의 근거가 무엇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답이 바로 15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이것이야 말로 복된 삶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내 영혼을 음부의 권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생명의 속전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신 무한하신 은총과 사랑의 존귀함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신자가 복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생명의 구속이야 말로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세상의 것이 풍부하지 못해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세상의 것이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모은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생명의 속전이 되지를 못합니다. 생명의 속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세상에서는 멸시를 받습니다.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존 세계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결국 음부로 돌아갑니다. 세상에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하나님의 구속은 음부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존귀한 은혜인가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무인도에서 한 달 동안 생활을 해야 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챙기겠습니까? 기름입니까? 무인도에서 기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음부로 돌아가야 할 운명인데, 이러한 운명에서 우리가 챙겨야 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생명의 속전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만을 믿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자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감사할 뿐입니다.
인생이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잊고 산다면 결국 우리는 소유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재물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가르치는 본문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48:1-14 이 하나님은
<본문>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찌어다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14)
<설교>
하나님은 신자에게 경배의 대상이시며 찬송의 대상이십니다. 또한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에 대해 무지한 자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 부분을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를 아는 일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문제가 단지 지식의 차원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또 다시 듣고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시간낭비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머리에 담고 있어야 할 내용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앎에 우리의 삶이 이끌림을 받아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이끌림 받고 있는 앎이 아니라면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48편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편이 어떤 내용인가를 말씀 드릴 때 이미 여러분들이 수없이 많이들은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내용에 이끌려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48편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굳이 본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고 말합니다. 광대하다는 것은 위대하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니 하나님이 성, 거룩한 산(시온산)에서 하나님을 극진히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하나님을 극진히 찬송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광대하신 하나님을 극진히 찬송하는 것이 됩니까? 이런 경우 대개 '최대한 자신의 정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성을 보일 수 있는 종교적 행위를 찾게 되고, 그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증거물로 삼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성으로 인해서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의 방향이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과 상관없는, 인간의 종교성에 의한 종교적 행위를 신앙으로 착각함으로써 성경과는 동떨어진 잘못된 신앙에 빠진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노래합니다. 즉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에서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바로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것이야 말로 광대하신 하나님을 극진히 찬송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그 거룩한 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본문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성이 있는 거룩한 산은 곧 시온 산을 뜻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시온 산이야 말로 온 세계를 즐겁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주위의 그 어떤 성보다도 높고 아름답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온 산의 외형적인 모습이 높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온 산의 높고 아름다움은 그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3절)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시온 산이 만민을 보호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는 것도 전능하신 하나님 때문이고,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4-7절)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어떤 적군이 공격을 해도 흔들림이 없이 든든히 설 수 있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온 산의 자랑은 그곳에 거하시는 주의 이름에 있으며, 주의 이름에는 주의 인자하심과(9절) 주의 정의가 충만하기 때문에(10절) 시온 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찬송이 오늘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지금 시편 기자는 장차 무너지고 파괴당할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건물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면, 성전이 무너져 버리고 없는 시대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성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바라봤습니다. 흠없는 제물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는 것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보았으며, 제물이 흘린 피를 보시고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 인자하심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시온 산에서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인자를 생각하고 정의를 높일 수가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할 수가 있고, 인자를 생각하며 정의를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자가 주의 전에서 생각할 것은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즉 죄 없는 주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에서 주의 인자가 아닌 다른 생각,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의 복이라든가 만사형통이라든가 문제 해결과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주의 인자를 멸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은 예수를 말하지만 부인하는 것과 같으며, 주의 인자를 노래하지만 멸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말하면서 주의 인자를 생각하기보다는 육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의 인자를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비록 지식으로는 주의 인자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앎이 나를 주의 인자하심만으로 감사하고, 인자하심만으로 찬송하고, 인자로 말미암아 주를 위대하시다고 고백하는 자리를 이끌어가지를 못한다면 인자하심을 알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때문입니다.
고전 3: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존재이지 감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불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까?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나에게 함께 하시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은혜 안에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고 찬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자는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으로 갚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망에 있어야 할 우리는 의롭다고 여기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놀라운 인자와 사랑으로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원수의 손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면서 생명의 그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고 찬송의 대상이 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님의 인자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찬송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온 산에서 광대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깨달으시고 하나님의 인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47:1-9 하나님을 찬양하라
<본문>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 가시도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찌어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시편 47:1-9)
<설교>
본문의 주제는 찬양입니다. 사실 신자에게는 십자가에 대한 것만큼이나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이야기가 찬양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이나 기도에 대한 이야기는, 평소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고 죄책감을 가지게 할 수 있지만 찬양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부담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찬양은 거의 모든 신자에게는 예배 모임에 행해지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을 읽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신자가 매일 행해야 할 신앙의 모습으로 여기면서도 찬양에 대해서는 다만 예배 모임에 행해지는 의식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찬양에 대해서는 떳떳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에서의 찬양은 단지 노래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뜨겁게 잘 부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뿐, 찬양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한국교회를 이런 분위기로 만드는데 한몫 한 것이 ‘경배와 찬양’이라는 모임일 것입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악기를 동원하고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과, 마치 쇼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이 노래할 때 뒤에서 춤을 추는 백댄서들처럼 율동을 하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마치 열린 음악회와 같은 쇼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한 청소년들은 어김없이 열정을 다해 찬송을 부르다가 분위기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도취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은혜를 받았다고도 하고, 성공적인 집회였다고도 하지만 은혜란 그렇게 눈물 흘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은혜를 깨닫게 됨으로 인해서 눈물이 나올 수도 있고, 죄를 회개하면서 눈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주변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즉 홀로 있을 때에도 나올 수 있는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을 보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은혜 받은 증거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성경에 대한 큰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이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찬양의 기쁨은 단지 사람의 심리작용이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신자의 믿음으로 인한 삶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삶이 곧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찬양을 어떻게 부를까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찬양을 어떻게 부르든 그것으로 참된 찬양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기를 동원해서 요란하게 부른다고 해서 찬양이 경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조용하게 부른다고 해서 경건한 찬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찬송을 부르든 결국 노래 부르기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찬양을 너무 무시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찬송을 부를 때의 여러분을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잊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심령의 상태로 찬송을 부르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설가 유명한 성가대가 찬송을 부른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가대의 관심은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서 찬송을 틀리지 않게 잘 부르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각자 개인의 감사와 기쁨보다는 틀리지 않고 다른 사람과 화음을 잘 맞추어서 부르는 것만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래 부르기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비롯해서 시편에 나오는 수많은 찬양들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체험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면서 하나님만 높이는 것이 시편의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는 지금 우리들의 찬양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의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는 구절을 보면,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심을 노래합니다.
시편 저자에게 여호와는 지존하신 분이시며 위엄이 있으시고,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편 저자가 여호와를 위엄이 있으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신다는 것을 어디에서 보았느냐는 것은 3,4절에서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고 노래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이스라엘의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 자신들을 위해 기업을 택하신 일에서 여호와는 위엄이 있으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만민과 열방을 이스라엘 앞에 복종케 하셨다고 말하지만 만민과 열방이 이스라엘 앞에 복종케 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공격으로 인해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살았던 것이 현실인데 시편 기자는 어떻게 이런 노래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에는 애굽의 종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큰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한 강대국을 하나님께서 굴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의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옴으로써 이스라엘이 승리자라는 것을 선포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애굽을 이긴 승리자의 위치에서 애굽을 나오게 된 것은 모두가 여호와의 언약과 권능으로 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언약과 권능아래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뜻안에서는 오직 승리자로 굳게 설 뿐입니다. 세상 그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고 그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는 바로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만 굴복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도 이스라엘 앞에 굴복했습니다. 가나안 거민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었고 또한 기골이 장대한 용사와 같은 사람들이어서 정탐꾼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 또한 이스라엘 앞에 굴복시키시고 약속하신 대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가 이미 이스라엘 발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신다고 외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 가시도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올라가신다는 것은 8절에서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고 노래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노래 속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든든한 힘으로 함께 계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나오게 되는 것이 찬양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이 내게 이런 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기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 행하신 일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뤄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인간에 불과한데 어떻게 참된 찬양을 우리 입술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찬양은 성령이 신자에게 함께 함으로써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인 것이지 인위적인 기술과 방법을 동원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찬양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참된 찬양을 하기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 결국 자기만족으로 그치는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7-9절에서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찌어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라고 노래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찬양인 것입니다.
여러분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써 열방을 여러분의 발 앞에 복종케 하는 분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강하고 안심할 수 있는 방패가 되시는 분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 찬양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알았다면 자연히 여호와의 행하심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여호와 앞에 자신의 기대사항을 간직하고 나온다면 이러한 찬양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여호와의 행하심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실 뿐 우리의 뜻을 이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는 큰 구원으로 다가옵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께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지금 배부르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그 약속 안에서 되어질 일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전능하신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를 독생자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고 생명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셨음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이 일로 하나님을 높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46:1-11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본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편 46:1-11)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무엇에서 실감을 하십니까? 아마 대다수의 신자들은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고,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고 필요한 것이 채워졌을 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실감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고백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되심을 알 수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인생은 그러한 극적인 순간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있겠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떠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기도해도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경우가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면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정말 된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는 신자가 몇이나 될까요? 된다는 것을 믿고 기도했다면 무엇보다 염려와 걱정이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했으면서도 여전히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라기보다는 어쩌면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기도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기도했으면 될 줄로 믿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힘이 되신다는 것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자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합니다.
대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이러한 구절을 좋아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지켜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어려움에 처하고 보면 이러한 말씀들도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많은 신자가 신앙의 힘을 상실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신자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고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신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려움과 문제가 기도로 해결되고 원하는 것이 채워지고, 병이 낫는 것에서 체험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장 현실성이 있는 체험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체험이 없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것과 같은 구절들은 심리적인 차원에서 힘이 되는 듯 한 느낌으로만 다가올 뿐 현실적으로 힘을 얻게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것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환난이 주어진다면 그 환난으로 인해서 가장 두렵고 염려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개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힘들고 어려워지고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상하게 되는 것이 염려스럽고 두려운 문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환난에서 신자의 두려움과 염려는 자신이 환난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환난과 고통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믿음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환난과 고통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의 문제가 큰 두려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천지가 개벽하는 엄청난 환난이 온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감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고, 바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에 의한 담대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무엇이 두렵지 않다는 것일까요? 환난 자체가 두렵지 않다는 것일까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용기라고 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용기는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는 것도 두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용기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환난 자체가 두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환난에서도 환난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두렵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롬 8:38,39절을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한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를 붙들고 있는 사랑의 힘은 세상의 무엇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안다면 신자는 어떤 환난도 두려울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환난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환난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믿기에 두렵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에서 무엇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가? 의 문제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중심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문제를 돕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도우십니다. 설사 육신의 문제를 도와서 해결해 주신다고 해도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 즉 하나님의 성소는 생명의 물이 넘치는 낙원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생명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환난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도우셔서 생명이 넘치는 하나님의 성소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단지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서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은총과 도우심을 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5절에서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고 노래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환난에서도 생명이 되시는 주 만을 바라보는 굳건한 믿음이 되도록 도우시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위에서 흔들림이 없이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항상 세상의 것들로 인해 유혹을 받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악한 세력이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실을 실감하지 못합니까? 밥 먹고 사는 것만이 현실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현실은 우리의 믿음이 끊임없이 훼방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인간의 자기만족을 돕는 존재로 마치 우리의 친구처럼 다가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수시로 믿음보다는 세상의 길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도 믿음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항상 세상의 것으로 인해 방해받는 믿음의 현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그 현실을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자연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7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던 야곱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복을 바라보는 야곱으로 고치신 하나님만이 내가 피할 곳임을 나는 믿음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10절에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됨을 알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를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신 결과입니다. 악의 세력이 강력하게 활동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현실에서 항상 세상의 문제 때문에 흔들리고 요동하는 우리의 실상을 생각한다면,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보지 못한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분명 내가 아니고 믿음이며, 나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증거임을 알 것입니다.
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11절)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45:1-17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본문>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5:1-17)
<설교>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조건과 형편을 초월하여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지는 신분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안의 신자의 관계에는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목사든 장로든 일반 교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는 일이 그를 존귀한 신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소위 목회라는 것을 가장 거룩한 직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목사를 다른 기독교인보다는 존귀한 존재로 보고, 그 다음은 교회를 살피는 일을 하는 장로가 존귀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 박혀 있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의 존귀함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한 분인데, 그 존귀한 분의 신부가 곧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가 존귀한 자로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은 신자의 복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목사와 같은 일을 존귀한 것으로 높이려고 하지만, 목사가 하는 일은 다만 교회 안에서 맡은 역할일 뿐 그 일로 인해서 목사나 장로가 특별히 존귀한 신분으로 격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관계에 있으면서 목사가 존귀하다는 말을 하다면 그것은 한 남편을 두고 서로 내가 더 낫다고 다투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존귀함과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리스도가 왕으로 묘사되고, 신자가 그의 신부로 묘사되어서 신부가 누리는 영광의 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왕이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본문 6,7절의 내용을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히 1:8-9절의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라는 구절을 보면 본문 6,7절을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6,7절을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을 증거하기 위해 인용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본문에 등장하는 왕은 곧 메시아를 묘사하고 있으며, 따라서 9절에 등장하는 왕후는 오늘의 교회, 즉 신자를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후는 왕과 함께 그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하지만 왕후라는 신분은 왕과 혼인을 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지 왕과 혼인한 관계가 아니라면 왕후로 지칭될 수가 없습니다. 즉 왕은 자기 홀로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왕의 신분과 권세와 존귀함을 누릴 수 있지만 왕후는 왕이 없이는 왕후라는 신분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왕후라는 존귀함은 왕으로 인한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신자 역시 그리스도가 없이는 신자라는 존귀함을 누릴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신자 스스로가 신자라는 존귀한 신분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의 존귀함을 세상은 전혀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고 있으며, 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해도 그 권세와 존귀함을 세상에서는 전혀 누릴 수 없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자의 존귀함은 팽개친 채 세상이 알아주는 존귀한 신분을 갖고 싶어서 이 땅의 복을 구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도 여러분도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로 인한 신자의 존귀함을 멸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신자를 존귀한 자로 여긴다면 그것은 내가 알게 되고 믿게 된 그리스도가 참으로 존귀하신 분임을 알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보다 존귀한 분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 받은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한한 복으로 여기면서 예수님을 노래하고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왕을 향한 45편 저자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1,2절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왕을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라고 노래합니다.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다’는 것은, 글로써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묘사해 내는 문학가처럼 자기 마음에 가득 넘치는 왕에 대한 아름다움을 말로써 묘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왕을 향한 저자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볼 때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마음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쓰는 저의 마음을 조심히 확인해 보면 주님에 대해 감히 시편 저자와 같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그 근처에도 못간 상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와 같은 마음은 분명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왕을 향한 뜨거운 마음, 즉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적인 마음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린 다만 성경의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면서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는 심령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누구신가를 아는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2절에서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라는 말을 함으로써 왕의 아름다움이 세상의 모든 인생, 즉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이 말은 왕 앞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아름다울 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세상에는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고,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며, 아름다운 행동, 즉 ‘미담’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것들로 인해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왕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저자가 노래하는 왕의 아름다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왕이 은혜를 입술에 머금은 그것이 곧 왕의 아름다움인데, 이것은 왕이 하나님의 은혜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통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은혜로 백성들을 다스리며 복주시는 것이야 말로 왕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왕의 아름다움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아름다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통치하신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으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시고, 또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 그 무엇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왕의 원수들인데 왕이 은혜를 가르치고 은혜로 다스리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무리들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란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은혜를 가르치는 은혜로 다스리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면 그것은 왕에게 기대한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땅에서의 부요함일 것입니다. 은혜보다는 부요함을 원하기에 은혜를 입술에 머금은 왕이 아름답기는커녕 못마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러한 자들은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목말라 하는 자라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족하며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복을 노래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으로 목말라 한다면 십자가의 은혜가 그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복만을 담고 있는 십자가보다는 세상의 것도 함께 보장해 주는 십자가를 원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무리들이 참된 진리와 복음은 외면한 채 세상의 것을 함께 약속하고 보장하는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왕은 이런 원수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5절에서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고 말하는 것처럼, 원수와 싸우셔서 승리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왕이 원수와 싸우는 것은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해서입니다.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시는 것이 곧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7절). 이것이 왕의 아름다움, 즉 예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아름다움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는 신자라면 자연히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랑과 은혜를 선명하게 증거하신 것이야 말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자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우리 자신들이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그 모든 것들도 초라한 것으로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십자가만이 가장 아름답다는 고백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바로 이처럼 아름다우신 예수님의 신부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덧입고 존귀한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전의 집이 아니라 새로운 집, 즉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10절의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는 구절입니다.
신자에게는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보다 복되고 아름다운 삶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의 행하심이 여러분께 어떤 복으로 다가왔는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서 예수님의 영광과 존귀하심을 덧입으며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복으로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44:1-26 주는 나의 왕
<본문>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시편 44:1-26)
<설교>
토마스 리브스라는 사람은 ‘텅 빈 교회’라는 그의 저서에서 현대의 기독교는 ‘소비자 기독교’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합니다. 교회를 찾는 교인들은 물건을 고르고 사는 소비자처럼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하나 골라 택하는 시대가 되었고, 교회는 그러한 소비자를 왕으로 대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교회에 비록 사람이 꽉 찬다고 해도 참된 복음을 소원하면서 진리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교회를 찾는 사람은 배우 희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책 제목을 ‘텅 빈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교인은 많되 신자는 드물다는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이 아닐 수가 없고, 이러한 시대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교인이 아니라 신자의 위치에서 신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인가를 점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4절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칭합니다.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또는 신하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헌신해야 할 존재로 규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는 나의 왕이라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 증거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절대적인 원칙은 주가 나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를 왕으로 대접하기보다는 자신이 왕이 되어서 주로부터 왕의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왕되신 분이 백성의 위치에 있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기 보다는 세상을 향한 자신의 계획과 욕심을 앞장세운 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가 아닌 자신을 왕의 자리에 세워 놓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이 옛날에 행하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일을 말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옛날의 그 일을 귀로 듣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가 하나님의 일을 귀로 들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귀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귀로 들은 시편 저자는 주가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절에서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가나안 땅에 거하던 이방 민족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이러한 하나님이시야 말로 자신에게 왕이 되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방 민족과 싸워 승리함으로 그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주가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고백은 어떤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들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체험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체험을 원하고, 특별한 체험을 하면 신앙이 크게 나아질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는 특별한 체험을 했던 이스라엘이 과연 그 신앙이 더 나아졌습니까? 특별한 체험을 인한 기쁨과 찬송은 그때의 한순간에 머물 뿐이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저자처럼 들음으로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고, 여전히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문제일 뿐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이 모든 일에서 저자는 주가 자신의 왕이 되심을 알게 됩니다. 왕되신 주의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살아온 인생이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하지도 찾지도 않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역시 원하지도 않은 독생자 아들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모든 일 역시 주의 뜻에 따라 주가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다스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주가 왕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가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신자에게 필요한 것을 왕을 왕으로 높이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왕을 왕으로 높이고 대접하는 것일까요? 또한 왕은 무엇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분일까요.
5-8절을 보면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고 노래합니다.
저자는 주가 나의 왕이라는 고백과 함께 이제는 주를 의지하고 내 활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칼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왕을 왕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주가 나에게 왕이 되심을 믿는다면, 왕이 자기 백성을 책임지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왕이 백성을 책임지고 계심을 믿는다면 자연히 왕되시는 분만 의지할 뿐 자신의 힘이나 칼은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된 자는 왕 되신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감사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주를 왕으로 높이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를 보면 주가 나의 왕이라는 말은 잘하면서도 주를 의지하는 것은 보기가 힘듭니다. 겉으로는 주를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온통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결국 왕 되시는 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행위를 믿는 것이 많고, 자신의 열심과 의를 자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44편은 9절부터 그 내용이 전혀 달라집니다. 9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는 말로 시작을 하는데, 이것은 왕되신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들을 버리시고 욕을 당케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옛날에 우리 조상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은 지금 어디계십니까?’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23-26절에서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라는 호소로 44편을 끝내고 있습니다.
9절부터의 내용을 보면 시편 저자는 극도의 고난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고난과 핍박이 그들의 범죄 때문이라면 이해하겠는데 현재 이스라엘은 주를 잊지 않고 언약을 어기지 않았으며(17절), 주의 길에서 떠나지도 않았습니다(18절). 그런데 이처럼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백성들을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44편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저자는 앞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들었고 그 일을 생각함으로써 주를 왕으로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이처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고난으로 인해서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난으로 인도하심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으로 인한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왕이신 하나님께 고난에 처한 자신의 구원을 부탁드리는 것이 44편의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시편 저자는 고난이 주어짐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옛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서 함께 하심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고난으로 인해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몸은 땅에 붙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형편이지만 그 고난은 저자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 것이고, 주가 왕이라는 것을 고백과 함께 왕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부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힘든 일이 없으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믿었는데도 고난이 주어지고 힘들어질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답답한 심정으로 원망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결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잊고 살다가 어떤 계기로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이 비록 고통과 고난이라고 해도 그로 인해 기쁨의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열매를 바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시편 43:1-5 나의 극락의 하나님
<본문>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3:1-5)
<설교>
사람이 살면 살수록 경험하게 되는 것은 기쁨과 만족보다는 불만과 고통 아픔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이 행복할 것만 같은 사람이라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속사정은 있는 것이고 고통과 슬픔 아픔도 당연히 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통과 아픔 대신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있는 삶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하지만 그 역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도 고통과 슬픔과 아픔에서 해방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앙이 사람을 고통과 아픔에서 헤어나게 할 수 있다면 지금쯤 세상은 고통과 아픔이 없는 곳이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가짐으로 고통과 아픔에서 해방되는 것을 목격한다면 너도나도 하나님을 신앙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수천 년 계속되었다면 지금쯤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해서 고통과 아픔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에는 기쁨과 만족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분명히 우리를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감사를 맛보게 하고 알게 합니다. 문제는 신자가 그것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중점입니다.
