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다는 비 소식에 밤잠을 설쳤다.
별로 가져갈 것도 없는데 새벽 2시까지 가방을 챙겼다.
눈을 살푼 붙이고 새벽 6시가 못돼 눈을 뜨고 양치질을 했다.
밤새 좀 내린 비가 만만찮게 보여 우산을 챙겨 베랑에 꽂아 넣었다.
땅이 젖어 있어도 나는 7시 시내버스에 미역과 멸치 상자를 실었다.
중부지방의 비피해가 버스 스피크에서 흘러나온다. 밤새 동개 멘 건어물 상자를 얼싸안은 비닐이 헐겁게 눈에 거슬린다.
버스표는 8시 10분인데 7시 30분차 손님이 몇 사람 안 왔다고 나보고 타라한다. 30분 일찍 떠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짐칸에 상자를 쑤셔넣고 얼른 버스에 올랐다.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린다.
“ 이선생, 오랜만이요.”
돌아보니 경상대 자연과학대 오세경교수다.
“ 아~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 얼굴 참 좋네요.”
“ 그렇습니까?”
“ 여기 앉으시오”
오교수는 가방을 치우며 옆에 앉기를 원한다. 나도 잘됐다싶어 그 곁에 앉았다. 20년전 통영수산대학에 같이 근무하던 기관과 교수다. 기관학과 교수지만 글을 잘 써 학보사 주간을 했고<소설가로 데뷰 내 기억에 등작작품 "바다와 소년"> 내가 부주간으로 같이 일했던 인연이 있다.
오교수와 동료교수의 자제분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한 인재가 부산광역시청 사무관대우를 받으며 문예행정을 잘 해나가다가 젊은 나이로 자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서울가는 차안에서 들었다. 나도 그 후배를 지면으로 알고 있었는데 <통영에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말고 2명있기에> 사무관대우까지 잘 받다가 요절했다니~/부친인 모교수는 이 일로 한동안 방황하다 지금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오교수는 나에게 전해주었다. 조선소 노동자인 내가 그래도 생명력 있게 잘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도 쉬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서울에 도착할 때 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부 터미널에서 오교수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는 차이나조 선배께 전화를 걸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무실에서 기다리듯 점심같이 하자고 빨리 오라 하신다. 전철을 갈아타고 학동역에 내렸다. 9번 출구 바로 옆에 사무실이 있었다.
반갑게 맞이하며 통영의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다. 있는 대로 이야기하고 멸치를 한 상자 내어 드렸다. 아이들 선물사라고 300달러나 준다. 한국 돈으로 계산해 드리려하니 극구 말린다. 내 가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배님이다.
“ 좋은 아내와 영리하고 건강한 아이들 잘 크니 언젠가는 빛 볼 날 있을 걸세.”
위로의 말씀 감사히 느끼고 그가 쓴 저서<중국을 뒤흔든 한국인의 상술/ 달가소간 >를 받아들고 수원으로 내 달렸다. 수원 동생 집 까지 2시간이나 걸린다. 저녁 서울 친구들과 만나고 싶었지만 새끼 친 카페일로 피곤해 져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카페일도 무슨 장사라고 사람이 많으니 다들 생각이 여러 가지다. 평생 노동하며 글만 써 온 친구 도와 줄 일 따로 없이 카페 머리수 채우더니 이 속에서도 유희의 즐거움 찾겠다고 딴 살림을 차리다니~~
자유 대한민국이 좋긴 좋다. <너무나 자유분방하니까?>
월미도를 지나는 배 위에서 중국 관광객들이 합창으로 노래를 부른다. 들어보니 대부분 조국<중국>에 충성하는 가사들이다. 놀랍다. 묻지마 관광 다니며 “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등을 부르며 엉덩이를 흔드는 한국 풍경과 참 다른 영상이다. 바다새들이 떼를 지어 다라 온다. 갑판에 모여 든 사람들 풍경을 사진으로 못 찍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디카를 사려고 면세점 물건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그냥 배를 탔다.
배안에서 꼬박 27시간을 보내고 천진 신항 부두에 배가 도착한다.
멀리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몇 달에 한번, 1-2년에 한번을 만나도 늘 한결같은 아내, 그녀가 바닷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저만치 서있다. 나는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렸다.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여권을 달라한다. 그리고는 좀 기다리라고 하고는 국제여객선 사장실로 들어가더니 2-3달전에 매진된 귀국 배표를 끊어 온다.
북경 가는 버스에 나란히 앉았다.
아내는 화상에 얼룩진 내 두 팔목을 만지다 손바닥의 못밖힌 군살을 만지며 어느 나라 문인의 손이 이리도 거친가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나는 아이들 근황과 처가 근황을 묻고 있는데 한참 후에 버스가 간이 휴게소에 멈춘다. 같이 탄 독일인과 영국인의 간식과 음료수를 대신 사주고, 배안에서 돈 아낀다고 한 끼도 안 사먹어 조코파이 한 통과 캔맥주 하나를 샀다.
두 아이는 참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저녁 아내가 준비한 양고기 사부사부를 함께 먹으면서 인민비로 바꾼 한달치 월급을 고스란히 건네주었다. 아내는 돈 안 가져와도 되는데 올 때마다 돈을 가져 오느냐고 한다.
다음 날, 북경도서관 근처로 가서 사장님께 드릴 간단한 선물을 샀다. 불교신자인 사장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참 찾았다. 그리고 저번에 우리 까페회원한테 선물할 때 사갔던 비취 팔찌는 안 보였다. 다 그 전보다 못한 것들만 눈에 띄었다. 그동안 도와 준 분들께 작은 기쁨도 함께 가져가고 싶었다. 가급적이면 낭비하지 않으려고 많이 사지 않았다.
밤새 내린 소나기에 한 낮은 참 깨끗해졌다.
우리 아파트 마당에 있는 수영장에서 본 아내의 모습은 나를 참 기쁘게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내만큼 밝고 환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디카가 없어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그 모습 내 눈동자 깊숙이 찍혀 영원히 변색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이 밤 자면 또 작별을 고해야 한다.
며칠을 기뻐하기 위하며 몇 달의 고뇌와 육체의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몇 달이 아닌 몇 년 몇 십 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 깊이 흐르는 사랑의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배 밑바닥 쇠를 갈아가며 우리가 편히 타고 갈 튼튼한 배를 끝까지 만들어야 한다.
그 배위에 선 아내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첫댓글 이나라 국민 만세! 만세! 만세!
만년 세월 가득히 아름다우면 더욱 좋겠습니다. 선생님도 더 행복하십시오.
ㅎㅎㅎㅎㅎㅎㅎ~~~... 언니는 잘 있남 유? 우리 통영사람님들 만만세!!!~~~~~~~~~~~~~~~~~~~~~~~~~~~~~~~~~~~~~~~
늘 한결 같다는 부인, 가슴속에다 꼭꼭 묻어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잡고 만년세월 다 가도록 행복하시게 될 날을....
잘 다녀오셨는지 궁금 했거랑요 함께하지 않아도 늘 항상 변함없는 그리움을 안고 사시는 오라버니 존경웃네요
저는 남망산 선배되는 장~~올시다.왕년에 글 많이 썼는데 지금 좀 쉬고 있답니다.잘 봐 주세요.
왕년에 글쓰시는 분 또한 존경하옵니다
저만 생각하다 주름진 아내의 얼굴을 대하니 새삼 송구스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