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을 전기로 쏘아 나무나 콘크리트에 박는 타정총에 얽힌 이야기, 하나. 한 미국 유학생의 경험담이다. 타정총은 요즘 미국의 가정에도 흔히 구비해 쓰는 모양이다. 미국인 친구가 집에서 서랍장을 만드는데 정전되었다고 한다. 못 몇 개만 박으면 끝날 텐데 잠시 쉬자며 연장을 거두기에 유학생이 망치로 마무리하자 그 친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는 거다. 기계가 없으면 작업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미국인에게 망치질은 생소했던 거였다.
타정총에 얽힌 이야기, 둘. 2005년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 이마에 긴 못이 박힌 고양이가 발견되었다. 누가 고양이에 타정총을 쏜 모양이었다. 등에, 옆구리에 못이 박힌 고양이도 많았다. 당시 방송 인터뷰에 등장한 주민들은 범인을 색출해달라고 분노했지만 잡혔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타정총을 겨눈 이는 고양이게 무슨 달랠 수 없는 억하심정을 가졌을까. 타정총을 사놓고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참을 수 없었던 건 아닐까. 분명한 건, 타정총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라는 점이다.
요즘 텔레비전 공익 광고는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성화다. 건강검진만 받으면 온몸의 질병이 사르르 사라진다는 툰데, 그런가. 물론 아니다. 질병 징후를 사전에 파악해 차단한다면 큰 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거다. 개인과 보험공단의 부담도 줄일 수 있을 게고. 하지만 늙어가는 현상을 질병으로 진단할 경우, 불필요한 의료비가 지출될 수 있다. 자신의 건강은 오로지 병원의 진단 프로그램으로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건강검진보다 자가진단 방법을 알리는 게 더 중요하리라. 덮어놓고 건강진단부터 받으라는 광고, 마치 판촉 같다.
많은 생명공학자는 인간의 줄기세포로 세포가 손상돼 발생하는 질병의 치료가 가능할 거로 기대한다. 그들이 언론과 손잡고 두둥실 띄운 애드벌룬은 시민들의 기대를 한없이 부풀렸고, 그에 화답하려는 정부는 세금으로 조성된 연구비를 막대하게 확대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에서 줄기세포 연구에 들어간 비용은 거의 천문학적일 텐데, 특별한 치료제나 수단이 보급되었던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백이면 백, “연구비가 모자란다!” 거나, “연기 기간이 아직 짧다!”, “연구 인력이 부족하다!”, “연구 시설이 낡았다!”와 같은 답이 쏟아진다. 치료 연구보다 예방에 많은 비용을 사용한다면 질병은 상당히 줄어들 텐데, 우리 사회는 그런 투자에 무척 인색하다.
세포치료의 가능성이 현재 가장 높은 척수손상을 보자. 주로 교통이나 작업장 사고로 비롯되는 척수 손상은 반신불수를 유발하는데, 예방보다 사고가 발생한 뒤의 불확실한 세포치료를 위한 연구에 막대한 비용을 퍼붓는다. 육식의 문제를 지적하는 한 미국 시민운동가의 냉소처럼, 낭떠러지 아래 최첨단 병원을 세워놓았으니 안심하고 속도를 내라는 투다. 생명공학자가 장래에 치료할 거로 장담하는 암과 당뇨병과 치매는 치료해야 할 퇴행성질환이기보다 겪어야 할 노화가 대부분이다. 젊은이에게 나타나는 퇴행성질환은 예방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전제되어야 옳다.
더우면 에어컨 커고 추우면 보일러 온도 올리면 그만인 우리는 부족하다며 도로를 더 뚫고 주차장을 늘이지만 그럴수록 자동차는 넘치고 견인스티커는 덕지덕지하다. 유럽의 어느 도시는 주차장을 없애는 행정으로 민원을 극복했다고 한다. 자동차도로의 폭을 줄여 제한속도를 낮춘 대신 자전거도로를 차선에 할애하고, 주차장을 자전거에게 내주자 민원이 해결되었다는 거다. 한결 조용해지고 깨끗해진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는 시민은 시간이 절약돼 만족하고 건강도 좋아졌다고 한다.
장자는 기계를 가진 자는 기계에 의한 일을 구상하고 기계에 사로잡힌 마음(機心)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대치동에서 과외를 받으면 더 똑똑해져 좋은 대학에 잘 들어갈 수 있나. 기심에 길들여져 도무지 융통성이 없는 부속품 같은 이, 시키는 자의 마음에 들 인적자원을 양산하겠지만 창의력은 그만큼 제한될 게 틀림없다. 그런 학생이 몰린 대학의 상대적 입시나 입사 성적은 높겠지만 개인의 만족도나 성취감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몸과 마음과 사회에 쉽게 스며드는 기심은 여유를 즐길 줄 모른다. 이웃의 개성을 배려하지 못한다.
첫댓글 오늘은 먼 옛날 예루살렘에서 예수라 이름한 한 존경할만한 인물이 태어났다고 추정하는 날입니다. 제겐 휴일이고, 늦게 일어나 아침 먹고 잠시 더 자자고 누웠다 이제야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여기에 글 올려야하기에. 이제 몸이 좀 풀리는 느낌입니다. 위 글은 한 진보적 가톨릭 매체에 기고한 글입니다. '성탄절'과 어울리려는지요? 1970년대 후반, 제가 존경하는 한 신부는 성탄절 전날 시끄러원 분위기에 질색을 하며 "고약한 밤, 거북한 밤"이라 했는데 요즘은 조용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