4절을 보면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극락의 하나님’으로 표현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극락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 아니라 기쁨 중의 기쁨, 최상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즉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쁨 중에 기쁨이 되시는 분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이 되시는 분으로 고백 할 수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하나님이라는 것 때문에 ‘최고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그냥 입술의 찬가에 불과할 것입니다. 즉 위장된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저자는 ‘극락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에 그것으로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 또한 동일한 것을 받았다면 시편 저자와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그러한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저자는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로부터 송사를 당하고 있는 처지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판단하심으로써 경건치 아니한 나라를 향하여 자신의 송사를 변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이 죄 없는 자신을 송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을 판단하사 자신의 죄 없음과 세상의 송사가 잘못된 것임을 변호해 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저자가 하나님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보실 때 ‘죄 없다’는 선언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2절을 보면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원수로부터 압제를 받고 고난을 받는 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고난에서 다시 주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3,4절)는 고백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저자는 원수로부터 압제를 당하는 현실에서 주의 장막과 성산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은 제물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용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의 장막입니다. 이 장막 안에서는 누구도 정죄 받는 것이 없고 용서의 기쁨과 은총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성산과 장막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의 장막과 성산은 우리의 힘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어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처럼 우리를 주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하실 빛과 진리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빛과 진리가 되셔서 우리를 용서의 은총이 있는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십자가에 이르러서 용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을 극락의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도 하나님이 빛과 진리로 자신을 용서의 은총이 가득한 주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5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는 말은 원수의 압제로 인해 낙심하고 불안해했던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도우시는데 낙망하고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성산과 장막의 세계, 즉 용서의 은총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면 낙망과 불안의 삶에 계속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보게 되면 실망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만큼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실망하고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실력을 갖추라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시고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 어떤 허물과 부족함이 보인다고 해도 그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송사를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의 장막과 성산을 믿는 것입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서 용서의 은총을 누리는 자신을 송사한 불의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변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자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았기에 그로 인해 극락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우리의 환경과 조건이 충족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신자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알게 하시고 맛보게 하시기 위해 고난과 고통으로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원수로부터 고통과 압제를 받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이것을 보면 신자에게 주어진 고난은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를 앍게 되는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생을 해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의 현실에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염려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에게서 샘솟듯 솟아나는 죄를 보게 됨으로써 십자가의 용서의 은총 밖에 있는 것은 절망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과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십자가의 은총의 세계로 인도하신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고 그래서 그 은총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내용들이 저자에게는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될 만큼 큰 기쁨이 내용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세계는 내가 나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당하는 어떤 고난과 고통도 우리에게 유익된 것으로 열매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계로 부름 받은 신자로서 주의 은총과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해 우리 또한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시편 42:1-11 여호와를 향한 갈망
<본문>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1)
<설교>
1,2절에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해 하는 것처럼 신자가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또한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지금 여러분이 갈급히 필요로 하는 것이 돈이 아니고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니고 성공이 아니라 영혼의 잘됨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심령은 분명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 갈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가치관이 변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진심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지는 것이 최고의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시편 저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갈망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3절의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는 내용을 보면 시편 저자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조롱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롱은 시편 저자가 큰 고통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전혀 도움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신자를 조롱하기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으면 잘되어야지 왜 그처럼 고통스러운 일을 겪느냐?’는 것이 조롱의 근거인 것입니다.
사실 신자로서 이러한 조롱을 받으면 마음의 고통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의 삶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이유로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믿음은 이처럼 신자를 세상으로부터 조롱 받는 길로 밀어 넣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왜 이렇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신자가 원하는 대로 좀 더 편안하고 쉬운 길로 인도해주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만약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이 세상에 가치관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통해서 내릴 수 있는 답은 지금 내가 처한 형편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과 고통의 현실에 처해 있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렘 29:1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단순히 복을 베풀어 잘 살게 하기 보다는 신자를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받은 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욥이 고난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서 믿음으로 지키는 수준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심과 믿음으로 신앙을 지켜나가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욥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심으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즉 욥이 자기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욥을 붙들고 계셨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욥이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고난 받을 이유가 없는데 고난이 주어진 것으로 인해 답답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를 고난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은 그 영혼을 하나님관의 진정한 평안의 관계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깨달았기에 시편 저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절)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 형편에 처해 있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낙망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신자에게 모든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 세상에서는 그 어떤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고 말합니다.
낮은 인간이 활동하는 시간이고 밤은 쉬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낮에는 여호와께서 인자를 베푸시고 밤에는 인자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차라리 기도하면 인간이 활동하는 낮에 자신의 활동과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밤에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인간이 비록 낮에 활동하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활동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인자의 복을 인해서입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인자하심으로 인해 찬송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밤에 기도한다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밤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기도한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편 저자는 6,7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상황이 계속되고 전혀 나아지지 않음으로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9,10절)라고 원망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시편 저자를 잊으신 것이 아니라 시편 저자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에게 일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는 말로 자신을 책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택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분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자신이 고난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보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알 수 있도록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는 이 시편 저자처럼 고난이 있을 때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는 말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자 하는 심정을 나와야 합니다. 지금 내가 보지 못하는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보였지 않습니까? 과연 무엇이 사도들로 하여금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찬송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사도들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고난 중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알았기에 낙망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주를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신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게 된다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 마음이 여호와를 갈망하는 영혼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시편 41:1-13 하나님을 아는 자의 기도
<본문>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시편 41:1-13)
<설교>
41편은 다윗이 늙었을 때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 요압과 아비아달 제사장과 함께 반역을 했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윗이 늙고 쇠약한 틈을 타서 반역을 한 것인데, 요압과 아비아달이 반역에 동조한 것도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있는 줄을 바꾼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비열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열함은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강할 때는 머리를 숙이면서도 약해지면 그 기회를 틈타서 짓밟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지 않습니까?
1절에도 보면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빈약한 자는 늙고 병든 다윗을 두고 한 말입니다. 다윗의 당시 처지가 빈약한 자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빈약한 자를 권고, 즉 도와주고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이 곧 복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위기는 나에게는 곧 기회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타인이 약해진 틈을 타서 자신이 강해지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즉 세상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짓밟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성은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빈약함에 처한 사람과 자신이 경쟁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서로 마주보고 통닭집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 가게가 갑자기 불이 나서 전소되었습니다. 그럴 때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통닭집은 어떤 마음일까요? ‘잘됐다’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혀 다른 업종의 사람은 기뻐하지 않고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쟁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타인의 위기와 어려움과 고통을 접수해도 권고하기 보다는 남의 위기를 틈타 나의 이익을 얻을 것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웃 교회에 분쟁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혹시 교인들이 내 교회로 오지 않으려나 기대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비열하고 비정한 속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믿을 것이 없다’는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어려움을 호소할 때 진심으로 들어준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번에 100만원을 손해 봤어’라고 하면 ‘겨우 100만원 가지고 그러냐? 나는 1억도 손해 봤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타인을 누르려고 하는 본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의 현실은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 줄 여유가 없이 삽니다. 사랑과 자비를 말하기는 하지만 타인을 위해 사랑과 자비를 베풀 마음도 없습니다. 자기 삶에 너무 바쁘고 자기 생활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비정하고 비열하게 사는지를 모릅니다. 만약 인간의 이러한 실상을 안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잘되고 힘 있는 자 되기를 구하는 것으로 집중되는 기도야 말로 인간의 비열하고 비정한 속성이 담겨 있는 것임을 안다면 말입니다.
물론 중보기도라는 명목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손해 볼 것이 없이 기도 하나로 자신이 사랑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것은 신자의 관계에서는 분명히 나타나야 할 모습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며 자비와 긍휼로 대하는 관계가 증거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자는 바로 이런 관계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자로 볼지 모르겠는데,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빈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의를 향해서 단 한발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이 권고하셔서 죄 없는 자로 여김 받으며 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고를 받은 자로 모이는 교회라면 당연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5-9절을 보면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호소합니다.
이것이 빈약한 자에 대한 세상의 풍조이며 우리 또한 이러한 풍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비열하고 비정한 세상의 풍조에 의해 예수님이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까?
다윗은 자신을 빈약한 자로 나타내고 있지만 우리 앞에 나타나신 빈약한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은 빈약한 자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했습니다. 힘없는 약자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곧 세상의 풍조를 그대로 안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의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자에게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다윗은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비록 압살롬이 반역을 했다고 해도 그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이 기도다운 기도이지 보복하게 해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기도가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보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반역을 한 무리들을 처단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기도는 빈약한 자를 해하고 자기 이익을 얻고자 하는 악한 풍조가 승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은 세워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다윗 자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다윗이 반역자에 의해 패하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패하고 세상의 풍조가 승리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보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지는 긍휼의 나라가 영원함을 세상에 나타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인 복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승리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개인의 문제에 급급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시고 세상에 남겨 놓으신 이유와 뜻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빈약한 자로 존재하기 보다는 타인이 무시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진 자로 존재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힘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신 나라는 긍휼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신자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긍휼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나타낼 것은 저주 받아 마땅한 나를 주님의 긍휼이 건져 내어 살렸음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이라면 신자의 마음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신자로서의 마땅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빈약한 자에게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빈약한 자 앞에서 나 또한 빈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권고하는 사랑과 긍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임을 안다면 이러한 신작됨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는 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빈약함을 아는 낮고 힘없는 자로 만들어 주기를 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는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기도를 하지만 세상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주님의 뜻에 의해 기도하는 신자의 기도는 다릅니다. 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포기하기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아는 자의 특이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 안에서 신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나약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 40:1-17 심중에 있는 주의 법
<본문>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편 40:1-17)
<설교>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곤고한 처지에 있는 인간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이 처한 곤고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다윗은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짐 받은 것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윗과 같은 고백에 참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다윗처럼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윗처럼 웅덩이와 수렁에 건져주신 분을 향해 감사의 고백과 찬양을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개의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세상을 사는 것이 힘들고 고달프기는 해도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것과 같은 상황은 아닌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웅덩이와 수렁이라는 것은 환경적인 문제와 형편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환경적인 문제를 두고 웅덩이와 수렁으로 표현을 한 것이라면, 다윗이 건짐 받았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환경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 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또 믿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신자를 어려운 환경에서 건져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윗이 고백하는 이 내용은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인 진리로 다가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려운 문제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만이 다윗의 고백에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환경적으로 어렵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님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전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은혜로 다가옵니다. 각기 처한 환경과 형편을 초월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동일한 은혜로 다가오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고백 역시 모든 신자에게 동일한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이 말하는 웅덩이와 수렁이라는 현실 또한 모든 신자가 처한 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모든 신자가 만나고 경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인간이 처한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는 현실은 무엇일까요? 가난한 자나 부자의 구별이 없이, 배운 자 못 배운 자의 구별이 없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인간이 처한 현실은 바로 죄라는 웅덩이, 수렁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 백성을 끌어 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입니다.
이 은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은총을 동일하게 받은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소유와 연결된 은총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의 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동일한 은총을 누리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감사는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만약 신자의 감사가 세상의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감사는 개인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감사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문제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감사의 전부라면 결국 감사는 지속적이지 못하고 환경에 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즉 좋은 일이 있어야 감사하는 수준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감사는 그러한 수준의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문제보다 더 차원 높은 문제를 두고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신자가 생각해야 할 차원 높은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현실에서 건짐 받은 은총의 사건인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숫자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도 하나님의 기적에서 벗어나 살아간 적이 없음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기적을 입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신자가 누리는 이 기적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이 곧 앞에서 언급한 대로 죄에서 건져 주신 은총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죄에서 건져 주신 후 알아서 살아가도록 팽개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사단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지키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자에게 함께 하시고 지키시면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징계하시면서 우리의 걸음이 생명으로 향하도록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기적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함께 밥 먹고 살아가는 것은 똑같지만 죄에서 건짐 받고 용서 받은 거룩한 자로 살아가는 기적의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세상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생에 부자로 산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되겠습니까? 부자라는 것은 기꺼해야 반짝하고 말 인생에 남보다 조금 나은 형편으로 살았다는 것 밖에 달리 말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죄에서 건짐 받고 모든 죄가 사해지고 용서 받았다는 선언과 함께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이야 말로 신자가 평생토록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해야 할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한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제물과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제물과 제사로 기뻐하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보답하고 갚을 수 있는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보답할 수 있고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은혜라면 그 은혜의 가치는 크게 하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을 한다든지 열심히 신앙생활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교회 스스로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훼방하는 결과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의 많은 교회가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를 훼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말입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은 7-10절에 말한 대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짐 받았으니 주의 의를 증거하고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증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은혜의 무한함을 안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의 의를 높이고 자랑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를 향하신 주의 뜻입니다.
11-13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기도에서 신자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자가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짐 받은 것으로 은혜가 끝난 것이 아니라 건져내신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고 생명으로 붙들어 인도하시는 도우심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기적이 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기적을 기적으로 보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우리들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7절에서 다윗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누가 봐도 궁핍하고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한 다윗이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나약한 자신을 봤기 때문에 자신의 수중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자기 것으로 간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체험한 신자의 고백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건져 주심을 체험한 신자라면 다윗의 고백에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이 우리의 심중에 법이 되어 자리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노래하고 증거하고 영광 돌리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봄으로써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39:1-13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본문>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시편 39:1-13)
<설교>
신자는 누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자의 삶은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신자는 잘사는가 하면 어떤 신자는 못살기도 하고, 어떤 신자는 건강한데 어떤 신자는 병으로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차별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즉 세상에서 잘살게 하기 위한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 마음을 하늘에 두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각기 다르게 주어진 다양한 삶에서 동일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로 고침받기 위해 다스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부자라는 형편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형편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겪는 일에는 애매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삶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계획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먼저 13절의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는 구절을 보면 39편은 다윗이 아주 중한 병이 걸렸을 때 쓴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중한 병에 걸려서 자리에 눕게 되면 돈도 권력도 다 소용없는 것임을 느낄 것입니다. 돈이 있어 뭐하고 권력이 있어 뭐하겠습니까? 돈도 권력도 자신을 병에서 낫게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결국 병에 걸려 꼼짝 못할 때 사람은 건강이 최고임을 알지 못하고 돈과 권력을 자랑하고 즐기고 살았던 인생을 후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아마 그런 심정으로 이 시를 쓴 것처럼 보입니다. 5,6절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써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건강했을 때는 돈과 권력 위에 든든히 서서 살아갔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병에 걸리고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병은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은혜였던 것입니다. 다윗을 낮아지게 하지 않고서는 부귀영화를 든든한 길로 삼고 있는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건강하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든든한 힘으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든든한 힘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자신을 지옥에서 건져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생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죽음을 막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재물의 헛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은 단지 인생이 헛되고, 돈도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그칠 뿐이지 그러한 깨달음이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신뢰하는 사람이 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즉 인생에 대해 후회할 뿐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되면서 인생의 해답이 나에게도, 돈에도, 권력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아는 자로 인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의 헛됨은 무엇일까요? 단지 돈을 힘으로 여기며 살아온 인생이기에 헛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불교도 그러한 말은 얼마든지 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헛됨은 단지 돈과 권력을 힘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알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한 것이 헛된 인생인 것입니다.
7절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윗은 병으로 인해 죽음을 의식하게 되자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한 인생의 헛됨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헛되지 않은 인생길을 갈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인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놀라운 업적을 쌓고, 온 세상 사람이 칭송할만한 선한 일을 하다가 죽었다고 해서 헛된 인생을 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업적을 쌓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기쁨을 알지 못한 자로 죽었다면 그는 헛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한 기쁨을 아는 자로 죽는다면 그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고침 받고 새롭게 되는 방향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고 기뻐하는 사람 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야 나의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다윗도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손에 무엇을 쥐고 있다고 해도 연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생을 자기 마음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자기 마음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대로 되던가요?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악한 세력이기 때문에 그 세력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미워하지 맙시다’ ‘비판하지 맙시다’라는 말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공허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1절부터 보면 다윗은 악인 앞에서 행위를 조심하여 말로도 범죄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내용이 나옵니다. 악인 앞에서는 선한 말이라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어떤 실수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비록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말로는 범죄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아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으니 악인에 대한 마음속의 화가 더 발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생각하면서 자기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희망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희망은 오직 여호와 한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여호와 한분에게만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이 나를 살리며 나의 힘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것이고 이러한 신자로 사는 것이야 말로 복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엇으로도 갈 수 없는 길을 신자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인생으로 인도받기를 소원하는 것입니까? 참된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가 없이 살았던 지난 인생이 참으로 헛된 것이었음을 마음 깊이 자각하십니까?
13절에 보면 다윗이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구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건강한 몸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인생의 헛됨이 무엇인가를 고백하는 다윗이 마지막 결말을 단지 건강한 몸으로 살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부귀영화 위에 든든히 살았던 지난 때를 헛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의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에서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원하십니까? 부귀영화 위에 든든히 선 인생을 원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인생을 원하겠지만, 죽음 앞에 서서 본다면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금의 건강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기뻐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과 인생을 아는 신자의 기도입니다.
시편 38:1-22 나는 이렇습니다
<본문>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1-22)
<설교>
시편을 보면 다윗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본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다윗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내용의 시편을 보면서 ‘나도 다윗처럼 회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들을 본받아 행하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인데, 물론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처럼 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과연 얼마큼의 현실성이 있는 생각인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생각이 과연 실제 회개로 이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시편 38편은 다윗처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내용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회개를 하려고 해도 다윗처럼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 다윗과 같은 징벌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상하고 기도하다가 자기 죄가 떠올라서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경험하면서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잠깐 죄가 생각나서 ‘하나님 용서해주세요’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인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실제 자신이 겪은 삶에서 자기 마음을 그대로 토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38편입니다.
1-3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나를 징계치 마소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주의 진노, 징계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른다는 표현이나, 주의 진노로 인해 내 살이 성한 곳이 없고 내 뼈에 평안함이 없다는 말들이 다윗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에서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라는 말과, 6,7절에서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다윗은 아마 심한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통은 이것만이 아니라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자와 친구, 친척들도 다윗을 떠나고 외면을 하는 외로움까지 겪어야 했고, 다윗이 징계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 기회를 틈타 대적들이 다윗을 해하려고 도모하기까지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심적 고통이 모두 다윗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고통에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같은 고통은커녕 매일 평안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윗과 같은 회개를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형편으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는 힘들고 어려운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 같은 고통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윗과 다를 바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의 징계 아래 있다고 말할만한 형편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주의 진노를 느낄 수 없는 우리에게서 다윗과 같은 회개가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38편은 다윗처럼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38편에서 말하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에 대한 얘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히 죄가운데 있는 우리에게도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이 진노를 친히 담당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38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죄로 인해 하나님이 진노를 받았습니다.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진노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를 예수님이 모두 담당하심으로써 다윗과 동일한 죄가운데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을 보면 육체적으로 부서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제자와 가족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예수님의 대적으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우리가 가야할 진노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있는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안함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주님이 담당하신 덕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불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평안이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그 혜택을 지금 이 현실에서 누리고 있음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타인과 비교하면서 실망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본래의 실상이 어떤 것인가를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현실들은 본래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져야 할 본래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당하신 그 모든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모든 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대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많고 적음을 따질 필요가 없이 모두가 예수님의 덕분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10개를 가졌는데 나는 한 개만 주어진 것에 불만을 가질 수가 있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그 한 개마저 가질 자격이 없는 나 같은 자에게 한 개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자라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과 조건에 대해 불평할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모다 어렵게 사는 것으로 인해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원망을 하지만 인간의 실상은 어렵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낮아짐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예수님 덕분에 누리는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봄으로 인해서 타인보다 못한 수준에 있다는 것으로 불평하기 일쑤입니다. 또한 항상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나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을 보면서 내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로 족한 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애통해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분에게 지금 무엇이 얼마나 있든 상관없이 그것은 여러분의 본래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나는 믿음의 흔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신앙이 좋아서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복이라고 떠들고 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철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모든 것이 넘치는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혜로 넉넉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한 자기 자신이 미워지고, 그래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은혜로 남게 되는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21,22절의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말씀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버림받아야 할 것은 주님이 대신 버림 받으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예수님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신자가 얼마나 크고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채워진다면 신자는 세상의 것과 상관없이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37:23-40 하나님이 함께 하신 길
<본문>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시편 37:23-40)
<설교>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주 공간 어딘가에 절대자라는 이름만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참여하셔서 그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삶에 참여하셔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고 계신다는 것을 현실의 세계에서 감지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악자가 번성하고, 믿는 자가 실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실로 인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대해서도 마음이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분명한 현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그 길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면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행악자가 가는 길에 함께 서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행악자가 가는 길에 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을 구한다면, 그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합니다. 적어도 행악자보다는 더 앞서고 더 잘되는 결과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증거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정적인 사실은 신자가 가는 길은 행악자의 길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그 길이 다른데 어떻게 행악자의 길에서 행악자가 누리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신자의 신자다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37-39절을 보면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의인의 결국과 악인의 결국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길이 다르기에 마지막 역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과 악인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으로 구별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걸어가며 그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길에 있는 악인이 누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자신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신자가 어떤 길을 가는 존재인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나약함입니다.
신자는 악인이 가는 길과 신자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는 길에서 누리는 번영과 풍요로 인해서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이 가는 길은 여호와가 함께 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지막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의인은 구원이 되시는 여호와가 함께 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해도 여호와가 소망이 되심으로써 승리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불의한 존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복은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나아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일에 대한 도우심이라는 것은 다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고 여길만한 일들이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을 마치 정치인들이 하는 공약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신32:10-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큰 날개를 펴고 새끼들 위에서 맴도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보호하시고 호위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실감 있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힘이 되지 않는 이유는 말한 대로 여호와의 도우심과 지키심을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만나시고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알다시피 광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 길의 마지막인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함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아니면 이해는 하겠는데 그래도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것은 여전히 이방인이 가는 길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23,2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의 걸움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걸음을 우리가 정하시고, 우리가 정한 걸음을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행악자와 같은 길을 갈 것이고, 같은 결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정하는 걸음은 항상 자기 욕망에 부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한 걸음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걸음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만으로 신자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걸음이라고 해서 형통함만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 길에도 넘어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붙드셔서 일으키시며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희미하나마 천국에 소망을 두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입술로 예수님을 말은 할지언정 사도의 기쁨이 무엇인가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어떤 경우에도 신자의 자손은 남에게 빌어먹는 거지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겨우 거지꼴을 면하는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여기겠습니까?
