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 안에서 두 분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학자들이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중에 한분이 1007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다미아니’이고,
다른 분은 1925년에 성인품에 오른 예수회 소속
‘성 베드로 카니시오’이다.
교회를 빛낸 성 베드로 다미아니는
교회가 많은 점에서 타락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이 윤리적으로 형편없었다.
특히 평신도들이 돈으로 성직을 사서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는
성직매매(聖職賣買)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교회의 근간이 위태롭게 된 시절이었다.
성 베드로 다미아니 추기경은
교회 개혁가이면서도 덕망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성 베네딕도수도회에 입회해
은수자로 조용히 살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고,
교황 사절로 임명했습니다.
성인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고아가 됐습니다.
형들이 돌아가며 그를 맡아 키웠는데
그중에 사제였던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른 형의 집에서 지냈을 땐 갖은 구박과 노동에 시달렸는데,
신부가 된 형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며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습니다.
성인은 29세에 성 베네딕도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수도 생활을 하며 신학 공부에 매진했던 그는
철학, 역사학, 성경학, 교부학을 통달하며
교회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강론과 가르침을 듣길 원했습니다.
또 수도원장이 된 후 수도자 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가 교회 개혁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같은 수도회 출신 아빠스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부터 입니다.
스테파노 9세 교황은 그를 오스티아 교구장으로 임명하고
추기경에 서임하면서
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켜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성인은 당시 돈을 내는 이들에게 성직을 팔았던
성직매매 문화를 없애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면서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곳임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성직자들에게 청빈한 삶을 당부했습니다.
그 역시 가진 것 전부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교회 부패 척결과 함께 그는 교황 사절로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분쟁 조정자로 활약했습니다.
성인은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칫 전쟁으로 번질 뻔한 문제들을
평화롭게 해결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대립 교황에 대항하는 등
교회 권위를 세우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레오 12세 교황은 1828년 교회를 위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려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했습니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이탈리아 파엔차주교좌 성당에 안치돼 있습니다.
성 베드로 다미아니는 두통을 없애주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많은 신자들의 그의 전구를 청한다.