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통신 27＞ 추사 적거지

[moonnight]

< 한라산 통신 27 > 추사 적거지

미술에 무지한 탓에 추사를 몰랐고, 더더욱 세한도를 몰랐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추사체 글씨로 유명한 서예가, 국보의 하나인 추사의 그림’ 정도의 지식이었다. 그러니 그가 유배생활을 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적거지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추사체 글씨 병풍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평생 제사를 올리면서도 그랬으니 얼굴이 뜨거울 뿐이다.

세한도(歲寒圖)에 관한 일은 더 부끄럽다.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왜 이것이 국보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복사본으로 본 것이었지만 밋밋하고 단조로운 선과 여백에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 하였다. 2012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제주 편)이 나오기 전까지 내 지식수준이 이러하였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적거지는 제주도 남서쪽 해안선에서 살짝 비켜서 있다. 올레 길에서도 그렇다. 산방산 송악산 용머리해안 모슬포 등지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여태 걸음을 하지 못 한 변명이기도 하다.

올해 첫 제주도 나들이에는 작심하고 찾아 나섰다. 제주대 HR 아카데미 겨울학습 첫 수업을 마치고 서부 해안도로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대다수인 승객들은 아직 두껍고 둔한 외투 차림들이었다. 등산복 입은 나 혼자가 이방인 같았다.

애월, 협재, 한림, 고산, 대정을 지나고, 조금 더 달려 인성리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리니 추사 적거지가 지척이었다. 정류장 바로 앞에 높다랗게 서 있는 안내판을 따라 100m 쯤 걸어 들어가니, 오래 된 돌하르방이 맞아 주었다. 그 너머로 특유의 제주 곰보 돌로 쌓은 대정읍성이 길게 늘어섰고, 돌담 아래 수선화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추사가 그토록 사랑했다는 꽃이다.

추위에 잔뜩 움츠렸던 육지손님을 놀래주려는 듯, 주차장 녹지에 매화도 만발하였다. 한국이 이렇게 큰 나라였던가! 불과 500km 사이로 이렇게 계절이 다르다니···.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건물은 현지인들이 감자창고라 부른다는 추사관이었다. 궁벽한 산골 분교 건물을 연상시키는 나지막한 건물 앞에 이르러서야 까닭을 알았다. 추사적거지보다 더 큰 건물이 들어서면 주객이 바뀌어 유적지 분위기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건축의도라 하였다.

감자창고 정도의 스페이스에 어떻게 기념물 전시가 소화될까 했더니 역시 기우였다. 전시공간은 지하에 있었다. 단체관람 온 젊은이들 기념사진 촬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구석계단으로 내려간 지하 전시실에 당도해서야 까닭을 알았다. 아! 추사 김정희가 거기 살아 있었다.

관람객을 처음 맞아준 작품은 세한도였다. 그 작품이 왜 유명한지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감자창고를 닮은 허술한 건물 좌우로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모를 다섯 그루 나무가 전부인 그 그림의 유명세가 무엇인가? 초가지붕인지 기와지붕인지 알 수 없는 건물의 벽면에 난 둥근 창이 눈길을 끄는 쓸쓸한 풍경일 뿐인데···!

그 연유를 설명하는 안내인의 열변에 관람객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유배인의 심정을 모르고는 그 값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이 단아한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그 내용에 있다”고 유 교수는 답사기에 썼다. 그러면 그렇지! 거기 얽힌 사연이 아니고서야 국보가 될 턱이 없다는 생각에 잠시 위안을 받았다.

<(세상인심은 권세를 좇는 법인데) 어찌 그대는 고생 끝에 얻은 책들을 초췌하고 초라한 내게 보내주는가. 공자께서는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는다는 걸 안다고 했는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에 더 한 것도 아니고 후에 덜한 것도 아닌데···>

추사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낸 그림에 작품제작 동기를 이렇게 밝혀 놓았다. 유배생활 하는 이에게 베푸는 인정에 대한 뜨거운 감사의 마음이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송백의 잎이 지는 것을 안다는 공자 말씀을 인용하여 어찌 유배 온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느냐는 고마움을 그림과 글로 표현한 것이다.

추사의 제자인 이상적은 스승이 필요하다고 한 책은 청국 수도 연경(북경)에 가서라도 구해 보내주었다 한다. 역관이었던 그는 인편에 부탁하기도 하고, 직접 가서 사 온 책과 화첩을 천리타향에 유배된 스승에게 보낸 것이다.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객에게 책보다 반가운 선물이 또 있으리오!