이 말은 비록 신자에게 고난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을 당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 어떤 고난으로 인해서 마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실상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거나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내 영이 하나님에 대해 산 영이 되게 하기 위해 나를 가르치시고 낮추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굳게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34-36절에서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고 말하는 것처럼, 악인이 비록 푸른 나무의 무성함처럼 무성하다고 해도 결국은 베어져 사라질 운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의 길에 있는 악인이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현재를 한탄하고 원망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자의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를 그 마음에서 버렸음을 뜻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정해 놓으신 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기업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길에서 하늘의 기업을 향한 걸음을 걸어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는 부족합니까?
신자의 존귀함은 세상의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붙드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길로 인도받는 존재라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의 존귀함을 세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신자만큼은 신자가 왜 존귀한 자인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의 존귀함을 헛된 세상의 것으로 인해 잃어버리지 않기 바랍니다.
시편 37:1-9 길이 다르다
<본문>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 37:1-9)
<설교>
미국의 오스틴이라는 목사가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나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은 신자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삶을 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런 얘기를 귀담아 듣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에 부합된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인가 아닌가? 진리에 부합되는 말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내 마음에 드는 말이라는 것 때문에 복음의 말로 간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부패되어 있고 자신을 위한 욕망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자기 욕망에 부합되는 말에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여러분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보상을 받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면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대신 믿음으로 살고 ‘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말을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면서 솔깃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겪고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겪고 있는 현실은 신앙이 좋은 신자라고 해도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평생을 예수를 믿으면서 십일조를 했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새벽예배를 나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또한 반대로 생각해 보면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눈에 목격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고 잘산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거짓말을 좋아하고 기대를 걸면서 하나님께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의 보상이 현재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보다는 듣기에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인가 아닌가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듣기에 좋은 말이라고 해도 그 길에서는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가 어떤 현실에 처하든 그것으로 자기 신앙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즉 일이 잘된다고 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반대로 일이 잘 안된다고 해서 혹시 자기 신앙에 문제가 있어서 벌을 주시는 것은 아닌가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합니다. 행악자, 불의한 자들이 현실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불평을 했던 것처럼, 현실을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신에 대한 세상의 상식은 ‘상선벌악’의 신입니다. 선에 대해서는 상을 베풀고 악에 대해서는 벌을 주는 것이 신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착한 사람들은 모두 아무 탈 없이 잘 살아야 하고, 죄를 범하는 악한 사람들은 모두가 있던 것도 다 잃어버린 채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되고 또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세상은 생각하는 것처럼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당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데도 하늘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그때의 현실이었고, 지금의 현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도 잘만 사는데 착한 사람들이 변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 현실을 보면서 도무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박국과 같은 불평이 우리에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불평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음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에 대한 보상이 현재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행악자에 대한 보상 역시 현재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절에 보면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고 말합니다. 행악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그들의 운명은 풀과 같이 베어지고 푸른 채소같이 쇠잔하는 것입니다. 즉 푸르름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베어지고 쇠잔하는 운명으로 끝나는 것이 행악자들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그냥 내어버려두십니다. 내어버려두시는 이것이야 말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이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고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정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자신을 고치며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셨다는 것은 베임을 당하고 쇠잔하는 운명으로 끝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악자들에게 희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행악자는 이러한 희망을 보지도 생각지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세상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모든 희망을 두고 살다가 결국 베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행악자들이 누리는 것이 부럽다면 신자로서 신자다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귀하다고 하면서도,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배설물에 불과한 것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는 행악자가 부럽다는 것은 입으로는 은혜를 귀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시는 길은 사람이 생각한은 것과는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은 하나님만 믿으면 자동적으로 가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때문에 항상 관심은 세상에서의 복으로 향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하나님만 믿으면 자동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상에 마음이 기울어져 살아가는 우리들을 다스리시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수고로 인해 들어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3-6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성실을 식물로 삼아라는 것은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이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약속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성실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는 대적과 싸워 승리하심으로써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죄에 붙들려 있던 우리를 기어코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신 여호와의 성실하심을 생각한다면 신자는 여호와의 성실을 식물로 삼아 배부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기뻐하며 여호와께 모든 소원을 두고 살아갈 것이고, 여호와는 신자의 소원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이 저와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갈까요? 부자입니까? 권력자입니까? 그 어떤 것도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나의 갈 길로 믿고 그 길로 가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일이고, 이러한 여호와의 일로 기뻐한다면 그 소원이 세상의 것을 얻고 취하는 것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가는 것에 두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소원을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우리의 힘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길을 마음에 두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 소원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7-9절을 읽어보십시오. 행악자의 길과 신자의 길은 분명 다릅니다. 행악자는 끊어지는 길을 가지만 신자는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인도받는 그 길이 아예 다릅니다. 행악자는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심 가운데 자기 욕망을 따라 자기를 위한 길을 가다가 결국 베어지는 운명에 처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간섭하고 다스리시면서 영원히 사는 길로 인도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의 차이를 잊지 않고, 길의 다름을 안다면 행악자들이 현재에 누리는 것들로 인해 불평하고 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길이 다르다는 것, 이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시편 36:1-12 의인과 악인의 차이
<본문>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시편 36:1-12)
<설교>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 보이는 것으로 주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교회 또한 믿음에 대한 보상이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으로도 주어진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기도 합니다. 즉 믿음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보장받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보상이 현세적인 것으로 주어진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보면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잘살고 못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고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보다 부요하게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현세적인 보상이 있는 믿음을 말하지만, 세상의 현실은 그러한 사실을 이미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보상이 현세적인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죄에 대한 심판 역시 현세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에 의해서 잘살고 못사는 것이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죄에 따라서 잘살고 못사는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믿음이 있는 자가 고통을 겪으면서 힘들게 살아갈 수 있고, 반면에 믿음이 없고 악한 자가 평안과 부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보상이나 죄에 대한 심판이 현세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한가지 현상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욕을 해도 자신의 신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도 물론 부정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성경은 악인이라고 일컫습니다.
1,2절을 보면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라는 구절은 개역개정판에는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악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데 그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심판하신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를 심판해야 하는데 그러한 심판이 없이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사는 것에서 차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 자체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무엇으로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두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신자라고 해서 죄를 지으면 불신자와는 달리 그에 따른 징계를 현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현세적인 문제로 징계하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한 살아오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고통을 받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모두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범할 때마다 그러한 방식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면 세상의 어떤 인간도 지금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참으시는 은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하나님은 없다’면서 자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현세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성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만약 현세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확인된 사실에 대한 우리의 선택과 의지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평생을 어려움이 없이 평안과 부요를 누리며 살았다고 해도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죄에 대해 두려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임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의 심판을 예수님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아는 신자는 죄를 범해도 현세적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죄에 대해 담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재앙을 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독생자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죄에 대해 철저하시는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보기 때문에 죄에 머물러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아무리 편안한 삶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을 복이라고 떠들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악한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때로 어려움이 있다면 불평과 원망보다는 ‘나 같은 자에게도 이만한 일도 은혜일뿐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반발이 있을 수도 있지만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 없음이 문제인 것이지 제가 잘못 말했거나 성경을 과장해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5-7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주의 인자, 주의 진실, 주의 의, 주의 심판을 말합니다. 사람이 과연 무엇에서 주의 인자, 주의 진실, 주의 의, 주의 심판을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현세적인 삶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펼쳐지는 현세의 상황이 ‘선과 악, 의인과 악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라는 기준에 의해서 펼쳐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를 봐도 주의 인자, 주의 진실, 주의 의, 주의 심판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죄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야 말로 죽어야 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참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의로우심과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선명하게 목도하면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남과 동시에 그 모든 죄의 값을 예수님께 물으시고 대신 우리를 살리신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을 진정한 피난처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10-12절에서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주의 인자는 주를 아는 자에게만 베풀어지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주를 알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자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반면에 악에 거하는 자는 넘어져 엎드려지고 일어나지 못하는 운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을 철저히 구별하여 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주의 인자를 계속 베푸시면서 악에서 건져내어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악인에 대해서는 내어버려두심의 방식으로 이미 심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세적인 것으로 세상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를 풍족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9절에서도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신자에게 생명의 원천은 주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로 말미암아 풍족한 존재이고 생수이신 주로 말미암아 복락의 강수를 마시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누리는 참된 하늘의 복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에 대한 복상은 주 안에서 이미 받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복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35:1-28 나는 네 구원이라
<본문>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 같이 하였도다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35:1-28)
<설교>
9절을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신자가 여호와를 즐거워하려면 무엇보다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즐거움이란 어떤 일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이는 여호와를 즐거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무엇으로 여호와를 즐거워하려고 하는가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은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은 것에 대한 즐거움일 뿐입니다. 즉 9절에서 말하는 즐거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즐거움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원하는 것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여호와를 즐거워 할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이 신자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바로 구원입니다. 여호와의 일은 신자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모든 일이 신자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2:1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정직한 자인 의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들은 32:1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입니다. 이 의인들이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우신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곧 구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에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일하시는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여호와를 즐거워하려면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신자는 설사 자신이 실패의 자리에 놓인다고 해도 변함없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여호와로 인해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편으로 구원을 말하면서 구원을 쉽게 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이 되는 모든 일들이 간단하게, 쉽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 왜 하나님의 능력이 동원되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할하자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구속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악한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심으로써 택한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힘으로도 악한 세력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대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의 대적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싸우는 대적을 하나님이 싸워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적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인용해서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관계에 있거나 자신을 해롭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싸워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해 너무 무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는 것이 됩니다. 다윗이 죽는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과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을 개인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자리에서 여호와의 대적으로 바라보고 여호와께 대적과의 싸움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이 대적과 더불어 싸우시고 승리하심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성취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 주어진 은총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구원이야 말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증거물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한 몸에 입은 자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란 이처럼 하나님의 승리와 전지전능하심과 능력과 인자와 자비하심의 증거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뛰어난 존귀한 자가 됨으로써 신자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신자는 신자 됨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와의 싸움은 이미 창세기에 예고되어 있습니다. 창 3:1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의 구도로 흘러온 것입니다. 이 싸움이 세상에 최초로 드러난 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벨이 가인에게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이미 셋을 예비하시고 아벨의 자리에 셋을 세우셔서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유다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언약이 중단될 위기에서는 다말을 등장시켜서 다말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세상의 힘을 무서워해서 사라를 누이로 속이는 사건 역시 하나님의 언약이 무너질 위기였으나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써 다시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이 모든 것이 악한 세력의 훼방이었습니다. 이러한 악한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현실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비록 평온할지 몰라도 사실 세상은 하나님과 악한 세력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고백을 가진 자로 나와 있는 것도 하나님의 전쟁에서의 승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원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대적이 다윗을 해하려고 그물을 숨기고 함정을 판 것처럼,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는 신자 역시 대적으로부터 이러한 훼방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개인을 넘어뜨려서 지옥 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은혜를 훼방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죄를 경험합니다. 이 모두가 악한 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이고 악한 세력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넘어뜨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기 위해 힘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 가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를 옹호하고 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알수록 애통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대적과 더불어 싸우시고 승리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키심이고 보호하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세력을 여러분의 힘으로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싸우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을 소망하면서 하늘의 의의 나라에 거하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악한 세력에 붙들린 자의 악한 심령이 아니라 의의 힘에 붙들린 거룩한 심령입니다. 이러한 심령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로 인한 전리품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승리가 우리를 의의 나라에 붙들어 놓기 때문에 여호와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적은 결국 멸망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고 신자는 여호와의 승리로 인해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일로 인해 신자는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보이지 않는 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승리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근거는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여호와를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4:1-22 여호와를 아는 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1-22)
<설교>
1,2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고 노래하는 것처럼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여호와로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로 자랑한다는 것은 여호와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당시 다윗의 상황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기뻐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34편은 다윗이 사울에 의해 도망을 다니다가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었는데 블레셋 왕의 신하들이 다윗이 예전에 골리앗을 죽인 자임을 알아보자 위기감을 느끼고 침을 흘리면서 미친 사람인 척 행세를 함으로써 겨우 살아난 후에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다윗 처지라면 여호와를 찬송하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로 자랑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런 처지에서도 여호와를 찬송하고 자랑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윗의 찬송은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이나 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오늘날 신자들의 찬양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하고 감사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현실의 형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찬양이 외적인 조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형편이 좋지 않으면 자연히 찬양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8-10잘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는 것은 신자가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여호와 선하심을 맛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와의 선하심이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알고 감사한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됩니다.
다윗이 말하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는 육신의 것으로 풍요로워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당시 그런 풍요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쫓겨 다니면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으로 눈으로 바라보는 좋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바라보는 좋은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신자는 언약이라는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언약의 관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 관계에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언약을 성취하는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자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부르신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약이 완성되는 복된 자리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신자를 악한 세력으로부터 붙드시고 지키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아는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여호와를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궁핍과 고통 안에서도 자신을 붙드시고 지키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도 비록 형편은 참담하고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자신을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4-7절)
위의 구절도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여호와를 신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든 대적으로부터 자신을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복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이 지키시고 건지시는 언약의 관계에 들어온 것이야 말로 멸망의 자식이었던 우리에게는 복의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참으로 좋은 것으로, 복으로 간주하지 않는 우리들의 시각입니다. 분명 탐욕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언약의 관계라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채워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분명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뜻대로 이뤄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세상에 정해진 마지막 운명입니다. 누구도 이 마지막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악에 거하는 자는 모두가 영원한 죽임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돈으로도 피할 수가 없고 권력으로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죄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죄 있는 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여호와께로 피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무엇이 있기에 여호와께 피하면 죄를 받지 않는 것입니까? 여호와께는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덮으시는 용서가 있고 인자하심과 자비가 있습니다. 신자는 바로 여호와의 용서와 인자와 자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것이 여호와께로 피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의 결국을 바라보십시오. 악이 악인을 죽인다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악이 악인을 죽이는 세상의 결국을 생각한다면 악에서 건짐 받은 것이야 말로 무한한 은혜가 아닐 수 없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야 말로 복된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의 결과를 두고 생각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있다는 것이야 말로 모든 좋은 것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를 복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영혼이 구속을 입었다는 것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풍성하고 넉넉하고 완벽한 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가 되는 것이고 주리지 않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달라고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더욱 깊이 알아가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신자가 자꾸 세상을 쳐다보면서 땅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으로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죄에서 건짐 받고 영혼이 구속을 입은 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참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미친 체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러한 찬송에서 ‘뭘 어떻게 해달라’는 자기 요구가 없습니다. 다만 이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하면서 은혜 안에 있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는 내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를 찾는 자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 기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로 죽었다면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오직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 이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시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 모든 세상적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시고 하나님만 경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33:1-22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본문>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찌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찌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 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시편 33:1-22)
<설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어느 것 하나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리석은 인간이 이해를 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선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간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형편에 따라 울고 웃었던 것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만으로 즐거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인한 신자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셨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만으로도 충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즐거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정직한 신자라면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으로 신자들에게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세요’라는 요구를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밥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 반응이지 자신의 의지와 결심이 개입되어야 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처럼 정직한 신자에게 있어서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은 정직한 신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적 반응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여호와로 즐거워하지 못하고 찬송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직한 신자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정직한 자란 누구며, 정직한 자가 만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의인과 정직한 자란 서로 같은 의미의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32:1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구절과 본문 1절의 내용이 서로 무관하지 않은 점을 생각해 보면 33편은 32편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2편에서는 어떤 사람을 의인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1,2절의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즉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으로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의해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 일만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그들만이 의인으로 간주되며 그들이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들이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무거운 죄를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하심과 용서가 얼마나 큰 은총인가를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감사와 찬송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정직한 자란 마음에 간사가 없는 사람인 것이고, 이는 자신의 무거운 죄를 보면서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시는 하나님이야 말로 사랑과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지키시고 도우시는 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심만으로도 얼마든지 찬송하고 감사하며 여호와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달라고만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주신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여호와를 대하여 살아가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9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찌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일을 말하는 것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보면서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은 말씀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힘과 기술로 살아가고 있다고 우긴다고 해도 참된 현실은 여호와의 능력의 말씀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장악하며 말씀대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힘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진리로 다가올 뿐입니다.
4,5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장악된 세상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와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이 되며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짐으로써 세상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인자하심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무거운 죄를 바라보는 신자인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죄를 덮으시고 가리우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은총임을 알기에 인자하신 여호와를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이며 마음이 정직한 자라는 것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상관이 없이 사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기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의 인자를 삶의 편안함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인자는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우시는 것입니다. 이 인자하심이 명확하게 확증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10,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도모는 모두 폐하시면서 오직 여호와가 도모하시는 것을 영영히 세워 가십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도모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12절)을 사망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즉 19절의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시는 도다”는 말씀을 영영히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바라보고 의지할 뿐이지 세상의 그 무엇도 힘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자신을 사망에서 건질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16,17절)
그래서 33편은 20-22절의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라는 기도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이 33편의 결론인 것입니다.
신앙의 감격과 감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됨으로 있게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뜻으로 내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인가를 알게 되면 결국 신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만으로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고 여호와가 나의 도움과 방패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여러분을 돕고 계십니다. 하지만 여호와가 도모하시는 것은 우리가 도모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해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며, 그것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가를 안다면 신자는 인자하심으로 일하시는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2:1-11 복을 아는 자의 기쁨
<본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시편 32:1-11)
<설교>
구원에 있어서 신비로운 것은 죄인이 죄인으로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대접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에 대해서는 사망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땅한 대접이었으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사망이 아니라 생명으로 대접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우리가 생명에 거하게 된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죄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떤 노력과 열심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즉 선을 행하여 죄를 덮음으로써 죄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설사 선한 행위를 할 수가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죄를 덮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을 행한다고 해도, 선을 행하는 동안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선이라고 여기는 것도, 죄 안에서 활동하는 도덕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내어 놓는 그 어떤 선으로도 죄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죄의 해결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외부에서 이루어진 은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1,2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우셨습니다. 그로 인해 죄 없는 자로 간주되고 따라서 의인으로 여김 받으면서 정죄를 당치 않은 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우리들의 선함과 열심, 그리고 행함과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러한 구원에 대해 못마땅해 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인간의 행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주장하는 것이 구원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도 천국에서의 상급은 행함에 따라 다르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기준과 천국에서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함에 따라 상을 각각 다르게 준비하셨다면 그것은 인간에게도 상 받을 만한 선한 행위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인간에게 선한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인간이 상을 받을 만큼의 선을 행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하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었으니 허물이 없는 자가 된 것이고, 모든 죄의 가리움을 받았으니 죄 역시 없는 자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의인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행했느냐?’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며 신분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내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으로 여김 받으며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었음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까지도 우리의 소관도 의지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무한한 은총이라고 외칠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돌출 될 수 없는 것은 행함에 대한 자랑입니다. 믿음에는 ‘내가 잘했다’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한 것이 있으되 자랑하지 않고 숨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이고 미덕일 뿐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아예 내가 잘한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믿음의 열매가 보인다고 해도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의 고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죄를 용서 받은 감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3-5절에서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고 말하는 것처럼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회개가 있게 됩니다.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려주신 은혜는 무엇보다도 죄에 대해 애통해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 않고 애통하지도 않으면서 십자가를 말하며 죄의 용서로 감사한다는 것은 단지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진심이 결여되어 있는 형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는 것은 회개하니까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용서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복인가를 아십니까? 6,7절을 보면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는 신자는 주를 만날 수 있고 주께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홍수가 범람해도 그 화가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는 나의 은신처’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모든 죄를 가리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신자에게는 은신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고 말하는 것처럼 신자가 갈 길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높이고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의지하기 보다는 내게 힘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것을 쫒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을 볼 때 그 무엇도 구원의 힘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면서 죄있는 자를 죄 없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의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는 구절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지금 형편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사는 일이 힘든데 여호와로 기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신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에 주어진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잠시 잠깐 동안의 편안함보다는 영혼의 영원함에 주어진 복과 은혜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베푸신 일만으로 얼마든지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의인으로 불리게 되었는가를 생각한다면 나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신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면 인간은 자기의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자기의 행함과 의를 포기하지 않는 고집으로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말하는 말이나 노새처럼 고집부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고집으로 살아가는 말과 노새 같은 우리를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시면서 하나님의 용서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부인하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고 찬송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음으로 의인으로 불리는 것이 죄로 가득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인가를 생각하시고 그 복으로 감사하시고 기뻐하십시오. 그 감사와 기쁨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주를 바라보게 할 것이고 낙심하지 할 것이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시편 31:1-24 강하고 담대하라
<본문>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시편 31:1-24)
<설교>
인간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타인에게 굽히기를 싫어하고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도 실패가 자신을 낮아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자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자신을 도와서 실패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목적이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즉 자기 자존심을 다시 찾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존심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 까지 거부하도록 합니다. 죄인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자존심을 허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면 하나님께 복이 아니라 심판을 받을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와서 ‘나는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반대로 ‘나는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입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하고 실패했다고 해도 죄인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이상하게 자존심이 강하게 살아있습니다. 죄인이면서도 타인에게 지기 싫어하고, 타인보다 저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우월감을 삼으려고 하고,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심으로 죄인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죄인의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는 모든 것은 위장된 거짓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장한 채 이러한 거짓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을 또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대로 다윗이 주께 피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17절에서도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부끄럽게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주께 피하는 이유는 세상에서의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주께 피하면 주가 자신을 도와서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으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주께 피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과 무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이 무엇이기에 주께 피하고 주를 부르면서 자신을 부끄럽게 말아달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일단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끄러움과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무엇을 부끄러워하십니까? 역시 자존심과 연결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타인보다 낮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그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타인의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잘되는데 내 자식은 공부도 못하고 별 볼일 없을 때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부끄러워 질 때가 많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한 것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직장이 좋지 않고 돈을 적게 번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집이 적고 초라하다는 것 때문에도 부끄러워합니다. 이러한 것이 인간은 항상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죄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인간의 자존심 문제와는 다릅니다. 9-12절을 보면 다윗은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여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피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낮아진 자리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을 부끄럽게 말아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대적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 부끄러움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고난에 처한 자가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신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실패하게 해서 타인들 앞에 쪽팔리게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러한 부끄러움은 인간에게 있는 죄의 산물일 뿐입니다.
마 7장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이것이야 말로 주님께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고 하고 또 많은 권능을 행하면서 자신이야말로 믿음이 좋고 주님 편에 있는 자인 것처럼 행세를 했는데 막상 부인을 받을 때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윗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고 외면당하는 것보다 주께 외면당하는 것을 크게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를 믿고 있다고 간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 자신들이 주께로부터 부인을 받을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권능을 행하는 것을 곧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증거로 여겼을 것인데 어떻게 주께 부인 당할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권능을 행한 자신을 바라본 것이지 주님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나는 권능을 행한다. 그러니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는 것으로 자신을 높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외면을 당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항상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를 바라보고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곧 주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도 1절에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하면서 주의 의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즉 주의 의가 자신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5절에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여호와께는 인자와 자비하심이 있고 그 인자와 자비하심이 자신을 구속하셨음을 믿기에 자신의 영을 주의 손에, 즉 인자와 자비로 행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것은 믿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의만 믿을 뿐입니다’라는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주께 부인당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에서의 낮아짐이 주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세상을 의식함으로 인해서 자꾸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내가 받아야 할 부끄러움을 다 받으시고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온갖 고난과 멸시를 받으시면서 피 흘려 죽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고 떠들었는데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죽어 버리니 사실 생각하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떠들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게 하시고 하늘의 영광 자리에 않게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길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신자는 바로 이 길을 가야 할 자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길에 있는 신자에게는 세상의 실패조차 부끄러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낮아진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한다고 해도 실패가 당연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부끄러움은 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 또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 해도 그들은 여호와의 의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에서 잊혀지고 무시를 받으면서 산다고 해도 신자는 주의 의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됩니다. 누가 과연 영원히 부끄러움에 놓일까요?
23,24절을 보면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고 말합니다.
신자는 인자와 자비로 행하시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의 낮아진 자리에서도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이 주의 의를 의지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U
시편 30:1-12 주를 높이는 이유
<본문>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편 30:1-12)
<설교>
신자가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자연히 육신의 일에 모든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이 기준이 되어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 감사하고 주를 높이는 것도 영혼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문제가 주된 이유가 될 것이 뻔하고 결국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범사가 육신이 잘되는 것으로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육신이 잘되어서 주께 감사하고 주를 높인다면 그것은 유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육신이 잘되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에서도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의 차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 30편의 내용은 다윗이 하나님의 노염으로 인해 징계를 받고 그 영혼이 음부에 내려가는 지경까지 되었을 때 여호와께 부르짖고 다시 건짐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오늘 말씀에서 만남으로써 다윗같이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6절의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는 구절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의 노여움을 살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였습니다.
삼하 2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강한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을 때 다윗이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서 인구를 조사한 일이 나옵니다. 자신의 군사의 수를 확인함으로써 자기 힘과 업적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역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죽게 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다윗의 힘은 이스라엘의 군사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의 수를 자신의 힘으로 여기는 교만에 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형통하고 평안한 것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결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징계로 인해 7만의 백성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강함은 자신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평안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평안이 주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은혜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다윗처럼 주의 은혜를 잊고 삽니다. 내게 있는 것이 마치 나의 실력과 재주로 인한 것으로 착각하고 교만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주가 얼굴을 가리심으로써 근심이 되는 길로 밀어 넣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로 살아왔으면서도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던 우리의 교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근심케 하시는 일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절)고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 영혼을 음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은총으로 진노하시고 근심이 있게 하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노염은 잠간이요 은총은 평생이라는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된다면 신자는 어떤 고난에서도 여호와의 은총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근심이 있게 하시는 이유를 알기에 오히려 근심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은총을 노래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 됨 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고난이 있을 때 고난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계속될 때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다면 고난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보지 못함으로써 무작정 고난이 멈추기만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계속되는 고난에서 내게 대해 침묵하지 않으시고 나를 고치시고 영혼을 살리시기 위한 은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다윗 같은 감사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발견한 하나님의 일은 자기 백성을 음부에서 끌어 내어 살리시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은총임을 안다면 고난까지도 나를 고치시고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행하시는 은총의 일인데 병고침 받고, 기도 응답받고, 복 받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결국은 모두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복을 받는 일 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발견할 수 없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다윗처럼 주를 높이고 감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다윗이 발견한 것은 자신을 고치시고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음부에서 건지시기 위해 근심이 있게 하시는 것도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다윗에게는 귀한 것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의 일로 인해 주를 높이는 것입니다. 1절의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는 내용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다윗의 대적이 다윗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을 음부로 무덤으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다윗을 무덤에서 끌어내심으로써 다윗의 대적으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일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로 인해서 대적이 기뻐하지 못하도록 일하십니다. 그것이 곧 우리를 무덤에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하나님의 그 일하심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한 보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중지됨이 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살아가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를 높이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일하셨고 오늘도 내일도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일이 때로는 평안으로 때로는 근심이 되는 쪽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놓인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 되신 자리를 지키고 계시고, 우리에 대하여 아버지 되시는 책임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자가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확인할 것은 하나님이 그처럼 공의와 신실하심으로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나 같은 자도 음부로 끌려가지 않고 고침 받으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며, 이 신앙이 신자로 하여금 주를 높이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8-10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고 노래합니다.
인간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무덤에 내려간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유익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무덤에서 건져줄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 살아가지만 그 돈 조차도 무덤에 있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모두가 허망하고 헛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구할 것은 무덤에서 건져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덤에서 건지시고 끌어내기 위해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근심이 되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12절)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인가를 앎으로써 범사에 주를 높이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시편 29:1-11 여호와의 소리
<본문>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1)
<설교>
신자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대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이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에서 찾는 것은 결국 자기가 원하는 세계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다’라고 떠드는 것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잘 살 수 있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오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기가 바라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가 어떤 것인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습니다. 방치된 채 인간에 의해서 유지되고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단지 운영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가 바라는 세계를 꿈꾸고 원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과는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돌은 성경을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생각에 맞는 성경 해석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해석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과 하나님이 바라시지 않은 세상을 구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축하신 후에 장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세상은 남기시고 그렇지 않은 또 다른 세상은 영원한 심판에 가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 즉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내가 바라는 세상은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포기해야 할 세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소리라는 말이 일곱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여호와의 소리를 뇌성처럼 힘 있고 우렁찬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3절의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라는 내용을 보면, 여호와의 소리를 많은 물 위에서 뇌성을 발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물은 바다처럼 넓은 물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폭풍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폭풍우와 함께 뇌성을 발하시는 것이 여호와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소리는 힘 있고 두렵고 위엄이 있으며 우리를 떨리게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고 말하는 것은 레바논의 존귀한 백향목도 꺾어 심판해 버리시는 여호와의 권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6-9절까지의 내용도 여호와의 소리의 권세와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소리에는 여호와의 권세와 능력과 위엄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여호와의 소리를 들었다면 자연히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가 여호와의 소리를 통해서 과연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접하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접한 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모든 영광을 여호와께로 돌리게 됩니다. 1,2절에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여호와께 경배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며 경배하게 되는 것은 진심으로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접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권능 있는 자는 세상의 권세와 능력으로 살고자 하면서 여호와 두려운 줄을 모르는 자를 뜻합니다.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힘으로 여기고 의지하는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소리는 그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일 뿐이기에 아무리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그 소리에서 여호와의 위엄과 권세와 능력을 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우리들의 실상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여호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자연을 통해서도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볼 수는 있지만 자연이 우리의 죄를 보게 하면서 여호와께 굴복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때때로 자연 재앙으로 인해 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다가올 위해를 감지함으로 인한 잠깐 동안의 두려움이지 여호와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굴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여호와의 권세와 위엄과 능력을 접하면서 진심으로 여호와를 두려워하면서 굴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굴복은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여호와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에 굴복한 자로서 여호와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영원히 남기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눈에 보이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니기에 장차 멸하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죄인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담겨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담겨 있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에는 죄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 앞에서 신자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신이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로 인해 오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남을 입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됨을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면서 내 죄로 인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독생자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죄값을 치르게 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고 말씀하는데 홍수 때에 좌정하신 여호와는 노아 홍수 때 세상을 심판하신 여호와를 말합니다. 그 여호와가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이 여호와가 지금도 왕으로 좌정하고 계신다면 분명한 것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과 그 생각이 악한 것을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여호와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며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 아니라 신앙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세상의 죄와 악함을 고발하고 책망하는 여호와의 소리를 드러내는 것은 꺼려합니다. 사람들이 즐겨하지 않고 거북해 한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는 여호와의 소리가 거북스러워 그 소리를 외면하고 싶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소리 앞에 굴복하고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고 말하는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경쟁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이겠습니까? 여호와가 주시는 힘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낮아짐에 처하고 어려움에 처해도 감사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말합니다.
신자가 여호와 앞에 진심으로 굴복하여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자신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어떤 은총을 누리고 있는가를 보게 되는 그것이 낮아진 자리에서도 여호와로 인해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만이 누리는 평강의 복입니다. 이 복은 여호와의 소리 앞에 제대로 섰을 때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시편 28:1-9 여호와를 아는 자의 기도
<본문>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시편 28:1-9)
<설교>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의 기도와 알지 못한 자의 기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지는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의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1절의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라는 내용의 기도를 보면, 다윗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주께서 다윗에 대해 잠잠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가 어떻게 생각하면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 있다면 항상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본다면 다윗이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잠잠하시면 자신의 인생은 망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전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잠잠하시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침묵하시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 인생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의 소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도한 대로 성취되는 것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단지 기도 응답을 구하는 차원에서 주께서 잠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무덤에 내려가는 것은 음부로 내려감을 의미하며 그것은 영원한 멸망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다윗은 주께서 자신에게 잠잠하시면 자신의 운명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자들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2절의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는다는 것은, 주의 성소에서 베풀어지는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만이 자신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의 인생과 같지 않게 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덤에 내려가는 운명에서 자신을 구출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여호와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자신을 멸망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여호와를 나의 반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외면한 채 우리 멋대로 반석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저 내 육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시는 여호와라는 의미에서 ‘나의 반석’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던 나의 반석과 다윗이 의지했던 반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고 멸시하는 것을 멈춰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은 운명에 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 어떻다는 것은 신자들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지식이 믿음이 되어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운명을 내다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자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세상에서 실패한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이 더욱 큰 두려움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께 자신을 붙들어 주기를 기도할 것이고, 다윗처럼 자신의 그러한 기도에 귀를 막지 말아달라고 호소할 것이고, 잠잠치 말아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께 맡긴 신자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엉터리고 형식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기도에서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담겨 있는 자신의 열망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살핌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대해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3절에서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기도에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는 같은 길에 서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의 마지막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그들과는 구별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악인과 행악하는 자들이 어떤 길을 가는가는 관심이 없이 다만 그들이 누리고 있고 소유한 것을 부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자를 구별하여 택하시고, 세상이 누리지 못한 하늘의 은총으로 우리를 대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악인과 행악하는 자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악인과는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3-5절의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말하는 악인의 마음에 있는 악독은 윤리적으로 악한 행동이 아니라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윤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악독이라고 말하고 여호와께 보응해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반발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은 것은 여호와의 구원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서 탄생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구원 사역에 대해 누구보다도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민족이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할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여호와의 구원 사역을 잊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응으로 멸망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덤에 내려가는 우리를 붙드시고 무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거하도록 인자와 자비를 베풀어주신 여호와의 행하신 그 일을 감사하면서 행여 여호와의 구원을 잊을까 두려워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진심으로 자신의 신앙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로부터 멀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여기면서 마음은 온통 세상에 둔 채 여호와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악독을 행하고 있는 자가 바로 나 자신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셨음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늘에서 무슨 음성을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았기에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기를 원하는 자신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셔서라도 하나님께로 끌어가실 것임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7-9)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끝까지 붙드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가 힘이요 방패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하나도 잃지 않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원의 하나님이 목자가 되신다는 것이야 말로 삶을 든든하게 합니다. 문제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잠잠하실 때 내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U
시편 27:1-14 여호와를 향한 열망
<본문>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시편 27:1-14)
<설교>
이제 다음 달이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교체가 되는데, 대통령 당선자인 이명박 씨를 향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원과 열망은 두말할 것 없이 경제발전입니다. 제발 좀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소원이며 대통령을 향한 열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열망이 BBK와 다른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서 도덕성이 의심된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당선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계천 복원 사업을 성사시키고, 그동안 이명박 씨가 이루었던 여러 일들이 이명박 이라는 사람에게 뭔가 기대를 갖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서 왕이시고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어떤 소원과 열망을 갖고 있습니까? 신자가 하나님께 아무런 열망도 소원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물론 신자의 소원과 열망이 온통 육신의 문제를 향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지만 아무런 소원과 열망도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 또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아무런 뜻도 목적도 없이 그저 교회를 찾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시편 저자가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소원과 열망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27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어떤 시기에 이 시를 기록하였는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내용을 보면 아마 사울에게 좇기는 때를 배경으로 이해하면 좋을듯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을 두렵게 할 수 있고 무섭게 할 수 있는 대상은 다윗의 대적, 즉 다윗의 원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원수 앞에서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빛이고 구원이시니 두려워 할 자가 없고, 여호와가 생명의 능력이시니 무서워 할 자가 없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다윗의 이 시에 동참되려면 무엇보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무서워 떨게 할 대적, 즉 원수가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나에게는 나를 두렵게 하고 무섭게 하는 원수가 존재하는가?’부터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움과 무서움의 대상인 원수가 없는 상태에서는 여호와가 빛이고 구원이시라 두려움이 없다는 다윗의 말의 깊은 의미에 전혀 접근할 수가 없게 될 것이고, 결국 국어 책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 이러한 대적자가 없다는 것은, 신자가 주의 이름과 연관된 삶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우리의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과 연관되어 등장하는 것이 원수이기 때문에 신자가 주의 이름과 연관된 삶에 있지 않다면 자연히 원수 역시 등장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의 이름과 연관되어 사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의 은혜를 높이고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주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원수는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주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에 몰두하도록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하고, 사단의 역사야 말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강대한 적이며 원수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비로소 빛이시고 구원이시며 생명의 능력이신 분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원수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무서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다윗은 원수에 대해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원수는 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옵니다. 그러나 신자 한 개인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사실 신자의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라 주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주의 이름으로 살지 않는다면 원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청하였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소원이고 열망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소원이고 열망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과연 이런 소원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신자가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다윗이 말한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이 보석으로 꾸민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꿈꾸고 살아가는 호화로움을 누리기 위해 여호와의 집을 열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그 아름다움을 사모하면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은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만 나타나는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미적이고 지적이며 선한 행동을 의미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빛이 되셔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다윗이 앙망하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이 소원하고 열망했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빛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집에서 거한다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모든 말들은 앞서 말한 대로 두려움과 무서움의 대상인 원수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끌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도움을 받아서 원하는 육신의 일이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다윗의 소원과 열망 따위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의 이름만을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 살고자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의 본분임을 잊지 않는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주의 이름보다 내 이름에 마음을 두게 하고, 주님을 높이는 것보다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 더 마음을 두게 하는 모든 유혹들에서 원수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수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기에 빛이시고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의 은밀한 그 곳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써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지성소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은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 인자와 자비하심으로써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 아래 거하는 것이야 말로 이미 승리한 자의 삶이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시를 보면 풍성한 기쁨과 찬송과 승리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풍성한 기쁨과 찬송과 승리를 담고 있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지키시고 숨기신 것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밀하신 십자가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즉 십자가에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 아래 자기 백성을 붙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 사건만으로도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가 있으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승리를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다윗의 기쁨과 승리의 노래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그 기쁨과 승리를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면 여호와께 아무런 소원과 열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다윗이 누렸던 하나님의 집에서의 기쁨과 승리를 나도 알게 해 주십시오. 사도들의 기쁨과 찬송을 나도 누리게 해주십시오’라는 소원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7편은 7절부터 그 분위기가 달라짐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승리와 기쁨을 노래하던 다윗이 갑자기 고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을만한 고난의 때가 없었겠습니까? 여호와의 집에서의 승리와 기쁨을 알았다고 해서 평생을 승리와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다. 원수에게 둘러싸일 때 도 다시 두려움에 빠지고 무서움에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긍휼을 구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27편은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13,14절)는 말로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신자가 바라고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죽음의 세계 속에서 참된 생명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윗처럼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할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때문에 바울처럼 비록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승리를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만이 가장 든든하고 안전한 피난처로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게 하신 그 사랑을 감사하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처할 수록 이 찬송은 더욱 더 높아질 것입니다. U
시편 26:1-12 나를 판단하소서
<본문>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26:1-12)
<설교>
인간은 누구 앞에서도 ‘나는 완전하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실수와 허물이 있기 마련이고, 설사 외적인 행동에 있어서 흠이 없다 하더라도 그 속까지 깨끗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을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1절)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하고, 또한 여호와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기도대로 여호와가 다윗을 판단한다고 하십시다. 과연 여호와는 다윗을 어떻게 판단할까요?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판단하시는 분입니까? 그보다 앞서 다른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을 판단한다면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이미 모든 죄를 회개하였으니 무죄하다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고, 사람은 다 누구나 연약하며 다윗과 같은 죄를 범할 수 있으니 용납하고 넘어가겠습니까? 어쨌든 누구라도 다윗에 대해 ‘저 죽일 놈, 지옥 갈 놈’하면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닌, 지금 여러분 주위에 함께 하고 있는 타인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하십니까? 다윗에 대한 동일한 마음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인간의 판단은 수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수가 동일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동일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판단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 대해 동일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자기 마음에 드는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판단을 바라보고 믿는 신자라면 자기 기준과 자기 취향을 앞세워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서로 비판을 해봐야 결국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을 믿고 여호와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2-4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고 기도하는 여기에 그 답이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목전에 있다고 합니다. 즉 다윗이 바라보고 믿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모든 죄를 가리시고 덮어주시는 주의 인자하심이 여호와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근거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여호와가 아니라 오직 인자하심과 긍휼로서 다가오시고 판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다윗의 모든 뜻과 마음은 주의 인자하심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어떤 환난과 시련도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향한 다윗의 뜻과 마음을 흔들 수가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인자를 향한 다윗의 마음은 강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과연 그러한지 여호와께서 시험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 믿음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마음이 붙들려 있는 자신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자신의 마음이 붙들려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마음을 붙들었기 때문에 어떤 시험과 시련에서도 그 뜻과 마음이 여호와만 향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봤습니다. 주의 인자와 자비는 자신의 어떤 죄와 허물도 다 덮으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 안에서 죄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완전한 자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행위의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 안에서의 자신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 안에서는 깨끗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주의 인자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그는 완전함에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의지하면서 완전함에 행하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자신의 의와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의 인자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추호도 의가 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인자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와 공로를 자랑한다면 그가 말하는 믿음은 거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의 인자를 믿는 자는 오직 주의 한없는 인자와 자비하심을 높이고 자랑할 뿐입니다.