거기서 끝이라면 그림 값이 그럴 리가 없다. 천하명필의 작품을 얻은 이상적은 그걸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스승과 교류가 있던 당대의 문인필객 16명에게 보여주고 코멘트를 한 줄 씩 받아왔다. 이게 바로 작품 왼쪽에 길게 붙은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 제찬이다. 이 글 때문에 작품 값이 치솟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그림이 한국과 일본을 떠돈 끝에 국보가 된 사연은 더 기구하다. 평생을 추사 연구에 몸 바친 유홍준 교수는 문화유산답사기에 연구의 결정체인 ‘완당평전’ 중에서 줄이고 줄여 그 경위를 답사기에 옮겨 놓았다고 밝혀 놓았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 제자 김병선에게 넘어갔다가 민영휘 소유가 되었는데, 그 아들 민규식이 유명한 중국철학 연구가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鄰)에게 팔았다. 조선 선비들이 중국학자들과 그렇게 친했다는 사실에 놀란 후지쓰카는 마침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추사연구 제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경성대학 재임 중 인사동 고서점가를 누비며 실학자들 작품을 긁어모으다시피 하였는데, 특히 “추사 글씨 값은 후지쓰카가가 다 올려놓았다”는 평판을 들었을 정도다.

세한도를 그의 손에서 한국에 가져온 것은 서예가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의 공로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그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무작정 도쿄로 건너갔다. 노환으로 누었던 후지쓰카는 첫 마디에 콧방귀도 안 뀌었지만, 두 달을 여관에 묵으며 매일 찾아와 조르는 열성에 감복하여 돈 한 푼 받지 않고 소전에게 세한도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돌아온 세한도는 소전의 정치바람에 다른 이 손에 넘어가 국보가 되었다.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소전은 선거비용 조달에 궁하여 그걸 저당 잡히고 돈을 끌어 썼는데, 끝내 돈을 갚지 못 하여 미술품 시장가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누구 손에 있든 팔려갔던 국보가 돌아온 것만은 천만다행이다.

추사가 살았던 적거지는 제주 4·3 사태 때 불타 없어졌다가 근래에 복원되었다. 지금 일부만 복원된 대정읍성 동문 바로 안에 있던 대정부자 강도순(姜道淳)의 집에서 추사는 오랜 유배생활을 보냈다. 명문대가 출신에 머리 좋고 관직 높았던 귀공자 추사는 이 집에서 갇힌 위리안치 신세였는데, 임금의 총애가 있고 권세 있는 친지가 많았던 덕에 비교적 자유로운 유배생활이 보장되었다.

복원된 강도순 가옥의 추사 거처는 본채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가 살았던 방안에는 친구 초의(草衣)선사 방문을 받아 차를 대접하는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는데, 초상화 상의 어질고 총명해 보이는 얼굴이 잘 표현되어 방문객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랑채에는 대정읍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천리 길을 찾아온 친구와 차를 마시고,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생활이 여유작작해 보이는 전시물이지만, 실은 외로움과 질병, 세상을 향한 원망과 한없는 기다림의 세월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대 낯선 섬 마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듯, 그는 가족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서 그 괴로움을 호소하였다. 장(醬)을 보내라, 말린 민어를 보내라, 어란(魚卵)을 보내라는 호소에, 받은 식재료가 상하고 변질되어 먹을 수가 없다는 답서를 보면 지체 높았던 명문대가 선비의 먹거리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감자창고 추사관 건립 이야기도 뺄 수 없는 화제다. 문화재청장이 되기 전 시절 유 교수는 현지에 있던 추사기념관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한다. 그러다가 떨컥 청장이 되어 손을 대 보려 하였으나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 때의 일을 그는 이렇게 썼다.

“행정상 문화재청에서는 이 기념관을 헐고 추사관을 새로 지을 권한이 없었다. 문화재청은 국보 보물 사적 등 국가 지정문화재에 한해서만 예산을 세우고, 집행은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한다. 추사관 유배시설 건물 어느 것도 지방문화재도 아니었다······법을 고치지 않는 한 허물 수가 없었다.”

비판은 쉽지만 실행이 어렵다는 것을 정부 일을 맡고서 알게 된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렇게 주저 앉아버렸다면 이런 글을 쓸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는 소원을 성취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추사의 초상화 붓 벼루 등 유물을 전시할 수 있도록 애쓰고, 개인적으로 소장하였던 간찰과 탁본 등 30여점을 기증하여 새 기념관을 지을 수 있는 예산을 확보, 제주도에 내려주었다.

그 공로로 새 기념관은 설계와 내용물 등 모든 면에 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는 명예관장이라는 신분으로 추사관 운영과 유지에 관여하고 있다. 시, 서, 학문 등 여러 분야의 천재를 알아본 후학에 의하여 추사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경위를 알면, 추사관 관람은 더욱 흥미롭고 유익한 공부가 된다. (2017, 2, 10)

[대모산스마일박순기]

감사합니다 .moonnight 고맙습니다 .역사공부 했어요 , 오늘도 좋은날입니다 .푸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