이처럼 주의 인자를 믿는 신자에게는 주의 인자가 아닌 인간의 의와 공로를 높이는 자들이 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3절 중간부터 5절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허망한 사, 간사한 자, 행악자, 악한 자라는 것도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높이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인간의 의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을 미워하고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다윗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8절).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은 성전을 말합니다. 아시는 대로 성전에는 제사가 있으며, 제사는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 죄가 용서되는 인자와 자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주의 인자와 자비가 있는 주의 집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심정이 여러분께 그대로 전달되고, 다윗과 같은 고백이 여러분에게서 나온다면 과연 어떤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의를 세우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의 집회, 즉 눈에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인자와 자비하심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겠노라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교회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우리가 알게 된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서로 교통하면서 한 몸의 관계를 확인하고, 또한 나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끊임없이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순간에도 그 마음과 뜻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서 다윗이 마치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역시 주의 인자하심 안에서의 자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이 말하는 죄인은 악한 일을 행한 자의 의미가 아니라 주의 인자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 아래 있지 못하고 긍휼하심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종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자기 영혼을 거두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끝까지 주의 인자하심 아래 거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아는 믿음의 사람의 기도를 대하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허망하고 쓸데없는 종교에 치우쳐 살아갈 때가 많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인자와 자비하심보다 다른 것에 더 뜻과 마음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경배의 모든 내용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알았고 만난 사람들의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경배의 노래들이 지금 우리가 어떤 허망함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는 기도로 끝납니다. 이제는 완전함에 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케 하시는 주의 인자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발이 평탄한데 섰다는 말도 주의 인자 아래 있는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환난과 시련이 있다고 해도 주의 인자와 긍휼 안에 있는 자신은 안전하다는 의미로 평탄한데 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기도와 찬송은 주의 인자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모든 뜻과 마음이 주의 인자하심을 향한 신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기도며 노래입니다. 사실 주의 인자하심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으면서 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도하시고 찬송합니까? 그렇다면 다윗과 같은 심정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도 찬송도 모두 허망한 것이고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라면 주의 인자하심을 알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주의 인자에 마음이 붙들리고 모든 뜻과 마음이 인자와 자비하심을 향한 채 어떤 풍파와 환난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믿음, 그런 마음을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임을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복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마음을 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편 25:1-22 여호와여
<본문>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시편 25:1-22)
<설교>
목사는 소위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목사 스스로도 목사 아닌 신자보다는 신앙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신앙이 좋은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게 됨으로써 한 가지 폐단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다른 신자의 구원에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바라볼 줄 모르고 타인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에게는 거의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매주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열심히 믿으라고 소리칩니다. 목사가 타인을 바라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제대로 가지 않는 신자를 보면 화도 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좀 잘하라고 목청을 높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바라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지 않고 단지 교회의 담임목사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를 오랜 다녀서 성경의 내용에 해박하고, 나는 죄인이고 나를 위해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셨다는 내용에도 환할 때 그것으로 자신이 예수님을 신앙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실시하는 교회의 프로그램을 잘 따라감으로써 신앙의 길을 잘 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신자가 경계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러한 자기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신자가 자기 착각에 빠져 산다면 자신을 향한 애통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애통함이 없을 때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 역시 없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착각을 경계하는 것은 중요한 일 일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자신을 향한 애통이 없다는 것은 곧 영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이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기쁨의 찬송이 가능할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애통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 25편도 그렇습니다. 25편은 1절의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혼의 문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5편은 원수로 인해 환난에 처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인데, 그 기도의 내용이 환난에서 건져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지켜 달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도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
대개 환난에 처한 자의 기도는 환난에서 건져 달라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환난에서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고려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만큼 육신에 매달려 사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 영혼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환난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5편을 보면 다윗은 분명 원수로 인해 큰 환난에 빠져 있습니다. 2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6-19절의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는 내용 또한 다윗이 원수로 인해 환난을 받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처럼 원수로 인해 환난을 받고 있는 다윗이 11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환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왜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말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4,5절에서는 주의 진리, 교훈, 도를 가르쳐 달라는 기도를 하는데 그렇다면 25편은 다윗이 환난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그 영혼을 죄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입니까? 분명히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답을 후자입니다. 환난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건짐 받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원수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보다 다 중요한 영혼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25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항상 육신의 문제에 매달려 살아갈 뿐입니다. 육신의 문제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영혼의 문제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영혼의 문제, 즉 영적인 문제는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의 일로 인해 불안해하고 염려한다면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죄를 원수로 인해 환난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에서 불안해 할 수 있고 염려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큰 죄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으로 인해 육신이 죽는 것보다 죄로 가득한 영혼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구하는 것보다 절실한 기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죄와 허물로 가득한 자신을 기억하지 말고 주의 인자와 긍휼로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주의 인자와 긍휼로 기억된다면 죄로 인해서 심판받을 자가 아니라 용서 받은 자로 기억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환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조차 사단에게 미혹된 것으로 바라보는 신자에게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빠진 자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필요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부터 멀어지게 하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이 내 문제에 집착하고 매달리게 하는 사단의 미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부르는 다윗의 그 심정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늘 살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는 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 육신의 괴로움과 고통만을 생각하면서 속히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바라기보다는 환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면서 불안해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을 들여 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낙심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기에 애통해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에서 건짐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의 인자와 긍휼로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육신의 문제에 집착하고 매달리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자신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런 상태로 계속 나아갈 때 결국 멸망일 수밖에 안다면 항상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내 영혼을 지켜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큰 대적은 육신에 괴로움을 안겨주고 고통에 빠뜨리는 세상의 물질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단의 계략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육신의 문제에 집착을 한다면 사단의 계략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이 나를 살게 하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힘쓰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자에게 육신의 문제는 단지 육신의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항상 자신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4:1-10 거룩한 곳에 설 자
<본문>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시편 24:1-10)
<설교>
신자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노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24편의 내용입니다.
24편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성소로 옮기면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언약궤를 성소로 옮기면서, 즉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은 시편 23:6절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말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고, 그 언약궤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옮기는 것은 곧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고자 하는 소원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이 노래를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께 진정한 찬양이 되고 예배가 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을 노래하는 것인데, 단순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교회를 다니는 사람치곤 모를 사람이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여러분 집 마당에 정원을 하나 만드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형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늘에서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패한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에 의해 세상으로 쫓겨 났는데 그것이 사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에는 이미 사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가지는 의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단을 그대로 방치한 채 세상을 창조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사단을 미리 제거하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인간이 죄를 범하고 사망에 처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선악을 알게 된 인간들이 가지게 된 악한 생각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것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불리하게 일을 하셨는가?’라는 불만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단을 제거하고 모든 창조를 하셨다면, 인간이 죄를 범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 에덴동산에서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에덴동산 같은 천국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편안한 삶을 위해 창조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엡 1:3-6절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세상에 나게 하시고 부르신 그 모든 뜻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영광의 찬미를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단을 제거하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그런 은혜의 영광의 찬미가 가능하겠습니까? 죄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올 이유가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영광의 찬미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으로 인해서 죄에 떨어진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은혜를 맛보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노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의 찬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은혜의 영광의 찬미는 하늘의 천사들도 부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도 죄의 자리에 떨어진 경험이 없고, 따라서 아들로 인한 인자와 사랑을 맛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감사하는 신자의 찬미는 천사의 찬미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지 우리의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가게 되고 하나님의 일하심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에는 단지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그 영광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4절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고 노래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성전으로 올라가면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다윗과 같은 그론 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않는 자로다”라고 노래하면서 말입니다. 이 말은 결국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는 나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고 거짓 맹세치 않는 자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노래할 처지가 못 되지 않습니까?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이 어떻게 그런 노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다윗은 당당하게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죄를 짓지 않았거나 우리보다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 역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이고, 거룩한 곳에 설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 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언약궤 때문입니다. 즉 다윗은 앞세우고 있는 언약궤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노래야 말로 시 23:6절의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노래와 일치되지 않겠습니까?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있습니다. 죄 없는 희생 제물의 피가 언약궤 위에 뿌려 짐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 모든 사람의 허물을 덮으시고 용서하심으로써 죄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용서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자를 죄 없다, 깨끗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의의 하나님을 죄인 된 존재가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는 의 앞에서는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소멸될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완전한 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의로운 자로 여김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를 아는 신자가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5,6절)는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신자가 여호와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오직 의는 하나님께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를 얻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복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죄의 자리에 있던 인간의 실체를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거룩한 곳에 설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아예 하나님께 나아가고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을 별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엉뚱한 것만 마음에 품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앞세우고 성전에 올라가면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고 노래합니다. 자신을 영광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이 자기 처소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처소인 성전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찬양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구원의 역사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의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나를 사단의 손에서 건지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설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믿는 자 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어떻게 자신이 거룩한 곳에 서는 자가 되었는가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인자와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마음 깊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
<본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1-6)
<설교>
여러분은 지금까지 시편 23편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셨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면 나의 인생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본 시편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신자 스스로 신앙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인생이 잘 풀려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면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산다고 해서 인생이 잘 풀려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분명 잘 풀려갈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고 분명한 확신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풀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이 잘 풀린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십니까? 세상이 말하고 기대하는 것처럼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잘 풀린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또한 인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한 사람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결국 잘 풀린 사람이든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이든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끝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의 끝에서 인생이 잘 풀렸다, 잘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혹 인생이 잘 풀린 사람과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의 죽음 이후가 다르다면 인생이 어떻게 풀려 가느냐는 것은 분명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인생 문제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말을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동감하신다면 23편을 인생이 순탄하게 잘 풀려가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항상 우리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욕심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대해 소경이 되게 하고 귀머거리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자기 욕심에 꿰맞춰서 해석하다보니 하나님은 마치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육신의 모든 것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여기게 되고, 또 그런 하나님으로 함께 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내용부터 그러합니다. 대개 이 구절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나의 삶은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질 것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나친 환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환상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사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매일 같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신다고 합시다. 과연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매일 자기에 대해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자기에게 채워진 것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비교할 때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을 보면서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매일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신다고 해서 과연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는 고백을 할 것이라고 여깁니까? 물론 한 순간에 그런 고백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뭄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라질 것에 불과합니다. 금방 또 다시 다른 것을 기대하는 욕심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의 내용은 ‘여호와가 목자시니 앞으로 내 인생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시를 지은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구절입니다. 대개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구절보다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구절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의 의미에 더 중요성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여러분에게 여호와가 목자이십니까? 목자라는 것은 단지 양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초장으로 인도해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양을 다른 맹수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잠시라도 양에게서 관심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로 인해서 아무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목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합니다. 설사 목자가 인도하는 길이 자갈길이고 비탈길이라고 해도 안심하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가 자신을 해로운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른다면 과연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모든 길에서 염려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갑니까?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하면서도 그 목자의 자리에 혹시 돈이 있고, 자존심이 있고,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호와가 목자가 아니라 실상은 돈을 목자로 삼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여호와를 목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양으로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기를 막연하게 기대하면서 쥐꼬리만 한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관심이 육신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자신에게 집착할 뿐,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존에 매달려 살아갈 뿐이지 영혼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현재에 대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기쁨의 노래가 나올 만큼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까? 이 기쁨의 노래가 있으려면 무엇보다는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해야 하고, 지금 현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믿어야 합니다. 무조건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목자 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는가를 앎으로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곳으로 눈을 바라봐야 하고 마음이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지금 현재가 어떻든 상관없이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절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는 구절도 욕망의 눈으로 생각하게 되면 ‘푸른 초장’은 내가 원하는 육신의 것으로 가득한 곳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처럼 육신의 것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시고,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푸른 초장에 있어야 하고 쉴만한 물 가로 인도 받았어야 합니다. 20년을 믿고 30년을 믿었는데도 여전히 푸른 초장으로 인도받고 있는 도중이라면 그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것은 2,30년을 믿어오면서 지금껏 여호와로 인한 기쁨은 누려보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이런 신앙의 형편에 처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하면 신자면서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양을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은 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는 말씀에서처럼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소생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영혼이 영원히 사는 생명의 길로 자기 양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의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써 우리가 사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 영혼이 소생되기 위한 의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인도만 따르면 되는 양의 입장에서는 양이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의가 되신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다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는 기쁨의 노래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목자가 함께 하시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들 두렵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떻든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영혼이 소생되는 의의 길로 인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삶의 형편이 비록 남보다 못하고 고생과 어려움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조차도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5,6절)는 노래가 가능한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넉넉하고 풍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살 때 주어지는 평안인 것입니다.
오늘 이 노래가 여러분의 노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자 되신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푸른 초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에 불과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영혼이 소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의 소생에 마음을 둔 신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노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노래가 여러분의 기쁨의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22:1-31 버림 받음
<본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편 22:1-31)
<설교>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랑에 인색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풍성하게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시기 때문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조건과 결과에 따라 차별 대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이라는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일을 하던 적은 일을 하던 그것 역시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조건과 결과에 따라 차별 대우하신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이미 풍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사랑은 세상의 것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풍성한 사랑의 증거로 확증된 예수님의 십자가로도 그 마음이 충족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확증된 사랑이 사망에 처한 우리에게 어떤 사랑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족된다면 신자는 사랑 받기를 원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사랑 안에서 감사하며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돕지 아니하시고, 고통의 신음 소리도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버림 받음은 예수님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버림 받음의 경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겪을 경험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한 다윗을 버림 받음을 경험하는 고난으로 인도하셨고,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버림 받는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예수님도 버림 받음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여전히 내 하나님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고난의 자리로 이끌어 가신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처한 형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해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때문에 1절의 말은 원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윗이 한 말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여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원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와 같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버림 받으심은 예수님 한 개인의 버림 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가 곧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버림 받음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 아래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주 받으신 예수님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버림 받음에서 나의 버림 받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윗이 버림 받은 자로서 알게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한 대로 본문은 버림 받은 자의 구원의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구원의 노래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다윗처럼 버림 받음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다윗과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1절에서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자신의 모든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을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는 고백처럼 아주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버림 받음의 경험입니다.
또한 12-18절의 내용에서도 다윗은 대적들에 둘러 싸여서 고난을 받고 조롱을 받는 처지를 말합니다. 특히 16-18절의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는 말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는 수치를 그대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 나올 때 이러한 버림 받음을 경험한 자로 나오십니까? 사실 우리의 삶이 풍족하다보니 버림 받음에 대해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버림 받음에 대해 생소하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구원의 노래가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버림 받음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윗과 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생명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시고 죽음에 처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인간은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인데 우리는 이러한 실상을 잊어버립니다. 마음 놓고 예배당에 나가서 기도할 수 있고, 어느 때 어느 장소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버림 받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잊고 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 또한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나오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관계에 있지도 못하고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하나님은 햇빛과 공기와 물을 주시고 살게 하십니다. 이것조차도 ‘웬 은예입니까?’라는 감사의 고백이 있어야 정상인데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고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처럼 철저하게 낮아짐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신자에게는 큰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버림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설사 고난과 어려움이 평생토록 계속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영원한 멸망에 갇히는 것이 마땅한 자신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야 말로 크신 사랑과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형편을 초월하여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23절의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라는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처럼 먹고 배부를 자는 겸손한 신자입니다. 즉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로서 자신을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자신에게 넘치고 풍성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임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와 사랑으로 배부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배부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노래인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한 배부름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시고 저주를 받고 사망에 처해야 마땅한 버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대신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의 버림 받음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그 무엇도 버림 받은 여러분을 구할 수가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여러분을 생명에 있게 한다는 것을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조용히 채워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노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시편 21:1-13 왕의 기쁨
<본문>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시편 21:1-13)
<설교>
성경을 보면 오직 그리스도로만 살았던 사도들의 기쁨은 오늘 우리들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질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온통 세상적인 것이 기준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식이 공부 잘하고, 돈 잘 벌고, 하는 사업이 잘되는 것들로 기쁨을 삼고 또한 그런 기쁨이 계속되는 것을 인생의 행복으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사도들의 기쁨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식의 문제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돈 버는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을 언급하면서도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기쁨을 마음껏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그 기쁨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다른 불행이 오게 되면 당장 사라지고 대신 불행으로 인한 낙심과 걱정과 염려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기쁨은 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상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사도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보고 살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신자로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흘러갈 뿐 삶에서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욱 소망하고,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음이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이 신자를 어떤 삶을 살도록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나 자신이 참된 믿음의 길에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즉 승리의 기쁨의 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승리의 기쁨의 노래는 통상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왜 기뻐하겠습니까?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한다면, 나중에 패배했을 때는 기쁨 대신에 슬픔만 남게 됩니다. 또한 승리의 기쁨도 지속적이지도 않습니다. 조금 지나면 승리의 기쁨 또한 반감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즉 기쁨의 정도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여자 테니스 선수 가운데 세계 최고로 여기는 선수는 ‘나브라 틸로바’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를 ‘만들리코바’라고 하는 신인 선수가 이긴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 정상의 선수를 이긴 후에 기자가 소감을 물었을 때 ‘마치 전 세계를 가진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자가 그 느낌이 얼마나 갔는가 물었더니 ‘한 2분쯤’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세계를 가진 것 같은 기분이라면 말 그대로 최고의 기쁨을 만끽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약 2분쯤 지속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 너무 허망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전 세계를 가진 것 같은 기쁨이라면 적어도 며칠은 잠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샐만한데 겨우 2분간 반짝하고 말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게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지속이지 못합니다. 순간은 모든 소원이 다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만 잠시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소원이 마음을 비집어 들어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허망하고 헛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에서 박수 받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의 기쁨 역시 같습니다. 단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만 생각한다면 그 기쁨은 지속적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왕의 기쁨은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왕은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고 노래합니다. 왕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승리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뻐하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가 기뻐하게 하는 일이나 슬퍼하게 하는 일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것일 뿐이지 그런 일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왕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하나님이 있게 하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힘과 도우심과 지키심과 함께 하심을 발견하면서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여호와로 인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의 힘과 주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서 생명의 길로 쉬지 않고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서입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승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그 심령에 성령이 거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힘으로 고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신뢰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신자만큼은 그 피를 가장 귀하다고 고백하고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주의 힘과 주의 구원이 나에게 함께 한 결과인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신자가 생명의 나라에 소원을 두고 산다면 그 소원의 마음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것도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는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즉 신자가 잘해서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주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과 자질로 잘한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잘한 것이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그 결과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면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에 모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게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잠깐 느낄 뿐 그렇지 않을 때는 아예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감지조차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참된 기쁨을 맛보고자 한다면 항상 그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내가 죽으면 다 끝나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라는 것도 잠시 잠간 동안 누리는 것에 불과할 뿐, 죽으면 모두 사라질 헛된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승리의 기쁨은 세상에서 타인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진정한 승리는 주의 힘과 주의 구원에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고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진정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승리의 기쁨은 주께 있는 것입니다. 주가 곧 승리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왕을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심으로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영토록 지극한 복이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영토록 지극한 복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이 복이 주 앞에서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 살아가는 신자야 말로 하늘의 지극한 복을 누리는 신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을 소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귀한 복을 알게 된 자로서 세상이 구하지 않은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죄의 사함을 얻고 허물의 가리움을 입은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보다 더 귀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잠시 동안의 느낌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지극한 복은 신자의 심령에서 잔잔한 기쁨으로 멈추지 않고 흐를 것입니다.
이런 기쁨에 있는 신자는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의 힘으로 인해 기뻐하고 주의 구원으로 인해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의 힘이 기쁨이 되기 바랍니다.
시편 20:1-9 우리의 자랑
<본문>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시편 20:1-9)
<설교>
만약 남과 북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두말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을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대한민국이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과 북의 군사력을 계산해 보면서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결국 행여 하나님이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일 수도 있고, 답답한 마음에 기도나 해보자는 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고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군사력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문의 기도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전쟁을 나가는 왕을 위해 백성들이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고(1-5절), 그 기도에 왕이 응답하는 내용(6-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와의 승리를 위해 기원하고 있지만, 그 기원은 단순히 하나님이 왕을 도와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막연한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들의 기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앞서 말한 대로 단지 막연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기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또 다시 군사력을 계산하면서 눈에 보이는 군대와 무기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을 위한 백성들의 기원은 우리들의 기도와는 맥락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고 기도하는데, 이 기도는 성소와 연관된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가 왕에게 응답하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왕을 높이 드실 것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인간의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기 때문에 왕을 도울 것이고 왕을 높이실 것입니다라는 의미의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상식에 의한 대로 ‘하나님은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무작정 기도에 열심을 보이려고 할 뿐입니다. 응답을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두면서 말입니다.
3절에서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것도, 왕의 제사와 제물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는 자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의 기도에 대한 왕의 응답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6-9절)입니다.
왕은 응답하기를 여호와는 자기에게 속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분임을 안다고 말합니다. 기름 부음은 ‘너는 내 것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별하여 택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키시고 도우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왕이 믿고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은 택하여 세운 자를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전쟁에 나가는 왕으로부터 모든 근심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오른 손의 구원의 힘으로 지키십니다. 그래서 왕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병거와 말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전쟁을 병거와 말로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즉 군사력이 승리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사람의 연약함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더 신뢰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다가도 세상이 보이면 세상이 더 큰 힘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살기 보다는 항상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살아갑니다. 몸에 병이 들었으면 병든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낫게 되는 것에서 은혜를 맛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본문의 기도와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달라는 기대감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기대감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승리했다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군사력, 즉 병고와 말의 숫자를 보고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승리를 확신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지켜온 힘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전쟁을 나가도, 전쟁을 하기도 전에 승리를 확신하는 것은 세상이 볼 때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진정한 힘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강국이라고 하는 미국도 산불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힘을 다 모은다고 해도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바람조차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그만큼 무능하고 나약한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것을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믿는 것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눈에 보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해도 보이는 것이 주어짐으로써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그 기쁨에 대한 반응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으로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승리를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라는 기대로 인한 확신이 아닙니다. 즉 내가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기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에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를 이미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부디 이 점을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하나님께 속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조건과 형편과 환경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구원은 포기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신자는 자기 구원을 두고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행함을 바라보게 됩니다. 구원의 여부를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잘했으니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설사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믿음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시면서 까지 믿음으로 돌이키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 열심이 죄인의 괴수일지라도 생명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 밖에 없습니다. 병거와 말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자랑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도를 보면 힘을 얻기 위한 기도 밖에 없습니다. 온통 자기 소원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러한 것이 얼마나 허망한 기도인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의로우신 피를 보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참되고 진실된 기도인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일은 우리에게 선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면 됩니다. 이것이 승리의 삶입니다. 지금 나의 형편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곧 승리입니다.
시편 19:1-14 다윗의 소원
<본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14)
<설교>
죄는 인간의 의지로 절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죄는 인간에 의해 주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에 의해 인간이 주장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3절에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죄 앞에서 무능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설명한 내용과 같습니다. 바울이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17,19)고 고백한 것처럼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자기에게 전혀 가망이 없다고 실토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 출발은 오직 십자가 복음입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의의 길을 갈 수 없으니 이제는 오직 주님의 긍휼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신앙이 이것과 다른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아무리 예수를 열심히 믿어도 헛수고입니다. 단지 여러 종교 중에 기독교를 택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이 된 것에 불과하지 아직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죄를 죄로 보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죄에 붙들려서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로 인해서 나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조차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해와 달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마 별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단지 여름이 되면 햇볕이 너무 뜨겁다는 불평이 나오고, 겨울이면 좀 더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이 거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는 말을 합니다. 해가 말하는 것이 있고 달이 전하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1절의 내용처럼 해와 달이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 외치고 있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6절에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누구도 해의 온기를 피하여 살 수 없다면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외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습니다. 악에 빠져 살아가면서도 악에 빠져 있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7절부터 율법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으로 감사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 세상의 악을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7,8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율법을 생각할 때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율법을 신자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실천과 연관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우리를 그러한 신자로 만든다는 것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영혼이 소성될 수 없고 지혜로울 수도 없으며 마음의 기쁨 역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잘 지킬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이것이 그 답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세워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영혼을 소성케 하고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를 알고 내 죄를 짊어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영혼이 소성되는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고, 마음에 기쁨을 얻는 것이고 눈이 밝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보지 못하는 허물을 보게 된 것이야 말로 눈이 밝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새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자신의 허물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사람에 대한 어떤 실수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별 실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전혀 허물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물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해와 달로 인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말씀으로 인해서 허물이 발각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는 말처럼 사람은 스스로 자기 허물을 깨닫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숨은 허물로 인해서 결국 죄의 주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3절에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고범죄는 알면서도 짓는 죄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죄가 무엇인가를 알면 그 죄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죄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해서 죄를 피하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교만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모두가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탐욕이 죄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만과 탐욕을 피하고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죄가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즉 다윗은 은밀하게 숨은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자신이 알고 있는 죄가 자신을 주장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죄의 주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만이 자신의 소망임을 깨닫게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14절에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죄에 있어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현실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향한 그 간절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다윗의 이 마음은 진심으로 죄의 자리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도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러한 교제를 소원하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숨겨 두고 있는 자의 말과 묵상이 하나님께 상달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과만 교제의 관계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교제의 관계까지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되어지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권능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숨어있는 자기 백성을 빛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알게 하시고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완전한 교제의 관계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단지 죄 짓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는 온전한 관계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할 것도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입니다. 그 소망이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로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18:20-27 갚으시는 여호와
<본문>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편 18:20-27)
<설교>
18편은 사무엘하 22장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고 평안을 주신 상황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여러 가지의 말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4-19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보면 통상 우리가 말하는 은혜의 내용과는 질적으로 내용적으로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은혜의 내용은 대개 눈에 보이는 것이고 육신의 것들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은혜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다윗은 오직 원수를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것만을 은혜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수로부터 다윗을 구원하셨는데, 그것을 마치 실제 목격한 것처럼 사실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단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라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그냥 막연하게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받아들이는 수준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을 목격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로 인해서 환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시는데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더라고 말합니다. 물론 실제로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요동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다윗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요동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어느 정도로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별다른 감격과 감사가 없지 않습니까? 나를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나를 붙들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기시고 죄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전쟁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열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요동할 정도였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에 붙들려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말합니다.
20-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마치 자신이 잘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의를 따라서,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런 말들을 보면 모두가 다윗이 잘했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다윗은 자신을 의롭다고 하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미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마치 예전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자신의 의와 깨끗함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율례를 지켰다고 말합니다.
23-24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다고 합니다. 도대체 다윗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와 깨끗함과 심지어 완전함을 말하는 것입니까?
다윗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의롭다는 것과 깨끗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대개는 의롭다는 것이나 깨끗하다는 것을 악한 일을 전혀 행하지 않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말 그대로 행위에 있어서 완전하고 깨끗한 상태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이나 깨끗함은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한 평가가 아니라 믿음을 기준으로 한 평가입니다.
롬 3: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 것처럼 의의 기준은 믿음에 있는 것이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행위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속이 더럽습니다. 속이 더럽기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은 의의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으로 나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음을 믿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죄 없는 깨끗한 자로 여기시고 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그 피의 은혜 안에서 악한 우리를 의로운 자로 깨끗한 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 51: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이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에 모든 소망을 두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믿는 이 믿음이 다윗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시고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모든 죄를 씻으신 인자와 자비 안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하고 깨끗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끗케 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높이고 노래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율례를 지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율례의 목적은 율례를 지켜서 착하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의 증거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도를 지키지 않는 것은 도를 실천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지 않고 스스로 율례를 실천함으로써 의를 얻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있어서 의로움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의를 보시고 하나님이 갚아주신 것이 있습니다.
25-27절의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주의 자비하심을 따라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으로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나타내고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인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비한 자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주의 자비를 아는 자가 곧 주의 자비에 거하는 신자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주의 자비가 대가로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비를 알지 못한다면 자비를 베풀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자비하심을 베풀고 주님께 헌신된 자로서 여호와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따라 자비하심을 넘치게 하고 주님께 헌신한 자에게 완전하신 사랑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특한 자와 거스리는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언약에 신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신실한 백성이 곤고를 당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보석도 아니라 일용할 양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자리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심판에서 건져 주시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은 인자와 자비로 만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이며 이 언약을 믿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의로움이고 깨끗함이며 완전함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거스리고 낮추실 것입니다.
주의 길에 있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갚으시는 것이 인자와 자비라는 사실은 참으로 신자가 무한한 복에 머물러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주의 길에 있도록 은총을 베푸시고, 또 다시 인자와 자비로 갚으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임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자와 자비를 바라보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그가 복된 자입니다.
시편 18:1-3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본문>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편 18:1-3)
<설교>
신자가 기도할 때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수식을 붙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등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이는데, 저는 그런 기도를 들을 때마다 ‘과연 저분이 저 말의 의미를 알고 하는 것인가?’ 또한 ‘진심으로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믿는 믿음으로 하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멋진 말을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진심이며 믿음입니다. 진심과 믿음이 없이는 어떤 멋진 말도 공허한 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무려 아홉 가지의 수식어를 붙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찬송 받으실 여호와 등으로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표현을 모두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18편이라고 적힌 옆을 보면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뢴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파란만장했던 전 생애를 걸쳐서 체험했던 하나님을 한 치의 과장도 없이 그대로 고백한 시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그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경험한 것이 어찌 아홉 번 뿐이겠습니까? 골리앗과의 전투로부터 시작을 해서 백성들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칭송한 것으로 인해서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게 되었고 신하와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과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도움으로 인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적군인 블레셋으로 망명을 하기도 했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겪은 고난은 우리의 생각이상입니다. 4절부터의 내용을 읽어보면 다윗의 고난은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그 일생이 환난과 대적이 떠나지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다윗은 그러한 고난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런 체험을 원하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앙을 부러워합니다. 나도 저런 신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은 싫어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결국 진심으로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만 신뢰하는 신앙으로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없는 큰 신앙을 가짐으로써 자기 이름을 높여 보고 싶은 욕망인 것입니다. 즉 큰 믿음이 욕심나는 것이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믿음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 훈련 받고 고침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방에 편히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윗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홉 번에 걸쳐서 각기 다른 말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실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환난 때마다 대적이 다르고 위급한 상황과 형편도 다르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도 다 달랐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하게 느끼는 내용도 각기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의 고백은 비슷한 사건이나 같은 상황과 형편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다양하게 설명한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나 실감하십니까? 죽을 고비를 넘기는 환난이 없으니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생각이시라면 아직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고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를 지킨 결과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신자는 실제 죽을 고비를 겪음으로써 그동안 살아왔던 것들이 기적이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결과였음을 실감하고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원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는 세상을 장악한 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려고 힘을 씁니다. 그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길을 여전히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매일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기적 같은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을 다윗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믿고 신뢰하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반석으로 삼는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다른 피난처를 세상에 두고 살아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돈이 힘이고 권세 있는 자가 힘이라는 방식을 따라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배워서 그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윗의 고백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2절의 내용을 말하면서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위험에 처했을 때는 건져 주시고 고통을 당할 때는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셔서 세상에서 내 이름을 굳게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다윗의 고백 앞에서 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수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알게 되고 체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대적을 피해 도망 다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반석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나아지고 대적들이 물러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나 대적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면 어려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다윗의 고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야 말로 그 어떤 세력도 자신을 해칠 수 없는 근거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 대한 영원불변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을 때 다윗과 같은 고백이 진심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정사와 권세 자들과의 싸움이라고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은 혈과 육의 싸움에 집중합니다. 타인보다 더 높아지는 싸움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윗의 고백을 바르게 받아들일 리가 만무합니다. 온통 자기 혈과 육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반석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따라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십자가를 지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봉사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길을 힘써 가고자 하는 싸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있어야 하나님이 반석이시고, 방패가 되시고, 요새, 산성이 되신다는 다윗의 아홉 가지의 고백들을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이 가신 길에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영원한 사랑의 확증은 여러분 안에 함께 하신 성령의 증거를 따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과 이런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도우심과 지키심을 날마나 누리면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시편 17:1-15 굳게 지켜야 할 것
<본문>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15)
<설교>
신자가 성경을 보면서 주의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성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17편의 내용은 다윗이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로부터 지키고 구해달라는 내용인데, 이 내용을 문자 그대로 자기의 기도 내용으로 삼아 버리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자신의 대적으로 여기고 다윗처럼 그 대적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기도는 그런 용도로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다윗의 기도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한 개인의 보복이나 한풀이용으로 이용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정직한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로 표현하면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기도가 무엇일까요? 정직하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많을 것입니다. 생각이 안나십니까?
여러분은 기도하시면서 마치 진심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처럼 죄인 됨을 고백하면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또한 세상을 싫어하는 것처럼 천국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의 것을 귀하게 보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이 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은 온통 반대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과 전혀 다른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나와서는 자신이 서 있는 길을 속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의 기도는 결코 정직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윗과 다른 점입니다. 즉 다윗의 기도를 그대로 내게 끌어 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주가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께로부터 판단 받고 싶은 자기 행위를 3절부터 말합니다.
3-5절의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말하는 정직함은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는 솔직하다는 표현이 아니라 다윗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인해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입으로 범죄치 않고 주의 말씀을 굳게 지키고 주의 길로 행하며 실족치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이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정직함은 원수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상황이면서도 말씀을 지키며 주의 길로 간 것을 말합니다. 즉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하는 정직함은 오늘 우리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대로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삶으로는 자신의 말을 부인하고 뒤엎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가 다윗처럼 나를 판단해 달라는 말을 하나님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우리가 감히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듣지를 않으십니다. 거짓말투성이인 우리 기도를 들으실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속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기도가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때문에 신자는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나를 보지 마시고 나의 죄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을 보시고 예수님의 뜻을 내게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내 뜻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뜻을 내게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말쟁이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정직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 할 때 다른 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토대로 해서 우리를 향한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병든 사람이 기도할 때 성경을 덮은 채 기도하면 다만 자신의 병이 낫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토대로 기도하게 되면 병조차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인간의 나약함을 알게 하시고, 내 육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게 하시는 주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병이 든 상태에서도 ‘이 은혜가 내게 족한 줄로 여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욕망을 초월한 채 진심으로 은혜를 알고 싶어 하는 기도이며 정직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고난에서도 변함없이 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기도는 다윗의 기도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서 힘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주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기도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직한 기도이며 신자가 고난 중에 굳게 지킬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6-9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부르면서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를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은 대적으로부터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으로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나 지켜주심과 같은 말들을 환경적인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항상 눈이 가려진 채로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는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생명의 나라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날개 아래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지키심을 외면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는 중요한 일을 정작 우리는 전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환경만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힘든 일이 없이 평안히만 살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복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곧 세상이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보지 못한 무지의 결과며 어리석음이고 눈이 가려져 있는 실상인 것입니다.
세상은 편히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설령 몸은 고달프고 고통이 있는 길로 인도 받는다고 해도 그 길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되고,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말씀의 길을 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최고의 복의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의 형편입니다.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와 같은 대적이 믿음의 길에 엎드린 채 신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다윗이 말하는 원수의 특성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 때문에 자녀로 만족하고, 대대로 그 유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후손에게 넘겨줘서 자자손손대대로 내 가문이 번성하기를 원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곧 원수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벗어나야 할 유혹인 것입니다.
이 유혹을 벗어나고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 신자가 끝까지 소망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쟁이에 불과한 자신을 알고 그리스도만이 희망이고, 그리스도로 만족하겠다는 그 믿음이야 말로 신자를 살리는 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그러한 믿음의 길을 가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깨어났을 때, 즉 부활했을 때 다른 것 필요 없이 오직 주와 함께 거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소망하는 기쁨은 마지막 날 의롭다는 판결과 함께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기쁨을 소원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로 하여금 의의 길로 가도록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정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6:1-11 여호와는
<본문>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찌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1)
<설교>
1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문제는 다윗의 고백에 우리가 얼마나 동감하는가? 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보호자로 믿으며 하나님께 피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신뢰와 확신으로 이 말씀을 대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분명한 확신과 신뢰로 이 말씀을 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해오던 지금까지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험을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입니다’라는 말도 수없이 하지만 결과는 항상 그대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라는 의심과 갈등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막연한 기대감에 의한 것일 뿐 확고한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얼마 전에 ‘빈자의 성녀’라고 불리던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썼던 편지가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평소 자신의 심경을 신부들에게 편지로 써 보냈던 40여 편을 책으로 만든 것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갈등의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침묵과 공허가 너무 급니다. 나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할 동안 혀를 움직이려고 해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본문의 다윗의 고백보다는 테레사 수녀의 갈등과 고백이 더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테레사 수녀는 이런 갈등의 편지를 신부에게 보냈으면서도, 그해 노르웨이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빈자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고백이 세상이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신부에게 보낸 갈등의 편지는 자기 신앙에 대해 갈등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갈등을 했다는 것 때문에 그 신앙에 대해 뭐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성을 두고 갈등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평생토록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서 우리가 보지 못한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들을 수없이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런 현장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들을 이렇게 버려두고 계시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그렇게 참혹한 상태에 살게 하시는 분명한 뜻과 이유를 알고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갈등과 의심과 혼란이 있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아무런 갈등이 없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보이는 현실에 매어 살 수 밖에 없는 한계의 인간이 눈에 보이는 세상 현실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 없이 확고하게 믿는다는 것은 거의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다윗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도 그런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3:1,2절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는 내용에서도 다윗의 갈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 인해 갈등한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갈등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의심이 있고 갈등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 마음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를 안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 백성을 버려두고 계셨던 것도 아니라 다만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고 고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형편과 환경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대적이 물러간 것도 아니고 여전히 위기 상황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다면 다윗은 육신적인 문제와 형편이 나아지고 해결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 피하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을 우리의 육신적인 문제를 벗어나고 하나님께 맡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그러한 고백을 하는 이유와 뜻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성경을 보면서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이점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내 형편과 사정에 무작정 끌어 당겨서 소위 적용이라는 것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의 신앙의 방향과 그 모습들이 성경의 말씀과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이 주께 피한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셔서 위기 상황이 물러가고 편안하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의미로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본문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10,11절을 보면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두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니 하나님은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시는 분이고 주께 생명의 길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유일한 해결책인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위기 상황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을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만 남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 피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2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고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복은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여호와가 복이라면 하나님께 복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이신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써 이미 복이 함께 하고 있는데 복을 달라고 한다면 여호와가 복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인데 하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이 뭔가? 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원하는 땅의 것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지도 않는 것에 집착함으로써 여호와가 복이라는 말의 기쁨과 즐거움까지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바라본다면 여호와가 생명이시고 구원이시고 때문에 여호와만이 복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10절에서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신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은 죽으면 천국 간다는 것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다시 부활할 것까지 소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행 2:29-32절에서는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소망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하는 것도 우상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자로서 생명의 능력이 없는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린다는 것을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능력이 없고, 구원의 능력도 되지 못하는 땅의 것을 그토록 소망하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8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가시고 마귀의 어떤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지키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굳게 붙들고 요동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5,6절의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는 내용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곧 신자에게 소득이 되시고 산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늘에 소망을 두는 신자라면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진 하늘의 넘치는 복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야 말로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소득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목자 되신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신자는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살아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복은 그리스도입니다. 산업도 소득도 그리스도입니다. 분깃도 역시 하늘에 있습니다. 놀라운 이 복을 놓치지 마시고 그리스도 앞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5:1-5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본문>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시편 15:1-5)
<설교>
본문은 다윗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1절)라는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막은 알다시피 성막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와서 제사함으로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이스라엘로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산은 이 성막이 세워져 있는 시온 산을 말합니다. 이 성산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장막과 성산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따라서 장막에 유할 자나 성산에 거할 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자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자가 누구입니까? 라는 것이 1절의 내용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곧 거룩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 죄가 깨끗하게 되고 거룩함을 입지 않고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질문을 바꾸어 말하자면 ‘누가 거룩한 자입니까?’ ‘누가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까?’라는 물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2-5절)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말은 이렇게 하면 거룩한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어떤 방법이나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다. 즉 사람은 무엇으로도 자신을 거룩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슨 의미로 그러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까? 15편의 내용은 14편의 내용과 비교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14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부패하고 가증한 행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들은 떡 먹듯이 여호와의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망령된 행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망령된 행실로 인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옥에 갈 자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나올 것은 선이 아니라 망령된 행실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망령된 행실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의 특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15편에서 말하고 있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함을 입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들의 특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의 부패한 행실은 이웃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힘없는 약자라는 것만 바라본 채 약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잊어버리고 압제함으로써 그들의 부패함과 가증한 행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 역시 이웃 관계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음에 진실을 말하고, 혀로 남을 비방하지 않고, 벗에게 행악하지 않고, 이웃을 헐뜯지 않고,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고, 약속한 것은 손해가 되어서 지키고, 돈을 빌려주고도 이자를 받지 않고,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다윗이 말하는 이웃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이 모습들은 구원 받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윗이 제시하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으로 오늘 우리들을 비춰 보십시다. 과연 우리에게서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양심껏 살고 타인으로부터 착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망령된 행실로 가득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하는 모습들 하나하나는 사실 우리들의 부패함과 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시 14: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이 곧 나 자신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고, 착한 척하지만 결국 선을 행하지 않고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더러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말은 우리의 더러움을 보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 14:7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온에서 나오는 구원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시온에서 나오는 구원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죽는 희생 제물로 인한 구원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절감하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은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웃에 대해 정직과 진실함으로 대했으며 이웃을 참소하지 않고 오히려 이웃의 허물을 위해 희생하는 길을 가셨으며, 죽는 길도 피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이 장막에 유할 거룩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그러한 사랑을 나눔 받음으로써 하늘의 무한한 복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패하고 악한 것 밖에 없는 우리를 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는 자리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신자라면 그에게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옳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신자의 마음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마음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 증거가 다윗이 말한 본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은혜가 신자로 하여금 다윗이 말하고 있는 이웃관계로 인도해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이 내용 앞에서 내가 부패하고 가능한 자임을 깨닫게 될 때,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 가를 절감하게 되고, 그리고 그 은혜가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이 나를 대하신 것과 같은 모습으로 이웃을 대하도록 만들어 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세상 일이 너무 바쁘고, 돈 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성경이라도 보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라도 되는데 성경조차도 외면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볼 기회를 다 놓치고 살아가버립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의 은혜의 깊음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아무리 결심한다고 해도 내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예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로 이웃을 대하게 되는 것인데, 정작 내게 예수님의 은혜의 깊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옛 본성 그대로 이웃을 대하면서 무시하기도 하고 업신여기기도 하고 비방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깊음을 누리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은혜의 깊음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패하고 가증한 자신의 본래의 자리에서 시온에서 나오는 구원을 바라볼 때, 즉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깨달은 그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몸을 연약한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우리를 위해 그 몸을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를 하늘의 부요로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으로 부요하게 된 그 부요함에 이웃이 참여하도록 힘써야합니다. 그처럼 이웃을 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힘써야 하는 관계에서 이웃을 참소하고 비방하고 거짓말로 이웃을 해치는 모습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은 자로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새로운 질서가 다윗이 말한 본문의 내용이고, 그것이 곧 주님과 함께 거하는 거룩한 자의 특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안하면 지옥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아가는 신자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1-7 세상의 형편
<본문>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편 14:1-7)
<설교>
세상은 세상의 형편을 단지 경제와 정치,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에서 판단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어지러우면 세상이 엉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문란하면 말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심각성을 두지 않습니다. 또 세상으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세상이 경제와 정치, 도덕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형편을 판단하는 것은 그 모두가 인간의 삶의 질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합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는 필히 국가의 경제가 좋아야 하고, 국가의 경제는 또한 정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해도 사회적 분위기가 문란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의 실천까지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안다고 해도 모른다고 해도 인간의 삶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산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자로 산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삶의 질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가 자신의 삶의 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비록 신자라고는 해도 그런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도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형편이며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문제가 세상에서의 삶의 질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내세의 문제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들만이 생명의 나라에 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면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결국 내세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내세의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종교일 뿐이고 형식만 신자로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지혜로운 것입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있다’라고 하지 없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입니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이 없다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뜻대로 살아갈 자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갈 자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인간에게는 자기 욕망이나 자기 계획 등이 불필요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의 계획을 갖게 됩니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위해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찾으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형편은 이렇습니다. 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 치우쳐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삶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을 세상이 순순히 인정 할까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볼 때 선을 행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보는 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선이 아니라 단지 인간관계에서의 선을 얘기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인간관계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의 바른 모습을 선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는 것은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마음에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증거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죄로 가득 하다는 것도 살인과 도둑질 사기 등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가득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세상에 선을 행하는 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더러운 자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들로만 살아가는 세상이며 바로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죄로 가득한 세상 안에서 세상 것을 가지고 경쟁한다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제 아무리 세상의 것을 소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죄인이며 망할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강자 약자라는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의 형편에서 신자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절을 보면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라는 말은 죄악을 행하는 자 가운데도 무지하지 않는 자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무지한 자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를 일컫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여호와만 의지할 수밖에 없고 여호와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자들을 힘 있는 자들이 괴롭히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힘으로 여기며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이며 무지의 증거가 바로 약자를 떡 먹듯이 먹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지한 그들은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형편이 어떠한지 보지 못하고 그래서 여호와를 부를 필요도 느끼지를 못하고 살아갑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여호와를 부른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심판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죄악을 행하는 자로 살아가지만 무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 때의 사람들의 무지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세상의 형편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항상 악한 것으로 인해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정작 노아 시대 때의 사람들은 그러한 형편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노아를 건질 것은 방주 밖에 없는 것처럼, 죄악으로 행했던 자를 심판에서 건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죄악 가운데 행하며 세상의 형편을 보고 사는 신자라면 여호와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약자를 억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었던 무지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없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없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살아가지만 심판의 때가 되면 그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의인의 세대에 계십니다.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구함으로써 의인으로 여김 받는 세대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6,7절도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를 구하는 약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것도 시온에 있는 언약궤로부터 하나님의 인자와 구원이 나오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세상의 형편을 보십시오. 그리고 죄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이 왜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인자와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행해야 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죄악을 행하며 삽니다. 그렇다고 다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의 실상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신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3:1-6 울다가 웃는다
<분문>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편 13;1-6)
<설교>
사도 바울이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 환난을 겪는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환난이 사라지고 좋은 일이 주어지면 모를까 환난이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내놓은 방법 중에 하나가 긍정적 사고방식입니다. 소극적이고 비관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와 마음 자세, 즉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오히려 환난에서 더 낙심하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정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난 할 수 있다’ ‘난 행복해질 수 있다’ ‘난 환난을 이길 수 있다’와 같은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환난에 대한 생각과 환난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치고 바꾸는 것이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기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하지만, 이것이 곧 신앙과 상관없는 단지 심리학에 불과한 세상의 삶의 철학일 뿐입니다. 이처럼 신앙과 상관없는 내용들이 오히려 신앙적인 내용으로 뒤바껴서 많은 교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에 관심이 없이 다만 교인들의 심리적 안정을 꾀하고자 하는 현대 교회의 실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부정적인 사고를 비신앙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신앙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자기 최면의 일종일 뿐입니다. ‘난 할 수 있다’와 같은 자기 암시를 함으로써 실제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긍정적인 사고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분명 도움이 되고 유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화가 물이 반쯤 찬 컵 얘기입니다. ‘컵에 물이 반 밖에 안남았네’라는 것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이고,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는 것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사고로 물을 마시든 긍정적인 사고로 물을 마시든 결과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물을 다 마시면 컵에서 물이 없어지는 것은 어떤 사고로 마시든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컵에 남은 물을 바라보는 심리적인 면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심리적인 느낌일 뿐이지 긍정적인 사고로 마신다고 해서 더 많은 물이 남은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도 못마땅하게 들릴 것입니다. 왜 자꾸 죄인이라는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부정적인 사고보다는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적인 생각이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이 세상만 바라보고 있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비성경적인 말인 것입니다.
사도의 말처럼 환난 중에 기뻐하는 것은, 생각을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환난도 하나님이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단지 고통을 주기 위해 환난이 있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폭적으로 자신을 맡기게 될 때 환난 중에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불평을 그대로 내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나를 잊으셨는가?’ ‘여호와께서 나로부터 숨어 버리셨는가?’라는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긍정적 사고로 본다면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은 찬양과 감사와 경배로 끝납니다. 울다가 웃는 것입니다. 즉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평과 의심으로 시작한 다윗이 경배와 찬양으로 끝나게 된 이유가 과연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일까요?
3,4절을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환난으로 인해 요동함으로써 원수가 기뻐하며 자신을 대적하여 이겼다고 할까 두렵다고 합니다. 다윗의 이런 말을 보면 긍정적인 사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이 세상이 좋아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환난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환난을 하나님의 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환난에서 벗어나든 계속 환난에 머물러 있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 머물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설사 죽음으로 이끄신다고 해도 순종하는 것이 곧 환난에서 기쁘게 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5,6절에서 다윗은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는 찬양과 경배로 마칩니다.
다윗은 큰 고통 중에서 하나님이 그를 잊으신 것처럼 캄캄하고 암담한 상황을 겪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성소로부터 멀리 떠나 도망을 치는 신세고, 심지어 이방 땅에까지 피신해 있고 그리고 원수들은 말하기를 ‘그는 여호와의 땅으로부터 떠났도다.’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왕국을 세우시기를 기뻐하셨는데 다윗은 왕의 위에 앉기도 전에 쫓겨나서 이방 땅에 유리하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참으로 사망의 잠을 자는 것처럼 괴롭고 그리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그 일로 노래하게 될 것이니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고 노래합니다. 즉 다윗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시고 자신에게서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은 암담함을 경험하였지만,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특별히 대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는 고백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한 곳 하나 다윗이 생각을 바꿨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환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을 뿐입니다.
자신을 후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또한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고 의뢰하였을 때 결국 환난은 주의 구원으로 끝날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환난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자신의 처지가 환난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고, 자신은 여호와로부터 후대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설사 죽는 길이라고 해도 실패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나는 죽는다고 해도 여호와의 일은 이루어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죽는 길로 간다고 해도 그 길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있고 또한 나를 후대하시는 것도 변함이 없음을 믿는다면 이런 믿음이야 말로 환난 중에서 기뻐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을 주의 인자가 인도하셨던 것처럼,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도 주의 인자로 인도하십니다. 주의 인자가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시겠습니까? 주의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기보다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분명하고 확고한 것은 주의 인자로 인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생자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정작 영원히 죽어야 할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신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형편과 어려움에서도 요동하고 의심하기보다는 기쁨과 찬양과 경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최고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써 증거된 인자하심과 긍휼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형편으로 인도된다고 해도 기쁘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실의 고난에서 벗어나고 형통하기 위해서 기질과 성격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자기 의지와 노력을 동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떤 환난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하고 믿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환난 중에서도 주의 구원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고난 중에 울다가 웃는 사람입니다.
시편 12:1-8 안전지대
<본문>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찌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시편 12:1-8)
<설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절대로 정상적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눈에 세상이 정상적으로 보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여겨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처에 살인과 강도, 사기가 성행한다고 해서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세상이 정상적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나타나는 흔적들이지 그것을 가지고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살인, 강도 등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을 정상으로 여겨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정상적인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이 과연 그렇습니까? 온 세상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영화를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도 모두가 자기 영화를 위해 부르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 대해 탄식이 없다면 우리 역시 정상적이지 않은 세상이 가는 길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정상적이지 않은 세상으로 인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고 말합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가 없어진다면 그것은 세상이 경건하고 충실한 자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8절에서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세상 현실이 경건한 자보다는 악인이 횡행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들이 거하는 가나안 땅 자체가 은혜의 땅입니다. 그 은혜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절)는 말처럼 이웃에게 악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정상적인 이웃 관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도록 권고해야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충실한 신자로서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경건하고 충실한 자는 점차 끊어지고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두 마음으로 아첨하는 사람들로 횡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에 있어서 다스림 받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혀로 이길찌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4절)고 말씀하는 것처럼 자기의 욕망을 따라 자기를 자랑하며 이웃에게 거짓과 아첨의 말을 내 뱉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3절에서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언급하는 것처럼 그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끊어질 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다윗이 보고 있는 세상의 형편은 악인이 횡행하면서 경건하고 충실한 자가 끊어지고 이웃에 대해서는 거짓과 아첨의 말을 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아첨하는 입술과 혀를 끊어버리시는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경건하고 충실한 자가 억압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한탄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일이 속히 이 세상에 시행되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는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일어서시는 분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가련하고 궁핍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탄식을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세상 현실은 악인이 횡행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운명은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어서실 때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진노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이며 이 세계가 곧 5절에서 말하는 안전지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단련한 은처럼 순결합니다. 이처럼 순결한 말씀이기에 절대로 헛됨이나 거짓이 없이 말씀한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세상의 현재를 모조리 엎으시고 새로운 말씀의 세계를 세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현실은 말씀의 세계이지 결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악인에 대해 호소하는 것은 악인들을 속히 심판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가 속히 임하기를 소원하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든 본문처럼 다윗이 악인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원수에 대해 말하는 내용들은 그대로 자신에게 끌어 붙이면 안됩니다. 다윗이 원수에 대한 심판을 말한다고 해서 나 또한 개인적 감정이 있는 누군가에 대해 하나님께 심판을 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의 무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탄식의 시편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의 시편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악인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고 신실한 백성들만 썩지 않고 영원한 기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을 지켜주는 것은 돈도 아니고 여러분 자신도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도 자신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만이 우리에게 보증이 되고 안전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말씀의 관계에서 가난하나 가난한 자가 아니고, 약하나 약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썩지 않고 영원한 기업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랑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거나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신자가 만약 그리스도 안의 부요함을 자랑하지를 못한다면 세상의 썩어질 질서로 자신을 해석하게 될 뿐입니다. 그럴 때 세상의 것으로 낙심하게 되고 사망의 열매를 맺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떠난 것처럼 되어 있어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크게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가 원수 되고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바 되었는데 성령은 친히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주신 아들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환란 중에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즐거워한다고 그렇게 롬5장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편을 읽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에 좋은 것들이 아무리 차고 넘친다고 해도 하나님이 일어서시면 모든 것은 다 소멸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만큼은 안전합니다.
마치 애굽의 장자 재앙이 있던 날, 죽음의 천사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힘이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온 우주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맡길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신다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안전한 곳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시편 11:1-7 의인이 무엇을 할꼬
<본문>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1-7)
<설교>
시편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고백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다윗이 ‘여호와께 피하였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이 신자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한편으로 이 말처럼 공허한 말이 없습니다.
사실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호와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의한 고백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 피한 상태에서 피난처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기대감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기에 막연한 것이고, 공허한 것이고, 종교적인 말로 그칠 뿐인 것입니다.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1절)라고 말하는 것은, 여호와가 피난처가 되어주기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호와께 피한 상태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다윗의 이 말은 여러분은 얼마나 실감 있게 받아들이십니까? 아니 다윗의 그 말에 얼마나 깊이 공감하십니다. 생각으로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에 삶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으려면, 필히 여러분이 다윗처럼 여호와께 피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피난처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호와께 피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여호와께 피하고자 하면 난감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고 사실이지 않습니까?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께 피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전쟁이 났을 때 중앙동 지하도로 피하라고 하면 쉽습니다. 중앙동 지하도가 어딘지 알아서 그곳으로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앙동 지하도처럼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장소와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분도 아닙니다. 결국 내가 달려가서 피할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난처’라는 말은 단지 신자들의 기대감을 갖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지 실제 다윗처럼 하나님께 피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한 피난처는 홍수가 났을 때 임시로 대피하는 대피소와 같은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위험한 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서의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원수에게 쫓기고 있을 때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윗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피했는데 왜 나에게 새가 산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도망치라고 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호와께 피한 자로서 또 다시 산으로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자연히 원수의 손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산으로 도망하여 숨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여호와께 피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서 천군천사를 보내서 다윗을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원수는 계속 다윗을 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생각합니까? 나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는 힘있는 사람이 있는가부터 생각하지 않습니까? 친구나 친척, 아니면 친구의 친구까지라도 찾아서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우리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미련하고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생각하면 믿음은 세상의 시각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고, 내가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으로 믿음을 말하기가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2,3절을 보면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다윗의 상황은 원수가 몰래 숨어서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활을 당기고 있는 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속히 산으로 도망하여 숨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말을 하면서 도망치지를 않습니다. ‘터가 무너지면’이라는 말은 다윗이 여호와께로 피했는데 만일 여호와께로 피한 자가 악인에 의해 죽는다면 그것이 곧 터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로 피한 것을 터 위에 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악인에 의해 죽는다면 그것은 곧 다윗이 서 있는 터가 악인의 활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터가 무너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여호와께로 피했다는 것을 자신이 서 있는 터를 굳게 믿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터를 여호와라고 해 버리면 너무 막연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4,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이 구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말하고, 또 다시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이든 보좌든 동일한 것은 여호와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성전에도 계시고 하늘에도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셔서 하시는 일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써 그들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희생의 피를 들고 성전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악까지 감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늘 보좌의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는 것은 악인이 결코 의인을 해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인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계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인자와 자비로써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는 의인이 악인에 의해 해를 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믿는 것이 다윗의 믿음이었고, 이것이 다윗이 여호와께 피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말한 터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 긍휼이었습니다. 이 터 위에서 의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노래하고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의 터 위에 굳게 세우시고 그 어떤 악으로부터도 해를 받지 않게 하시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6,7절에서 말한 것처럼 악인의 소득은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루실 이 일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믿음에 있는 다윗이 악인을 두려할 수 없지 않습니까? 혹 악인의 손에 의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악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의 악인의 세력에 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그 일을 믿는다는 것이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으니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서 있어야 할 터는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셔서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을 기어코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해 내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하심, 인자하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고 생명의 나라에 집어넣으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 피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의지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심은 그 무엇에도 무너질 수 없는 견고한 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육신이 사는 것에 마음을 둠으로 인해서 육신에 유익이 되는 방법과 길을 택하게 될 때 스스로 견고한 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돼 버립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노래하고 높일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괴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보게 하심으로써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의인으로 터 위에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믿고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입니다. 이 터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의 방법과 힘을 동원해서라도 육신의 도움을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비록 육신은 고달프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힘있게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0:1-18 없는 것 같은 하나님
<본문>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18)
<설교>
신자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긴 하지만 그 믿음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치 이 세상에 안계신 것처럼 침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세상을 둘러봐도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신다는 것을 자신 있게 증거할 증거물들이 없습니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세상에 먹혀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오고 비가 오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여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실패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더욱 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만 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기 백성이 어려움을 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때로 신자들에게도 혼란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는 탄식을 합니다.
지금 시편 저자는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처럼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난에 처한 입장에서 그 답답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저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탄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난을 보고 악한 자들이 조롱을 하는 것에 대해 탄식을 합니다.
4절을 보면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데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심으로 인해서 악한 자들이 여호와가 자기 백성도 살피지 않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없다’라며 조롱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오늘날도 하나님이 없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사상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을 받기 위해 신을 찾습니다. 이런 사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연히 자기 백성을 돕는 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은 인간의 인생이 아니라 그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기도하는데도 여전히 그 환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할 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의함이 성행하는 것 까지도 신의 부재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인데, 선한 분이 악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악이 성행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이런 조롱에 대해 명확한 증거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으로 많은 신자들이 답답함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하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시각과 욕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도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마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일이 날마다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과 욕심을 벗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11-14절을 보면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고 말합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부디 그 모습을 나타내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저 악한 무리들을 심판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함을 주께서 다 보고 계시며 그 모든 악함에 대해 주가 직접 갚으실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에 있고, 하나님은 숨어 계신 것처럼 가만히 계시고, 세상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자기 백성을 돌보지 않으신다고 조롱 하는 자들을 두고 보시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서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잘 해결되고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지만, 시편 저자는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일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 악한 자들에 대해 승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결국 어떤 길로 가게 될 것인가를 바라보며 탄식하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악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처한 현실입니다. 세상은 악에 대해 어떤 심판도 행하지 않는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이 없다’며 조롱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악이 드러남으로써 심판하실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15,16절에서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는 말에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라는 말의 의미도 악한 자들의 악이 하나도 남김없이 드러나도록 하시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시편 저자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은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가 다 드러나도록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에 두시고, 그 백성들이 세상의 악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조롱을 받는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감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가만히 계시는 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악과 완악함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악에 대해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모든 악을 드러내셔서 하나님의 때, 마지막 때에 모든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 세상의 시각으로는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이 보일 리가 만무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신자만큼은 하나님에 대해 바른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가만 두고 보시는지,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왜 가만히 계시는지 그 이류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의 어려움에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당장 눈앞의 부와 권세에 미혹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으로 나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악 간에 심판하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현실로 인해서 조급해서도 안됩니다.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어질 것을 믿고 그 날을 기다리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인내입니다. 무작정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대로 성취될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인내가 신자에게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때를 믿는 믿음으로만 세상에서 숨어 계시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치 못하게 하시리이다”고 말합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하는데 겸손한 자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의 팔을 꺾으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들으셨다는 것은 지금 당장 악한 자를 심판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어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미리 내다보고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그 때를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시편 9:1-20 기쁨은 주께 있다
<본문>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아니하시도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 (셀라) (시편 9:1-20)
<설교>
신자에게 있어서 기쁨과 감사는 누구나 누리고 싶어 하는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즉 기쁨과 감사가 있는 삶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쁨과 감사가 있다는 것은 기뻐하고 감사할 좋은 일이 주어졌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것보다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살전 5:18절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크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감사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의미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곧 신앙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쁜 일이 있다고 해도 감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기쁨이 없는 억지로 감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본문 1,2절의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찬송을 드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감사는 오늘날 우리와 동일할까요? 다를까요? 3절부터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는데, 다윗은 여호와의 행하신 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쁨이 될 만한 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일단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감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내게 기억될 만한 좋은 일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감사는 믿음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적 반응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생각해야 할 것은 좋은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내게 좋은 일이 있는가 없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감사와 일치하는 참된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항상 선을 이루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는 신자에게 나쁜 일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가 ‘나의 영혼을 잘되게 하는 일인가?’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내 육신에 유익이 되는 일인가?’라는 기준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좋은 일 나쁜 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조건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나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에서도 감사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감사가 다윗의 감사와 전혀 달랐다면, 그것은 내게 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은 대적으로부터 쫓기면서 원수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위협과 고난의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럴 수가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자신의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불안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긍휼과 자비로 함께 하시는 분임을 안다면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믿음에 의해서 기쁨과 감사의 찬송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윗의 기쁨은 주께 있었습니다. 즉 땅의 것들이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아니라 주가 감사와 기쁨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주가 다윗과 함께 하시는 날까지 다윗의 감사는 어떤 일에도 방해받지 않고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땅으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결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살아오시면서 기뻐하고 감사할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감사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 역시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께 감사와 기쁨을 둔다면 내 형편과 상관없이 결코 시들어지지 않는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을 향한 주의 일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의 일을 제대로 경험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껏 기대하는 것이 육신의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주의 일은 전혀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주께 감사와 기쁨을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이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는 사단의 유혹이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여전히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벗어버리지는 못하였지만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으려고 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으려고 하고 위엣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며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고 믿고 있는 것이야 말로 주의 일이 계속되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욕심을 두고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죄인 됨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9,10절을 보면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고 노래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날마다 천국보다는 세상에 소망을 두게 하는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산성이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악한 세력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지키심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기쁨과 감사의 노래는 여호와가 누구시며 여호와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함으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라’는 강요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감사를 헌금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사기일 뿐입니다. 교회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된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연히 기쁨과 감사의 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도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자가 음부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지 않은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이며,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살피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러한 일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8절을 보면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즉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음부로 돌아가는 악인이 될지언정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아둔 부자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궁핍하고 가난해도 하나님께 잊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영영히 실망하지 않는 구원의 길을 가고 싶은가?’ 여러분은 과연 어떤 길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잊어버림을 당하지 않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고 그러한 인생으로 머무르기를 소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날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긍휼의 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기쁨과 감사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시편 8:1-9 아름다운 주의 이름
<본문>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 8:1-9)
<설교>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관심이 없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사에 곡을 붙여서 노래로 부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찬양이 단순한 노래가 아님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 관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찬양은 기쁨과 감사를 의미합니다. 찬양을 함으로써 기쁨을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쁨이 있기에 찬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소위 열정적인 찬양을 함으로써 신앙의 기쁨을 체험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의 참 기쁨은 오직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은혜로 소생되어 내 마음이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지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뻐하심에 신자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앎으로서 누리는 참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이러한 참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과 자비하심을 발견하고 찬양을 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고 노래하는데,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노래가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여 나타내십니다. 즉 하나님은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하심들을 노래하며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는 것은, 주의 영광이 참으로 높고 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참으로 높으신 영광으로 노래하고 있는 이 영광은 어떤 것입니다. 이 영광이 곧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이고, 이 아름다움 즉 주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함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처럼 온 세상에 가득한 주의 영광, 아름다움은 어떤 것입니까?
다윗이 노래하는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 곧 주의 영광은 2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는 이 구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온 땅에 가득한 주의 영광인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주의 영광은 한마디로 말해서 약한 자를 세워서 강한 자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란 구약에서는 사람의 수로 계수되지도 않을 정도로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약한 존재를 세워서 주의 대적을 잠잠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세우신 것입니다.
마 21:16절을 보면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본문 2절의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처럼 힘없고 쓸모없고 볼품없는 자에게 권능을 입히시고 승리하게 하신 주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아름답다고 하는 주의 영광, 즉 주의 행하심은 어린애 같은 약한 자를 세워서 대적을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자신을 존귀하게 하신 일을 뜻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5절에 보면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달과 별보다도 못한 사람에 무엇이라도 그토록 생각해주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런 나를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크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자기 인생을 만들려고 기를 쓰고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 이웃과 경쟁하고 나보다 조금 낫다 싶으면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온통 자신의 욕망만 담고 있는 이런 인간이 과연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움 받을만할까요?
신자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려면 필히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으며 오히려 저주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면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진다면 나를 가난하게 살게 하셔도 괜찮고, 병들게 하시고 고생하게 하셔도 괜찮고, 어려움과 고통에 있게 하셔도 괜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보다 더한 고통과 저주에 빠져도 마땅한 존재인데 그런 나를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하신 은총과 사랑이 너무 큰 감사로 다가왔기 때문에 현재의 어떤 고통도 낙심으로 이끌어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찬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6-8절의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어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는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발 아래 주신 것입니다. 즉 똑같은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두신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영화와 존귀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그 형상으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다스림 아래 두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영광에 눈을 돌립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게 되고, 결국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구축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이 무엇이라고 여전히 영광과 존귀의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까지 희생하게 하십니다. 이제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알에 굴복해야 합니다. 이들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여전히 자기 영광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굴복하지 않는 모든 자들의 영원한 저주의 자식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신자로써 안타까운 것은 신자에게 입혀진 하늘의 존귀와 영광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썩어질 것에 불과한 세상 것에 목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으로 감사하며 주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7:1-17 나의 방패
<본문>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7:1-17)
<설교>
주일 대예배 때에 하는 대표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기도가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수식어가 한두 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힘이 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밝히 보이시며, 우리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등등 기도의 전반부가 전부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일색입니다.
물론 기도에 이런 수식어를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라는 말을 하고,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라는 말을 하고, 지금 수중에 있는 것으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등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가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즉 자신의 삶에서 만나고 알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기도문을 그대로 판박이 식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미사어구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기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도 하나님을 부를 때 수많은 수식어를 동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8:1-3절을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고 무려 아홉 가지의 수식어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식어는 시편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들어왔던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들을 그냥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전 생애의 체험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한 치의 과장 없이 묻어 나온 시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본문 10절에서도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임을 말합니다. 이 역시 다윗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 되심을 체험했기에 하는 생생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절의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자신을 쫓는 대적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줄 방패는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곧 자신의 방패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평안하다.’고 외치며 아무런 일이 없이 살아가면서 단지 말로만 ‘나의 방패는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3-5절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겪고 있는 고난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억울한 고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이 다윗처럼 억울하게 고난을 겪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께 할 말이 많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할 말이 많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겪는 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두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다윗처럼 나의 방패는 여호와께 있다는 고백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억울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아는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고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6-9절에서 대적을 심판해주시고 그들의 악을 끊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다윗은 뭐냐?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도 죄인이고 악한 자인데 자신을 위해 대적들을 심판해 달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8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분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오직 의와 성실함을 따라 판단하시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의와 성실함을 보시고 의인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속에 의와 성실함이 없는 자는 악인으로 판단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데는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하고 누군가를 높이는 현대 교회의 모습들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와 성실함은 무엇일까요? 12절의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죄에 대해 회개하는 심령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로우신 것이고 성실한 마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의로운 심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자신의 모든 공로와 의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로 여겼던 모든 행위가 악한 것일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인된 인간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정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이 곧 자신의 방패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리움이 없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정직은 죄에 대해 애통해하고 회개함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15절에서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악인은 죄악을 해산할 뿐입니다.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다고 하는데, 궤휼이 속이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악인이 낳는 것은 속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이 낳은 궤휼이 과연 무엇일까요? 악인이 속이는 것은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인간의 의를 개입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를 기준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윗은 악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마음 놓고 다윗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게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의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를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직함입니다. 신자는 이 믿음 안에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윗처럼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방패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칼을 갈고 계시고 심판을 예비해 놓으셨지만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는 구원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시편 6:1-10 신자는 고아가 아니다
<본문>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1-10)
<설교>
세상은 죄의 질과 양에 따라 죄를 달리 봅니다.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의 수위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무거운 죄, 가벼운 죄가 없습니다. 비록 행동에는 차이가 있지만 인간에게 자리하고 있는 죄의 본질은 결코 다르거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죄가 사람에 따라 그 질과 양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인간의 본성인 탐심 역시 사람에 따라 그 질과 양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장난감을 탐내는 것과, 어른들이 돈을 탐내고 남을 속이고 부정을 저지르는 탐심이 다를까요?
행동을 기준으로 보게 되면 아이들의 탐심은 어른들과 다르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한 탐심이 아이가 커가면서 함께 자라가는 것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탐내는 것이고, 어른은 어른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결국 탐심은 동일한데 각기 자신의 세계에서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는 죄의 질과 그 양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신자는 불신자보다 죄의 행위가 덜해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종교인에 대한 생각일 뿐 하나님은 신자를 그런 원칙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혼이 떨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뼈와 영혼이 떨리다는 말을 하고 있고,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고 고백하는 말을 보면, 다윗이 죄에 대해 얼마나 애통해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다윗과 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윗의 회개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 싶어 하는 다윗의 간절한 소원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의 회개를 단지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있다면 왜 죄에 대해 애통하게 됩니까? 신자로서 죄에 대해 애통함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 단지 회개를 위한 것이라면 그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문제에서 죄를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죄로 인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죽음의 상태입니다. 단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영원한 사망이 죄로 인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회개하고 회개하기 위해서 애통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애통해 하는 것은 나의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것이 곧 영원한 사망에 머물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자기 죄에 대해 그 질과 양을 따라 경중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가벼운 죄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산다’라고 생각하면서 합리화하고 가볍게 지나쳐 버립니다. 설령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양심의 반응일 뿐입니다.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양심이 반응하여 후회와 자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불신자는 그 어떤 죄를 두고도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망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행위로 죄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하지 않고 자기 속의 죄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였음을 보게 되고 죄의 무거움을 깨달으며 애통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회개는 하되 애통은 없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고 우는 애통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뼈와 영혼이 떨리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벌을 면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회복을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애통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짐을 뜻하기 때문에 은총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아는 신자라면 죄에 대해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회개는 도덕적 죄책감이나 종교적인 의무감,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상실이나 징계에 대한 염려 등이 회개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부모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이 경우 자식이 용서를 구하고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단지 자식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식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식의 잘못으로 인해 부모 자식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함으로써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반성을 합니다. 하지만 고아들은 반성을 해도 그 반성을 받아줄 대상이 없습니다. 고아원 원장이 반성을 받아준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아이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방법적 차원일 뿐이지 부모 자식의 관계회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해 보자면 불신자가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자신을 용서를 받아줄 대상이 없는 단순한 자기 양심에 의한 반성으로 그치는 것이라면, 신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부모와의 관계 회복을 소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소원하는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은 5절의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이 내용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음부에 가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는 곳에는 결코 가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음부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음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은 음부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에 머물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회개에는 죄에 대한 용서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거룩한 교제를 소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회개는 분명 십자가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죄에 대한 용서, 심판에서의 구출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에게 화목의 손길을 내미시고 거룩한 교제를 다시 이루고자 하시는 초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단절된 교제의 회복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아직도 고아원에 있는 고아로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벌 받지 않으려고 회개하고, 상 받으려고 열심을 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관계가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 없는 고아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인생의 가장 큰 목적과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기에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8-10절을 보면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회개를 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즉 회개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물리쳐주시고 형편을 바꿔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곡성과 간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확신의 고백이 무엇으로부터 나오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7절의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는 구절을 보면 다윗이 고통의 환경으로 인해 근심하고 염려했던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기도하면서 기억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의 긍휼의 관계를 믿고 의지하였기에 자신의 형편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받으신다고 말하고, 원수가 물러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기도, 자신의 회개, 자기 행위를 믿는 자가 아닙니다.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의심과 낙심이 없이 확신에 찬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회복된 긍휼의 관계에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고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시편 5:1-12 주의 길을 곧게 하소서
<본문>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시편 5:1-12)
<설교>
하나님은 사람은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여 보십니다. 그런데 구분의 원칙은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할 자로 택한 자는 의롭게 보시고, 미워할 자로 여긴 자는 악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뭔가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위로 사람의 의와 악을 구분하신다면, 세상 그 누구도 의롭다고 여김 받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악을 깨닫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것만이 생명의 길임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악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도우심을 구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롭다고 여김 받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러면 의인과 악인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3-6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죄를 기뻐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악이 주와 함께 유할 수 없고,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고,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는 분이고,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는 분이 다윗이 아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 고백을 보면서 누구를 생각합니까? 살인자를 생각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신다고 하면서 왜 그런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그냥 두고 보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벌주는 분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을 통째로 깨어 버릴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조건을 모두 갖춘 자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하지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못됩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보다도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의지하고 힘으로 여기며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써 마음이 든든해지는 오만한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힘이 빠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곧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이것부터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부터 내 뼈 속까지 파헤쳐서 그 바닥까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길을 훼방하는 사단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실체에 대해 그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7절)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노래합니다. 주의 집은 주가 거하시는 집을 뜻합니다. 구약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생명의 나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 이 집은 죄인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된 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당장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용서되고, 우리를 죄없다 선언하심으로써 주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다른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악인은 세상을 자신이 거할 집으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만 중요하고 목적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를 구할 이유도, 인자를 힘입고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세상이 집이 아니라 주의 집을 자신의 본향으로 믿습니다. 세상에서는 나그네일 뿐임을 압니다. 주의 집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소망이기에 삶의 방향은 세상이 아니라 주의 집, 즉 천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은 무한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의 집에 거할 수 없는 자신이 주의 인자하심으로 인해서 영원히 주의 집에 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를 힘입는다는 것이야 말로 말할 수 없는 복이며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원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를 힘입어서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기도하는 소원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세상에 마음을 뺏긴 자와, 주의 인자하심에 마음을 뺏긴 자의 소원은 이처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한 악한 자신을 바라봤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바라볼 때, 생명을 향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분인데 나같은 자가 주의 집에 거하기는커녕 멸망을 받을 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다가오는 것이 곧 주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모든 허물과 악을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인자하심이야 말로 유일한 희망이며, 주의 나아갈 수 있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자를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를 힘입는다고 해서 세상의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으로 기대를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죄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의 인자를 의지하는 자로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는 말을 합니다.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는 말은 주의 길로만 곧게 걸어가게 해달라는 소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소원은 주의 의의 길로만 인도받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늘 구하는 것이 육신이 편히 머무를 수 있는 조건들이 아니라 내 영혼이 영원히 주와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것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인생의 마지막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내 인생과 주께서 인도하시는 인생의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인도입니다. 주의 인도는 분명 우리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소원을 주의 인도하심에 두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만이 내게 길이 되어지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서 소원을 내뱉지 말고 십자가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면밀히 파헤쳐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진심으로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한 것처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의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의 길로만 나아갈 수 있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으로 주를 바라본다면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11,12절)는 노래처럼 다윗의 기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노래를 부르며 다윗의 감사가 있는 그가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시편 4:1-8 의의 하나님
<본문>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편 4:1-8)
<설교>
다윗이 쓴 시편의 내용들은 모두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부터 솟아나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쁨은 형통한 삶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고난과 죄악 중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결과였습니다. 말하자면 다윗은 고난과 죄의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루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시간을 내어 기도하거나 성경을 묵상해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루하루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르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교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었던 다윗의 찬송을 통해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었는가를 깨닫고 우리도 다윗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의가 되신다는 뜻의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내게는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은 대적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을 돕지 않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압살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볼 때 다윗은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모습으로 보여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면, 누구든 다윗의 왕위를 빼앗을 때 하나님이 나서서 다윗의 대적을 치고 다윗을 돕는 것이 마땅한데 왜 왕위도 빼앗기고 쫓겨 다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처지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부르는가 하면 세상이 볼 때는 하나님께 버림 받은 죄인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로운 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를 범한 다윗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뻔뻔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다윗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솔로몬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아(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로 부르게 합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솔로몬을 다윗에게 보내셨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모두가 다윗의 범죄를 욕하고 조롱해도 하나님을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시는 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갚을만한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자로 택하셨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행위와 그가 처한 형편과 처지를 기준하여 사랑을 받고 있는 자와 미움을 받고 있는 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다윗을 보기 때문에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고 왕위에서 쫓겨나 도망을 치고 있는 다윗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 버림 받아서 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 51편을 보면 다윗의 회개가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제가 죄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범죄한 자신은 주를 떠나 살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범죄한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의로우심만이 생명이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입니다. 회개의 행위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믿음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은 세상이 볼 때는 버림 받은 자의 모습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의로운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비록 내가 처한 초라한 모습과 형편을 보면서 무시한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백성이고 의롭다 여기시는 택한 존재임을 믿으면서 세상의 시각과 판단에 기죽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대적의 조롱에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한마디로 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2-5절)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영광으로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또한 다른 영광을 구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영광이 하나님이 아니라 왕위였다면 다윗이 왕궁에서 쫓겨난 상황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준 영광을 잃어버린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왕위가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이셨기 때문에 비록 쫓겨 다니는 신세라고 해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고 영광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앉혀준 왕위를 다윗의 영광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쫓겨난 다윗이 영광을 잃어버린 초라한 자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윗이 볼 때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헛되게 하고 허사를 구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대적을 향해서 너희들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잠잠해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교만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볼 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의 제사였습니다. 의의 제사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제사를 뜻합니다. 즉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온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내 힘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볼 때 대적자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이것뿐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말을 놓고 보면 결국 다윗의 말은 오늘 우리를 향한 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대적들과 같은 시각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영광을 구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곧 나의 영광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세상이 영광으로 높여주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곧 나의 힘이라는 믿음으로 삽니까? 아니면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기를 구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땅의 것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방식에 묻혀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윗의 대적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내 자신에게서 발견해야 하며, 그러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불의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진심으로 내게 필요한 것,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죄 가운데 있는 우리는 사망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르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가리고 용서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자리에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주님의 의를 구하는 그가 바로 의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민감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마음에 두시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7,8절)고 노래하는 것처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곡식과 새포도주의 풍성함보다 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자는 이러한 복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이야 말로 어떤 고난에서도 하나님만이 방패며 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주의 얼굴을 비춰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사는 것은 허사를 경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다윗처럼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평안히 자게 하시고 눕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의를 자랑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3:1-8 여호와의 구원
<본문>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시편 3:1-8)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에 대해 과연 얼마나 실감을 하며 살아가십니까?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실감하십니까?
물론 신자라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하루를 살았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살았음을 실감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고 보호해 주시 않으시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 상황이라는 것이 결국 육신의 문제가 아니던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신에게는 어려운 상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듣기 좋아라고 하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3편은 고난 중에 있던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7,8절에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자기를 구원하셨음을 말합니다.
다윗의 이 노래에서 주의할 것은 다윗은 이미 이루어진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지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7절에서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3편을 기록할 때는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왕궁에서 도망쳐 나와서 떠돌아다닐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수의 뺨을 치신 하나님을 노래하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배신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다윗을 다시 왕궁으로 들여보낸 후에 해야 순서가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여전히 도망을 치는 상황에서 원수의 뺨을 치신 여호와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가 원수의 뺨을 쳤다는 말은 다윗이 처한 상황을 개선해 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다윗이 처한 상황은 많은 대적들로 인해서 사면초가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 대적들은 다윗을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조롱합니다. 대적들에게 쫓겨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으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대적들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의 의미를 육신의 조건과 상황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돕는 결과고, 모든 일이 실패와 고통으로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버리시고 떠난 결과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대적들은 반역이 성공한 것을 하나님이 다윗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돕고 계시기 때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다르지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육신의 조건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려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 사랑, 선하심,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상황과 형편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통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소위 잘 살면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한 결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믿음에 근거를 두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처지라면 과연 이런 노래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가 나의 방패임을 바라보고 방패 되시는 여호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기대하는 노래를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방패가 되시는 여호와가 자신의 영광임을 고백합니다. 방패가 되어주기를 기대하고 나의 영광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방패요 영광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켜주시는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4,5절에서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고 노래하는 내용에서도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육신의 형편이나 상황을 초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응답하셨음을 말하지만, 다윗의 처지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부르짖음이 자신이 처한 형편을 바꾸어 달라는 것이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누워 자고 깨었다는 것은 평안의 잠을 뜻합니다. 즉 다윗은 대적이 둘러싼 상황에서도 평안의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붙드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다윗의 이러한 신앙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여호와를 방패로 말하는데, 방패라는 것은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전쟁터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무기의 일종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이처럼 군사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싸움으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압살롬이란 인간과의 싸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대적을 하나님의 대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대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다윗은 지금의 형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그 모든 대적이 깨어질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심판을 받고 다윗이 승리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천만인이 그를 치려한다고 해도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하나님을 알았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 다니게 되는 것은 사실 다윗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비록 다윗이 하나님께 징계는 받았지만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이 택하신 왕으로써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맺으신 이 관계는 인간의 실수와 허물에 의해서 파기되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실수와 허물을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관계로서 약속의 실체인 영원한 생명에 거하도록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윗의 형편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이 떠난 버림 받은 사람이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인간이 처한 환경과 형편으로 계산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대적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대적자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함께 함을 알았기에 흔들림 없이 구원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주의 복,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주의 백성에게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복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사랑과 자비하심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사단에게서 구출하신 것이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사랑이고 자비임을 안다면 신자는 실패의 자리에서도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자인 것입니다.
시편 2:1-12 아들에게 입맞추라
<본문>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편 2:1-12)
<설교>
시편 1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복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세상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은 복된 사람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어차피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서야 할 때가 이를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이지 세상이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신자는 세상의 판단과 시각에 대해 전혀 눈치 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자신을 맡기는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부끄러움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말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2편 역시 1편과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 된 것이 곧 복이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의지해서 뭔가를 얻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 손에 쥐어준 그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이지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호와를 의지하기는커녕 여호와를 대적하며 여호와의 주곤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꾀합니다. 이것을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여호와를 의지하기를 거부하는 세상은 여호와와 그리고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대적하며 그 권세에 복종하지 않고 자유코자 합니다. 즉 열방의 분노는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주관하고 붙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왕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기를 즐기는 세상에게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 있고 주관자가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러한 세상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을 원합니다. 신의 뜻대로 나의 인생을 이끌어 가고 간섭하는 신은 애당초 원하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나를 주관하고 다스리면서 신의 뜻대로 내 인생을 간섭하고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그 길을 걷게 하는 신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주관자로서 우리의 모든 인생을 간섭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있습니까? 순종은 둘째 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겉으로는 당연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내 인생을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나아가서 나에게 힘들고 고통이 있는 길로 인도해 가실 때 당연하다는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왜 이런 길로 인도하시는가?’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본다면 1-3절에서 언급하는 세상의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향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비웃으신다고 말합니다(4절).
하늘에 계신 자가 비웃는다는 것은, 세상이 주께 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습들이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는 비웃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과 열심과 실력을 동원해서 자기의 뜻을 이뤄보겠다고 설치는 모습들이야말로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우습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뜻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허사를 경영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자의 권세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뜻과 힘으로 살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비웃으시면서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6-9절)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 시온에 하나님의 아들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왕권을 가지고 세상에 세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아들에게 유업으로 주셨고, 그 나라는 땅 끝까지 이름으로써 세상 모든 나라가 아들의 권세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아들을 거절하고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처럼 깨뜨려 버리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아들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으로써 세상을 다스릴 분이라는 의미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 세상의 운명은 하나님이 세우신 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구든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철장으로 깨뜨려 버리실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세상은 ‘누가 아들에게 입맞추는가?’로 그 운명이 결정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도 우리의 왕으로 오신 아들에게 입맞추고 복종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는 자는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당하게 믿고 천국가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이 아들에게 복종하고 아들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할 인생으로 결정되었음을 알고 아들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2편의 결론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았을 때 운명은 망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 욕망을 극복하고 아들에게 입맞추고 복종하는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모든 희망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두면서 여호와가 자신을 아들에게 복종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곧 복 있는 자인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의 시편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향은 이렇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했고 마지막 그 아들을 보냈을 때도 거절하고 아들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대적했지만, 하나님은 아들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을 대적했던 죄의 권세를 영원히 끝내시고 이제는 천하 만민이 하나님께 복종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천하만국은 주님 앞에 복종하는 새로운 시대로 그의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바로 이 권세 때문에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아들에게 입맞추고 아들로 즐거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했던 세상은,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음에도 세상은 왕으로 오신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분명 아들의 손에 쥐어진 철장으로 인해서 깨뜨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의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신자는 다만 죽음을 이기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고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할 것을 권면할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왕에게 복종하는 새 백성으로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면서 아들에게 입맞추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내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면서 여호와만 의지할 뿐입니다.
시편 1:1-6 복있는 사람
<본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1-6)
<설교>
다윗은 시편을 통해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고 외치고 있는 그분과 성경에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이 일치되는가를 살필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의 분위기는 믿음을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동행의 개념보다는 종교적인 도리, 즉 믿음의 항목들을 실천하고 열심을 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적인 도리에 헌신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조건 믿을 것을 요구하지도, 종교적인 도리를 다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가령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 역시도 십자가에 죽는 길로 인도하시고 능히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하실 것임을 아는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십자가에 죽는 길로 인도받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믿음으로 산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우리를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가를 알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시편에서 고난 중에 있고,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하고 있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위로를 얻고 힘을 얻으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이 결코 고생의 길이 아니며 참된 생명의 길임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은 참 복있다.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할 때, 대개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합니까? 아마 세상적 시각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무엇인가가 주어졌을 때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공부도 잘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가정적으로도 평화로울 때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저 사람은 복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1,2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 복 있는 사람과 대비해서 등장하는 것이 악인입니다. 그리고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망한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곧 의인으로도 일컬음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결국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 즉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다운 사람을 무엇으로 기준하여 평가합니까? 그 사람의 인격과 인품, 즉 도덕과 윤리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덕과 윤리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직 복 있는 사람으로서 의인의 길에 서 있는 자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여기실 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고와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사고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착각과 오류에서 벗어나 세상을 참되고 바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참되고 바른 시각을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발견하고 인식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복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그것이 신자입니다. 하늘이 인정하는 복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세상이 인정하는 복 있는 사람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곧 하늘이 인정하지 않는 악인의 길을 소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에 동참하여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런 사람으로 고쳐 가실 것이고,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오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이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이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누가 자기의 뜻과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에 순종하였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인데 왜 이런 길을 가게 합니까?’라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로 여겨지는 있으면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세상에 예수님 외에 복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편 1편은 예수님만이 복 있는 분이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의 복에 참여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신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길로 부름 받았고 인도 받을 사람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신자라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걸어가게 하고자 하시는 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하고 그것이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복으로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무익하며 헛된 것들임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복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고 현대 교회에서도 예외 없이 복을 외치고 있지만, 한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누구도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일컬으면서 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오직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보시고 심판에서 건시지고 생명으로 인도하셨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증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우 종교적인 도리 몇 가지를 힘쓴 것을 근거 삼아 복을 달라고 아우성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의 종교적 모습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땅의 것들이 자신을 구원하고 힘 있고 생명을 누리는 자로 만들어 줄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땅의 것들로 풍족해지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땅의 것은 힘도 생명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을 공급받는 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귀한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은 우리와는 좀 더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가 있고, 그 오아시스에 심겨진 나무 한그루와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에 참여된 신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내로 인해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나무가 과실을 맺기 위한 물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푸른 잎사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냇가에 심겨져 있는가에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져 있다면 물은 시내로부터 무한히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즉 나무는 시냇가에 심겨져 있다는 것 때문에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는 것 역시 세상이 말하는 만사형통의 의미가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형통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합니다(4절). 바람에 나는 겨는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를 뜻합니다. 스스로는 열매가 있다고 자랑하고 그 열매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열매를 열매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내로부터 공급되는 물로 인해 맺어진 열매가 아니라 나무가 스스로 맺은 열매, 즉 육의 열매이기에 열매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는 바람에 날려갈 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 있는 사람의 복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복에 참여된 자로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곧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님의 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이 바라는 복의 모습은 예수님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악인의 길에 서지 않으신 분이었고,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한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복임을 믿으신다면 여러분 또한 그 복에 참여된 자로서 그러한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오직 예수님만 원하고 말씀만을 원할 뿐입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열매를 맺고 마르지 않는 심령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이 복의 길임을 믿으신다면, 현재의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불평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가신 길에 참여되고 그 길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이 복에 참여되고 복의 길을 가는 신자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